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누워 있다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길이 한 장, 폭 반 장의 좁아빠진 침상 위에서 나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꿈을 꾸며 지른 비명 탓에 목이 칼칼하니 아팠다. 방을 혼자 쓰는 덕분에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대사형(大師兄)이라는 명목으로 내게는 혼자 쓸 수 있는 방이 주어졌다. 나와 같은 배분이라 해도 사제들은 두 사람이 하나의 방을 공유했다. 그리고 가장 배분이 낮은 제자들은 강당에서 단체로 침구를 깔고 함께 자야 했다. 우리 환검문(幻劍門)에서 독실을 배정받은 사람은 오직 나의 스승이신 장문인과 그의 첫째 제자인 나뿐이었다.
머리맡의 자리끼를 찾아 오랜 시간 동안 들이켰다. 그러고 나자 조금 마음이 진정된 것 같았다. 나는 맥없이 벽에 등을 기대었다. 식은땀에 전 등에 와 닿는 벽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나는 아릿한 목을 쓰다듬으며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암흑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방향 모를 정면을 노려보며 나는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날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칠흑같이 어둡고 태산같이 거대한 공허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이윽고 한 자루의 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은 없었다. 검이 혼자서 천천히 공중을 움직였다. 나는 그 검이 구사하는 초식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휘소탕(一揮掃蕩). 우리 문파의 자랑거리인 환영검법(幻影劍法) 칠십 이식 중 마지막 초식. 양손으로 잡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후 단숨에 내려 긋는, 단순하면서도 강맹한 일격. 그 초식의 검로(劍路)에 따라 검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공중으로 올라간 검이 마침내 일직선으로 나를 내리쳤다. 추호의 흔들림조차 없이 단숨에. 나로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서 그 검을 쥔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그 검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칠사매(七師妹)가 아니면 당금 천하에 또 누가 있어 그런 경지를 보일 수 있겠는가. 그녀가 분명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나와 더불어 비무(比武)할 그녀가 바로 꿈속에서 나를 반으로 갈라 버린 검의 주인이었다.
스승님은 일흔 살이 되는 오늘 은퇴할 것이라 선언했다. 동시에 환검문의 오랜 전통에 따라 차기 장문인은 가장 재능이 뛰어난 두 제자의 검술 대결을 통해 정해질 것이라고 확언했다. 전임 장문인의 은퇴와 신임 장문인의 취임이 한 날 한 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날이 밝아오면 나는-.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와 수련장으로 향했다.
수련장은 문파 한가운데 지어진 거대한 건물이었다. 내부는 단 하나의 거대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동시에 오십 명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부딪히지 않은 채 무공을 수련할 수 있었다. 그 수련장 귀퉁이의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간 후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문을 열었다. 한쪽 구석에서 횃불을 밝힌 채 검을 휘두르던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대사형!”
순박해 보일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칠사매는 급히 내게 예의를 갖추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명확한 반가움이 나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잠이 안 와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칠사매는 이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있는 거야?”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칠사매가 머리에 맺힌 땀을 털어내며 싱긋 웃어보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내심 고소(苦笑)을 금치 못했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성실한 자를 고르라면 칠사매는 분명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 틀림없었다. 스승님의 제자로 입문한 이래로 칠사매는 단 한 번도 검법 연습을 거른 적이 없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도, 벼락이 떨어져 산중턱이 불타오른 날에도, 몸살이 나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도 결코 환영검법(幻影劍法)의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환영검법은 환검문의 최고 절기이자 천하에서도 일세절학으로 손꼽힐 만한 검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익히기 까다롭기로 이름난 검법이기도 했다. 환영검법은 유능제강(柔能制剛) 이허극실(以虛克實) 여덟 자를 구결로 삼았는데 그 뜻대로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고’ ‘허초로 실초를 극복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래서 허초가 실초보다 많고 검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보통 허초가 많은 검법이라 해도 세 번에 한 번은 실초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환영검법은 연달아 일고여덟 번의 허초를 내지르면서도 실초를 드러내지 않고 숨겨 두곤 했다. 게다가 초식만도 일흔 두 개나 될뿐더러 초식마다 더해지는 변화까지 합치면 모두 육백이십삼 종류나 되는 변초(變招)가 있었다. 비단 검법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무공을 통틀어서도 환영검법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무공이었다. 우리 문파에 입문한 제자들 가운데서도 환영검법을 온전히 터득하기는 고사하고 그 초식들을 모두 외우기라도 할 줄 아는 이들이 오히려 드물 지경이었다. 언젠가 스승님이 말씀하신 바 있었다.
“나는 평생 일곱 명의 제자를 들였고 모두에게 환영검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진정 환영검법의 검리(劍理)를 깨우치고 있는 아이는 오직 첫째와 일곱째뿐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으쓱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칠사매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환영검법을 온전히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그건 겸양이 아니었다. 칠사매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안타까움이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훗날 본파의 장문인이 될 자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결정할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대사형. 함께 수련하시겠습니까?”
청량하기까지 한 칠사매의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깨뜨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날이 밝으면 한바탕 겨뤄야 하는데 굳이 지금 그럴 건 없잖아?”
“아. 그렇군요.”
칠사매는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여느 사람 같으면 그녀가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 여길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민 나는 정말로 그녀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에게 있어 환검문의 장문인 자리는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환영검법. 오직 검법을 갈고 닦아 조금이라도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만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가벼운 작별 인사와 함께 떠나려 했다. 그러나 나의 꿈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한참을 망설이는 동안 칠사매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뭡니까, 대사형?"
"일휘소탕(一揮掃蕩)을....... 한 번만 보여주지 않겠어?"
대사형으로서 당당히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방식은 부탁이었다. 칠사매가 그 두 방식의 차이를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단지 활짝 웃으며 시원스레 대답했을 뿐이었다.
"물론이죠!"
그녀는 수련하고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소매 아래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환검문의 가르침에 따라 호흡하며 내공을 순환시킨다. 전신을 순환하는 내공은 점차 단전으로 모여들면서 실체화된 기운으로 화(化)한다. 엄숙하기까지 한 집중력이 이미 그녀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칠사매는 왼손을 가만히 내밀어 오른손 아래로 튀어나온 칼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멈추고 있었다. 꿈에서 본 강렬한 기시감이 나를 덮쳐왔다. 나는 무언가에 사로잡한 듯, 무언가에 홀린 듯 그 검식을 응시하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일휘소탕. 환영검법의 마지막 초식. 다른 일흔 한 개의 초식과는 전혀 다른 비초(秘招). 단 하나의 허초도 가하지 않고, 단 하나의 변화도 없이, 오직 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똑바로 내려긋는 매우 단순한 일격. 그것은 분명 환영검법의 초식이었지만 환영검법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일흔 한 개의 초식과는 전혀 다른 검리(劍理)을 따랐다. 그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언젠가 내가 그 대한 의문을 품고 질문하자 스승님은 솔직히 대답하셨다.
"실은 나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너희가 언젠가 그 이치를 깨달아 내게도 가르쳐준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구나."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었다. 칠사매가 구사하는 일휘소탕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환영검법의 터득에 있어 나와 칠사매는 거의 비등한 수준이었다. 대련하면서 서로 일천 합을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초식만은, 일휘소탕만은 그녀가 나보다 위에 있었다. 나는 그녀처럼 이 초식을 구사할 수 없었다.
칠사매의 입에서 가벼운 기합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아래로 움직였다.
검은 곧장 아래로 내리쳐졌다.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일직선으로. 검이 움직일 수 있는 가장 빠른 경로를 따라. 그 검날 앞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단숨에 갈라놓을 강맹한 기세로. 그 무자비하리만큼 단호한 일격을 보며 나는 내가 그 일격을 받낼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응당 두려워해야 했다. 마치 꿈 속에서의 나처럼 비명을 질러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그보다 앞선 감정이 뚜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찬탄.
그녀의 일휘소탕은 아름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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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척관법에서 1장이 3.03미터인데, 본래 척관법상 1丈은 성인 1명의 키를 나타내는 단위였습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길이 단위가 조금씩 변하고 한 시대에도 여러 가지 도량형이 혼용되었습니다만 일단 이 글에서는 1장을(1길처럼) 성인 키에 준해서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