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7/31 15:04:29
Name 설사왕
Subject [일반] 무제
어느덧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이다.
그 당시 나는 신입사원 교육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젊은 남자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서로 약간의 탐색전 끝에 담배 피우는 시간을 기회로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다.
어색했던 감정도 잠시, 되지도 않은 얘기를 해가며 벌써 어떤 이들은 서로 말을 트기 시작했다.

같은 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도 모르던 그 친구와는 담배를 피우는 시간에서야 나는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마도 담배가 다 떨어졌는데 차마 담배 한 대 달라는 얘기를 못 하던 그 친구에게 내가 담배를 권하면서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심할 정도로 낯을 가리던 그 친구가 그나마 살갑게 굴었던 게 나였던 거 같다.

1주일, 2주일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친구들은 이미 몇 년이라도 사귄 불알친구라도 되는 마냥 서로에게 살갑게 굴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온종일, 잠자는 시간만 빼면 서로 붙어 지내니 제법 넉살 좋은 남자들에게는 충분히 가까워질 시간이리라.

하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높은 담을 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없었고 먼저 나서지도 않았으며 누구의 눈에도 띄길 원하지 않았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 교육 중에는 행군도 있었다. 여자들도 고려해 만들어진 그다지 어렵지 않은 행군 코스를 그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척 힘들어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알았어야 했다.
아니, 나는 적어도 알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의지하고 있었던 게 나였으니까.

교육 과정 중 자유 주제로 연극을 해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어떤 걸 주제로 연극을 할까 고민하던 중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다.
소심한 신입 사원이 활기차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뀌는 모습을 연극으로 만들자고 했다.
당연히 그 친구를 모티브로 한 것이었고 주인공도 그 친구가 맡기로 했다.
우리는 의외로 쿨하게 주인공을 맡겠다고 한 그 친구에게 격려를 보냈지만, 그 친구의 내면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 그 친구 아버지를 뵈었다. 절망스러운 모습의 그분은 나에게 물었다. 혹시 누가 때리지 않았는지, 누가 괴롭히지 않았는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나도 머지 않아 퇴사를 했고 그 뒷소식은 알지 못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했다고 또는 배려했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건 나를 위함이 아니였을까?
정답이 없기에 더더욱 답답한 일이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현직백수
18/07/31 15:14
수정 아이콘
안타깝네요. 이해라는 말은...
처음과마지막
18/07/31 15:23
수정 아이콘
신입사원 교육에 행군이 있다구요?
그런 교육은 별로 같아요
부사관 전역이라서 오히려 군대문화에 거부감이 들더라구요
꽃이나까잡숴
18/07/31 15:45
수정 아이콘
은행 이런데는 아직도 행군이 있죠...
처음과마지막
18/07/31 20:11
수정 아이콘
그렇군요
군대생활을 비교적 오래한편이라서요
오히려 이런 군대 문화가 싫더라구요
그리움 그 뒤
18/07/31 16:20
수정 아이콘
안타깝지만...
저 위의 상황만으로 그 친구를 많이 이상하다고 다른 이가 챙겨주기는 어렵지 않았을까..싶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7772 [일반] 한국전력, 22조원 영국 원전 우선협상자 지위 상실 [48] 베라히13797 18/08/01 13797 4
77771 [일반] 7월의 어느 토요일, 평행 세계의 소녀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28] 위버멘쉬6342 18/08/01 6342 37
77770 [일반] (소소한 일상글) 잃어버린 카드를 마음씨 착한 여성분이 찾아준 이야기 -上 [31] VrynsProgidy6160 18/08/01 6160 4
77769 [일반] (뉴스) 기무사, 노무현-국방장관 통화 감청…민간인 수백만명 사찰(연합뉴스) [155] 잠이온다22278 18/07/30 22278 27
77768 [일반] . [90] 삭제됨12379 18/07/31 12379 1
77767 [일반] 나의 지겹도록 반복되는 생활패턴에선 별 거 아닌일도 키보드로 끄적일 수 있는 소재가 되어버린 다는 사실이 기쁘다 [29] 현직백수7755 18/07/31 7755 25
77766 [일반] 무제 [5] 설사왕3765 18/07/31 3765 3
77765 [일반] 더운 날 소변을 보면 더 더워질까? [14] 녹차김밥6143 18/07/31 6143 11
77764 [일반] "'성정체성 혼란' 군인권센터 소장이 군 개혁 주도" [98] 길갈11425 18/07/31 11425 13
77763 [일반] (소소한 일상글) 동대 상근병에게 받은 문자 이야기 [30] VrynsProgidy9248 18/07/31 9248 20
77761 [일반] 마미증후군 회복기(2) [14] 김보노7442 18/07/31 7442 28
77760 [일반]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켄드릭 라마 공연 후기 [40] RENTON10545 18/07/30 10545 5
77759 [일반] 청년 우대형 청약 통장 내일 출시됩니다. (수정) [73] 낙원16628 18/07/30 16628 0
77758 [일반] 태풍경로중 엽기(?)적인 코스 [10] 냥냥이10714 18/07/30 10714 1
77757 [일반] (블랙코미디?)현재 진행형인 연세대 총여사태 근황 [73] 치미14165 18/07/30 14165 20
77756 [일반] 태풍 종다리 큐슈 남쪽에서 부활 후 상하이로 직격 예정 [47] 아유11921 18/07/30 11921 1
77755 [일반] 수사기관,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11] LunaseA11086 18/07/30 11086 9
77754 [일반] 세계 주요 도시의 대중교통비 비교 [18] 삭제됨8782 18/07/30 8782 0
77752 [일반] 중도.jpg - 적절함.jpg은 어디쯤에... [4] 장바구니6222 18/07/30 6222 3
77751 [일반] (스포) <어느 가족>을 바라보는 6가지 시선 [14] 마스터충달8574 18/07/30 8574 11
77750 [일반] 서울 지하철 끊긴 뒤 전철노선 따라 심야버스 운행 추진 [66] 군디츠마라13117 18/07/29 13117 5
77749 [일반] 요즘 청년들은 노력이 부족해서 취업이.. [178] 피지알맨21429 18/07/29 21429 1
77748 [일반] [뉴스 모음] No.190. 장성들의 이례적인 '충성' 경례 외 [16] The xian12457 18/07/29 12457 2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