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휴가를 내고 쉬고 있던 어느 날, 나이 서른 가까이 먹고 다들 자차 한대 씩 굴리면서도 뭐가 좋다고 버스 타고 동네 PC방에 매주 모여서 잘하지도 못하는 게임을 즐기는 친구들이, 오랜만에 얼굴 보자고, 오늘은 꼭 나오라고 연락을 해왔다.
처음엔 몇 번 "안 가 인간 쓰레기들아 나 아파 쉴 거야, 나 지금 본가 아니야 회사 근처 숙소야 갈라면 한참 걸려" 하고 거절해보지만 전화기가 불 탈 때까지 놔주지 않는 그들의 집념 어린 연락에 결국 체념하고 집을 나서 PC방에 도착했다.
어릴 때부터 비흡연자인 내게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꿉꿉한 냄새를 참고 PC방에 들어가니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신나게 깔깔대며 배그를 즐기고 있는 예비 30대 아저씨들이 구석탱이에 앉아 있는게 보인다. 대충 옆에 빈자리를 쓱쓱하고 몇 번 쓸어낸 뒤 그들 옆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타라 노답들아 형이 캐리 해 줄게"
대충 그렇게 게임 몇 판을 캐리하고, 동네 쌀국수 집에 가서 밥 한 끼를 먹고 헤어져 버스를 타고 강남으로 돌아가는 도중, 거의 후불교통카드 용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체크카드를 집어 넣으려 별 생각없이 지갑을 보는데 아뿔싸, 세상에 밥 먹을 때 계산하려고 꺼냈던, 카드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 것이 아닌가?
원래 20대부터 풍류를 즐긴다는 명분하에 꽐라가 되는 게 일상이었던 지라 카드를 자주 잃어버리고 자주 재발급 받는 편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당장 카드를 쓸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거래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재발급 받기까지 엄청 귀찮아졌다고 자책하며 ARS로 분실 신고를 했는데, 분실 신고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카드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XXX 고객 님이시죠? 지금 분실 카드를 습득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연락 드렸는데요, 혹시 XXX 카드를 XX역 정류장 근처에서 잃어버리셨나요?"
여차저차 해서 분실 한 걸 확인했고 신고도 했다고 얘기하니, 상담사분께서 뜻밖의 이야기를 해오셨다.
"지금 습득하셨다고 신고해주신 분이 본인 연락처를 남겨주셨는데 혹시 본인하고 한번 연락해보시겠어요?"
아니, 도시 사람들의 삭막한 인간성 어쩌고 하며 현대인의 메마른 감성과 개인주의적인 심성에 대해 비판하고 반성하는 책이 수 천권씩 쏟아져 나오는 21세기에, 누가 모르는 사람이 떨어트린 카드를 주운 걸로 모자라, 그걸 바로 카드 사에 신고까지 한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본인 연락처를 남겼다고?
부처님이 우리 동네에 볼일이 있어서 행차하셨나 하는 의문점을 가진 채, 상담사분께 일단 그럼 분실 신고를 취소 해 달라고 요청한 뒤 전화를 끊고 안내 받은 습득자분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XX역 버스 정류장에서 카드 잃어버린 사람인데 제가 카드사에 전화해보니 고맙게도 연락처를 남겨주셨다고 하더라구요~'
'아 안녕하세요 맞아요 제가 주웠어요. XX카드 노란거, 맞죠?'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보다는 꽤 나이가 젊으신 여성분이신거 같았다. 정말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거듭해서 드렸더니 혹시 어디시냐고 물어보시길래, 지금 강남이라 대답해드렸다.
그랬더니 자기가 지금은 공부를 하러 가느라 학교 도서관에 가는데, 혹시 이 근처 사시면 직접 가지러 잠깐 저녁에 떨어트렸던 정류장으로 나오실 수 있는지 물어오셨다.
사실 습득자분께 전화를 걸 땐 일단 카드를 찾아준 것 자체로도 내게 시간적으로 매우 크게 도움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얼핏 생각해도 상당히 귀찮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돕기 위해 해주시는 게 너무 감사하기도 했고 그런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어지간하면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밥이라도 사드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성별도 다르고, 대충 이야기로 추정하기에는 나이 차도 좀 나는 것 같아, 괜히 상대도 부담스럽고 나도 찝찝해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 제가 지금 사는 곳이 멀기도 하고, 수고 스럽게 그렇게 까지 시간 맞춰 나와주실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그냥 괜찮으실 떄 주변 경찰서나 은행에 맡겨주시면 그것 만으로 너무 감사할 거 같습니다. 만나서 주시는 게 가장 편하시면 만나러 가구요. 무조건 본인 편하신 대로 해주세요. "
'그럼 오늘 일이 끝나고 근처 가게에 맡기고 연락을 드리겠다' 하고 이야기를 하시길래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 고마운 마음이 가시지 않아 오늘 카드를 떨어트렸던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를 찾아 기프티콘을 결제한 뒤,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문자로 보내드렸다.
이후 그 날은 공부가 늦게 끝나셨는지 맡기지 못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으며, 다음 날 낮에 나도 자주 왔다갔다 해서 익숙한 본가 근처 가게 사진과 함께 이 곳에 맡겼으니 찾아가시라는 문자와 함께 커피 잘 마시겠다는 답장이 왔다,
그 날 일이 끝나고 나는 바로 그 가게에 들러 물건을 몇 개 사고 카드를 찾으러 왔다고 아르바이트분께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안쪽에서 사장님이 나오셔서 '원래는 이런 거 절대 안 맡아드리는데, 특히 카드라 진짜 맡아드리면 안되는데 자주 오시는 분이고 좋은 뜻으로 하신 얘기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드렸다' 하고 곤란하다는 듯이 말씀해오셨다.
고맙다 죄송하다 말씀 드리고 샌드위치, 과자 몇 개와 카드를 챙겨 집으로 돌아오며, 부디 그 착한 사람에게 더운 여름 커피 두 잔 보다 더 가치 있고 멋진 행운이 찾아가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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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편은 스토리가 끝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 좋은 일을 남에게 받은 만큼 베풀고 살아야 하는데 요새 이상하게 너무 많이 받아서 받은만큼 베풀기가 벅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