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주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1871년 대청제국은 왜 일본과 대등한 "조약"을 맺었는가?
중화제국으로서의 자부심과 천하질서의 주인이, 어찌 동방의 섬나라 오랑캐와 서구식 조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외교문서가 무례하다고 하여 강화도 조약 때까지 버텼는데 말이죠.
그런데 최근 어떤 기사를 보니, 이제야 좀 납득이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의 "동방의 천자가 서방의 천자"에게 전하노라 (실제로 저렇게 한 건 아니고, 옛날 당나라 시대 당시 일본이 보낸 문서였습니다)하는 문서를 받은 청나라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무례하도다! 감히 상국을 업신여기고 우리의 천하질서를 어지럽히다니!
(2) 문서를 거부하면 일본이 서양과 합세하여 중국을 공격할 수 있음. 게다가 일본은 애초에 우리 천하질서 바깥의 존재임
당시 문서를 접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는 리훙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은 그를 깊이 신임했습니다.
근데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톈진사태" (1870)
외세에 반대하던 중국인들이 프랑스인들을 수십명 죽였고, 이는 거대한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특히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에 동조하여 중국은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까지 적대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다고 하네요.
아울러 일본 또한 중국에 강압적으로 나갈 형편이 아니다보니... 굉장히 특이한 방식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먼저 서로 원했던 것을 짚어보자면
청국 - 중국과 조공국에 대한 공격 금지, 서양식 근대조약 거부, 최혜국 조항 및 영사재판권 조항 거부
일본 - 조공체제의 타파, 서양식 근대조약, 자유무역
그런데 현실적으로 양국이 서로 자국의 의사만을 관철시킬 수 없어 묘하게 타협했다고 합니다.
(1) 조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조규라는 단어를 쓴 점
- 조약이라는 단어를 거부하여, 형식상 근대조약 표현을 제외시켜 중국 입장 관철 (참고로 강화도 조약도 원래 조일수호조규로 조규의 형태입니다)
(2) 상호간 "방토" 침략 금지
- 중국 입장에서 볼 때는 속방과 영토를 모두 포괄 조선, 류큐 등을 포함한 의미. 일본 측 입장에서는 중국 본토만으로 해석. 서로 편할대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습니다.
(3) 최혜국 조항 및 영사재판권 조항 상호 거부
- 근대조약의 필수조항이었던 이 조항이 없어 서양열강이 당시 일본과 중국이 내통해서 서구열강에 대항하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4) 조약문구나 서명란에 양국 군주의 휘호나 도장이 없는 점
- 일본은 서양식으로 메이지 천황의 사인이 들어가는 걸 원했으나, 중국이 거부. 결국 양국 교섭자의 서명으로 갈음함. 아편전쟁 후 난징조약에는 영국과 중국 양국의 국가수반의 승인이 있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중국은 형식을 취하고 일본은 제한적인 실리를 취한 조약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일본이 중국과 맺은 이 "조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