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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9/26 10:23:23
Name 글곰
Subject [일반] 2000년, 그들이 발렌타인 21년산을 마셨던 날 (수정됨)
  서기 2000년. 그들은 푸릇푸릇한 대학생이었다. 물론 나이가 그랬단 이야기다. 생김새까지 그랬다는 뜻은 아니다.

  나이는 새내기, 행동거지는 풋내기, 얼굴은 헌내기였던 고등학교 동창 아홉 놈이 방학을 맞아 포항으로 놀러갔다. 긴 여행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놈들은 상 위에 준비한 음식물을 올려 놓았다. 시장통에서 산, 만 원에 다섯 마리 주는 오징어회와 싸구려 잡어회. 소주와 맥주 몇 병. 종이컵. 김치. 과자 몇 봉지.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놈들은 그저 가난하고 굶주린 비렁뱅이 대학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개중 한 놈이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고학력 엘리트 대학생인 놈들은 라벨에 적힌 알파벳을 읽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Ballantine's aged 21 years.
  발렌타인 21년산.

  놈은 그걸 아버지의 콜렉션에서 빼 왔다고 했다. 다른 놈들은 놈을 칭찬하고 칭송했다. 잔이 없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종이컵이 있잖은가? 손에서 손으로 종이컵이 옮겨졌다.

  그중 또다른 놈이 아는 척하며 말했다.(그 놈이 바로 나라는 건 비밀이다.)

  "야. 비싼 양주는 원래 온더락스로 마셔야 하는 거야!"  

  그러나 얼음이 없었다. 그러나 구하는 자에게 하늘은 답을 내려주기 마련이었다. 사실 얼음이 있었다. 놈들은 얼음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만 원에 다섯 마리 주는 시장통 횟집에서, 더운 여름 날씨에 회가 상하지 않도록 넉넉히 넣어준 얼음이었다.

  그들은 오징어 비린내가 폴폴 풍기는 얼음을 밥숟가락으로 떠서 종이컵마다 두 개씩 넣었다. 그 위에다 발렌타인 21년산을 쪼르륵 부었다. 그 후 나무젓가락을 하나 부러뜨려서 잔에다 쑤셔넣고 휘휘 저었다. 고급 양주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놈들은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다. 개중 절반 이상이 은기침을 하며 물을 찾았다. 나머지 절반은 아마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한 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 난 발렌타인이 입에 안 맞네."

  그 놈이 평생 다른 위스키를 마셔본 적이 없다는 데 돈을 걸 수도 있었다.

  여하튼 그 자리에 스무 살 먹은 남자 아홉 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렌타인 21년산은 절반 가량이나 남았다.  
  미안해요, 발렌타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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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6 10:25
수정 아이콘
이렇게 슬픈 이야기는 정말 오래간만에 듣습니다 흑흑
린 슈바르처
17/09/26 10:27
수정 아이콘
전 양주를 준비하던 시험 합격하고 아버지가 주신 발렌타인 21년산으로 처음 접했거든요.

친구들과 탕수육 시키고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는데 목도 아프고 이걸 왜먹나 싶었네요.
마스터충달
17/09/26 10:31
수정 아이콘
이거야 말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로군요...
17/09/26 10:34
수정 아이콘
아이고 아버지
사악군
17/09/26 10:35
수정 아이콘
저도 발렌타인 안좋아합니다. 사실 위스키를 다 안좋아해요...
함들어가던 날 장인어른이 발렌타인 30년산을 따주셨는데 함재비 친구하고 저, 아버님 셋이서 2병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술주정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다 토했...............
17/09/26 10:53
수정 아이콘
사실 저도 위스키는 진저 에일 섞어서 먹지 스트레이트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향은 좋은데 목넘김이 너무 쎄요.
그림자명사수
17/09/26 10:37
수정 아이콘
군대에서 100일 휴가 나온날!!
친한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엄마가 소고기를 구워주시고 아빠는 해줄게 없었던지 찬장에 있는 양주들을 가리키며 "난 치질수술해서 술 못먹으니 저중에 니들 먹고 싶은거 맘껏 먹어라"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셨죠...
그날 친구 세놈이란 먹은 술이 조니워커 블루라벨, 로얄 살루트....
나중에 면회오셔서 한마디 하시더군요
"니들이 그날 먹은 술값이 좋은 술집에서 먹으면 2~3백만원 정도 된다..."
분명 그 눈빛은 '후회'였습니다...
17/09/26 10:40
수정 아이콘
아버지... 아아...
17/09/26 10:38
수정 아이콘
사실 지금 나이에 위스키 먹어봐도 그 맛이 그 맛이긴 합니다.
대학생때 먹던 J&B건, 나이들어서 면세점에서 사온 발렌타인 21년산이건, 죠니워커 킹조지 5세건, 로얄살루트건, 글렌피디히 17년산이건.
'용과 같이' 게임을 하면서 위스키 맛을 다시 떠올려볼 뿐... 저런 맛이 나야 하는 것이였나?
살려야한다
17/09/26 10:38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킄 불쌍한 발렌타인쨔응..
BibGourmand
17/09/26 10:46
수정 아이콘
아... 내 사랑 발렌타인은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風雲兒
17/09/26 10:54
수정 아이콘
양주 처음 시작은 진리의 캡틴큐 아닙니까???
뭐 이제는 마실 수도 없는 진귀한 물양주..
17/09/26 11:09
수정 아이콘
비린내 나는 얼음 이라니ㅜㅜ
발렌타인아 내가 미안하다~~
마법사5년차
17/09/26 11:26
수정 아이콘
전 발렌타인 보다는 죠니워커가 입맛에 맛더군요.
블루는 말할것도 없고, 스윙이나 플래티넘도 맛있었네요.
순규성소민아쑥
17/09/26 11:43
수정 아이콘
먹어본 많은 술중에 블루가 두번째로 맛있는 술이었습니다. 첫번째는 바카디 151 -0-
마법사5년차
17/09/26 11:45
수정 아이콘
첫번째가 바카디 151이라니 대단하시네요;;-0-
저한테는 벌칙주였는데;
순규성소민아쑥
17/09/26 12:00
수정 아이콘
파견 나갔을때 2년간 큰걸로 한 15병 마신 것 같습니다. 매번 가는 바에다가 한병씩 들여놓으라 하고 키핑해놓고 혼자 마셨죠. 한번은 바텐이 자기 술 잘마신다고(여자였습니다) 함 붙어보자고 해서 둘이 스트레이트 5잔 마시고, 둘다 업혀간 기억이...(전 맥주 너댓병 마신 상태였고, 바텐도 당연히 술 좀 먹은 상태였지요). 다음날 낮 12시 출근, 엄청 깨졌습니다.

한때는 세계 주류 마트 같은데서 3만원 가량 주고 사서 집에서도 마셨습니다. 바에서 마시면 10만원대인데...훨씬 싸니...

수술 전에는 워낙 술담배를 좋아했었죠...대학생때는 친구들이랑 저랑 가방 열어보면 소주 고량주 심지어 오리지날 안동소주(안동 가서 인간문화재 할머니들이 담으신걸 직접 병에다가 퍼온!)도 들어있었지요. 지금은 큰 수술 받고 소맥 3잔만 마셔도 훅 가는지라...
홈런볼
17/09/26 11:44
수정 아이콘
2003년이었죠? 대학생 때 아버지가 선물로 들어온 양주를 주셨습니다. 무려 발렌타인 21년 산......
이걸 가지고 와서 같이 자취하던 사촌동생이랑 마셨습니다. 좋은 술이니 좋은 안주와 먹어야 한다고 그 당시 학생신분으론 거금인 2만원을 들여 광어, 우럭회를 떠다가요. 흐흐흐
넘기는게 괴롭긴 했지만 워낙 술을 좋아하는 둘이다보니 기분내면서 750미리 한 병을 다 비웠죠.
그리고 그 다음날 둘이서 하루종일 술병 나서 몸져 누웠습니다. 크크크
흔히들 그러잖아요? 다른 술 안 먹고 양주만 먹으면 뒷끝 없다고...... 그날 다른 술 한 방울도 안먹고 750 반반 나눠먹은거거든요.
그날의 숙취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주를 서너병 먹어도 그정도는 아닐 것 같아요. 하하하
그 뒤로 7~8년 지났죠. 아버지께 발렌타인 30년산을 받았는데 이건 아껴마셨죠. 자기 전 한 두잔 정도씩요. 그렇게 마셔서 그런지 30년산은 정말 좋은 술이라는 느낌이 확 들더군요. 흐흐
그림자명사수
17/09/26 11:47
수정 아이콘
위스키 말고 꼬냑 좋아하시는 분 없나요?
저에겐 발렌타인이고 블루라벨이고 헤네시가 최고입니다
17/09/26 12:38
수정 아이콘
위스키는 몰트위스죠!!
17/09/26 14:10
수정 아이콘
싱글몰트가 진리죠..
마스터충달
17/09/26 16:00
수정 아이콘
비싼 위스키는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저는 조니 워커 처럼 부드러운 것보다, 피트 향 강렬한 위스키가 좋더군요. 문제는 넘모 비싸요. 호에에에엥.
17/09/26 19:55
수정 아이콘
남대문 가성비킹 탈리스커10 이 있습니다.
wish buRn
17/09/26 15:40
수정 아이콘
입맛이 저렴한건가.. 저에겐 마트에서 구한 금룡고량주가 최고더군요
17/09/26 18:30
수정 아이콘
전 글렌피딕이 그렇게 맛있더라구요
찌질의역사
17/09/26 18:34
수정 아이콘
21살 때 군 휴가 나온 친구가 집에서 발렌타인 30년산 몰래 가지고 왔다고 빨리 오라고 갔더니...
친구를 만난 순간 이게 발렌타인 30년 산이다 하면서
의기양양 하게 하늘 위로 드는 순간, 종이케이스에서
양주가 밑으로 빠지면서 박살..
정말 떨어지는 순간이 슬로우 비디오로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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