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민족의 위엄
중국의 북방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많은 북방민족이 크게 위세를 떨쳐왔다. 대표적으로 흉노족을 예로 들수가 있는데,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로 순유라고 했다.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聖君)이었던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시대의 이전에는 산융, 험윤, 훈육등으로 불리며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유목생활을 했다고 한다. 흉노족은 너무 강해서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등을 침략하였다. 또 흉노족은 군사기술이 너무 뛰어나서 조(趙)나라의 무녕왕(武寧王)은 국방강화를 위해 유목민족이 입는 옷을 입게 하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유목민족의 전투기술을 익히게 하기도 하였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폭군 진시황은 한, 위, 조, 제, 초, 연등의 6개의 나라를 멸망시켰지만 흉노족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을 놓지 못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통일왕조인 진나라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흉노는 동아시아와 인접한 유라시아 동쪽 초원에서 북방민족 최초로 제국을 이루었고 북방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흉노는 한나라때에 와서는 한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한고조 유방을 거의 사로잡을뻔하기도 했을만큼 강대한 세력이었다고 한다.
한고조 6년, 한나라의 건국삼걸 한신(韓信)이 아닌 동명이인인 다른 한왕신(韓王信)이 흉노에게 투항한 후 흉노와 함께 태원을 침공했다. 고조는 이듬해 대군과 함께 출격해 동제전투에서 한왕신 주력부대를 전멸시켰으며, 그의 장수 왕희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한왕신은 패잔병을 모아 흉노로 도망쳤다. 한나라 군이 철수하자 흉노병사들은 교란작전을 폈는데, 이에 한나라 군이 회군하자 흉노들은 또다시 도망쳤다. 이것이 반복되자 한나라 군은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대군을 출동시켜 추격케 했다.
겨울철이라 추위에 약한 한나라 병사들은 동상으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몇 번의 싸움에서 대승하면서 파죽지세로 전진했다. 이때 유경이 나서서 말했다. "흉노가 거짓계략으로 아군을 위험한 곳으로 유도함이 명백합니다. 성급하고 무모한 진격은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조는 유경의 진언을 무시하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모돈선우를 치기위해 출병했다. 이때 고조는 모돈선우의 생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고조와 대군이 평성에 도착했고, 백등산으로 올라가 적의 동태를 살폈다. 이때 사방에서 복병이 나타나 고조가 포위되고 말았다.
고조는 모돈선우의 아내 알씨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 간신히 화를 면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밤낮 7일 동안 산위에서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앞의 한고조 유방이 흉노와 전쟁을 벌인 내용은 조인묵씨가 쓴 '6가지 지혜로 3가지 전략을 얻어라"에서 발췌하였다. '6가지 지혜로 3가지 전략을 얻어라'라는 책은 주(周)나라 문왕을 보좌했던 태공망 여상이 쓴 '육도삼략'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앞의 글의 전체적인 내용은 한고조 유방이 '국사무쌍'이었던 한신과 동명이인인 한왕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토벌을 명했는데 한왕신은 흉노토벌에 어려움을 느끼고 흉노와 화평을 시도하였고 한고조 유방은 한왕신을 책망하였다.
그러자 한왕신은 흉노의 모돈선우(冒頓單于) 즉 목특선우에게 투항하였는데 모돈선우의 '모돈'의 뜻은 용자(勇者)라는 의미이다. 한왕신은 흉노토벌을 하려던 것에서 반대로 모돈선우와 함께 흉노의 40만대군을 인도하여 한나라를 공격했는데 한고조 유방이 32만을 이끌고 직접 맞서 싸웠다. 한고조 유방은 백등산으로 쫓겨갔는데 7일간 포위당한후 항복하였다고 한다. 한고조 유방은 모돈선우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고 겨우 장안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모돈선우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고 한고조 유방을 사지에서 구한 계책은 책사였던 진평(陳平)의 계책이었다고 한다.
이후 한고조 유방은 모돈선우에게 황실의 여인을 보내고 매년 조공을 바치고 만리장성을 경계로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했다. 한고조때부터 한무제때까지 한나라의 흉노에 대한 화친정책은 60여년간 유지되었다. 한나라는 한무제 때에 흉노에 대한 굴욕적인 화친정책을 버리고 흉노정벌을 단행했다. 한나라가 흉노정벌을 단행한 경제적인 이유로는 주요생산품이었던 비단의 수출증대를 위해 흉노의 방해를 받고 있는 '실크로드(Silk Road)' 즉 '비단길'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서였다.
한무제의 흉노정벌에서 위청과 곽거병과 이광리등 많은 명장들이 흉노와 난타전을 벌이고 대격전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흉노는 수차례의 난타전을 겪으면서 막북으로 밀려났다. 막북(漠北)은 몽골고원 대사막 이북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한대부터 사용되던 이 명칭은 청대에 이르러 오늘날의 외몽골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축소되었다. 막북으로 밀려난 흉노는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혼란기와 두차례 나라가 나뉘어지는 분열기를 거쳐 중원의 패권을 상실하였다.
한무제 시절에는 흉노의 왕자였던 김일제(金日磾)는 흉노의 번왕인 휴도왕의 장남이었는데 열네살때 전쟁에서 패하면서 한나라에 포로로 끌려왔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신임을 받아 한나라의 관료가 되었고 김(金)씨 성을 받았으며 곽광, 상관걸과 함께 한나라 소제의 후견인이 되었는데, 이후 김일제는 병들어 투후(秺侯)에 봉해지고 곧 죽었다고 한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서 중에 후한(後漢)의 역사를 담은 후한서(後漢書)에는 흉노의 왕자 김일제와 관련된 '선견지명'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오는데, '선견지명'은 장래를 미리 예측하는 날카로운 견식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후한말 삼국지시대에 조조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조조의 마음을 헤아렸던 양수가 조조의 미움을 사서 죽고서 조조가 어느날 양수의 아버지인 양표에게 말하길 "공은 어찌 그렇게 매우 수척해지셨소?"라고 물었다. 양수의 아버지인 양표가 대답하기를 "김일제(金日磾)와 같은 선견지명을 가지지 못한 것이 부끄러우니 다만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고사성어인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선견지명'은 앞날을 미리 내다볼수 있는 안목을 말하고, 안에 담겨져 있는 뜻은 한무제 임종시에 흉노왕자 김일제가 처신을 잘하여 곽거병의 형인 곽광과 사돈을 맺어서 보신(保身)하고 후일을 도모했다는 뜻으로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 삼국지시대에 김선과 김의 부자가 흉노왕자 김일제의 후손이다. 한편 2008년 하반기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가 신라(新羅) 김(金)씨의 조상이라고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는 유물로는 1796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명문이 소개되었다.
18세기에 조제프 드 기네 이래로, 현대 역사가들은 4세기에 유럽 경계에 나타난 훈족을 기원전 3세기와 서기 2세기 사이 오늘날 북방 스텝 지역에서 중국을 침입했던 흉노족과 관련시켰다. 중앙아시아에 있던 흉노족들은 유라시아를 통해 이주했으며 따라서 이들이 훈족과의 일부 문화적, 유전적 연속성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또한 흉노족, 훈족, 그리고 "훈족"으로 알려지거나 훈족에서 정체성을 가졌다고 여겨진 "이란계 훈족", "서융", "키다라인", 그리고 가장 유명한 "에프탈" (또는 백훈족) 등 수 많은 중앙 아시아 민족들 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오토 J. 멘헨헬펜은 저술 자료 연구를 주요 기반으로 삼는 전통적인 연구법에 도전하고, 고고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멘헨헬펜의 연구 이래로, 훈족의 선조라는 흉노족의 정체성은 논란이 되었다. 추가적으로, 일부 학자들은 유럽계 훈족이 있는 "이란계 훈족"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월터 폴 (Walter Poh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대한 유목민 전사들의 연합은 인종적으로 동일하지 않았고, 명성을 이유로 다른 민족들이나, 생활 방식 또는 지정학적 기원을 외부인들이 묘사하기 위해서 같은 이름이 사용되었다.
우리 모두가 확실히 말하는 훈족이라는 명칭이란, 고대 시대에서는 저명한 튀르크 전사들의 지배 계층으로 묘사한다. 최근 학계에서, 특히 김현진과 에티엔 드 라 배지에르 (Etienne de la Vaissière)는 훈족과 흉노족이 한 민족이고 같다라는 이론을 부활시켰다. 드 라 배지에르는 고대 중국과 인도의 사료들이 흉노와 훈을 서로를 번역하는데 사용했고, 다양한 "이란계 훈족"들은 흉노족과 유사하게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김현진은 훈족이라는 용어가 "주로 민족 그룹이 아니라, 정치적 범주"라고 여겼고, 흉노족과 "이란계 훈족" 사이뿐만 아니라 흉노족과 유럽계 훈족 사이 간에 근본적인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연속성을 주장한다.
훈족 (Hun)이라는 명칭은 고전 유럽의 사료에서 그리스어로 우노이 (Οὖννοι)와 라틴어로 훈니 (Hunni) 또는 쿠니 (Chuni)로 나타난다. 이오아네스 말랄라스는 훈족의 명칭을 우나 (Οὖννα)라고 기록했다. 훈족과 일치 여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또다른 가능한 그리스어 명칭으로는 쿠노이 (Χοὖνοι)일수도 있다. 고전 사료들은 훈족이라는 명칭 대신에 오래된 유목민들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고 특히 훈족을 마사게타이, 스키타이인, 킴메르라 칭했다.
훈족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현재 남아있는 훈족의 언어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 언어와 가장 비슷하다는 것이다. 학설로는 다양하게 제시된 훈족의 어원들은 일반적으로 최소한 훈족이라 알려진 다양한 중앙아시아 민족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 훈족의 명칭이 튀르크어 왼(ön), 외나(öna, 성장이라는 뜻), 쿤(qun, 대식가), 퀸(kün), 귄(gün), "아마 '사람들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퀸(qun, 힘), 휜(hün, 사나운)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것처럼 많은 학자들에 의해 수 차례 제시된 튀르크어 유래 가설들이 존재한다.
오토 멘헨헬펜은 많은 학자들이 제시한 튀르크어 유래 가설들을 부정했다. 멘헨헬펜은 hūnarā (기술), hūnaravant- (숙련된) 등 아베스타어에 가까운 단어에서 온, 이란어군 유래를 제시하고, 훈족이라는 명칭이 본래는 민족 보다는 계층을 지칭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잼시드 코스키는 기원전 10세기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어 자체에 이란어의 요소가 포함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잼시드 코스키는 고대 투르크어와 이란 유목민의 언어는 같은 장소에서 기원했다고 하였다.
로베르트 베르너 (Robert Werner)는 토하라어 ku (개)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고, 중국인들이 흉노족을 훈족의 토템 동물이었던 개라고 부른 사실을 바탕으로 주장했다. 그는 마사게타이의 명칭에 있는 사카족의 요소가 개를 뜻한다는 점을 주목하며, 마사게타이의 명칭과도 비교했다. 해럴드 베일리 (Harold Bailey), S. 파를라토 (Parlato), 잼시드 코스키 (Jamsheed Choksy) 같은 다른 이들은 아베스타어에 가까운 이란어군 단어 Ẋyaona에서 유래했고, "적대감, 적"을 뜻하는 단어가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토퍼 앳우드 (Christopher Atwood)는 음운과 기록적 근거의 가능성을 모두 부정했다. 언어학으로 접근하지 않은, 앳우드는 흉노족의 명칭과 같거나 유사하게 발음되는, 몽골의 옹기강에서 훈족의 명칭 유래를 가져왔고, 민족적 이름 보다는 가문이나 왕조의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앞의 흉노족과 관련된 훈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위키백과'에서 발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