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1/16 18:18:55
Name 말다했죠
Subject [일반] 열 사람의 한 개비와 한 사람의 열 개비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여중-상고-여대를 잇는 삼각형 안의 주택입니다. 처음 이사왔을 때는 9시면 가게 불 다 꺼지던 이대 근처 주택가랑 비슷하겠거니 하고 왔는데, 불행히도 먹자골목이 생각보다 가까워 취객들이 담배를 피우러 자주 이 주택가 골목까지 역류해 옵니다. 대로변에서 담배를 피우면 눈치가 보이는지 나름 매너를 지키는 건데, 덕택에 골목 입구쪽 점포들은 매일 담배연기에 시달리고, 거주민들도 들어올 때마다 옷에 담배냄새를 묻히고 들어옵니다. 연기는 넓게 흐르고 퍼지지만, 꽁초는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증식하기 때문에 골목 입구는 꽁초와 침으로 가득합니다. 열 사람이 한 개비씩만 버리고 가도 꽁초가 10개니까 누군가는 치워야 하고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점포 사람들이 물청소를 하는 거 외엔 딱히 방법이 없습니다.

더 불행한 일은 거기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눈치 보이는 사람들이-주로 여중-상고-여대생들- 조금 더 한적한 곳을 찾자하고 올 만한 위치가 딱 골목 중간에 있는 제 집 부근이라는 것입니다. 한 숨 돌리고 한 대 빨기 너무나도 적절하기에 과거에 흡연자였던 제 입장에서도 명당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골목에 면한 집들의 창문 아래서 사람들은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고 전화를 하면서 담배를 피웁니다. 왜 자기들이 침을 뱉고 쓰레기를 버리는 더러운 골목 바닥에 가방과 옷가지를 던져두고 저런 걸 하는진 잘 모르겠지만 오래된 동네 풍습인듯 양태가 비슷합니다. 동네 쓰레기 무단투기를 방지하는 방법 중에 나쁜 짓을 하는 자기 모습이 비치게 거울을 놓으면 된다는 생활 TIP을 본 기억도 있는데 마침 골목엔 그런 구조물이 있긴 합니다.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으려면 거울이 필요하니 더욱 흡연 명당입니다.

그냥 학생이든, 동네에서 공사를 하는 업자이든, 레즈비언 커플이든 -창문 앞에서 자기들끼리 쩌렁쩌렁 이야기를 하거나 쪽쪽 물고 빨면 소리가 다 들리기 때문에- 흡연자들의 패턴은 비슷합니다. 창문으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나 캭 소리가 들려 나가보면 문 앞에서 한 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땐 저를 보고 슬금슬금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서 너 명 이상이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죄송한데 여기서 이렇게 침 뱉고 꽁초 버리시면 안됩니다를 해야 하하하하 사뭇 센 척을 하다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휴대용 재떨이라거나 주머니에 꽁초를 넣고 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고, 제 문 앞에 버려질 운명이었던 꽁초들은 골목 입구에 놓입니다. 간혹 특이한 경우도 있는데 한 두 명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담에다 노상방뇨를 하고 있느라 움직이지 못하던 경우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고정픽 중고등학생들은 다른 데 가서 피우세요 좋게 말하면 대개는 안 옵니다. 그들에겐 지속가능한 흡연장소가 필요하니까요.

흡연의 흔적들을 치우는 게 달갑지는 않지만 종량제봉투 내놓는 날에 쓰레기는 집게로 집어 버리고 양동이에 물 받아서 한 번 뿌리면 5분이면 치우고, 인근 집주인들도 종종 청소를 하는 김에 남의 집 앞 것도 쓸어주니 신학기 담배 단체손님들이 오지 않을 때는 그럭저럭 골목의 균형은 지켜져 왔습니다. 여태까지는요. 어느날 여행가방과 단촐한 이사박스를 들고 한 학생이 이주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숙집과 자취생이 가득한 골목이니 흔한 광경이라 금방 잊혀질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꼴초였던 학생은 자주 찾아오는 친구-인지 동거인인지-와 담배를 태우며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합니다. 유독 걸걸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골목에 퍼지면 어김없이 누우런 필터와 소용돌이가 그려진 필터 꽁초 두 종류와 담배갑이 쩐내와 뱉어진 침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참다 못한 원룸 주인이 니가 버린 쓰레기는 니가 주우라고 벽보를 붙입니다. 옆 하숙집 주인도 담에다 벽을 붙입니다. 그 둘은 장소를 살짝 이동해 5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집 앞에서 담배를 피웁니다. 꽁초가 놀라운 속도로 쌓입니다. 지나가던 흡연자들도 옳다거니 하고 버리고 갑니다. 액상을 쓰는 전자담배도 포장갑은 있어서 버릴 수 있더군요. 매일 주워야하니 하숙집도, 원룸도, 저도 손을 놓습니다. 이번에는 2주 후 하숙집 앞에 CCTV가 생기고 구청의 경고문이 붙습니다. 불행히 제 집은 CCTV의 사각지대라 다음 흡연스팟은 이 곳입니다. 열 사람의 한 개비는 치울 만 한데, 한 사람의 열 개비는 치우기 곤혹스럽습니다. 누구인지 알고 있기에 불쾌하기 때문입니다. 참다못해 두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항의를 하러 나갔습니다. 왜 남의 집에다 꽁초를 버리시느냐, 치우시라. '늬예늬예~ 죄송합니드아~' 하고 자기들끼리 웃으며 꽁초를 주워듭니다. 그런데 자기 방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쭉 내려갑니다. 저기다 버리고 오겠죠. 다시 올라오려다 제가 쳐다보고 있는 걸 보고 그들이 쭈뼛거리고 있을 때 마침 그 집으로 배달기사님이 옵니다. 203호 치킨이요. 이제 몇 호 사는지까지 알게 되었네요. 저 흥건한 침 자국이 시간이 지나면 마르듯 이 문제가 해결이 됐음 좋겠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아이고 혼날까봐 무서워서 담배도 못 피우겠네~'로 시작되는 짧은 타령으로 시작해 끽연타임이 끝나면 다시 한 번 타령을 하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갑니다. 혼나지도 않았고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담배도 잘 피우더만 왜 저러는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시끄럽습니다. 차라리 얼굴을 보고 내가 내 집-에서 피우면 냄새나니까 니 집 앞에서 피지만- 옆에서 담배도 못 피우느냐고 했다면 '선생님, 저는 꽁초를 치워주라 했지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진 않았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되겠지만 이 분은 제 집 문을 주시잡고 있다가 문 소리가 나면 바로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가 타령을 이어가기 때문에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어제는 집 대문을 여니 무언가가 툭 떨어집니다. 먹고 남은 과자 봉지를 접어서 문 사이에 끼워놨네요. 발 밑에 꽁초도 두 개 떨어져 있습니다. 누우런 필터와 소용돌이가 그려진 필터 두 종류입니다. 오늘은 김밥을 먹었나 포장지가 뚝 떨어지네요. 열 사람의 한 개비는 치울만 한데, 한 사람의 열 개비는 정말 치우기 곤혹스럽습니다. 화는 나지 않는데 벌써 지긋지긋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홍승식
19/01/16 18:52
수정 아이콘
으~ 나쁜 사람들
19/01/16 18:53
수정 아이콘
위추 드립니다..
CCTV 비스무리한거 하나 걸어놓고 금연구역 : 과태료 10만원 이런거라도 훼이크로 붙여주면 좀 낫지 않으려나요.
19/01/16 19:04
수정 아이콘
전면전에 돌입했네요. 힘내십시요.
valewalker
19/01/16 19:09
수정 아이콘
저도 흡연자지만 담배로 주변에 폐 끼치는 것에 거리낌없는 이웃 있으면 답도 없더군요. 아파트 우리집층 계단에 누가 깡통으로 재떨이 하나 만들고 상습적으로 피워대서 잡아보니 옆집 여고딩.. 그래서 더 피면 그 집 부모님께 말하고 관리실에도 통보한다고 하니 자기 언니도 같이 핀다고 물귀신작전을 쓰더라구요-_-;; 황당
스컬리
19/01/16 19:26
수정 아이콘
뜬금없지만 글을 잘쓰시네요
스카이
19/01/16 19:32
수정 아이콘
차 문 손잡이에 똥 발라놨던 복수글이 떠오르네요.
와사비
19/01/16 20:06
수정 아이콘
보복이라니 흡연보다도 태도가 더럽네요
19/01/16 22:42
수정 아이콘
열 사람의 한 개비는 일종의 자연재해같은 거지만 한 사람의 열 개비는 나를 무시한다는 의도성이 들어있으니까... 당연히 더 짜증날 것 같습니다.
수지느
19/01/16 23:50
수정 아이콘
어우 보기만해도 빡치네
김제피
19/01/17 09:59
수정 아이콘
아 진짜 글만 읽는데 격분하네요. 그 와중에 글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더 열받습니다.
콩탕망탕
19/01/17 10:30
수정 아이콘
글의 내용에 공감을, 필력에 감탄을 하고 갑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779 [일반] 영국을 구원할 사람 누굽니까? [31] 알레그리7683 19/01/17 7683 0
79777 [일반] [어록] 로마사 논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통찰 [7] aurelius6856 19/01/17 6856 6
79776 [일반] 이 와중에 이재명찡이 칼을 뽑았다능 [121] 삭제됨16887 19/01/17 16887 21
79774 [일반] (제목 수정) 사탄도 울고가는 동물인권 근황 [93] 수지앤수아12988 19/01/17 12988 6
79773 [일반] [역사]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근원 [10] aurelius8698 19/01/17 8698 8
79772 [일반] 면접 보고 집에가는 길 [6] 타카이5855 19/01/17 5855 4
79771 [일반] 트위치에서 게임하면서 스트리밍하는 이야기 [55] 크르르8985 19/01/17 8985 21
79770 [일반] 게임 이야기 없는 PGR [219] anddddna15586 19/01/17 15586 33
79769 [일반] [역사] 1715년 어느 일본인의 서양인식 [27] aurelius12241 19/01/17 12241 32
79768 [일반] 목포 그 동네의 국토부 실거래가 [281] LunaseA28162 19/01/16 28162 14
79767 [일반] 하태경 "2019년에는 젠더 이슈가 뜰 것이다." [94] 렌야13917 19/01/16 13917 23
79765 [일반] 오늘자 sbs뉴스 손혜원 의원 특집 [313] 낭천25323 19/01/16 25323 15
79764 [일반] 영어 발음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2) [6] Lump3n6218 19/01/16 6218 1
79762 [일반] 비난에 대한 책임감이 부재한 사회 - 언론/페미/반페미 [71] Multivitamin8129 19/01/16 8129 9
79761 [일반] 열 사람의 한 개비와 한 사람의 열 개비 [11] 말다했죠5765 19/01/16 5765 15
79760 [일반] 제발 일어나지마 [99] 삭제됨14717 19/01/16 14717 13
79759 [일반] 자유한국당 당권은 과연 누구의 손에? [88] 렌야12006 19/01/16 12006 1
79758 [일반] 일자리 안정자금과 관련된 문제 제기 [27] 아유8478 19/01/16 8478 8
79757 [일반] 서영교 의원 청탁 의혹 [38] 유부10099 19/01/16 10099 7
79756 [일반] 손혜원 의원의 오늘 뉴스쇼 인터뷰 [346] Davi4ever27914 19/01/16 27914 3
79755 [일반] 영국 하원 브렉시트 표결 부결. [34] 알레그리10396 19/01/16 10396 1
79754 [일반] 나이키 신발 신제품 Adapt BB [15] 인간흑인대머리남캐12346 19/01/16 12346 0
79753 [일반] 꿀뷰 꿀팁.jpg [29] 김치찌개12722 19/01/16 12722 2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