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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2/11 03:12:24
Name 靑龍
Link #1 http://smh2829.blog.me/220932531890
Subject [일반] [삼국지] 공적에 따른 승진ㆍ봉작ㆍ세습에 관한 기록
손견의 군의 사마(司馬)로써 정용(精勇)한 자들을 모집하여 천여 명을 얻어서, 주군과 함께 합쳐 이들을 토벌해 격파하였다. 이해는 희평(熹平) 원년(172)이다.
자사 장민(臧旻)이 그의 공적을 열거해 올리니, (황제가) 조서로써 손견을 염독(鹽瀆)현의 현승(丞)으로 제수하였고, 여러 해 만에 우이(盱眙)승으로 옮겨갔다가 또 하비승으로 옮겨갔다.
- 오지 손파로전 -

건안(建安) 24년(219)에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그의 공적을 거슬러 기록하여 아들 손윤(胤)을 단양후(丹楊侯)로 봉했다.
- 오지 손교전 -

선제 시대에, 관직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 오랜 시간 있은 연후에 공적을 고찰하여 승진과 강등을 결정했습니다.
- 육개전 -

성도가 평정된 후, 왕련은 십방현의 현령으로 임명됐고, 광도현으로 전임되었는데, 임지마다 공적을 세웠다. 사염교위로 승진하여 소금과 철의 이익금을 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세금수입이 매우 많아져 국가의 재정 상태를 도왔다.
- 촉지 왕련전 -

제갈량이 죽은 후 좌장군으로 옮겼는데, 과거의 공적을 소급하여 현명정후로 봉하고 특진의 지위를 주었다.
- 촉지 상랑전 -

승상 제갈량은 마속 및 장군 장휴(張休), 이성(李盛)을 주벌(誅罰)하였고 장군 황습(黃襲)등의 병사를 박탈하였으나 왕평에게는 특별히 공적을 높이 드러내[崇顯] 주었으니[見], 참군(參軍)에 제배하여 오부(五部)를 통솔케 하였고 겸하여 왕평에게 소속된 군영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토구장군(討寇將軍)의 작위로 승진시키고 정후(亭侯)에 봉하였다.
- 촉지 왕평전 -

[진양추晉陽秋]에 이르기를 - 태시 2년 (266년-태시는 진무제 사마염 즉위연호), 고안향후 하후좌夏侯佐가 죽어 하후돈의 후사가 끊기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 “하후돈은 위魏의 으뜸공신으로 그 공적을 죽백竹帛에 남겼다. 옛날 정견庭堅을 제사지내 줄 사람이 없자 뭇사람들이 슬퍼했는데, 하물며 위魏로부터 선위를 받은 짐이 어찌 공신을 잊겠는가! 마땅히 하후돈의 가까운 친척을 택해 책봉하도록 하라.”
- 위지 하후돈전 -

태조가 장막과 여포를 복양(濮 陽-연주 동군 복양현)에서 토벌하자 여포가 패해 달아났다. 마침내 동아(東阿-연주 동군 동아현)를 점거하고 군을 돌려 제음(濟陰-연주 제음군), 산양(山陽-연주 산양군)과 중모中牟, 양무陽武, 경京, 밀密(사례주 하남군의 현들)등 10여 현을 공격해 모두 함락시켰다.
앞뒤의 공적으로 응양교위鷹揚校尉에 임명되고, 양무중랑장揚武中郎將으로 승진했다. 천자가 허현에 도읍을 정하고 조홍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다.
별도의 군으로 유표劉表를 정벌하여 유표의 별장을 무양舞陽, 음陰, 섭葉, 도양堵陽, 박망博望(모두 형주 남양군의 현들)에서 격파하는데 공적이 있어 여봉장군厲鋒將軍으로 승진하고 국명정후國明亭侯에 봉해졌다.
- 위지 조홍전 -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르자(220 년)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삼고 앞뒤의 공적을 기록해 동양정후東陽亭侯에 봉했다.
- 위지 조휴전 -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르자(220) 조진을 진서장군(鎭西將軍) 가절 도독옹량주제군사(都督雍涼州諸軍事-옹주, 양주의 군무를 총괄)로 임명했다. 앞뒤의 공적을 기록해 동향후(東鄕侯)로 올려 봉했다.
(중략)
명제가 조진의 공적을 추사(追思-추모)하여 조서를 내려 말했다
“대사마는 충절을 이행하고 2조(二祖-조조와 조비)를 좌명(佐命-제왕을 도와 정권을 세움)했다. 안으로 친척으로서 총애 받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밖으로 백옥지사(白屋之士-미천하고 가난한 선비들)에 교만하지 않았으므로, 능히 지영(持盈-가득 찬 것을 보존하여 지킨다…창업/수성을 대비해 볼 때 수성의 비유적 의미로 쓰인 듯)하여 수위(守位)할 수 있고,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하니 가히 덕 있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조진의 다섯 아들인 조희(曹羲), 조훈(曹訓), 조칙(曹則), 조언(曹彥), 조애(曹皚)를 모두 열후에 봉하노라.”
- 위지 조진전 -

이에 황제가 중서감 유방(劉放)을 시켜 손자(孫資)에 명해 조서를 쓰게 했다  
“옛날 오한(吳漢)이 광무제를 보좌해 사방을 정벌하여 평정한 공으로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어 그 명칭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태위(사마의)는 품행이 정직하고 공적이 해내(海內)를 덮었기에 선제(先帝)께서 본래 그 관위를 바꾸려 하셨으나 늦어져 시행되지 못했다. 지금 대장군이 태위를 대사마로 천거하니 이는 선제(先帝)의 원래 뜻에 부합하며 또한 덕을 고양하고 공훈을 높여 현량(賢良)을 밝히고 서열을 분별하고 장소(長少)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비록 단(旦-주공 단), 석(奭-소공 석)과 같은 이들이 여망(呂望-강태공 여망)의 아래에 위치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잘못된 것이겠는가! 짐은 매우 기쁘도다.
- 위지 조상전 -

칙명을 내려 1만 호의 현을 다스리게 하여 군수의 이름을 주고, 5천 호 이상을 다스리게 하여 도위의 이름을 주며, 5천 호 이하를 다스리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처럼 현의 영장으로 하고, 작은 현의 장관인 장 이상은 공적에 따라서 자리를 옮겨주고, 능력이 있으면 승진하고 다스리는 곳도 그에 따라서 확대시키십시오.
- 위지 하후현전 -

이전에 원환의 사촌 동생 원패(袁覇)는 공정하고 엄격하며 공적과 재능이 있었으므로 위나라 초기에 대사농(大司農)이 되었고, 같은 군(郡)의 하기(何夔)와 나란히 명성을 알렸다.
- 위지 원환전 -

여러 관리들중에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 공적이 현저하지 않고 사사로운 재화가 풍족한 자들은 모두 파면시켜 오래도록 뽑지 않았다.
- 위지 모개전 -

제가 듣건대 ‘현명함을 조건으로 하여 작위를 준다면 백성들은 그들의 품덕을 닦을 수 있고, 공적을 근거로 하여 봉록의 등급을 정한다면 백성들은 다투어 공업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위지 하기전 -

건안 17년(212)에 조조는 포신의 공적을 기록하고, 표를 올려 포훈의 형 포소를 신도정후로 임명했다.
- 위지 포훈전 -

태조는 그의 건의를 따랐다. 감릉(甘陵)ㆍ패(浿)ㆍ양평태수(陽平太守)를 역임하고, 재임하는 곳마다 공적이 있었다.
황초(黃初) 연간에 중앙으로 들어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다.
- 위지 사마지전 -

「위서魏書」에 실려 있는 태조(太祖)의 표문 왈 :
“신이 듣기로 충성스런 이를 기리고 현명한 이를 총애하는 것은 꼭 그 당사자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공적을 생각할 때에는 그 은혜가 후사(後嗣)에게까지 융성히 내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춘추시대 초(楚)나라는 손숙(孫叔)(→손숙오孫叔敖)을 존숭하여 그의 자식을 높게 봉하고 후한 초에는 잠팽(岑彭)이 죽은 뒤에 그 작위가 적자 이외의 방계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 위지 곽가전 -

함희 연간에 이르러,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를 설치하자고 건의하였을 때, 유방과 손자는 이전 왕조에서 두드러진 공적을 세웠으므로 유정은 방성자(方城子)에 봉해졌고, 손굉은 이석자(離石子)가 되었다.
- 위지 유방전 -

진제공찬(晉諸公贊): 가충은 자가 공여(公閭)이며, 감로 연간에 대장군장사(大將軍長史)가 되었다. 고귀향공(조위의 마지막 황제)이 난을 일으켰을 때, 사마소는 가충에게 의지하여 난을 피했다. 진 왕실에서는 최고의 공적을 세운 신하였으며, 관직은 태재(太宰)에까지 올랐고, 노공(魯公)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무공(武公)이다.
- 위지 가규전 -

양패는 수년 후에 공적에 따라 호강교위(護羌都尉)가 되었다.
- 위지 가규전 -

태조는 임준의 공적이 다대함을 인해 상표하여 도정후로 봉하고 삼백호를 내렸으며 장수교위로 전임케 했다.

조지는 그 공적을 높게 세웠으나 불행히고 요절하고 말았으므로 군수의 관을 추증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급이 아직 그의 공적에 상당치 못한 듯 하다. 지금 거듭 이를 생각하니 조지는 봉토를 받음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데(봉작을 받음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데),아직까지 이를 행하지 못한 것은 짐의 불찰이다. 조지의 아들 조처중에게 봉토와 작위를 더하여 조지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을 불후의 사업으로 해야할 것이다.
- 위지 임준전 -

소칙은 군대를 통솔하고 그를 토벌하러 갔다. 국연은 두려웠으므로 항복하기를 원했다. 그 공적으로 문제는 소칙에게 호강교위의 관직을 주었으며,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내렸다.
- 위지 소칙전 -

문제가 제위에 오른 후, 이전이 합비성에서 세운 공적을 추념하여 이정의 식읍을 1백호 증가시키고, 이전의 한 아들에게 관내후라는 작위를 주었으며, 식읍 1백 호를 주었다. 이전의 시호를 민후(愍候)라고 했다.
- 위지 이전전 -

동방의 주에 소란이 일자 장패등은 정의를 세워 폭악을 제압하고, 해대지방을 완벽히 평정하였으니, 공적이 실로 막대하여 열후에 봉해졌다. 장패는 도정후가 되어 위로장군의 관위를 더하여 받았다. 또한 우금과 함께 창희를 토벌하고, 하후연과 함께 황건의 잔당 서화 등을 토벌하였으므로 공적에 따라 서주자사에 영전되었다.
- 위지 장패전 -

부하는 공적으로 승진하여 양향후(陽鄉侯)에 봉해졌고, 식읍이 6백호 증가하여 이전 것과 합쳐 1천 2백호가 되었다.
- 위지 부하전 -

진태는 앞뒤의 공적으로 식읍 2천600호가 더해졌고, 자제 한명에게 정후를 하사받았으며, 두명에게는 관내후를 받았다.
- 위지 진태전 -

왕기(王基)ㆍ주태(州泰)는 모두 공을 세웠다. 그래서 왕창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ㆍ의동삼사(儀同三司)로 승진되고, 경릉후(京陵侯)로 봉해졌다.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병사를 인솔하여 관구검과 문흠에게 저항한 공적이 있었으므로 두 아들을 정후(亭侯)와 관내후(關內侯)로 봉하고, 지위를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시켰다.
- 위지 왕창전 -

왕기는 상소를 올려 완곡하게 사양하고, 공적을 보좌관들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장사(長史)ㆍ사마(司馬) 등 일곱 명이 모두 제후(侯)가 되었다.
- 위지 왕기전 -

12월, 조서를 내렸다.
<등애는 군의 위엄을 나타내고 무력을 떨쳐서 적지 깊숙이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고, 악한 사람들을 죽였다. 제왕이라고 참칭한 군주로 하여금 머리를 땅에 박고 목을 빼게 하였다. 몇 대를 걸쳐 처벌을 면제받았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평정되었다. 병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시간을 넘지 않았으며, 싸움에 있어서는 하루를 다 사용하지 않고, 구름을 자르고 자리를 마는 것처럼 파와 촉을 평정하였다. 비록 백기(전국 시대 秦의 명장)가 강대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한신이 강력한 조나라를 이겼으며, 오한이 자양(공손술)을 잡았고, 아부(전한 시대의 명장)가 일곱 나라를 멸망시켰을지라도, 공적을 계산하고 성과를 논하면 이번 훈공에 비교할 수 없다. 등애를 태위로 임명하고 식읍을 2만 호를 증가시키고, 아들 두 명을 정후로 봉하여 각기 식읍 천 호 식을 주도록 하라.>

(주)태가 말했다,
“실로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명공(名公)의 자식으로 어려서부터 문채(文采,아름다운 문장 ; 문학의 재주)가 있었으므로 리(吏)의 직임을 맡았습니다. 원숭이가 토우(土牛)를 타고 달리듯 또한 어찌 이토록 (진급이) 늦단 말입니까!”
뭇 빈객들이 모두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뒤에 연주자사(兗州刺史)와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역임하였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주산(籌算,모책과 계산)과 적효(績效,공적)가 있었다.
- 위지 등애전 -

관운장과 장익덕을 찬함(贊關雲長張益德)
관우(關)와 장비(張)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한신(韓)ㆍ경감(耿)과 공적을 비교하면 그들과 명성과 덕을 나란히 말할 만하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

조자룡ㆍ진숙지를 찬함(贊趙子龍ㆍ陳叔至)
정남장군(征南 : 조운)은 성정이 후덕하고, 정서장군(진도)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다. 당시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써 공훈을 날렸다.

이정방을 찬함(贊李正方)
정방(이엄)은 선주에게 유명을 받아 후세의 기강 정립에 참여했는데, 의견을 서술하지도 않았고, 협조하지도 않았다. 이단을 만들어 그 시대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므로 임무나 공적도 없어졌다.
- 촉지 계한보신찬 -

[조운별전]에 기재된 후주(後主)의 조서에서 이르길,
“조운이 지난 날 선제(先 帝-예전 황제 즉 유비)를 뒤따르며 공적(功積)이 이미 현저했고, 짐이 나이어려 간난(艱難)을 겪을 때 그의 충순(忠順)에 힘입어 위험에서 구제되었다.무릇 시호는 그 으뜸되는 공을 잘 드러내야 하는 법이니 바깥에서 조운에게 합당한 시호에 관해 의논하도록 하라.”
고 했다. 대장군 강유(姜維) 등이 의논하여 말했다,
“조운이 지난 날 선제(先 帝)를 뒤따르며 공적이 이미 현저했고 천하를 경영하며 법도를 준봉했으니 그의 공효(功效)가 가히 기록될 만하며 당양(當陽) 싸움에서는 의로움이 금석(金石)을 꿰뚫듯 하였습니다. 충(忠)으로 윗사람을 보위하면 임금이 그에게 상줄 것을생각하고 예(禮)로써 아랫사람을 후대하면 신하는 자신이 죽을 것을 잊게되니,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족히 불후(不朽)할 것이고 산 자들은 은혜에 감격하여 족히 몸바칠 것입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건대, 유현자혜(柔賢慈惠)를 순(順)이라 하고 집사유반(執事有班)을 평(平)이라 하며 극정화란(克定禍亂)을 평(平)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로는 순평후(順平侯)가 마땅합니다.”
- 촉지 조운전 -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 촉지 관우전 -

그 뒤 군(郡)에서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았다. [功曹; 군의 보좌관으로 공훈을 조사해 기록하는 직책]
- 촉지 방통전 -

건흥 7년(229년), 제갈량이 진식(陳式)을 보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공격했다. 위(魏) 옹주자사 곽회(郭淮)가 군을 이끌고 진식을 공격하려 하자 제갈량이 직접 출병해 건위(建威)에 도착했고 곽회가 퇴환하니 마침내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에게 조책(詔策)을 내렸다.
“가정 싸움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자신의 허물로 돌려 심히 스스로 폄억(貶抑-폄하하고 억제함. 벼슬을 내림)하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둔주(遁走-도주)케 했다.
저(氐), 강(羌)을 항복시켜 모으고 2군(郡)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고 공훈은 현연(顯然)하도다. 지금 바야흐로 천하가 소란스럽고 원악(元惡-원흉. 악행의 우두머리)이 아직 효수되지 않았고 그대는 대임을 맡은 나라의 기둥이니, 오래도록 스스로 읍손(挹損-겸손함. 벼슬을 내림)하는 것은 홍렬(洪烈-위대한 공업)을 크게 드날리는 바가 아니다. 이제 다시 그대를 승상으로 삼으니 사양치 말라.”
- 촉지 제갈량전 -

양의는 군을 이끌고 되돌아오고 또한 위연을 주토(誅討-죄를 들어 토벌함)하니 스스로 공훈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 의당 자신이 제갈량을 대신해 정무를 장악해야 한다고 여겼다.
- 촉지 양의전 -

하후패는 정시 연간에 토촉호군討蜀護軍 우장군右將軍에 임명되었고 박창정후博昌亭侯에 봉해졌다. 평소 조상曹爽과 가까웠는데 조상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 망명하여 촉으로 들어갔다. 하후연의 예전 공훈을 이유로 하후패의 아들은 사면되고 낙랑군樂浪郡으로 옮겨졌다.
- 위지 하후연전 -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 오지 주유전 -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陽新)ㆍ하이(下雉)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후에 감녕은 환현 공격에 참가해 승성독(升城督)으로 임명됐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결국은 주광(朱光)을 격파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여몽이 가장 컸고, 감녕이 그 다음이었으므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제수되었다.
- 오지 감녕전 -

유비는 촉군을 평정하고, 곽준의 공로를 칭찬하며 광한군을 분할해 재동군으로 만들고 곽준을 재동태수로 임명하고 비장군으로 삼았다.
- 촉지 곽준전 -

당시 진문왕(晉文王: 사마소)이 위(魏)나라의 상국(相國: 승상(丞相)의 다른 명칭)으로 있었는데, 초주가 국가를 보존한 공로가 있어 양성정후(陽城亭侯)로 봉했다. 또 문서를 하달하여 초주를 초빙했다.
- 촉지 초주전 -

유민은 공로가 있어 운정후(雲亭候)로 봉해졌다.
- 촉지 장완전 -

제갈양이 죽은 후, 전령군에 임명됐고, 유주를 토벌한 공로를 소급하여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 촉지 장익전 -

순욱별전의 태조가 올린 표에 이르길:
"신은 뛰어난 공을 가릴 때에는 모략을 기준으로 포상을 결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야전에서의 전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묘당(廟堂)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리 많은 전투를 펼쳤더라도 국가를 세운 공로보다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곡부(曲阜)에는 큰 은전을 하사했지만, 영구(營丘)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중수상서령(侍中守尙書令) 순욱은 덕행을 쌓아왔으며, 어려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과실이 없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게 되자 그는 오로지 충성심으로 정치에 투신했습니다.
신은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사방으로 주유하며 간적들을 정벌하면서 순욱과 한 마음으로 전력을 다했습니다. 순욱은 신의 측근에서 뛰어난 전략을 내놓았으며, 여러 가지의 책략을 제시했습니다. 순욱이 내놓은 방안이 실효를 거두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순욱의 공업으로 신은 여러 차례 어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의 재능은 구름을 가르고 해와 달이 빛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폐하께서 허도로 행차하시자, 순욱은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군국기무를 담당했으며, 충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로지 폐하께서 평안하시기를 바라며 마치 살얼음을 디디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여러 가지의 일을 치밀하게 연구하며 많은 일을 처리했습니다. 천하기 지금처럼 안정된 것은 순욱의 공입니다. 마땅히 높은 관작을 하사하여 그의 공을 으뜸으로 표창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욱이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사양하자 조조의 표는 시행되지 못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을 해오면서 조정을 바로 세울 때, 그대는 함께 페하를 크게 보필했으며, 그대와 함께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했고, 그대와 함께 여러 가지의 계책을 세웠으며, 그대와 함께 비밀리에 모략을 꾸민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말로 사양을 하지 마시오.”
순욱도 더 이상 사양을 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 위지 순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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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록을 추려낸 것은 아니고 대략적인 것만을 추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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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사랑
17/02/1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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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된 수익모델이었군요 전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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