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4년 여름 정오, 어제 몇년만에 만난 친구들과 반가움에 줄창 술을 퍼먹고 연례행사처럼 민증을 잃어버린 나는 분실 신고를 하기 위해 직장 근처 주민 센터에 방문했다. 하도 자주 분실해서 이제 익숙해져버린 5천원과 여권사진 한장이라는 준비물을 손에 쥐고 터덜터덜 주민센터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들어가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니 여기 있는데 뭔소리하는거야! 이걸로 해줘! 여기 사진도 있고 다 있는데!!"
대충 슥 스캔해보니 할머니 한 분이 뭔가 민원적 불만사항이 있으신지 다투고 있는거 같았고, 몇 없는 민원인들과 직원들은 저게 뭐야~ 하는 시선으로 슬쩍 구경하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공무원이 고생하는건지 할머니가 억울한 일을 당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건 내 일이 아니고 나는 어서 일을 처리하고 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기 때문에 민증 분실 관련 일을 보는 창구를 찾기 시작했다. 조금 둘러보니 주민등록증-분실이라는 팻말이 세워진 창구가 보인다. 사람들이 민증을 많이도 잃어버리나보다. 칠칠맞게 시리...
그런데 이상하게 내 창구앞에 사람이 없다. 그제서야 남 일인줄 알았던 소요사태가 내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아, 저기서 할머니랑 씨름하는 사람이 내 민증 재발급을 도와줄 사람과 동일인물이구나. 일단 회사 점심시간이 1시간 30분이라는 점에 감사하며 잠깐 앉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 육X럴 놈들아, 여기 이게 있는데 왜 안된다는거여, 나 이런일 한두번 해본줄 알아? 나 어디어디에서 뭘 어떻게 어쩌고 저쩌고..."
"선생님, 그거 분실신고해서 이제 못 쓰는 민증이라니까요. 2014년 X월 X일에 재발급 받으셨잖아요. 그걸 가져오셔야 되요. 저희가 그걸로는 선생님 신분 확인이 안되서 못 해드려요"
"그래서 여기 그거 사진으로 찍어놓은거 있잖아. 이거 말하는거 아녀, 이거보라고!"
"사진으로 확인 못해드린다니까요. 가서 가져오셔야 되요"
"그거 잃어버렸다고 그거 몇번 말해! 지금 당장 이거 일 처리만 해달라니까 급하다니까!"
무슨 업무를 보러 오신지는 내가 공무원이 아니라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신분 증명에 필요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실랑이가 생겼나보다. 공관에서는 현재 효력이 있는 신분증이 없으니 처리를 못 해주겠다는 입장이고, 할머니는 기존에 분실 신분증에도 자기 사진이 붙어 있고,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폰에 찍혀있는 신분증 사진에도 자기 사진이 붙어있는데 왜 안되냐고 역성을 내시는거 같았다.
10분쯤 기다린결과 결국 둘은 최종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대치했다. 공관측에서는 5천원을 줄테니 요 앞에 지하철역에 가서 여권 사진을 찍어오면 옆에서 분실 신고 처리해서 임시 신분증으로 처리해준다는것이 최종적인 입장이었고, 할머니는 그런거 바빠서 시간없어서 싫고 그냥 무조건 지금 당장 해주면 나중에 와서 신분증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 그냥 그대로 두면 사태가 끝나지 않을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할머니, 이 사람들 이렇게 얘기하면 백날 천날 얘기해도 안 해줘요. 그냥 나가서 사진 찍고 오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 지금 내가 바빠 죽겠는데 어 나가서 사진찍고 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안받아주고 지랄이야! 내가 여기서 업무를 몇번을 봤는데"
"어차피 이렇게 계속 우기시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세요 할머니, 역 요 앞이잖아요. 그게 훨씬 빨라요 나오세요 얼른"
그렇게 계속 성질내는 할머니를 모시고 주민센터 바로 옆 신XX거리 역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도 할머니는 끈임없이 욕을 하셨다. 내가 나라에 낸 돈이 얼만데... 대충 말하는 내용이나 입고 오신 옷을 보니 좀 사시는분인가보다. 민증 사진이 폰에 있는걸 보면 아마도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하시는분 같았는데, 욕할때 말투는 시골에서 밭일만 하신 우리 할머니보다도 더 걸걸하시다.
그렇게 맞장구치며 같이 죄없는 공무원들을 욕하며 할머니를 달래고 달래서 사진을 찍고 뽑아서 다시 주민센터로 돌아가니, 부서장의 긴급 소집이 있었는지 밥을 먹으러 갔던 직원들이 다 돌아와서 자리에 각을 잡고 앉아 있다. 할머니는 이거랑 이게 뭐가 다르다고 마지막까지 꿍시렁 꿍시렁 대면서 찍어온 사진 분실 민증과 함께 창구에 툭 던지듯 내려놓으며 일을 보셨다.
잠깐 직원들이 엄청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왔다갔다 하더니 마침내 일처리가 끝났다.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원하던것을 받아든 할머니는 언제 성질냈냐는듯 입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렇게 신나는 웃음을 지으며, 나와 직원들에겐 단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채 전화로 아는 사람에게 야~ 일 다봤다~ 라고 호쾌하게 외치며 주민센터를 떠나셨다. 너무나도 인간의 본능에 솔직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황당함 반 유쾌함 반의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찾아온 내 차례. 드디어 민증 분실 신고를 할 수 있겠구나. 드디어! 점심시간이 50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드디어!
'젊으신분이 모르는 사람 일로 고생하셨네요. 이거 작성해주시고 5천원이랑 사진 가져오셨죠? 그거 내주시고...'
간단히 분실 장소 사유등과 신상명세를 기입하고 양식을 제출한다. 직원은 대충 몇번 검토하더니 사진을 스캔하고 임시 대충 테이프로 슥슥 붙여서 임시 신분증을 내준다. 그런데 임시 신분증 옆에 알로에 음료수가 하나 같이 나온다.
"고생하셨으니까 이거 하나 드세요 날도 더운데, 그리고 민증 수령은 어떻게 하실건가요? 우편 요금 내시면 우편으로 보내드리고 아니면 집 근처 주민센터로 보내드릴수도 있고, 아니면 이쪽으로 수령하러 오셔도 되구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리고 보자 우편이랑 집 근처 방문이랑.. 네? 여기로 또 오라구요? 설마요. 안와요 안와. 여긴 안옵니다 이제."
쓰잘데기 없는 농을 던졌지만 사실 회사에서 15분 거리인 여기서 방문 수령하는게 제일 편했던 관계로 이쪽에서 보관해달라고 말하고 주민센터를 나선다. 현재 시각은 벌써 1시 10분, 오늘 점심은 이 알로에 주스로 때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로 돌아간다. 그래, 세상에 편하게 돈버는 방법은 없구나. 지금의 허기는 이 교훈의 대가로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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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간에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부분은 그 당시 딱 주민센터에 들어섰을때의 제 의견을 말한거고, 사실 할머니가 말도 안되는걸 우기신게 맞죠. 뭐 원래 빡빡하게 신분을 요구하지 않는 주류 민증검사라던가, 공관 업무중에서도 뭐 교육을 받는다거나 하는 간단한 업무라면 혹시 몰라도 저분의 업무는 신분증 사본을 복사해서 보관할 필요가 있는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