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전에 써둔 글이기도 한데, 마침 유게에
https://pgr21.co.kr/humor/398259
위와 같은 내용이 보여서, 도대체 왜 이런 도입부가 물리학 교과서에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글을 남겨 봅니다.
유게에 올라온 이미지는 아마도 Caltech의 물리학자 David Goodstein의 책 'State of Matter'의 1장 서두로 보입니다. 참고로, 제 사견임을 전제로, 이 책은 통계물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딱히 좋은 교과서로 권할 정도의 책은 아닙니다. 학부 수준에서 권할 책은 유명한 Kittel 책을 위시로 (물론 이 책도 별로 친절한 책은 아니죠.), Reif의 Fundamentals of thermal and statistical physics, Tong의 Lecture notes 시리즈, 간단하게 볼 요량이면 Chandler의 Introduction to Modern Statistical Mechanics, 대학원 수준에서라면 고전 중의 고전인 Landau & Lifshitz의 Stat. Mech. 책이나 Pathria의 Statistical mechanics도 좋습니다.
https://www.amazon.com/States-Matter-Dover.../dp/048649506X
첨부한 이미지에 나온 첫 문장에서 언급하듯, 통계물리학의 태조 격인 볼츠만이나, 그의 제자였던 에렌페스트 모두,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통계물리학 (통계열역학)의 아버지인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드비히 볼츠만 (Ludwig Eduard Boltzmann, 1844-1906)은 가족들과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던 도중 스스로 목을 매 삶을 마감했습니다.)
**(볼츠만이 빈 대학에 재직했을 시절의 제자이자 역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였던 파울 에렌페스트 (Paul Ehrenfest, 1880-1933) 역시 우울증으로 권총 자살했다. 심지어 그는 다운증후군으로 입원 중이던 막내아들을 먼저 권총으로 쏜 후 자살을 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우울증을 앓았고, 결국 삶을 불행하게 마감한 것에 어떤 공통점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두 사람의 물리학자로서의 삶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에는 다소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주로 볼츠만에 대해서만 자세히 알아볼 것입니다.
볼츠만은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 학부생 재학 시절,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맥스웰의 기체 분자 운동론 (kinetic theory)에서 영감을 얻어, 본격적으로 '원자'가 어떻게 운동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순전히 기계론적인 뉴턴 역학 관점에서 유도하였고, 특히 역학의 시간 대칭성과 그가 유도한 통계열역학의 시간 비대칭성의 모순을, 확률 분포의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통계물리학의 시초가 되기도 했죠.
볼츠만이 거의 평생 매달렸던 회심의 역작인 운송 (수송) 방정식 이론 (Boltzmann transport equation)은 고전역학과의 화해는 물론, 당시까지 평형 상태에서만 논의되던 기체의 움직임을 비평형 상태로까지 끌고 들어와 다루려던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볼츠만은 이 방정식을 최대한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기체 분자의 기계론적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설정하였습니다. 즉, 이상기체 (ideal gas) 분자의 충돌을 수학적으로 모형화했는데, 3차원 위치-운동량으로 이루어진 6차원 위상 공간 (x, y, z, px, py, pz)에서의 입자들의 확률 분포 함수 f(x, y, z, px, py, pz)를 도입하고, 그것의 비평형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f의 시간 변화율을 상정한 것은 물리적 개념에서나 수학적 체계 안에서 탁월한 접근이었죠. f의 변화율은 분자에 가해지는 외부의 힘, 분자의 확산 (diffusion), 그리고 분자끼리의 충돌 (collision)로 나뉘어 분석되었는데, 앞선 두 가지 요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뉴턴 역학 이론을 가져다 쓰면 되었지만, 세 번째 요소가 문제였습니다.
문제를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 볼츠만은 기체 분자 두 개의 충돌만 고려했습니다 (세 분자가 한꺼번에 충돌하는 경우는 수학적으로 해석하기가 불가능한 유명한 삼체문제가 됩니다). 특히, 그때그때마다의 분자 간 충돌은 다른 충돌이나, 과거의 충돌과는 상관없으며, 충돌 직전의 두 분자 역시 서로의 위치나 운동량 정보를 모른다는 (즉, 완전히 uncorrelated state라는)는 가정 (이 가정을 분자 카오스 (molecular chaos ) 가정이라고 합니다.)을 이용하여, 볼츠만은 운송 방정식의 '충돌항'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표현이 닫힌 표현이 아니라 적분 형태로 밖에는 남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몇 가지 가정을 더 하면 (특히, BGK 등의 approximation은 맥스웰 분포로의 회귀율을 도입하여 훨씬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적분 형태를 벗어날 수 있으나, 가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수학적으로 이 미분-적분 방정식의 일반 해를 구할 수 있을 전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당대의 대 수학자 힐베르트도 이 방정식에 한 때 매달리기도 했으나, 일반 해를 구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볼츠만은 열역학 2법칙이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바로 이 운송 방정식을 통해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볼츠만은 H라는 열역학적 비대칭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 때문에 볼츠만의 운송 방정식은 'H-정리'라고도 불립니다), 기체 분자들의 H값은 그의 운송 방정식에 따르면, 분자들의 속도 분포가 맥스웰-볼츠만 분포일 때 최소가 된다 (따라서 물리적 의미만 따지면 엔트로피 S는 H값의 부호를 바꾼 값에 대응합니다.). 분자들의 속도가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벗어나는 정도가 크면, 그에 비례하여 분자 간의 충돌 빈도가 높아지고, 이는 마치 피드백 제어회로처럼 작용하여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벗어난 '비정상적인' 속도 분포를 다시 '정상적인 (즉, 평형 상태에서는 열역학적으로 가장 낮은 자유 에너지를 갖는)' 맥스웰-볼츠만 분포로 되돌리는 작용을 합니다 (이를 가장 간단하게 수학적 형태로 모사한 것이 BGK approximation이죠.). 이는 열 현상이 왜 비가역적인지를 설명하는 이론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열적 상태에 있는 기체 시스템이든, 결국 시간이 지나면 맥스웰-볼츠만 분포로 회귀하는 것은 상태 진화에 대한 방향성이 정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감소할 수 없다는 클라우지우스의 이론과 합치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즉, 볼츠만의 운송 방정식, 특히 분자 충돌에 대한 모형은 엔트로피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돈하고, 비평형 열역학에서의 시간 비대칭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정작 볼츠만 자신이 이론을 유도한 기저인 뉴턴 역학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뉴턴 역학은 힘, 질량, 그리고 시간만 주어지면 개별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있는, 기계적으로 잘 작동하는 체계였고 (사실 분자동역학 시뮬레이션도 이러한 기계론적 해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몇 가지 term이 더 추가되거나 확률적 해석을 추가할 수는 있습니다), 특히 시간에 음의 부호를 붙이더라도 물리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간 대칭성을 갖습니다. 따라서 시간 가역성이 있으며, 이는 뉴턴 역학으로 기술되는 어떤 시스템이라도 시간 대칭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볼츠만이 유도한 운송 방정식은 뉴턴 역학으로 기술되는 어떤 가상의 물리량 H에 시간 대칭성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이 때문에 볼츠만의 친구이자 같은 빈 대학 동료이기도 했던 요제프 로슈미트 같은 물리학자는 볼츠만의 이론에 모순이 있다고 비판했으며, 이는 로슈미트의 역설 (시간 가역성 역설)이라고 불렸습니다. 볼츠만의 이론은 수학적 관점에서도 꽤 곤란한 지적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동시대의 프랑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엥카레는 에너지가 보존되는 비평형계 역시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상태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표했는데 (이를 푸엥카레 재귀 정리 (Poincaré recurrence theorem)라고 합니다), 이 정리에 따르면 다소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에 있던 계 역시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그보다 낮은 엔트로피를 갖는 상태로 회귀할 수도 있습니다. 즉,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닫힌 계의 엔트로피가 반드시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서, 볼츠만의 H-정리는 푸엥카레 회귀 정리와도 모순인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또한 같은 대학에 재직 중이던 과학철학자 에른스트 마흐는 조금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볼츠만의 아픈 곳을 찌르기도 했습니다. 마흐는 볼츠만을 비롯해서, 그 이전 달톤 (Dalton) 같은 과학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혹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실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따라서 볼츠만이 어떤 정교한 이론으로 어떤 특정한 현상을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은 반쪽짜리 이론일 뿐이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런 사조는 사실 유럽 대륙, 특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같은 독일어권 학계에서 강했는데, 증거가 없으면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실재론'의 바탕을 이룬 것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대륙 유럽이 아닌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의 방정식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파의 존재를 예견했고, 논문 출판 이후, 유럽 전역에서 맥스웰 방정식은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전기 및 자기 현상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고전 물리학의 극적인 성취로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독일권 학계에서는 반신반의의 분위기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가 최초로 전자기파가 존재함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이후에야 전자기파의 개념, 그리고 맥스웰 방정식은 독일권 학계에서도 굳은 기반 위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개념의 실재성, 수학적 허점, 이론의 모순성, 그리고 검증을 힘들게 요구하는 독일권 학계의 실증주의 분위기 속에서, 볼츠만 같이 자존심이 센 물리학자는 점점 에너지가 고갈되어 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둘째 아들이 맹장염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 조울증을 앓기 시작했던 볼츠만에게, 이러한 끊임없는 동료들의 공격은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계속 갉아먹는 요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요제프 로슈미트의 시간 가역성 공격은, 볼츠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을 확률론적 관점에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마침내는
S = klogW
라는 엔트로피 개념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좋은 자극제가 되긴 했습니다 (참고로 로슈미트는 1895년에 사망했습니다). 또한 푸엥카레 정리와의 합치성 역시, 엔트로피의 증가와 비평형 열역학 법칙에 확률 개념을 도입하는 것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으니 돌파구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흐와의 실재론 다툼은 볼츠만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볼츠만을 괴롭히는 문제였습니다. 10년 넘는 마흐-볼츠만 논쟁은 '원자'에 대한 실재성이 증명되지 않는 한, 볼츠만에게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였기 때문입니다. 1897년, J.J. 톰슨에 의해 처음 실험적으로 그 존재가 증명된 전자 역시, 당시로서는 원자가 실재하는지에 대한 실험적 증거로서는 불충분하다고 여겨졌을 정도였습니다.
원자의 실재한다는 당위성을 철학적으로 우회하여 증명하기 위해 볼츠만은 빈 대학 재직 시절,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특히 인식론을 비롯한 과학철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스스로 과학 철학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강의와 철학 역시 마흐와의 합의를 끝내 이룰 수 없었고, 마흐를 지지하던 과학자들의 공격도 같이 받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들, 과학철학자들의 지속적인 공격은 볼츠만을 점점 내향적으로 몰고 갔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기보다는 소모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방어는 그가 만든 이론이 그때까지 관측된 여러 실험 결과와 잘 합치된다는 귀납론적인 방어이긴 했습니다.
1905년에 출판된 아인슈타인 (당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운)의 브라운 운동 (Brownian dynamics)에 관한 페이퍼 역시, 볼츠만을 지옥에서 구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의 페이퍼에서 원자의 실재론을 가정하여 입자의 통계적 요동을 해석함으로써, 입자의 열적 요동 (thermal fluctuation)으로 준동된 마구잡이 걷기 (random walk)에 의한 확산 (diffusion)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은 '볼츠만 상수 k'라고 불리는 특별한 상수가 바로 그 열적 요동에 관여하는 상수이며, 그 의미는 원자를 가정해야만 확립할 수 있음을 아인슈타인은 보인 것이었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계산이 맞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정해진 시간 동안 확산된 입자의 개수를 측정하여, 어림셈만으로 아보가드로수 (Avogadro's number)를 측정하기도 했는데, 비록 정확한 값은 못 구했지만, 대략 그 order가 10^23 임까지는 보임으로써, 꽤 실질적인 증명을 한 결과에 당도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아보가드로 수는 6.02*10^23). 하지만 매우 애석하게도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계산도 이듬해 있었던 볼츠만의 불행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1905년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 논문이 Annalen der Physik이라는, 당시로서는 지금의 Physical Review Letters 같은 국제적으로 가장 명망 있는 물리학 저널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볼츠만이 이 페이퍼를 안 읽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페이퍼는 원자론을 가정하여, 입자의 확산을 설명할 수 있고, 확산 계수는 입자 개개의 열적 운동의 평균 운동에너지에서부터 유도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실험적 증거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볼츠만에게 결정적인 도움으로까지는 여겨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약간의 위로는 되었겠지만, 여전히 실재론의 관점에서 공격하는 적들에게 대응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주지는 못 했겠죠. 그보다는 톰슨의 전자 발견, 패랭의 아보가드로수 측정, 그리고 러더포드의 원자핵 발견이 그나마 조금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을 텐데, 볼츠만이 5년만 조금 더 버텨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1906년 늦여름, 학계에서 사실상 은퇴하다시피 한 볼츠만은 가족들과 휴양을 즐기던 중, 목을 매 6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삶을 스스로 마감했습니다. 불과 3년 후 1909년, 패랭이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 이론을 이용하여 아보가드로 수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5년 후 1911년에는 마침내 러더퍼드가 원자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하여, 원자가 실재함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볼츠만의 불행은 너무 안타까운 비극이었습니다. 아마 볼츠만이 5년만 더 버텼더라면, 볼츠만은 노벨상 수상은 물론, 이후 혁명적으로 번져나간 양자역학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그의 제자이자 마찬가지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파울 에렌페스트가 통계물리학의 개념을 연장하여, 관측 가능한 물리량이 양자역학에서는 어떻게 통계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이끌어 낸 (이를 에렌페스트 정리라고 합니다) 대목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과학사의 곳곳에는 이러한 불운의 순간이 꽤 많습니다.
볼츠만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가 왜 자살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그 정확한 이유를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슬픔, 지속적인 논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상황, 어려서 아버지와 형을 잃고, 결혼해서는 둘째 아들마저 잃은 상황, 학자로서 더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는 무능함에 대한 자괴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볼츠만의 운송 방정식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연구되었으며, 지금은 통계물리학은 물론, 반도체 소재의 물리학, 양자역학/양자정보, 스핀트로닉스, 플라스마 동역학, 유체역학, 고분자 물리학, 연소공학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각종 유체 (혹은 준 유체)의 이동 및 유체가 갖는 물리적 특성의 비평형 분포를 해석하는데 응용되고 있습니다. 1975년 제정되어 3년마다 국제 통계물리학회에서 수여하는, 통계물리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역시, 볼츠만의 이름을 받아 '볼츠만 메달'로 정해져, 볼츠만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역사에 if는 없지만, 볼츠만이 만약 20년만, 아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과연 통계물리학과 양자역학의 사이에서 어떤 일이 더 벌어졌을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불행하고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볼츠만의 연구는 통계물리학이라는 물리학의 주요 학문 분야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제 통계물리학은 물리학과 공학 제반 분야는 물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해, 경제학,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frame을 제공할 수도 있는 범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사회물리학이라는 '사회학 + 통계물리학'의 융합 학문이 융성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하여 집단 의견 형성이나 정치적 당파성 동역학, 소문의 퍼짐 같은 사회 현상은 물론, 이후, 아예 바라바시 같은 네트워크 과학의 창시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제는 통계물리학은 SNS 등을 연구하는 네트워크 과학자들에게는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죠.
볼츠만, 그리고 그의 제자 에렌페스트가 비록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긴 했지만, 통계물리학은 그렇게 위험한 학문이 아닙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통계물리학은 학자를 미치게 하는 학문이 절대 아닙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는 정말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고, 수많은 입자들, 나아가 개체들과, 더 나아가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해석하고 확률론적으로 접근하고 통계적인 의미를 유추하여 관측 가능한 수준까지 이들의 행동 기저에 깔린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가 되는 것이 바로 통계물리학입니다. 볼츠만은 자신이 창시한 학문이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자라나 많은 이들에게 좋은 그늘이 되어 주는 나무가 되리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볼츠만 메달을 받는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노벨상 바로 다음 급으로 여길 만큼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개인의 삶은 불행했고, 사람은 죽어 먼지가 되겠지만, 위대한 학자의 아이디어와 빛나는 이론, 그리고 치열한 사유의 흔적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조금이라도 더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 주는데 큰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다시금 학문을 하는 것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