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회사에 거짓 핑계를 대고 옷을 챙겼다. 잘 다녀오라는 동료의 걱정이 묻어나는 전언에 느껴지는 이 느낌이 익숙한 내가 나쁜 사람인걸까. 본래 정해진 퇴근시간에 회사를 나오는데도 거짓 핑계를 대야하는 내가 불쌍한 사람인걸까.
생각보다 춥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여유롭게 대중교통을 타면 늦을 것 같아 택시를 붙잡았다. 시외 손님을 받는 기사님은 밝은 목소리다. 내 목소리도 밝다. 이 시간에 나와본 적이 오랜만이라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어둡다. 기대를 하고 있지만 알고있었으니까..다. 오늘 이 외출이 온전한 내 기다림만으로 끝날 거라는 것을.
- 02
그 날 난 취해있었다. 취기는 용기에 지대한 버프를 준다. '치명타 확률'과 '치명타 피해 증가'가 내 캐릭터의 강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듯이. 하지만 취기에 도움받은 용기는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 '뻥딜'인 셈이다. 더군다나 멀쩡한 상대에게는.
나는 다음에도 만나고 싶다고 조르며 '뻥딜'을 애처롭게 넣고 있는 중이었고, 체력 바가 줄어들지 않는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단호한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일회성 만남은 참 애처롭다. 남여 양측에게.
그녀가 체념한 듯하다. "봐요 그래요. 몇시 어디서 볼까요" 그녀가 여태까지 지었던 표정과 말투와 분위기를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지는 않다. 당장 불타오르는 상대를 진정시키고 상황을 넘기기 위한 자세라는 걸, 나이를 먹은 나는 이제 안다.
왜 저렇게 말했을까. 일말의 희망도 주지 말지. 그렇게 내가 불쌍해 보였을까? 그러면 바보같이 믿고 나와서 혼자 기다릴 거라는걸 몰랐을까. 아마 몰랐을거다. 아니 알았으면 더더욱 나오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초라한 사람, 나 같아도 싫었을 것 같다.
- 03
약속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여전히 춥다. 달달 떨리거나 당장 추워서 어디 들어가고 싶은 정도는 아니지만, 춥다.
계단을 올라 지하철 출구에 도착했다. 여기가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하는 사람들이 으레 접선하는 곳인 만큼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다. 둘러보기 시작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한 사람은 누군가의 차를 타고 떠나고, 한 사람은 기다리던 애인이 도착한 듯 포옹을 한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기다렸을까. 상대가 많이 늦었을까? 늦더라도 올 거라는 믿음은 있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적당한 곳을 찾는다. 아마, 긴 시간이 필요할테니.
적당한 화단에 걸터앉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난 참 발전이 없구나 싶어서. 스스로에게 매정해지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 날도 오늘처럼 그랬으니까. 난 지난 기억에 빠져들었다.
- 04
그 때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일언반구도 없는 갑작스러운 등장에, 억척스럽고 비루해보이는 그 문자는 내가봐도 무시하고 싶게 생겼었으니까.
무심코 찾아갔던 옛 장소에 옛날처럼 앉아있는 그녀를 봤을 땐 얼어붙는 줄 알았다. 거기에 앉아있을 거라고 예상했고, 이 시간에 간다면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으면서도 얼어붙었다. 역시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서 열 번도 넘게 상상한 상황이다. 잠시 얼어붙었지만 나는 이내 발길을 뗐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닌 것처럼, 마치 옛 추억을 잠시 떠올리는 것처럼, 그러다 여기 있다는걸 알고 놀란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앉아서 대화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조용하고, 그래서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기 쉬운 분위기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마치 커피를 주문할 것처럼 카운터도 들여다보고, 벽에 붙은 선전물도 유심히 들여다본다. 이쯤이면 날 발견했을 것이다.
어떤 표정일까, 당장이라도 얼굴을 돌려 확인하고 싶었지만 참는다. 아직이다.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가며 그녀가 앉아있을 곳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 05
그 때 쯤이었다. 차 경적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왔다. 나는 어느 지하철역 출구에서 누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사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문득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녀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이도 알고 회사를 다니고 어디에 사는지는 알면서, 이름을 모른다. 술에 취해있던 당시의 나는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 웃는 눈빛이면 다 필요없다고 아이처럼 생각했었으니까.
물론 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번호를 물어봤고 저장했다. 메신저에 표시되는 이름을 봤으니 알고 있다. 통성명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러고 있는 내가 미친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원래 누군가를 만나면 통성명부터 해야한다. 내가 과거에 기다렸던 그녀, 아니 그 아이는 그랬다.
- 06
"안녕하세요 OOO선배님, 선배님 멘티가 된 누구누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보는 이름의 그 아이는 나에게 그렇게 통성명을 했다. 그제서야 내가 신입생 멘토를 하기로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학부 조교인데 해야하지 않겠니"라는 교수의 무거운 말 한마디에 나는 하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안녕 잘 부탁해"라고 짧게 답장을 보내며 이왕 해야한다면 남학생보다 여학생으로 해달라던 지나가는 내 말을 캐치해낸 과 회장 후배가 기특했다.
순식간에 단체방도 생겼다. 요즘에는 멘토멘티도 조를 이뤄서 하나보다. 같은 조에 속한 후배들과 신입생들이 서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도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그러자마자 줄줄이 메세지가 달리고 너도나도 잘 부탁한단다.
이런거 싫은데, 나도 그냥 너희들과 같은 학생일 뿐이다. 나이가 많다고 조 회식때 결제를 하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담당 교수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학부 경비로 처리해버릴까 하는 검은 속내가 순간적으로 꿈틀댔다. 곧 뭐 먹고 싶니 라는 허세가 가득한 톡을 단체방에 갈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도 같은 학생으로 대우받고싶다.
- 07
내 멘티가 된 아이가 내 여자친구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결심이 중요했고, 결심이 서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둘이서 중요한 결정을 한 날, 나는 SNS에 'OOO님과 연애중'을 띄웠다. 나는 관종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좋아요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 때 만큼은 학과생활, 학생회, 과 회장, 단대회장을 지냈던 내가 자랑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다, 축하한다, 예쁜 사랑하세요 등등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와 그 아이는 그걸 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모두에게 축복받는 것 같아 기뻤고, 다른 학생들에게 이 아이는 이제 내 여자친구라고 인정받는 것이 기뻤다. 나이 차 덕에 듣는 도둑놈 소리도 마냥 기쁘기 그지없었다.
학교 근처 싸구려 고깃집에서 마주앉아 먹으며 서로 나누던 눈빛과, 대화가, 한 잔씩 나누던 대통주가, 올린 SNS 글과, 쏟아지던 댓글들이 머리속에서 기억으로 한 데 뒤엉켜졌다.
그 날은 유난히 길었던 겨울과 꽃샘추위가 끝나는 날이었고, 첫 키스를 나누기도 했던 기념적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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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새 직장으로의 이직이 확정됐습니다. 좋은 직장이고, 열심히 일 할 생각입니다.
기쁜 마음 덕분인지 PGR에서의 글쓰기 버튼이 오늘 유난히 가벼웠고, 이렇게 첫 글을 올립니다.
회원님들 모두 좋은 일들 가득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소설(60%의 추억)은 앞으로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이제서야 저도 제 글에 집중해서 정리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