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11/04 09:55:44
Name 글곰
Subject [일반] 병원일기 2일차 (수정됨)
  1일차 - https://pgr21.co.kr/?b=8&n=78744

난생 처음으로 입원한 병원은 신기한 곳입니다. 예전에 다른 사람 병문안으로 몇 번인가 방문했을 때의 기억과는 달리, 한 사람당 LCD TV가 한 대씩 제공됩니다. 머리맡에 메달려 있고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게 되어 있어요. 그 바람에 하필이면 넥센 대 SK의 플레이오프 5차전을 볼 수 있었고, 넥센이 10회말에 연타석 홈런을 얻어맞으며 결국 침몰하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TV가 없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반면 냉장고는 제 딸아이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구형 모델입니다. 하기야 냉장고의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일만 잘하면 되지. 나는 냉장고보다 더 많이 늙었는데......

  침상은 돌침대보다 조금 더 폭신합니다. 여기 누워 자도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이 가끔씩 떠오르지만, 뭐 괜찮겠지요. 발치에 있는 판떼기를 당기면 간이형 식탁이 되는데, 인체공학적 설계 따위는 엿 바꿔먹은 물건이라 거기에 식판 올려놓고 밥을 먹다 보면 허리가 아파옵니다. 그렇잖아도 옆구리가 아파서 저는 차라리 침상에다 식판을 올려놓고 방문자용 의자에 걸터앉아 밥을 먹습니다.
  
  입원해 있으면 아무 일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방문이 잦습니다. 간호사분이 하루에 너덧 번씩 와서 수액 갈아주고 혈압과 체온 재고 몸상태를 체크해 줍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매일 오셔서 쓰레기통을 비워 주시네요. 주치의의 회진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가 아프세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입니다. 그 때마다 아픈 데가 다르라고요.(......) 이거 누가 봐도 보험사기꾼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간호사분이 '교통사고 난 분들은 원래 그래요!'라고 쿨하게 한 마디 하고 간 덕분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치료기를 어깨에 두 개 옆구리에 두 개 붙이고 전기의 찌릿함과 적외선의 뜨끈함을 만끽하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이거 받고 나면 확실히 아픔이 가십니다. 자주 받으면 좋겠는데 토요일은 오전밖에 안 된다고 하네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려와 병원 밥을 먹습니다. 생각보단 맛있습니다. 생각보단 말이죠. 그러니까 뭐랄까, 요즘 군대 생각보단 괜찮더라, 딱 그 정도의 뉘앙스죠. 그래도 몸을 생각해서 삼분의 일 정도는 꼭 먹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가족의 방문이 가장 반갑습니다.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더군요. 한 이십 분 가량 시답잖은 수다를 떨다가 병원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나가라 재촉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내고 돌아서니 쬐끔 쓸쓸하네요. 근육이완제와 진통제를 섞은 수액을 두 통이나 맞은 탓에 감성적이 된 거라고 괜히 변명해 봅니다.

  몸이 아픈 데다 한팔에 수액용 주사바늘을 꽂고 있는 사람에게 샤워는 꽤 고단한 작업입니다. 어설프게 한 손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데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하필이면 오른손 손등에다 바늘을 꽂아 놓아서 더 불편하네요. 그래도 샤워를 안 하면 홀아비 냄새가 날 테니 씻는 건 필수입니다. 결국 오후에 수액 갈아주러 온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오른손 손등의 바늘을 왼팔 팔뚝으로 옮겼습니다. 한결 낫네요.

  저녁시간이 되자 슬슬 잠들 준비를 합니다. 약의 성분 때문인지 몰라도 병원에 있는 내내 조금 졸린 느낌입니다. 그래서 해가 떨어지면 곧 잠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자볼까 하던 차에 병실 문이 열리더니 세 번째 환자가 들어옵니다. 음. 성인이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아무래도 발달장애인인 것 같습니다. 콧노래와 웅얼거림 사이 어디쯤엔가 있는 소리를 끊임없이 내는군요. 문제는 그 소리가 큽니다. 많이 큽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보호자인 어머님의 휴대전화는 끝임없이 진동소리와 카톡 소릴 냅니다. 병실에 들어오고 삼십 분 사이에 통화를 네 통째 하고 있습니다. 시계를 보니 열시 사십분입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합니다. 안 됩니다. 너무 시끄럽습니다.

  결국 새벽 한시쯤에 비틀거리며 걸어나가 간호사 분께 부탁해 다른 병실에 침구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습니다.

  아침 여섯 시. 옆 침상 할아버지의 잠꼬대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아마데
18/11/04 10:00
수정 아이콘
수액을 원래 손등에 꽂는 건가요? 평생 바늘 무서워한 적은 없지만 듣기만 해도 엄청 아플거 같은데;;
요슈아
18/11/04 10:30
수정 아이콘
손등은 딱히 아프진 않습니다.
대신에 손목 옆 툭 튀어나온 부분에 동맥이 지나가는데 수술 전 검사를 위해서 거길 찌를 수도 있습니다...그게 리얼로다가 아픕니다.
18/11/04 10:47
수정 아이콘
바늘 뺄 때 조금 따끔한 거 빼고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좀 불안하긴 해요. 바늘이 피부 뚫고 나올 것 같은 걱정이....
22raptor
18/11/04 10:24
수정 아이콘
입원해보면 같은 병실 쓰는 환자가 조용한것도 복입니다.
18/11/04 10:48
수정 아이콘
낮에는 상관없는데 잘 때 그러니까 좀 괴롭더라고요.
handmade
18/11/04 10:40
수정 아이콘
예전에 입원했을 때 휴가나온 군인이 병실 동료?였는데 저녁시간에 여친이 오더니 둘다 침대 속에 들어가서 이불덥고 애정행각을 계속 하는데 성질 같아선 두 년놈을 이불로 멍석말이 하고 싶었지만 여린마음 동호회 회원이라 그냥 병실을 옮기는 것으로 참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도 열받네
18/11/04 10:46
수정 아이콘
[대박][충격]병실에서 휴가나온 군인이 여자친구와.avi
handmade
18/11/04 10:53
수정 아이콘
그런 방법이?!
혜우-惠雨
18/11/04 11:28
수정 아이콘
편하게 쉬셔야하는데 쉽지않네요. 도리어 더 피곤하신 것 같은ㅠㅠ
18/11/04 11:38
수정 아이콘
예전에 기흉으로 입원했었는데 아시는분은 아시겠지만 폐에 관꼽고 그 뽀글거리는 산소 물 나오는 통을 연결해 놓는데
문제는 이게 소리가 되게 시끄러워요.. 계속 뽀글뽀글뽀글
달고있는 저도 시끄러워서 짜증났었는데 그걸 6인실에서 하고있으니 아마 저때문에 잠 못이루신 분들도 많을거같아요.. 항상 죄송합니다
잉크부스
18/11/04 21:50
수정 아이콘
수액줄은 첨에는 불편하지만 조금 지나시면 수액줄로 줄넘기하면서 샤워를 하실 수 있어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 다만 적응하시기 전에 퇴원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6개월 있었거든요
18/11/04 22:59
수정 아이콘
6개월...저는 사흘도 미칠 것 같은데 6개월을 어찌 버티셨습니까.
잉크부스
18/11/05 02:13
수정 아이콘
수액줄로 줄넘기하면서 샤워하며 버텼습니다 껄껄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5571 [일반] [만화] xkcd - "병원균 저항성" [17] worcester7695 20/04/06 7695 8
85233 [일반] "이상하면 보고하지말아야 하나" 되 묻는 영남대병원 [57] 후마니무스13971 20/03/20 13971 3
85191 [일반] 숨진 대구 17세 부모 "열 41도 넘는데, 병원은 집에 가라했다" [319] 청자켓34073 20/03/18 34073 2
84986 [일반] 현직 일본 병원 외노자 발 소식 [56] 라그나문12788 20/03/10 12788 1
84956 [일반] "대구 아냐" 5번 거짓말한 환자..서울백병원 방문 [75] 청자켓15419 20/03/09 15419 8
84563 [일반] 대구가톨릭대병원서 부모에 간 기증자 코로나 확진 [103] Leeka11764 20/02/22 11764 1
84516 [일반] 北 청진병원에서 폐렴증세로 12명 사망…코로나? [25] 잰지흔7775 20/02/21 7775 0
84281 [일반] 16번 환자, 27일에 병원에서 신고했으나 거부당했다고 합니다. [212] Leeka16167 20/02/06 16167 13
84049 [일반] 이 지구 어디쯤, 어느 시기에 존재했던 나라의 병원 이야기 [32] 삭제됨10363 20/01/16 10363 11
83381 [일반] 병원에서의 선교행위 이래도 되는건가요? [74] 중년의 럴커15264 19/11/10 15264 26
83026 [일반] 의학, 병원 정보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79] 마법거북이9926 19/10/07 9926 2
81733 [일반] 자실시도 이야기 여담 및 정신병원 이야기 [56] 界塚伊奈帆11584 19/07/08 11584 9
80164 [일반] 녹지국제병원(제주도 영리병원)이 내국인도 진료하게 해달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32] 홍승식12152 19/02/18 12152 2
79985 [일반] 병원 당직중입니다(그리고 간단한 의료상식) [68] 걸스데이민아13792 19/02/03 13792 35
78781 [일반] 병원일기 4일차 [12] 글곰6250 18/11/07 6250 13
78761 [일반] 병원일기 3일차 [7] 글곰5442 18/11/04 5442 6
78751 [일반] 병원일기 2일차 [13] 글곰5668 18/11/04 5668 2
78744 [일반] 병원일기 1일차 [15] 글곰7914 18/11/03 7914 9
78210 [일반] 병원 수술장에 CCTV설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40] 무가당14023 18/09/13 14023 2
77891 [일반] 병원에 갈 때 미리 알아두고 가면 도움이 되는 사소한 팁들 [31] 사업드래군13153 18/08/14 13153 37
77515 [일반] 환자를 싣고 병원으로 향하던 구급차가 사고가 나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7] k`12511 18/07/06 12511 15
76934 [일반] 한 달 반 간의 기침 치료 이야기(부제 - 왜 사람들은 3차병원을 선호하는가) [46] 안초비11061 18/05/11 11061 8
75588 [일반] 밀양 세종병원에서 화재 대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125] 라이언 덕후18466 18/01/26 18466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