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6/22 17:35:32
Name 글곰
Subject [일반] 어린 시절 다녔던 학원들에 대한 기억 (수정됨)
  아이가 어느덧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아이가 먼저 원한다면 모를까, 아니면 학원은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내 경험상 그랬다. 소심하고 맥없는 찐따인 아들을 안쓰러워한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알뜰히 돈을 모아 사교육의 은총을 내게 퍼부으셨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의 아들은 귀하디귀한 돈을 시궁창에 처박았습니다. 그리고 제 딸은 자기 아빠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그리하여 도출된 완벽한 논리에 따라 아이를 학원에는 안 보내는 게 낫겠다고 나는 결론내렸다. Q.E.D.

  아래는 학원과 관련된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1) 태권도 학원]
아마도 가장 먼저 다니기 시작한 학원이 아닐까. 열 살도 되기 전에 당신의 아들이 허약하기 짝이 없는 말라깽이임을 간파한 어머니는 나를 태권도 학원에 집어넣으셨다. 남자아이라면 응당 태권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여차저차하여 검은띠를 땄다고는 하지만 야매가 분명하다. 검은띠 안 달아주면 당장이라도 학원을 그만둘 것 같아서가 아니었을까. 그 허약했던 아이는 어느덧 180을 넘는 키와 그 절반에 달하는 몸무게를 지니고 있다.

[2) 미술 학원]
동생은 피아노. 나는 미술. 나는 미술 학원이 좋았다. 왜냐면 책장에 책이 많았으니까. 어느 날 어머니가 불시에 미술학원을 방문했더니, 내가 구석에 앉아서 책을 잔뜩 쌓아둔 채 읽고 있는 동안 학원 선생님이 열심히 내 그림을 대신 그려주고 있었다 한다.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참 아쉬웠다. 아직 못 본 책들이 있었는데. 그리고 본가에 가면 방에 걸려 있는 내 어린 시절 그림은 그 때 미술학원에 가져다 준 돈이 아무런 쓸모도 없었음을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

[3) 주산 학원]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예체능은 진즉에 글러먹었음을 깨달으신 어머니는 대신 공부하는 재능을 개화시켜 주기로 마음먹으신 듯했다.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주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동네에는 주산 학원이 있었다. 나는 학원에 갔고, 10분 동안 혼자 주판을 놓아본 후 50분 동안 책을 읽고 집으로 갔다. 사실 종이에다 연필로 써서 계산하는 것과 크게 차이나는 속도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주판의 끝물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셨다.

[4) 웅변 학원]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차츰 덩치는 커져 갔지만 여전히 나는 붙임성 부족한 숙맥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웅변 학원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 변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를 키워드로 하는 웅변은 딱히 재미도 없었고, 항상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었기에 책을 읽을 수도 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웅변 학원은 얼마 가지 않아 망했다. 다만 나름대로 논리적인 논지 전개 방법을 익힐 기회가 되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그 때 배운 걸로 교내 웅변대회 나가서 상장은 하나 받았다.

[5) 컴퓨터 학원]
어르신들에게 컴퓨터는 그저 정체모를 비싼 물건일 뿐이었다. 그리고 GW베이직은 영어와 숫자의 조합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GW베이직을 가르쳤다. 그러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학원에는 사오십 대나 되는 엄청난 양의 컴퓨터가 늘어서 있었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열광적으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남북전쟁. 가라데카. 수왕기. 덕테일즈. 페르시아의 왕자. 그리고 아쉬운 하원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오늘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보고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참으로 기특해하셨던 것 같다. 평생 가장 열심히 다닌 학원이었다.

[6) 교과 학원]
중학생이 되자 세상에 학원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험과목을 가르치는 수험 학원.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학원은 공부 수준에 따라 다섯 단계의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학원으로 가 원장과 상담하며 확신에 차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머리가 좋으니까 제일 공부 잘하는 반에 넣어 주세요. 나는 간단한 시험을 보았고, 원장은 어머니를 설득하여 나를 두 번째 반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반으로 올라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반으로 떨어졌다. 그걸 숨기려고 학원비 청구서를 위조했다가 결국 걸렸다. 그렇게 내 학원 생활은 끝났다.

[7) 영/수 과외]
지금 생각해 봐도 나의 고등학생 시기는 환상적이었다. 하루에 만화책 다섯 권과 무협지 세 권을 읽던 시절이었고, 새벽 4시까지 게임의 바다를 항해하다 학교에서는 엎어져 자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어와 수학이 싫었다. 덕분에 두 과목에서 양과 가가 찍힌 성적표를 받아든 어머니는 내게 과외를 붙이셨다. 주부 과외교사였다. 내 과외비는 과외 선생의 딸이 첼로를 배우는 과외비로 나갔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금의 순환을 나는 직접 체험했다. 그러나 내 성적을 올린 것은 과외가 아니라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 자신이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너무 늦은 건 아니었다.

[8) 자동차 학원]
걱정 마라, 내 딸아. 아빠가 여기만은 꼭 보내줄게. 그 나이까지 부디 무탈하게 자라주렴.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06/22 17:41
수정 아이콘
자동차 학원은 꼭가야 합니다 암요..
뽀롱뽀롱
18/06/22 17:49
수정 아이콘
제일 중요한 국가고시 학원은 꼭 다녀야죠 흐흐흐
18/06/22 17:55
수정 아이콘
첼로를 글곰님 어머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돈을 회수하면 진정한 순환의 고리가!!!
한량기질
18/06/22 18:03
수정 아이콘
좀 딴 소리지만 책 많이 읽는게 공부의 기초이자 사실상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글쓴 분도 정신 차리고 성적을 후딱 올리신 게 아닐까...
김철(33세,무적)
18/06/22 18:20
수정 아이콘
지금생각해보면 제가 다녔던 피아노 학원은 정말 날로 먹었어요. 가면 뭐뭐뭐 5번씩 쳐 이러고 대충 2-3번씩 치고 바를정자 하나 써서 가면 검사맡고 끝...
홍승식
18/06/22 18:22
수정 아이콘
저도 고등학교 때 자습한다고 하고 일 고정액 만화가게에 가서 그 만화가게의 모든 책 - 만화책, 무협지 - 를 다 봤습니다.
최종병기캐리어
18/06/22 18:34
수정 아이콘
어릴땐 몸이 너무 허약해서 남들 다가는 태권도학원 한개 안다니고 살다가 비평준지역이라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학원을 중3때 처음가보곤 컬쳐쇼크받고는 다음날 환불했네요.

고등학생 시절엔 11시까지 강제야자를 하던 학교라 학원은 꿈에도 못꾸고 있다가 고3되서야 공부에 맛들리면서 -등수가 오르는 재미- 졸라서 단과학원 다닌게 유일하네요..
elesevier
18/06/22 18:34
수정 아이콘
저는 한문학원을 5년정도 다녔네요. 지금도 한문학원이 있을까모르겠네요.
FreeRider
18/06/22 18:57
수정 아이콘
전 한문을 서당에서 배웠습니다 상투 틀고 갓 쓴 영감님들한테 회초리 맞아가며 배웠더니 천자문 쯤은 금방 외우겠다라구요
물론 서당 그만두고는 다 까먹었지만
그 때 이후로 강압적으로 하는 공부는 일시적으로는 효과 있을지 몰라도 지식이 되기는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Sith Lorder
18/06/22 18:54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른건 모르겠지만, 고등학생때, 영어학원이나 영어과외는 받아보고 싶었네요. 여러가지로 그럴수는 없었지만.
무가당
18/06/22 18:5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정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데에 돈을 버린거 같습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저런걸 알고 있으니 학원의 인기가 좀 줄어들까요? 어차피 억지로 시키면 소용이 없는데...
18/06/22 19:34
수정 아이콘
국민학교 2학년 그림을 너무나 못그려서 부모님에게 가고 싶다고 말한 유일한 곳이였습니다.
얼마나 다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미술선생님이 넌 재능이 없다라고 했었고
어머님이 따지러 간것까지는 기억합니다.
전 지금도 그림 그리는 것이 싫어요.
후마니무스
18/06/22 19:56
수정 아이콘
교육과 경제논리가 만난, 학원은 자본주의의 산실이죠.
블랙비글
18/06/22 20:21
수정 아이콘
방향만 좋았다면 굉장히 생산적이었을수도 있는 시스템인데 이렇게 되었다는게 안타깝죠.
18/06/22 21:47
수정 아이콘
3에서 연배가 느껴지시네요...
루카쿠
18/06/22 22:28
수정 아이콘
학원 진짜 돈낭비죠.

저도 학원 많이 다녔는데 그 시간에 그냥 책이나 볼걸 그랬습니다.

시간낭비 돈낭비;;;;
장바구니
18/06/22 23:45
수정 아이콘
주산!!크크크 따님 운전할땐 자율주행이 시행될지도요 하하
아마데
18/06/23 04:11
수정 아이콘
학원은 저한테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다닐땐 정말 싫었지만 안 다녔으면 지금처럼 영어를 잘했을까? 아마 아니겠죠
마텐자이트
18/06/23 13:37
수정 아이콘
어릴때 다녔던 학원은 놀이터였죠
카디르나
18/06/23 21:27
수정 아이콘
따님의 나이를 모르니 소용 없는 이야기지만, 따님이 자동차 학원에 다닐 때 쯤 모든 자동차는 자율주행을 하게 될 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면허를 따고 2년 쯤 묵혀두었다가 큰 맘 먹고 운전을 해보려 할 때 쯤 자율주행 상용화가 될 지도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7367 [일반] 구글이 코리안 헤리티지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13] 홍승식13098 18/06/22 13098 11
77366 [일반] 어린 시절 다녔던 학원들에 대한 기억 [20] 글곰7969 18/06/22 7969 7
77365 [일반] 경복궁 펜스룰 사건의 충격적인 결말 [212] 삭제됨23313 18/06/22 23313 28
77363 [일반] 인텔 CEO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사임 [28] 인간흑인대머리남캐11200 18/06/22 11200 1
77362 [일반] 중고거래 속에 쌓이는 생각들 [88] The xian13002 18/06/22 13002 12
77361 [일반] "미투 당할까봐" 쓰러진 여성 방치한 펜스룰, 사실일까? [65] 하이바라아이17254 18/06/22 17254 9
77360 [일반] 더 나은 프로그래머가 되는 10가지 방법 [29] 시드마이어8962 18/06/22 8962 13
77359 [일반] "부모님은 자신이 주의를 끌 테니 꼭 도망치라고 하셨습니다." [33] nexon11161 18/06/22 11161 7
77357 [일반] 실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어도, 그래도 여전히 과학인가? [27] cheme13290 18/06/21 13290 40
77356 [일반] Daily song - 너를 공부해 of 소란 [3] 틈새시장3364 18/06/21 3364 1
77355 [일반] 내 친구는 연애 고수였다. <3> [28] aura7069 18/06/21 7069 9
77354 [일반] 동사무소 민원 관련 [최종]결론입니다. [46] 삭제됨11787 18/06/21 11787 1
77352 [일반] 동사무소 직원 민원 관련.. 결론입니다. [43] 삭제됨12289 18/06/21 12289 1
77351 [일반] 강진 여고생 실종사건 [83] 자전거도둑17119 18/06/21 17119 2
77350 [일반] 어제 저녁에 있었던 실로 기이한 경험. [35] 피카츄백만볼트10291 18/06/21 10291 13
77349 [일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조작? [59] 루트에리노15561 18/06/21 15561 1
77348 [일반] 무지개 다리 넘어 너 나를 반기지 마라. [28] Dukefleed7793 18/06/21 7793 27
77347 [일반] (논의 종료) 정치/사회/이슈 게시판 오픈 여부에 대해 의견수렴합니다. [211] OrBef14865 18/06/17 14865 1
77346 [일반] 눈의 여왕과 악몽의 세계 [7] Farce7354 18/06/20 7354 8
77345 [일반] (음식사진주의) 살안빠지면 예수부처알라한테 쌍욕해도 되는 2018년 상반기 다이어트 일기.JPG [25] 살인자들의섬11608 18/06/20 11608 21
77344 [일반] 교통공학 이야기 - 2. 수요예측 이론편 [11] 루트에리노8758 18/06/20 8758 8
77343 [일반] 해외출장수당 [87] 글곰15753 18/06/20 15753 61
77342 [일반] 오늘 하루 미국 한인 사이트을 뒤흔든 한장의 사진 [35] 곰주19878 18/06/20 19878 2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