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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4/09 21:37:23
Name LowCat
Subject 아찔했던 그날의 추억
미취학 아동 시절, 그 호기심 많은 나이.


나는 누나와 함께, 빈 집을 지킬 때면 요상한 짓들을 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건, 110v 콘센트 구멍에 쇠젓가락을 찔러넣고 저절로 부들부들 떠는 젓가락을 붙잡은채 깔깔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전자과를 졸업한 지금도 어떻게 그 쇠젓가락이 저절로 부르르 떨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걸 붙잡고 노는게 소위 '미친짓'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그리고 어떤 날은 누나와 둘이서 라면 하나를 끓여놓은 뒤, 온도를 재겠답시고 수은온도계를 라면 국물에 담궈본 적이 있었다.

유리로 만든 그 온도계는 온도측정범위가 70도씨를 넘지 않았다.

막 끓인 라면 국물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민감한 물건이었다.

우리는 국물에 온도계를 넣으며 눈금이 쭉쭉 상승하길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눈금의 움직임은 없었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오히려 눈금이 쭉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나와 나는 머리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라면에서 온도계를 꺼냈다.

빨간국물이 잔뜩 묻은 수은온도계는 밑동부터 똑, 부러져 있었다.

우리는 첫번째로 온도계를 깬 것 때문에 엄마에게 혼날 걸 걱정했다.

그리고 애써 끓인 라면을 못먹을까봐 아까워하고 있었다. 아무렴 겉으론 멀쩡해보였는데 아깝지 않은가.

그래서 누나와 나는 온도계 유리파편을 찾으려 젓가락으로 한참을 뒤적거렸다.

부러진 부분만 빼내면 라면을 먹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 다행이도 우리는 끝내 찾지 못했고 라면은 통째로 하수구에 버려 버렸다.

(생활하수에 중금속 무단방류... 죄송합니다.)

만약 그 때, 온도계 파편을 찾았더라면 수은을 복용했을지도......



또, 아버지 친구분의 집들이를 갔을 때였다.

집들이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여섯 가족이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모였으니 내 또래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내 또래라는 말엔 사실 어폐가 있다. 난 막내중에 개막내였으므로.

나보다 적게는 두 살, 많게는 여덟 살 많은 형, 누나들과 함께 놀아야 했다. 물론 그들은 날 잘 끼워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애는 애들노는데 끼어야 하는 것을.

그날 밤, 나를 포함한 애들은 집 근처 하천이 있는곳으로 나가 달구경을 했다.

그 외, 다른 무슨 놀이를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돌아오는 중, 개천 옆의 뚝방길이 무서웠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뚝방위를 뛰는 것이 무서웠다.

형, 누나들은 뚝방위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뛰었지만 나는 뚝방 아래에서 그들을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다리가 그들을 뒤쫓기에는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뚝방을 지나 골목 몇개를 도는 사이 나는 일행들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어쩌면 귀찮은 동생을 놀리기 위해 형, 누나들이 일부러 도망친 건지도 몰랐다.

어쨋거나 나는 낯선 골목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날은 춥고 전날 내린 눈으로 골목엔 전봇대 마다 모아둔 눈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기억을 더듬어 집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간간히 눈더미에 발자국을 찍으며 좌회전, 좌회전. 우회전후 다시 좌회전.

갈수록 길은 낯설어졌다.

분명 목적지는 골목 사이의 단독주택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 쌩쌩 다니는 8차선 대로변이었다.

그 때의 어린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대로변에 세워진 차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 승용차엔, 어떤 부부가 타 있었다.

나는 부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길을 잃었는데, 집에좀 데려다 주세요.'

그래도 어릴때의 나는 제법 똘똘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대범하게 낯선이에게 말을 걸다니, 집주소도 똑바로 외우고.

아무튼 그 부부는 정말 착한 사람들이었다. 생전 처음보는 아이를 아무 댓가도 받지 않고 집으로 데려다준걸 보면.

어찌저찌 그렇게 나는 할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먼저 귀가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할머니의 전화를 받은 뒤 집들이를 파하고 돌아왔다.

아마 그날 우리 누나는. 아니, 뿐만아니라 다른 집의 형 누나들도 엄청나게 혼났을 터였다.

막내동생 관리를 못한 죄로 엄청 맞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몇가지 더 있겠지만 가장 아찔했던 기억들은 위의 세가지다.

만약 그때 온도계 파편을 찾아냈다면? 라면을 버리지 않고 국물까지 원샷했다면?

그때, 길 가에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가 창문을 두드린 차 주인이 나쁜마음을 먹었다면?

어릴 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일들인데, 이제와 생각하니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들은 그 동안의 각종 위험들을 견딘 생존자나 다름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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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zisuka
21/04/09 21:40
수정 아이콘
강하거나 운이 좋은자들이 살아남아 지금 피지알에서 크크크 거리며 노는거죠! 약하면 안돼!
21/04/09 23:28
수정 아이콘
전 지금의 제 와이프와 연애하던 시절에 시골 구석구석 드라이브 하는걸 좋아했었지요.
어느날은 차 한대만 지날수 있는 외딴 숲길로 접어들었는데 뜻밖에 저앞 길 옆에 택시와 봉고차가 서있었고 웬 아저씨들이 서너명 서있었는데 지나가는 저희를 노려보더군요.. 비포장인데다가 길도 좁아서 천천히 지나갈수밖에 없었는데 만약 그 아저씨들이 우리 차를 가로막았더라면... 18년전 일이지만 아직도 오싹합니다. 그때 아저씨 둘셋은 길 안쪽 수풀속에 있었고 둘은 길가에서 망보는거 같았는데 도대체 뭘 하는 중이었을까요??
이라세오날
21/04/09 23:39
수정 아이콘
똥 싸는 중 아니었을까요
이라세오날
21/04/09 23:41
수정 아이콘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때 누나랑 빈집에 있으면 베란다나 안방 난간에 매달려서 걱정하는 누나를 놀리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납니다
칠층이었거든요
윤이나
21/04/10 10:58
수정 아이콘
크크 저는 중학생 때 학원에서 친구들 앞에서 건물 바깥쪽으로 매달려서 턱걸이하곤 했습니다. 확실히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테라스에 겉부분에 매달려서. 그때 미끄러졌거나 턱걸이하다가 힘빠졌으면 에휴. 8층 정도 되었던 거 같은데... 이놈의 중2병-_- 20년이 훌쩍 넘게 지난 지금은 고소공포증이 생겼다는 건 함정;;
해질녁주세요
21/04/09 23:42
수정 아이콘
초딩 때 동네형들이 라이터불로 온도계 온도 올리다가 폭발해서 유리 파편이 동네형의 허벅지랑 볼에 박혀서 흉터가 크게 남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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