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7/05/18 01:45:14
Name 깐딩
Subject [일반] 동물의 고백(19)
매일 오던 카톡이 안 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카톡이 꼭 왔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카톡이 없다.

'이 여자랑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체념했다.

그리고 토요일이 되었다.

-야 롤 하자.

친구들 단톡방에서 연락이 왔다.

-깐형 빨리 오세요 형만 오면 5인 큐.

-깐통수새끼야 또 늦지 말고 빨리 와라.

-알았다고 간다고. 이제 바쁠 일도 없다고.

그렇게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정신없이 게임을 하고 있을 무렵 카톡이 날라왔다.

원래 게임할 때는 전화가 와도 신경 쓰지 않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카톡을 확인하게 되었다.

-뭐해요?

어? 뭐야? 그 여자다! 끝난 게 아니었나?!

나는 급한 마음에 얼른 대답을 했다.

-집에서 그냥 쉬고 있어요.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어디서요?

-석촌호수 아세요?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가 약간 넘었다.

내가 지금 씻지도 않았으니까 대충 씻고 지하철까지 가는 시간이 대략 25분.

지하철에서 잠실까지 가는 시간이 40분 정도. 음, 그럼 여유롭게

-그럼 거기서 6시쯤 보는 걸로 할까요?

라고 물었더니

-제가 9시까지 밖에 못 놀아서요. 빨리 오실 수 있나요?

라고 대답한다.

이때부터 급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 그럼 무조건 5시 되기 전에 도착할게요.

-네, 기다릴게요!

지금 분식집 같은 망겜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야 야 야 님들 님들! 저 그 여자한테서 연락옴요>

<머? 니 썸 끝났다고 했잖아>

<끝난 줄 알았지 일주일 넘게 연락이 없어서>

친구들이 게임하다 가는 게 어디 있냐며 이래서 커플은 안된다고 한다.

<새끼야 이거 끝내고 가라>

<아, 제발 내 좀 살리도>

한 친구가 말했다.

<보내주면 썸녀를 여자친구로 만들어서 올 수 있나?>

<노력해봄>

그렇게 대답하자 친구들이 채팅으로 합의를 본다.

<야 보내주자 여자는 인정하자 솔로 새끼들아>

<깐통수새끼 오늘은 어쩐지 안 늦고 왔더니만 이렇게 또 통수를 치네 아오>

<부족한 딜은 용기로 채운다 너는 빨리 현실 온라인으로 접속해라>

친구들에게 승낙을 받았다.

<고맙다 리얼월드에서 보자!>




빠른 속도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손질한다.

로션.

스킨.

선크림.

향수.

섬유 향수.

청셔츠에 검은 팬츠를 입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집 앞에 나왔더니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다시 집안으로 뛰쳐들어가 허둥지둥 우산을 챙겼다.

택시가 도착하고 잠실 석촌호수로 가달라고 말했다.

"지금 이 시간은 차가 엄청 막힐 텐데. 지하철까지만 가고 거기서 내리는 게 빠를 텐데?"

택시기사님이 교통상황을 조언해주신다.

나도 그게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면 무조건 늦는다.

"급하게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5시까지는 무조건 가야 돼요."

"여자친구?"

"여자친구가 될 사람이죠."

"썸 타는 중이었구먼!"

기사님이 씩 웃으며 날 쳐다봤다.

"젊을 때 연애 많이 해."

라고 말씀하시며 밟기 시작하신다.

끼어들기, 신호위반, 과속, 꼬리물기 등등을 시전하시며

내가 괜히 기사님께 몹쓸 짓을 시킨 게 아닌가 자책을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기사님이 말씀하셨다.

"택시 타고 급하게 가려는 거 보면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인가 봐?"

"네. 진짜 제 인생에 두 번은 오지 못할 기회인 것 같아요."

"부럽다. 부러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나도 젊었을 때는 자네랑 똑같았거든."

카카오 택시 예상시간으로 35분 걸리는 거리를 20분 만에 도착했다.

덕분에 4시 50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여자는 놓치는 거 아니라고 했어!"

끝까지 응원해주시고는 쿨하게 떠나셨다.

다행히 비도 그쳤다.

소나기였나 보다.




-저 석촌호수에 도착했어요.

그렇게 카톡을 보내고 벤치에 앉아 여자를 기다렸다.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을까?

왜 석촌호수일까?

왜 빨리 보자고 했을까?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날 불러냈을까?

2~3분 밖에 안되는 시간에 온갖 잡생각들을 했다.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오시느라 힘드셨죠?"

어느새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아뇨! 힘들긴요. 근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예요?"

"XX 씨랑 같이 벚꽃구경하면서 산책하고 싶어서요. 같이 걸어요."

세상에! 썸이 끝난 게 아니었어! 현재 진행 중이었어!

마침 석촌호수는 자잘한 이벤트들과 좌판 상점들이 열려있었고

우리는 석촌호수를 두어 바퀴 돌며 같이 즐겁게 산책을 했다.

"XX 씨 거기 서봐요. 오리 배경해서 사진 찍어드릴게요."

찍힌 사진을 보니 내 표정이 좋아 죽으려고 하는 표정이다.

"저도 한 장 찍어주세요."

그렇게 여자 사진도 찍어주고 서로의 사진을 보며 웃었다.




뻥튀기를 하나씩 입에 물고 느긋하게 걸어가는데 롯데월드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자이로 드롭을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무심코 내뱉었다

"와, 진짜 재밌겠다."

"맞아, XX씨 놀이기구 타시는 거 좋아하신다고 하셨죠?"

"네. 엄청 좋아해요. 정말 신나게 타네 와..."

"XX씨는 휴가 언제 쓰실 수 있으세요?"

뜬금없이 휴가는 갑자기 왜 묻는 거지?

"저는 제가 원하면 언제든지 쓸 수 있어요. 회사가 그런 거는 잘 터치 안 하거든요."

"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휴가 쓰고 저랑 롯데월드 가실래요?"

정말 의외의 말에 너무 놀라서 네에에에?? 라고 대답했다.

"싫으세요?"

"아뇨! 가요! 갑시다!"

내가 드디어 8년만에 놀이동산을, 그것도 여자랑 간다! 우와아아아앙!

그렇게 행복에 겨워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가지고 있던 우산을 펼쳤다.

"저 우산 없어요 같이 써요."

라고 말하며 여자가 내 우산속으로 쑥 들어왔다.

마침 저녁시간이 되어 근처 음식점으로 같이 우산을 쓰고 걸어갔는데

여자가 자꾸만 멀어지려고 해서 반대편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무 멀어지면 비맞아요."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며 아... 아... 하며 탄성을 내뱉는다.

귀엽다.

항상 들고 다니기 귀찮았던 우산이 이때만큼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다음에 또 봐요! 휴가 내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렇게 같이 저녁을 먹고 커피도 한잔하고 9시까지 밖에 못 논다는 여자는

9시 40분이나 돼서야 택시를 타고 집으로 떠났다.

나도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친구들이 카톡을 엄청 보냈다.

-야 나 이때까지 여자랑 데이트하고 왔음.

가볍게 생존신고를 했다.

-살아있었네! 어디 잡혀간 줄 알았다.

-그래서 썸녀가 여자친구 되셨습니까?

-아니 이때까지 연락은 왜 안 했다는데?

친구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다음 주 금요일에 서로 휴가 쓰고 롯데월드 가자던데.

묻는 질문에 대답은 안 하고 내 할 말만 했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난리가 났다.

-와 X 바! 해냈다 해냈어!

-지렸다! 실화냐 이거? X된다!

-와 점마 맨땅에 여친 만들었네. 오졌다 진짜.

-아, 근데 아직 여자친구는 아닌데?

라고 하니까 친구들이 더 난리가 났다.

-병신 새끼야! 아직도 고백 안 했나?

-휴가 쓰고 롯데월드 가자고 할 정도면 아예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가?

-딱 보니까 여자가 하도 답답해서 먼저 돗자리 깔아줬구만, 저 새끼도 진짜 개답답하네 어휴.

-형, 타이밍 봐서 롯데월드 가기 전에 썸 끝내고 가세요!

그래 그래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두 달 넘게 이어온 이 길고 길었던 썸을

언제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만 생각하면서 돌아왔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7/05/18 01:45
수정 아이콘
이번편은 그동안 외전때문에 짧았던 만큼 더 길게 썼습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덧글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Outstanding
17/05/18 01:49
수정 아이콘
어떻게 망할까 기대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절대 부러워서 그러는거 아님 (아무튼 아님 부들부들..)
17/05/18 02:22
수정 아이콘
어떻게 끝내시는지 다음편에 나오겠네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크크
17/05/18 02:42
수정 아이콘
아... 이건 아닌데...아.... 너무 부럽다...아...
미리축하드립니다. 예쁜사랑하세요
17/05/18 02:49
수정 아이콘
하... 오늘은 추천 안 누를 겁니다.(단호)
이시하라사토미
17/05/18 06:37
수정 아이콘
마..망해야돼.. 그래야 동물의 고백이 계속되는거야.....

이건 수필이니까...

안망하면 소설이자나...
MiguelCabrera
17/05/18 07:42
수정 아이콘
(이미 배아파 죽은자의 댓글)
재즈드러머
17/05/18 08:15
수정 아이콘
좋네요. 저도 이런 설레임 느껴보고 싶어요.(삼십대 중반 아재)
전광렬
17/05/18 08:39
수정 아이콘
욱 배가 아픕니다.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30대 남성이 비슷한 수준의 연애경험을 가진 괜찮은 여자 만나는건 하늘에 별따기 수준인데....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게 추후에 보면 더 재미있는 법이죠.
카디르나
17/05/18 08:55
수정 아이콘
꼭 성공 하시길!! 깐딩님의 행복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덩달아 행복해지고, 깐딩님 슬퍼지려 하면 저도 같이 슬퍼지네요.. 절 위해서라도 꼭 행복한 결말(이 아닌 현재진행형!)이 되길!
좋은데이
17/05/18 09:10
수정 아이콘
달달하네요.
전 그동안 너무 경험이 없어서, 재작년에 너무 좋은사람을 놓친게 참 후회되는데..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면 좋겠어요.
17/05/18 09:21
수정 아이콘
와 계속 입가에 미소지으면서 봤어요 다음편이 마지막이겠죠? 미리 축하드려요!! 크크크크
Serapium
17/05/18 09:41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보고있습니다 크크크

근데 뭐때문인지 왜이렇게 불안하죠?? 뭔가 불길한 직감이... 친구분들이 깐통수라고 언급하는게 뭔가 복선같기도 하고요..

그냥 해피엔딩으로 끝내주셨으면 좋겠...
Thanatos.OIOF7I
17/05/18 09:52
수정 아이콘
아... 후 새드...
바랬던 결말과 멀어지고 있군요ㅠ
그래도 '연애의 온도'같은 놀이동산 씬을 기대해봅니다.
FlyingBird
17/05/18 10:14
수정 아이콘
흐흐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해피엔딩 기대할께요!
신지민커여워
17/05/18 10:43
수정 아이콘
아이고 배야.. 동갑이신데 되게 부럽네여 ㅠㅠ
나른한오후
17/05/18 12:25
수정 아이콘
젠장 이럴줄 알았어 ㅜ
우리에게 이런일따위 생길리가 없...
17/05/18 14:28
수정 아이콘
배는 아픈데 엔딩은 해피했으면...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3214 [일반] 전두환 측 "택시 운전사" 날조...법적대응 검토... [85] Neanderthal10708 17/08/08 10708 5
73203 [일반] (스포) 택시운전사 감상! 역시 영화는 아무 것도 모른 체로 봐야 제맛! [23] 마음속의빛8423 17/08/07 8423 5
73195 [일반] 개인적인 택시운전사 감상평(스포주의) [69] 말랑10861 17/08/06 10861 10
73194 [일반] 지난 100일을 뒤돌아보며, [63] 로각좁7842 17/08/06 7842 67
73192 [일반] [군함도] 천만은 쉽지 않아 보이네요... [79] Neanderthal12719 17/08/06 12719 3
73187 [일반] [영화공간] 사이다 : 신파의 교묘한 진화 [13] Eternity8333 17/08/06 8333 18
73147 [일반] 택시운전사 감상평 - 충분하다. [35] 유유히9900 17/08/03 9900 6
73130 [일반] [뉴스 모음]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임종석 비서실장 외 [30] The xian11382 17/08/02 11382 51
72843 [일반] 아빠가 됩니다. (부제 : 어느 난임 부부 이야기) [53] 토끼호랑이7506 17/07/14 7506 62
72815 [일반] 성매매 그런거 나쁜거 아니야, 할수도 있는거야 [289] 리니시아17622 17/07/13 17622 10
72602 [일반] 두 번째 후회 [10] 저글링앞다리4338 17/06/29 4338 16
72484 [일반] [잡담]중국에 대한 잡설 [65] 겨울삼각형8069 17/06/20 8069 7
72357 [일반] 한번도 못해본 남자. [71] 냉면과열무13065 17/06/12 13065 43
71960 [일반] 제주도 4박5일 뚜벅이 여행기 [3] 그림속동화5792 17/05/20 5792 3
71894 [일반] 동물의 고백(19) [18] 깐딩4914 17/05/18 4914 11
71762 [일반] 가정의 달 특선 단편소설 : 운수 좋은 날 [10] 글곰5080 17/05/12 5080 3
71166 [일반] 3.1 운동 33인 민족지도자 비판글 [28] 서현우11346 17/03/19 11346 20
70955 [일반] 어느 아재의 강변테크노마트 폰 구입기 & 기타 Tip (& 뒤늦은 반성문) [66] 제랄드14871 17/03/06 14871 8
70860 [일반] 다시 만난 그녀 (상) [34] 글곰8410 17/02/27 8410 20
70824 [일반] H2 - 전반적 의미와 해석 (스포, 스압) -2 [27] makka12186 17/02/25 12186 17
70625 [일반] 몰랐던 "오늘도 무사히" 그림의 정체... [10] Neanderthal19019 17/02/16 19019 4
70614 [일반] 어느 부부이야기16 - 4년 만의 어떤 일상 [2] 그러려니3675 17/02/16 3675 4
70467 [일반] 야근에 대하여 [146] The xian12040 17/02/09 12040 1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