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왕 장사성
호주성을 둘러싼 7개월간의 격전은,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일생일대의 혈전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판도에서 보면 호주 반란군과의 전투 따위는 실로 작디작은 미풍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호주 공성전이 한참 펼쳐지던 1353년 정월, 제국을 뒤흔드는 이름 석자의 주인은 바로 따로 있었다.
장사성(張士誠). 자는 사구(九四). 태주(泰州) 백구장(白駒場) 출신 사람. 바로 이 인물이야말로, 작금 천하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있는 이름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태주 백구장은 지금의 장쑤성 다펑 현이다. 100km가 넘는 해안선을 두고 있는 다펑 현은 옌청 시의 아홉 시할구 중에 하나다. 옌청은 한자로 염성(塩城)이니, 말하자면 소금 나라라는 뜻이 된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예로부터 중국 전체에서 가장 많은 소금 생산량을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장사성은 그 ‘소금의 나라’ 에서 소금을 팔아먹어서 먹고사는 소금장수였다. 판다고 해도 직접 생산하는 위치라기보단, 물건을 중간에 사서 팔아 이윤을 챙기는 중간 유통업자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는 가지고 있는 배를 타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며 여기저기에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장사성의 아래로는 장사의(張士義), 장사덕(張士德), 장사신(張士信)이라는 3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이들 사형제는 모두 똑같이 형처럼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소금은 큰 이윤이 나는 물건이다. 이윤이 나는 물건이라면 이권을 놓고 파리가 꼬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물건을 파는 일도 당시 같은 세상에서는 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자연히 장 씨 형제의 일이란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사사로운 수작으로 간악한 이윤을 모았다(緣私作奸利)라는 것이 이에 대한 명사에서의 평이다.
예나 지금이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성격의 이권이란 많은 위험만큼 많은 돈이 얽힌다. 위험하긴 하지만 돈은 단번에 많이 벌 수 있고, 쉽게 돈을 버니 이를 쉽게 써버리고 만다. 장사성 역시 재산을 가볍게 여기고 흥청망청 돈을 쓰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지금 가진 것을 탕진해도 한번 건수만 해결하면 또 벌 수 있지 않은가.
다만 똑같이 돈을 쓰더라도 장사성의 씀씀이에는 현명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번 돈을 혼자 다 해 먹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베풀어 줬다. 흡사 『수호전』을 보는 듯한 거친 호걸들의 세계에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주위에 화통하게 뿌려주던 장사성은 상당한 인망을 얻었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동지를 많이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인맥이야말로 장사를 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런데 장사를 위한 수단이었던 이런 인맥은, 이후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용되었다.
많은 돈과 따르는 추종자를 거느리며 밝은 세상에서는 지역의 큰 손, 어둠의 세계에서는 흑사회의 보스와도 같은 위치였던 장사성이었지만, 그런 지역의 두목에게 있어서도 까다로운 상대가 없지는 않았다. 결국 소금 장수는 소금 장수. 족벌(族閥)과 문벌이 강조되던 시대에 콧대 높은 지방의 토호들이나 지역의 유생들에게 있어 장사성이란 그저 같잖은 무뢰배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지역의 소금 업계를 장사성이 꽉 쥐고 있으니 이런 유지들에게 공급되는 소금도 물론 장사성이 공급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장 씨 형제를 비롯한 그 부하들을 심하게 모욕하고 무시했으며, 심지어 소금을 사놓고도 소금값을 외상으로 달아두고 제대로 갚지도 않았다. 물론 장사성 역시 원활한 장사를 위해 그들에게 굽신거리고 뒷돈도 적잖이 찔러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장사성이란 사람의 가치란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개돼지에 지나지 않았다. 장사성도 필시 얼굴에 핏줄이 설 정도로 화는 났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일단 참고 사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한가지 치명적인 사실이 있었다. 권위는 힘을 만들지만, 가끔은 권위보다도 주먹이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날은 평소처럼 장사성과 그 부하들이 부잣집을 찾아가 밀린 외상을 받으려다 모욕만 받고 쫓겨나는 날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으리으리한 대문을 떠나며 “에이, 더러운 놈들.” 하고 침이나 뱉고 떠났겠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수준에서 멈출 조롱과 조소가 사람이 참을 수 있는 한을 넘어버렸던 것이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는 구의(丘義)라는 사람이었다. 지역의 토호였던 구의는 도무지 해도 해도 너무한 수준으로 그들을 깔보며 무시했다. 치솟아 오르는 화를 참으며 일단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애당초 이런 흑사회는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갚아줘야지, 무시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세계다. 스스로의 분노도 있지만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위신 문제도 걸려 있었다. 옆의 부하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참으실 거요?” 라고 운을 떼기라도 한다면 두목된 체면으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있는 한도를 지나고, 자신들을 모욕한 일당에 대한 성토로 한껏 분위기가 고조된 그들은 이판사판으로 들고일어나버렸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장사성은 3명의 동생과 힘이 좋은 장사로 명성을 떨친 이백승(李伯昇), 그 외에 자신을 따르는 동지들 18명을 이끌고 다시 구의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손에는 무기를 들고 눈에 살심이 가득한 그들은 대문을 때려부수고 집안의 모든 사람을 도륙한 뒤 문제의 원흉인 구의 역시 잡아 죽였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피맛을 봐서 한껏 고양되기도 했고, 어차피 호랑이 등에 탄 형세라 더 물러날 수도 없던 그들은 구의뿐만 아니라 평소에 고까웠던 부잣집에 쳐들어가 그들 모두를 베어 죽이고 대궐처럼 으리으리했던 집들은 모조리 불에 태워버렸다. 비록 그 과정에서 지주들이 이끄는 민병들의 반격으로 4형제의 한 사람인 장사의가 죽기는 했지만, 결국 목포로 삼았던 지역 부자들을 모두 죽이는 데 성공했다. 단 하 루만에 일어난 관계의 역전이었다.
평소에 ‘죽여버리고 싶다’ 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다 죽이고, ‘부숴버리고 싶다’ 고 생각했던 것도 모조리 부수고 불태워 통쾌하게 울분을 푼 그들이었지만, 이제 장사성 일당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관병에게 잡혀서 모두 목이 날아가고 뼈와 살이 분리되거나, 멀리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 산적이나 수적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말 반역질을 하거나. 그리고 그들은 반역을 하기로 결심했다. ‘홧김에’ 반란군이 된 셈이다.
장사성 일당은 곧바로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태주에도 이미 시국의 혼란함은 익히 알려진 바였다. 죽어라 농사나 짓느니 뒤집어지는 세상에 뛰어들어 한탕 챙겨보자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지역의 유명한 두목 장사성의 이름에 끌려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한몫거든 것이 소금 노동자들의 네트워크였다. 일은 고되고 힘든데, 버는 것은 적은 1차 노동자들이었던 그들이 모두 장사성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런데 앞서 말했지만, 태주는 그 거대한 중국에서도 가장 많은 소금 생산량을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그런 태주의 모든 소금 업계 관련 노동자들이 전부 장사성을 돕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 소금 노동자들 본인과 그들의 연줄로 함께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한 수준이 아닐 수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그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란 근처 고우(高郵)의 수령 이제(李齊)는 재빨리 달려와 장사성을 만났다. 장사성이 하는 일을 생각하면 필시 장사성과 이제는 본래 면식이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다리를 건너서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장사성을 면담한 이제는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느냐며, 심정은 이해하지만 더 커지기 전에 일을 무마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타일렀다. 말을 들으니 당장은 혹했던 모양인지 일단은 그러마 하고 동의했던 장사성이지만, 막상 이제가 떠나자 생각이 바뀌었는지 다시 반란을 일으켜 근처인 흥화(興化)를 장악하고 덕승호(德勝湖)에 진을 쳤다. 이 시점에서 장사성이 이끄는 사람들의 숫자는 수만 단위에 이르렀다.
그런 장사성에게 원나라 조정에서는 만호(萬戶) 벼슬을 주겠다며 회유의 뜻을 보였지만 그는 이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일전의 이제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며 나섰지만, 장사성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며 그를 만난 뒤 죽여버리며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제를 참살한 장사성은 수령이 비어있는 고우를 습격해 장악 한 뒤, 자신을 성왕(誠王)이라 칭하고 대주(大周)라는 이름으로 국호를 정했으며 기왕지사 화끈하게 천우(天祐)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숫제 나라를 건설해버렸다. 그야말로 홧김에 반란을 일으켜 나라까지 만들어버린 질풍노도의 기세였다. (1)
장사성의 반란은 각지에서 벌어진 여타 홍건 기의와는 성격이 달랐다. 애당초 홍건군 자체가 통일된 조직이 아니긴 하지만, 그는 명목상으로도 홍군을 칭했던 다른 세력들과는 달리 스스로 홍군이라 칭하지 않았다. 반란 자체도 비밀결사로 오랫동안 일을 준비했던 유복통이나 팽형옥에 비해 갑작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정작 원나라 조정이 당시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반란은, 다름 아닌 이 장사성의 반란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각지에서 깃발 하나만 들면 단번에 10만 반란군이 결성되던 시절이니, 장사성에게 수만의 부하가 있다고 해도 그게 조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장사성이 똬리를 뜬 웅거지의 위치 때문이었다.
저 북에서 내려와 천천히 남하하여 전중국을 장악했던 원나라였지만, 정작 제국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의 기반은 북이 아니라 남에 있었다. 중국 강남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부유함, 특히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라는 두 도시가 가지고 있는 경이적인 수준의 번영이야말로 제국을 무너지지 않고 버티게 할 수 있는 큰 힘이었다.
“하늘에는 천당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下有蘇杭)” (2)
정확히 언제부터 이런 말이 나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송 시절에 쓰인 책에도 이미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소주와 항주의 부유함은 유명했다. '소주와 호주(태호 남쪽 지역)가 풍작이라면, 천하는 부족함이 없다.' 는 말도 있다. 이 지역의 농사만 잘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천하가 굶지 않고 기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소주, 천주(泉州), 명주(明州), 광주(廣州), 송강(松江), 가흥(嘉興), 호주(곽자흥이 장악한 호주와는 다른 곳), 항주 등지야말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화한 지역인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이었다.
당시 중국 강남 지역의 부유함에 대해선 중국인들 본인보다도, 먼 길을 건너온 유럽인들의 기록을 살펴보는 게 더 실감 날 수 있다. 그 유명한 모험가인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소주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소주는 놀라울 정도로 크고 훌륭한 도시다. 주민은 우상을 숭배하는 교도들이며, 위대한 칸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두 지폐를 사용한다. 그들의 생업은 오로지 상업과 수공업이다. 생사(生絲)의 생산량은 막대하며, 옷감용 비단은 대량으로 유통된다. 부유한 대상인의 수도 적지 않다. 이 도시는 매우 규모가 커서 주위 둘레는 60마일에 달하며, 성내 인구도 감히 그 수를 헤하리기 어려울 정도다.“
“만일 소주의 인구가 모두 무인이라면, 만자(蠻子 : 남중국인)는 그만큼의 병사만으로도 능히 전 세계를 모두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대신 상술에 뛰어난 상인들이자 온갖 재주에 뛰어난 장인들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자연철학 이론에 통달한 대가가 있으며, 우주의 신비를 터득한 명의도 있고, 주술을 터득하여 점복술(占卜術)에 도통한 이도 적지 않다.” (3)
소주의 둘레가 60마일이라는 것은 과장 섞인 말이긴 하지만, 관찰자 입장에서 느꼈던 생생함은 확실히 전해진다. 소주 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번에는 마르코 폴로가 아니라 다른 인물의 기록이다.
"광주(광저우)는 베네치아의 세 배 크기이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해상활동이 활발하다. 온 이탈리아의 선박을 모두 모아도 이 도시 하나가 가진 만큼의 선박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먹거리가 이곳에 있다.” (4)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선교사였던 오도릭(Odoric)은 6년간 중국에 체류하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유기(東遊記)를 저술했다. 특히 1290년대 무렵에 중국을 떠난 마르코 폴로와는 달리, 오도릭은 1328년까지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순제가 즉위한 게 1333년이고 동계, 서계 홍건군의 봉기가 1351년에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원나라가 본격적으로 멸망하기 불과 수십년전의 광경을 보고 기록에 남긴 셈이 된다.
오도릭
동유기에 묘사된 이 지역의 풍경은 곧 멸망할 나라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휘황찬란하다. 천주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이 곳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곳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삶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 이 곳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실로 많은 것을 이야기 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더 쓰지 않도록 한다."
명주(닝보)에 대해서는 이렇다.
"이 도시는 아마 세계의 어떤 다른 도시들보다도 훌륭한 배가 많은 것 같다. 모든 선박은 백색 도료로 칠해 눈처럼 하얗게 빛나며, 각 배들의 안에는 홀과 선술집 그리고 기타 갖가지 편의시설이 모두 마련되어 있다. 어디를 보더라도 미관이 살아있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만약 당신이 이런 배들에 대해 소문으로 듣거나 혹은 심지어 진짜 눈으로 보더라도 어떤 것들은 정말로 믿기 어려울 것이다."
남경에 대해서는 이렇다.
“성벽의 둘레가 40마일이며, 300개의 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들은 우리 세계에 알려진 다른 모든 돌다리들보다 더욱 훌륭하다. 도시에는 사람이 아주 많으니, 선박들은 보기만 해도 경탄을 자아낸다.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도시 중에 하나다.”
가장 압권은 항주에 대한 기록이다. 한번 보도록 하자.
"나는 '천당의 도시' 라고 하는 칸사이(항주)에 도착했다. 칸사이는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다. 정말로 큰 도시여서, 나는 감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 도시는 백 마일은 족히 되며, 그 모든 구역에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라고는 한 뼘도 없다. 그리고 도시에는 몇 개의 커다란 교외가 딸려 있는데, 그 교외의 인구는 도시 자체의 인구보다 많다. 그리고 그러한 시가 하나 하나가 모두 베네치아나 파도바보다 훨씬 거대하다! 만약 당신이 어느 한 교외에서 6,7일을 쉴 새 없이 여행한다쳐도 실제로는 아주 짦은 구간 하나를 밟아본 데 불과할 것이다."
"도시에는 1만 2천여 개의 다리가 있고, 다리마다 대칸을 위해 도시를 지키는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다."
"정말로 기이한 것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 곳에서 살 수 있도록 안배되었으며, 또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빵과 돼지고기, 쌀과 와인이 장만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누군가 만약 이 도시의 웅대함과 기적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루고자 한다면 종이 한 첩도 모자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야말로 이 세상 전체를 아울러서 가장 크고 가장 고귀하며, 또한 가장 좋은 통상지이기 때문이다." (5)
어느 정도가 진실이고 어느 정도가 과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하는 심정만큼은 절절하게 느껴진다.
다소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 관찰담을 나열했는데, 요지는 이 지역의 중요성이 단순히 도시 한 두개, 혹은 변방의 땅덩이 일부 정도의 가치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모작을 할 수 있는 기후, 발달한 농업 기술, 성행한 직물업까지. 또한 제지업(製紙業) 역시 극도로 발달하여, 다양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색상의 '분전지' 역시 명성을 떨쳤다. 질 좋은 종이가 생산되었기에 인쇄업도 성행했으며, 수많은 문인과 화인들이 바람처럼 몰려들어 이 지역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원나라의 머리는 북방이었지만, 그 몸통은 바로 이 지역이었다. 그리고 대운하가 몸통과 머리를 연결하는 뼈대 역할을 맡았다. 대운하를 통해 올라온 막대한 재물과 최신 유행이야말로 제국을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그런데 그 길목에 장사성이 나타난 것이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바로 남하해서 이 지역을 공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반군이 있는 흥화, 덕승호 방면은 물자가 올라오는 수로 지역이었다. 그곳을 장사성이 장악하고 있는 한 대도의 정권은 목구멍이 틀어잡힌 셈이나 진배없었다.
때문에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소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원나라 조정도, 장사성의 존재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강회(江淮)와의 연결이 끊겨버린다면 대도의 정부는 정말 북방의 일개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 일 만큼은 필사적으로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용서할 수 없는 반역자인 장사성을 굳이 회유하려고 했던 점도 일단 애가 타서 수습부터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사성이 이를 거부했으니, 결국 남은 선택지는 무력 투입 밖에 없었다.
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고, 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때문에, 이를 맡는 사람 역시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탈탈이 나섰다. 이 전투의 향방에 무너져가는 제국의 남은 명운 수십 년이 걸려 있었다.
(1) 명사(明史) 권 123 장사성 열전
(2) 범성대(范成大)의 오군지(吳郡志)
(3)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4) 오도릭, 동유기(東遊記)
(5) 위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