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6/27 10:10:39
Name 글곰
Subject [일반] 오늘도 머리카락을 잃었다 (수정됨)
  출근을 위해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또다시 몇십 가닥의 머리카락을 잃었다. 아무리 조심스레 두피를 어루만져도 머리카락이 뽑혀나가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나날이 줄어드는 머리숱은 되돌릴 수 없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말없이 웅변한다. 오늘도 하수구를 타고 내려가는 머리카락이 나는 슬프고 허탈하다. 문득 시리도록 아련한 가슴을 부여잡고 나는 오늘도 샤워기 아래에서 눈물을 흘린다. 머리카락. 내 머리카락.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의 운명을 직감했다. 추석 차례상 앞에 일렬로 늘어서서 절하는 친척 어른들의 뒤통수는 하나같이 듬성했다. 아버지의 친구는 아버지를 가리켜 대통령의 기상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것이 전두환의 헤어스타일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내가 막 십대로 접어들었을 무렵에 이미 아버지는 가르마를 포기했다. 남들보다 세수해야 할 면적이 넓었기에 아버지는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징기즈칸의 후예에게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척박한 땅뿐인 것처럼, 한때나마 남들만큼은 숱이 있었던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한 줌조차 되지 않는 머리카락뿐임을 나는 항시 아파한다. 머리카락의 소실은 자존감을 박탈한다. 그렇기에 탈모는 곧 고통이다. 불타가 고해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의 몸을 고행으로 내던진 것처럼 사람들은 탈모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어떤 이들은 패션이라는 미명 하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또다른 자들은 가발의 세계로 도피한다. 약을 쓰기도 하고 민간요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타는 고행의 끝에서 진실을 깨달았다. 그 모든 노력이 결국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임을. 머리숱의 감소를 막기 위한 몸부림의 끝에서 결국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단 하나의 명징한 진실뿐이다. 탈모르파티.

  예수는 황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이겨냈다. 그것은 그가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머리숱이 남들보다 부족했고, 악마가 그에게 남들보다 더 굵고 풍성한 모발을 제시했다면 설령 예수라 한들 어찌 거부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만큼 숱이 많지 못했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예 머리를 밀어버리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너도 삭발 나도 삭발이라는 공평함 앞에서 머리숱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 곧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도리다. 소크라테스가 아내에게 매일같이 잔소리를 들은 이유는 그의 텅 빈 정수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도 완전히 밀어버렸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만두자. 그 어떤 헛소리로도 결국 머리를 되돌릴 수는 없다. 우주가 빅 프리즈를 향해 나아가듯 인류의 머리는 풍성에서 듬성으로 나아간다. 이는 불가역적인 변화다. 오늘의 머리는 어제보다 줄어들었을 것이고 내일의 머리는 오늘보다 더 부족할 것이다. 그렇게 매일 머리카락을 잃으며 나는 감당하기 힘든 대머리의 미래 앞에서 힘없이 비틀거린다. 언젠가 나의 머리는 아버지의 그것처럼 되겠지. 나는 그 전에 세상이 멸망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가끔씩 생각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바라건대 유인 우주선이 알파 센타우리에 도달할 때쯤에는 탈모 또한 정복될 수 있기를 나는 조심스레 기원하는 것이다. 부디 인류의 미래에 희망의 빛이 깃들기를.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오'쇼바
18/06/27 10:13
수정 아이콘
이런 뼈때리는 팩폭을 ... 수필 형태로 맞으니깐.. 더 아프네요..ㅜㅜ
윤가람
18/06/27 10:14
수정 아이콘
자라나라 머리머리!
타카이
18/06/27 10:16
수정 아이콘
스타트렉의 피카드 선장를 볼 때 미래에도 고쳐지지 않는 걸로...는 그냥 무시하고
고쳐지겠죠. 대머리 유전인자를 찾아서 유전자 가위로 싹둑해버리거나(현재 진행중인 탈모는 못고치는 방법)
모발 이식도 유지가 잘 되는 방법으로...치료가 가능한 질병인가 하는 점은 의학계 지식이 부족한 관계로 읍읍
뜨와에므와
18/06/27 10:16
수정 아이콘
내 머리가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Been & hive
18/06/27 10:20
수정 아이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목화씨내놔
18/06/27 10:21
수정 아이콘
웃으면 안되는데 킄큭
크림샴푸
18/06/27 10:23
수정 아이콘
인류 평화를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 의사 쌤들 모두 강제 탈모를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하루라도 빨리 발모제 + 탈모치료제가 개발 되지 않겠습니까!!!
18/06/27 10:31
수정 아이콘
둘째문단 하...
18/06/27 10:51
수정 아이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
대통령의 기상이면 이분들 설마 전부(!?)
술마시면동네개
18/06/27 10:52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추게로 흑...
시노부
18/06/27 10:52
수정 아이콘
전미가 울었다. ㅠㅠ

근데 부처님 머리는 나발이라고 엄청 배배꼬은 머리긴 하지만 그거 쭉다 풀면 풍성풍성...
여담이지만 고타마 싯다르타 는 엄청 미남이었다는...
18/06/27 11:01
수정 아이콘
와 이거 진짜 보는 순간 추천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화씨내놔
18/06/27 11:07
수정 아이콘
추천수가 덜덜
sen vastaan
18/06/27 11:48
수정 아이콘
모발탈락속도가 조금 줄어들기를 바라면서 추천 눌러봅니다
루트에리노
18/06/27 12:16
수정 아이콘
힘내세요, 오늘은 내일보다 풍성하니까요
아이지스
18/06/27 12:18
수정 아이콘
일단 추게로
18/06/27 12:41
수정 아이콘
자라봐라 머리머리
티모대위
18/06/27 13:28
수정 아이콘
아아.... 아아..ㅠㅠ
비익조
18/06/27 13:55
수정 아이콘
남은 날 중에 가장 풍성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브라이언
18/06/27 14:08
수정 아이콘
아니.. 이런 명필이..
필력에 감탄하며 껄껄대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님에 속으로는 웁니다 ㅜㅜ
18/06/27 15:33
수정 아이콘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니 이렇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라 감히 추측해 봅니다
이니그마
18/06/27 15:37
수정 아이콘
하하하..
글쓴이를 직접 본 적이 있기에...
더 아련합니다.
3년쯤 되었나요?
그땐 더 풍성하셨을겁니다 암요 ㅠㅡㅜ
18/06/27 15:54
수정 아이콘
오.
오......
이니그마
18/06/27 16:31
수정 아이콘
Zotca 에 듀얼파티 공성벌이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저도 글곰님도 조금더 풍성했겠지요
ㅠㅡㅜ
18/06/27 16:33
수정 아이콘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말뜻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아니라, 그때보다 확실히 더 부족하다는..... 흑.ㅠㅠ
Zoya Yaschenko
18/06/27 15:48
수정 아이콘
어느날 우리는 우주인을 만났습니다.
그 우주인은 머리가 없었습니다.
18/06/27 16:18
수정 아이콘
답은 '삭발'이다
주파수
18/06/27 17:35
수정 아이콘
추게감.
18/06/27 17:56
수정 아이콘
추천수보소 크크크크
카랑카
18/06/27 21:04
수정 아이콘
사실 선택지는 두가지이죠.
꼬추 VS 탈모방지
하나만 포기하면 됩니다.
사실 남자라면 두마리 토끼를 잡아야 합니다만......
아마데
18/06/28 15:57
수정 아이콘
전 운이 좋아서 탈모 걱정은 평생 안해도 되지만, 정말 만에 하나 탈모가 오면 돈이 몇천만원 몇억원이 들든 머리를 빼곡하게 심을거 같습니다.

본문은...글쓴분 개인적 경험에서 나오는 글이 아니길 빌겠습니다 ㅠ
18/06/29 08:57
수정 아이콘
머리카락 따위가 뭐라고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지ㅠㅠ
비가오는새벽
18/06/29 11:24
수정 아이콘
아 웃으면 안되는데 웃어버렸네요. 추천드리고 가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7626 [일반] 한국 경제 이야기를 할 때 알아두면 좋은 숫자들 [5] 예루리6890 18/07/17 6890 3
77625 [일반] 통계로 알아보는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 [67] 여망9871 18/07/17 9871 0
77624 [일반] 심리 상담을 받아보자 : 심리 상담을 받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44] Right7380 18/07/16 7380 13
77623 [일반] (혐주의)(링크클릭주의)워마드 회원, 낙태후 태아 시신훼손 [218] 아점화한틱28983 18/07/16 28983 11
77622 [일반] 상가 임대료 추이 [137] 삭제됨15155 18/07/16 15155 2
77621 [일반] 내 친구는 연애 고수였다. <5> [20] aura6352 18/07/16 6352 8
77619 [일반] [축구] 아시안 게임 명단 속 답답한 기자들 [37] 잠잘까11610 18/07/16 11610 35
77618 [일반] 한국 경제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 - #1. 최저임금 [103] Jun9119626 18/07/16 9626 15
77617 [일반] 튼튼이의 모험 (Loser’s Adventure, 2018) [7] 리니시아5084 18/07/16 5084 3
77616 [일반] 고전 문학과 성희롱 [65] 한쓰우와와7817 18/07/16 7817 4
77614 [일반] 불교에 대한 잡설 [33] Just_fame5475 18/07/16 5475 2
77613 [일반] 더운 여름날 먹는 음식 [40] 비싼치킨8359 18/07/16 8359 17
77612 [일반] 아름다운 통영 알차게 관광하기 [50] 파츠14010 18/07/16 14010 39
77611 [일반] 오늘의 잡 정보! [20] 현직백수7696 18/07/16 7696 6
77609 [일반] 영화, 드라마로 듣는 Best 80s 팝/락 [9] azrock7063 18/07/15 7063 11
77608 [일반] 7월 1, 2주차) <앤트맨과 와스프>, <스카이스크래퍼>, <몬몬몬 몬스터> 감상평 [44] 마스터충달9619 18/07/15 9619 4
77607 [일반] 어림짐작 [9] ohfree5010 18/07/15 5010 6
77606 [일반] 무상과 나 [12] Just_fame4387 18/07/15 4387 2
77605 [일반] 최저임금 논란 [410] 수미산22440 18/07/15 22440 8
77604 [일반] 어두운 현대사와 화려한 자연경관 - 크로아티아 [66] 이치죠 호타루15868 18/07/15 15868 80
77603 [일반] [스포주의] WWE PPV 익스트림룰즈 2018 최종확정 대진표 [18] SHIELD5300 18/07/15 5300 1
77602 [일반] 프로듀스 시리즈에 대한 고찰 [23] 애플망고7721 18/07/14 7721 5
77601 [일반] [뉴스 모음] No.188.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페미니즘 외 [19] The xian10630 18/07/14 10630 3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