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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8/13 14:55:40
Name 헤이주드
Subject [일반] [단편] 만진이
나는 바로 전 해 까지 비평준화였던, 그래서 전교 일등이 지방 거점 국립대정도 밖에 가지 못하던 사립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는 십수 년 만에 받은 평준화 신입생들을 반겼다. 학교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서 스쿨버스로 편도 50분을 써가며 통학해야 했다. 학교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비교하여 뒤쳐지지 않는 신입생들을 보며 그제야 비로소 어떤 야심을 가졌던 것 같다. 학교는 야심차게 도서관을 기숙사로 개조했다. 그리고 '우수'한 평준화 학생들을 그곳에서 먹이고 재우며 공부시키려 했다. 기숙사 입사 조건은 입학 성적 순이었고 학교가 워낙 멀었으므로 성적 우수 학생들은 기숙사 입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230명의 학년생 중 50번째 안에 간신히 들어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숙사에선 성적대로 방이 갈렸다. 나는 나와 비슷한 성적으로 간신히 들어온 친구들과 같은 방을 썼다. 입학 고사에서 1,2 등을 했던 홍기와 형래는 같은 방을 썼다. 그 둘은 서로 경쟁하듯 공부했으며 일학년임에도 공통수학을 이미 지나 수학 I 을 보고 있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350점 이상을 기록하며 시골 학교의 전교 1,2 등을 다퉜다. 그런데 그 둘은 내신에서 전교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신 1등은 만진이였다.  


만진이도 입학 성적이 좋았고 공부를 썩 잘하긴 했다. 그러나 만진이는 사설 모의고사를 치르지 않았다. 만진이는 입학 후 처음 치르는 모의고사에서 기대이하의 성적을 받았다. 두번 째 모의고사 때는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이후 모의고사에서도 그때마다 여전히 배가 아팠고, 몸살이 났고, 머리가 심하게 아팠다. 교사들도 나중에는 만진이가 모의고사를 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만진이는 야간 자율학습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만진이는 내신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했다. 부동의 일등이었다.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하려면 만진이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한다.


만진이의 아버지는 우리 학년의 주임 교사였고 수학을 가르쳤다. 만진이는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그러니까 만진이는 나와 같은 선생님에게 수학을 배웠던 것이다. 친구들은 제 아버지가 일일교사만 해도 교실에 눈둘 곳이 없어 괜한 커튼을 봤다 선풍기를 봤다 시계를 봤다 그러며 눈을 굴리는데, 만진이는 제 아버지가 거의 매일 교실에 들어왔으니 그 기분이 어떨까 참으로 궁금했다. 아버지가 친구에게 소리 지르고, 아버지가 친구 손바닥을 때리는 걸 보는 기분도 조금 궁금했고.  


만진이는 제 아버지의 작은 눈과 낮은 코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나는 비슷하게 생긴 그 두 사람을 볼 때마다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건 일종의 생리적 혐오에 가까웠다. 지나치게 닮은 외모 탓만은 아니었다. 만진이는 조용한 편이었고 늘 일찍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만진이가 혼자 공부하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일 년이 다 지나갈 무렵엔 수학시간마다 텁텁한 공기가 흘렀다. 그러니까 그건 체육 다음 교시의 땀 냄새 같은 찝찝함이었다. 이 폐쇄적인 학교에서 부자지간의 정이 어떤 식으로 작용했을지 다들 짐작은 하였으나 감히 앞에서 말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만진이가 모의고사 날 아침에 조퇴하는 걸 볼때면 그 까슬한 뒤통수에 막연한 적의를 느끼곤 했으나 결코 그것을 손으로 혹은 다리로 구체화시킬 순 없었다. 적의는 오로지 입으로만 구체화되어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녔다.


내 모교는 사립 고등학교였고 한 학년을 같은 교사진이 3년을 맡아가며 지도했다. 그러므로 국어 교사도 영어 교사도 만진이 아버지도 그대로였다. 2학년 때도 만진이는 여전히 모의고사를 보지 않았고 내신은 여전히 일등이었다. 우리는 부정(不正) 한 부정(父情)이라며 가끔 개탄했으나 결코 나서서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여전히 재잘대기만 했다. 실로 만진이로 인해 받는 손해라고는 등수 하나 정도였으니 직접 주임 교사의 얼굴을 붉히려 드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학부모들조차도 감히 나서지 못 했다. 증명할 수 없는 걸 위험을 무릅쓰고 증명하려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도 그랬다. 홍기와 형래조차도 가만히 있는 걸 내가 나설 이유가 없었다. 아니 자격이 없었다. 사실 내 성적이 고만고만했던 게 만진이 탓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의혹은 의심으로 묻어둘 수밖에 없었고 의심은 열패감으로 변했다. 나는 오르지 않는 성적때문에 부모님께 죄송했다.


삼 학년이 돼서 새로 우리 학년에 편성된 담임은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학기 초 학부모 모임에서 자기 와이프가 영업하는 알로에 화장품을 팔았다. 진실일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화장품이 필요하던 차였다며 수십만 원 값을 사가곤 했다. 알로에 화장품을 많이 사면 실장은 못해도 담임이 앉혀주는 부실장 정도는 할 수 있었고, 성적이 조금 부족해도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집도 다행히 알로에 화장품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만 원을 용돈으로 주는 어머니는 40만 원 값의 화장품을 샀다. 나는 우리 집이 알로에 정도는 살 수 있는 재력을 갖추고 있음에 감사했다. 알로에를 사지 않거나 사지 못한 집의 아이들은 그에 걸맞은 냉랭한 대접을 받았으니까. 나는 알로에 덕분에 따뜻한 삼 학년을 보냈다. 성적이 오르지 않았던 것만 빼면 그럭저럭 따뜻한 한 해를.


만진이는 우수한 내신 성적으로 지방대 의대 수시 모집에 무난히 합격했다. 만진이의 수능 점수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만진이의 아버지는 주름이 깊어지게 웃었다. 홍기는 늘 받던 좋은 점수로 만진이와는 다른 지방대 의대에 합격했으나 형래는 그러지 못 했다. 형래는 재수 하겠다 말했고 선생님들은 형래의 어깨를 주물러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나도 재수하기로 생각하였으나 남들에게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묻지 않는 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재수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알로에 화장품 같은 걸 사서 조금 편한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나, 학원 강사는 알로에를 팔지 않고 지식만을 성실히 전달했다. 그러니까 재수 시절은 수분 빠진 알로에처럼 건조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나는 다행히 이름은 다들 알만한 서울 소재의 사립 대학교에 합격했다. 가채점을 하며 캔맥주를 마셨고, 알딸딸해지니 문득 재수를 한 형래는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삼 년간 친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형래의 소식은 나중에 친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뜬금없게도 만진이가 생각났다. 만진이의 미운 뒤통수가 아니라 깔끔하게 다려져 있던 만진이의 교복, 매일 세탁해서 피죤 냄새가 나던 체육복 같은 게 말이다. 만진이 아버지는 수학을 가르치다 이제는 교감이 됐다고 했다.


요즘은 무역 회사에 다니고 있다. 성인의 일이란 자신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직시하는 것임을 요즘에야 조금 알게 됐다. 인간의 능력은 쉽게 변하지 않으므로 나는 여전히 고만고만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수학 문제 실수하듯 가끔 일에서도 실수했다. 그래도 과장은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곤 조곤 지적만 했다. 과장의 지적이 길어질 무렵 티브이에서 국회의원이 자기 딸의 로스쿨 졸업시험 구제를 부탁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과장의 목소리 뒤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흘렀다.


퇴근길의 스마트폰 안에선 다른 국회의원이 자기 사무실에 카드 리더기를 놓고 자신의 책을 판매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댓글로 사람들은 그 국회의원에 분노하기도 하고 그를 조소하기도 하였다. 난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땐 퇴직한 교감 선생님의 동시집을 전교생이 3500원 주고 사야 했었다. 그 3500원은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게 득이 될리야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의사가 됐을 만진이처럼 말이다. 나는 하품하며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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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쯤 써놓은 글이고 양념 조금 친 글입니다. 요즘 기시감이 드는 사건이 있길래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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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돌이
18/08/13 15:48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봤습니다.
NoWayOut
18/08/13 23:53
수정 아이콘
글에 제시된 만진이 전교1등이 정말 부정적인 일로 된것이라면 놀랍기 그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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