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7/25 17:40:55
Name 지니팅커벨여행
Subject [일반] 메모장의 내용을 정리하며 - 아이의 예감
회사에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진전이 없을 때, 보고서 작성시 뭔가 집중이 되지 않을 때면 가끔 메모장을 띄우고 글을 씁니다.
꿈 이야기라거나, 설레였던 추억 같은... 요즘은 주로 아이 관련된 색다른 경험들을 적곤 하고요.
아, 물론 욕을 하고 싶어서 메모장을 열었던 기억은 아직 없네요.

전에 틈틈이 끄적거려 놓은 메모장의 내용을 정리할 일이 생겨 적어 봅니다.



작년 여름 결혼식 건으로 대구 내려간 김에 부산에도 들러 아내의 할머니가 계시는 병원을 방문했다.
요양 병원 인근에 살고 있어 평소에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시는 둘째 고모가 아내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평소에는 볼 일이 없다가 이럴 때만 보게 되는 게 요즘 우리네 일상이라 어색함을 지우기 힘든데, 이렇게라도 보니 그나마 반가움이 더 생기는것인지 서먹하지만 화기애애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물론 아이들 덕분에 침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약간은 밝게 유지된다.

병실에 들어서자 처 할머니는 누워 계시다가 고모가 침대 아래 손잡이를 돌려 매트를 들어 올리자 우리를 바라보시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신다.
듣던 대로 2년 전에 병원을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첫 만남때보다는 더더욱.


큰 아이가 3살 되던 해 여름휴가때 세 식구를 데리고 합천의 처 조모댁에 방문하여 사실상 처음 아내의 할머니와 대면했다.
결혼식 때는 안 오셨으니, 이후 처가에 갔을 때 친인척들을 보긴 했지만 할머니는 안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합천 본가를 지키며 사시던 분은 장인어른의 남동생이 되는, 아내의 작은아버지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두 남매-아내의 사촌들-를 키우셨는데 장성한 아들이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비록 처음 방문했지만 집안은 그 전과 완전히 다른 꼴이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 자리에 작은아버지는 안 계셨고, 작은어머니와 할머니, 사촌 동생 이렇게 셋이 있을 때 우리 부부가 3살 짜리 딸을 데리고 간 것이다.

당시 할머니의 기운은 강렬했다.
어느 시골이나 다름 없겠지만, 커다란 밥그릇에 밥을 고봉으로 떠 주시고 이런저런 반찬들을 내 앞으로 가져다 놓으셨는데, 엄청난 밥의 양을 거절 못하고 끝까지 다 먹었다.
초면에 손주 사위한테 배푸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호의를 어찌 거절하겠는가.
밥을 다 먹어갈 때쯤 더 권하시는 할머니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많이 먹었다는 답을 하자, 그 쪼매 먹고 우야냐는 면박 아닌 면박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며느리에게 얼른 밥 더 주지 않고 뭐하냐고 구박을 하시기까지 했으니...


수년 전 느꼈던 강한 기운은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계셨던 이전 방문 때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모는 당신의 엄마에게, 조카와 조카 사위, 손주들을 마치 아이에게 설명하듯 반복해서 차근차근 소개하셨다.
할머니는 끄덕이며 당신의 머릿속에 꼭 담으시려는 듯 우리들을 한명 한명 차근차근 바라 보신다.
그러고는 재차 당신의 딸에게 물어 보신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고모는 금방 알아채곤 다시 우리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신다.

큰 아이는 할머니를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할머니의 상태가 양호했던 시절에 병원 왔던 기억이 있어 그나마 익숙해 하는 눈치이지만, 둘째 녀석은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인 데다가 입원실이 있는 병원도 처음이고, 생전 처음 보는 두 할머니들이 있으니 쭈삣쭈삣 거리며 할머니와 고모의 눈길을 피해 소심하게 침대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아이들이 지루해 하는 것 같아 잠깐 병실 밖을 나가 복도를 돌면서 조금 놀고 오니 어느새 낯가림이 사라졌는지 침대 곳곳을 보며 신기한 것들에 대해 물어본다.

병원에 처음 온지 20~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아내는 울음을 참으며 떠날 채비를 하고, 고모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갑자기 둘째 녀석이 그런 엄마를 보고 해맑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엄마, 왜 울어?"

아들의 뜬금 없는 물음에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쏟아지며 대답을 못하고 훌쩍거리기만 하니, 재차 질문을 한다.

"이제 다시 못 볼 거니까 우는 거야?"

그 말에 아내와 고모는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어 흑흑 소리를 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흐느껴 울었고, 나는 병실 안에 있을 수 없어 열려 있는 문 밖으로 잠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 얼굴을 가리는 탓에 줄곳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이가 너무 궁금해서 못참고 던진 질문.
그런데 그것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물음으로 들렸다.

돌아가실 날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지만, 아이의 말을 들으니 이제 정말 아내는 할머니를 더이상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성큼 다가왔다.

다행히도 그로부터 몇달 뒤에 장인, 장모님과 처남네 식구들과 같이 병원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어머니가 병실에 계시는 모습을 처음 본 장모님은 한스럽게 우셨지만, 우리는 더이상 침울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 전쯤 할머니의 위독 소식을 들은 뒤 마음의 준비를 했고, 아내는 회사에서 부산 출장길에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으며, 우리는 일주일 뒤인 지난주 금요일 정식으로 이별할 수 있었다.

병원의 요양기간이 길었음에도 고모들과 장모님을 포함한 여자 어른들은 장례 절차가 시작될 때 큰 소리를 내며 오열하셨고, 가장 오랫동안 모시고 사셨던 아내의 작은어머니는 담담하게 눈물을 닦으시는 것으로 심정을 대신하셨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7735 [일반] [울화통 소식] 사법농단 사건 관련 최근 보도 모음 [29] 후추통8171 18/07/27 8171 17
77731 [일반] 합리적 보수 유승민 의원의 인사 추천 [164] ppyn19753 18/07/27 19753 22
77730 [일반] (스포) <인랑> 스토리 쉽게 이해하기 [26] 마스터충달9951 18/07/27 9951 10
77729 [일반] 태풍 종다리와 폭염의 한판승부 결국 폭염이 이길 듯 [38] 아유11641 18/07/27 11641 2
77728 [일반] 인랑, 이대로 묻히기는 아까운 영화...라기보다 영상물?(스포있음) [16] 앙겔루스 노부스7042 18/07/26 7042 0
77727 [일반] 학제 개편 - 독일식 학제에 대해서 [38] 트럼피즘10224 18/07/26 10224 3
77726 [일반] '씨밤'을 재밌게 보신 분에게 추천하는..'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 [38] cluefake7800 18/07/26 7800 2
77725 [일반] 신일그룹, 돈스코이호 보물 현재는 파악할 수 없는 상황 [48] 아유12454 18/07/26 12454 1
77724 [일반] 자게와 스연게에서 운영위원을 모십니다. (기간 연장) [26] OrBef8158 18/07/14 8158 3
77723 [일반] 노회찬대표 조문을 다녀오며. [24] Fim10380 18/07/25 10380 26
77722 [일반] 조선일보, 25일부터 27일까지 네이버·다음 노출 중단 [32] 좋아요13451 18/07/25 13451 14
77721 [일반] <인랑>, 로맨스 안넣으면 제재라도 당하나? (스포X) [73] 화이트데이10341 18/07/25 10341 4
77720 수정잠금 댓글잠금 [일반] 삼성 반도체의 본질 [117] kurt16811 18/07/25 16811 4
77719 [일반] 8월 부터 본격적인 일회용컵 단속 시작! [44] 보라도리11816 18/07/25 11816 1
77718 [일반] 인랑. 꽤 재밌게 보긴 했는데 뭐가 문제인 걸까(스포성 있습니다) [17] 드라고나6713 18/07/25 6713 1
77717 [일반] 메모장의 내용을 정리하며 - 아이의 예감 지니팅커벨여행5104 18/07/25 5104 9
77715 [일반] <인랑> 보고 왔습니다. (스포일러 약간) [22] 주홍불빛6553 18/07/25 6553 0
77714 [일반] 여름철, 사상 초유의 무더위, 전력수요 증가로 대(大) 정전 사태가 일어날까? [106] superiordd13461 18/07/25 13461 63
77713 [일반] 어제 100분 토론 패널 선정이 왜 그모양이었는지 밝혀졌네요 [47] 마재12912 18/07/25 12912 17
77712 [일반] 폭염이 바꾼 신풍속도 "나가면 생고생" 소확행 휴가族 는다 [62] 자전거도둑11181 18/07/25 11181 3
77710 [일반] 영화) 미션 임파서블 : 폴아웃 보고 왔습니다. (다소 스포일러) [28] empty7828 18/07/25 7828 8
77708 [일반] 학종이 아니라 수능도 문제였군요. [312] 삭제됨12696 18/07/25 12696 0
77707 [일반]  "아버지의 부성애 본능"...불길에 아이 둘 안고 사투 [31] swear9670 18/07/25 9670 2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