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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09 11:50
우금은 시기가 안 좋았던것도 큽니다. 과거 소위 말하는 군웅할거 시대때야 세력 갈아타기가 자주 일어나곤 했었지만
삼국이 정립된 이후부터는 타세력에 항복하는 것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죠. 하물며 당시기준 그 동안 쌓은 공적만으로 보면 다섯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우금이 항복해버렸으니 하필 항복을 받는 장수가 충의지사로 이름 날렸던 관우기도 하고요
17/02/09 11:56
우금의 항복 여부가 군사들을 살리는 것과 직결되었는지의 여부는 애매하군요.
그의 항복이 진정성을 얻고자 했다면, 항복한 후 오나라 혹은 위나라로 돌아와서라도 자결로 자신의 떳떳함을 증명하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항복한 사실 하나만으로 평가절하하기는 어렵지만, 또한 그와 관련한 대처가 명예롭지 못했던 건 분명 사실입니다. 딱히 실드를 과하게 쳐줄 이유는 없을거 같네요.
17/02/09 12:24
항복하고 자결하지 않고 있다가 후에 다시 복귀해서 공을 세운 케이스는 많습니다.
관우도 그런 케이스죠. 유비 가족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조조에게 항복하고 그렇다고 자결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유비로 복귀해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반면 우금은 그렇게 복귀해서 다시 공을 세워 과를 씻을 기회도 안주고 조비가 굴욕을 줘서 분사시켜버렸죠. 생각해보면 관우나 우금이나 항복에 있어서 그렇게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군주인 유비와 조비의 차이가 있었던거죠. 유비가 관우를 항복했다는 죄로 참수시켰다면 관우의 평가가 지금처럼 높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17/02/09 19:30
관우의 항복 당시에는 분명한 조건을 달지 않았던가요? 정사의 기록에도 공공연하게 "언젠가는 유비에게 돌아갈 것이다"를 천명하며 충절을 저버리지 않은 관우와, 항복 후에도 비겁자라고 까였던 우금은 동등하게 비교할 처지가 아니라고 봅니다.
17/02/09 12:11
하아. . 고대의 일본 무사들도 항복을 택할 바엔 할복! 이라며 배를 가르곤 했죠.
도저히 죽으면 무슨 소용이고 뒷일은 어찌 도모한단 말인가요. 명예? 일단 살아남고 다시 권토중래하여 큰 공로를 세워서 회복하면 됩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길을 버리고서, 당장 죽어서 넋이 되어서 울편 화이팅! 하고 응원해줄 겁니까. . 스타워즈처럼 영령이 되어서 짠!하고 나타나서 울편에게 조언을 해줄 것도 아니고. . 우금에게 너무 심했던 것이 맞습니다. 우금으로 하여금 다시 군대를 이끌게 하고 공적을 세워라하고, 못하면 투항한 죄를 물어 벌을 주는게 나았습니다 저렇게 조롱하는게 조씨 부자가 참 졸렬해보이네요
17/02/09 20:30
그런데 그 당시 일본 무사들은 할복을 한다면 무사들의 가족을 무사들의 군주가 돌봐줬습니다
위 본문에 보면 우금은 방덕과 처지가 다르다고 나오고요 방덕은 싸워도 문제 없지만 우금은 자기의 처신에 따라 부하 3만명의 목숨이 달려 있죠
17/02/09 12:13
하필이면 비교대상이 방덕이었다는게 문제죠. 차라리 방덕까지 항복했으면 우금의 처지가 저렇게 비참해지진 않았을걸요.
조조를 섬긴지 얼마 안된다 번성에 있었던 장수들에게 촉으로 투항할지도 모른다고 의심받던 방덕조차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죽었는데... 하물며 그 방덕이랑 같이 번성으로 파견된 대장이었던 우금은 창업공신인데다 조조를 30년이나 섬긴 역전의 용장이었는데 항복했으니...
17/02/09 12:26
우금과 방덕은 그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방덕은 부장이니 마음껏 자기 목숨 내버려가며 항전할수 있었다면 우금은 7군의 병사를 다 책임져야 할 주장이니 그의 항전은 곧 3만 병사의 익사및 수몰을 의미하는거고 따라서 우금도 방덕과 같은 선택을 하지 못했던거 같아요.
17/02/09 13:26
글쎄요 우금이 싸우다 죽는것과 아닌것에 7군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말은 선뜻 이해하기가 힘드네요.
원래 대장이 싸우다 죽으면 그소식을 듣고 병사들은 항복하기 마련인데요.
17/02/09 13:45
저 상황이 좀 평소 전장하고는 좀 다른게
그냥 일반 전장에서 싸우다 항복하는게 아니라 큰 비가 내려 우금의 7군이 물속에 잠긴 상황이었습니다.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 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범람하는 물속에서 우금군이 허우적대고 있고 몇몇은 섬같은곳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구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죠. 우금이 죽음을 병사들이 알기도 쉽지가 않고 그걸 알기전에 범람하는 물에 수장될 긴급한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우금이 관우와 목숨을 걸고 계속 싸우면 그 사이에 우금의 병사들은 수장되는 상황이라는거죠.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을 했고 그 이후에 관우가 큰배를 이제 구조선으로 활용해서 우금의 병사들을 구해냅니다. 일반적인 전장상황이면 모르겠으나 우금의 상황은 정말 꼬일대로 꼬여 너무나 긴급한 상황이었죠. 우금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그냥 열심히 싸웠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개죽음 당할 상황이었다는거죠.
17/02/09 13:52
우금이 싸우다 죽었다는 말이 퍼지기 힘들다는 말은 우금이 항복했다는 말도 퍼지기 힘든상황이라는거죠
우금의 항복이 병사들을 살렸다는 사실이지만 우금의 항복이 병사들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였다는 말은 단정지을수 없다고 봅니다 어차피 우금이 항복한다면 나머지 병사들을 살릴지 말지는 관우의 권한이죠 우금이 항복을 댓가로 요구하고 말고 할만한 조건이 아니니까요. 싸우다 죽거나 항복을 했거나 나머지 병사들 처우는 승장의 재량이죠 그걸 우금이 모를리도 없고말이죠. 거기까지 내다보고 항복을 햇다기보다는 당장 죽기 싫어서 라고 생각합니다. 오나라에도 갔다가 위나라에도 간걸 보면 말이죠.
17/02/09 13:59
물론 우금이 항복한다고 관우가 무조건 병사들을 살린다라고 단언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금이 계속 싸우는것과 우금이 항복하는것과 어느쪽이 병사들의 목숨을 더 살릴 확률이 높냐를 따지면 당연히 후자죠.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했기에 관우도 그 우금을 데리고 큰배로 돌아다니며 우금의 병사들에게 주장이 항복한걸 보여주며 그들을 구조할수 있었던거고 그로 인해 우금의 많은 병사들이 물속에서 살아남을수 있었던 겁니다. 요컨데 우금이 계속 싸우면 - 관우도 우금과 계속 싸울것이고 그 사이에 우금의 병사들은 대거 수장될것이다 우금이 항복하면 - 100% 단언할수는 없지만 관우가 큰배를 이끌고 우금의 병사들을 구해 줄것이다 라는거죠. 그리고 우금도 관우가 항복했을때 관우를 봤었고 관우의 성격상 항복하면 병사들을 살려줄거라고 예상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대부에게 교만하고 사졸들에게 관대한 관우의 성격은 이미 여러 열전에서 언급될정도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관우라면 자기가 항복했는데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지 않고 구조해줄거라고 우금도 그렇게 생각했던거죠. 그 후 스스로 자결하지 않은건 단순히 죽기 싫어서 라기 보다는 이후 때를 노렸다고도 볼수 있지 않나요.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하고 자결하지 않고 다시 유비에게 돌아가 공을 세운걸 생각하면 관우가 자결하지 않았다고 죽기 싫어서 항복했다 라고 할수는 없으니까요.
17/02/09 14:04
그런 확률을 계산한다면 왠만한 상황에서는 다들 항복하겠죠. 아니 불리한 상황에서의 전투는 나서지 않는게 나을겁니다. 여기서 우금이 어떤마음을 가지고 항복했느냐가 중요한건데 병사들을 살리고 싶다인지 내가 살고 싶다인지 그상황만 봐서는 몰라요. 둘다 가능 한 얘기니까요. 그러니 병사들을 살리고자 항복한 인류애가 넘치는 장수로 표현되기에는 좀 찝찝함이 남지않을까 생각하는겁니다. 게다가 모든 세력이 조조에게 향했는데 단기로 아무것도 없는 유비에게 돌아간 관우와 오에 항복했다 최대 세력인 위로 되돌려 ' 보내진' 우금과의 비교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17/02/09 14:19
근데 실제로 관우가 특이한 케이스고 적국에 항복했던 장수가 다시 본래의 주인을 찾아간 경우는 거의 없지요. 항장 출신이라고 중용되지 않은 경우도 많고 항장 출신임에도 능력을 인정받고 중용된 경우도 많지만 본래의 주인에게 다시 돌아간 케이스는 관우 정도말고는 찾기 힘든 사례죠.
본문에 언급된 황권도 항복 이후에 유비와의 신뢰관계는 유지되었어도 황권이 다시 촉으로 돌아가진 않았습니다. 우금이 그 상황에서 항복했다면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서 공을 세워 번성구원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병사들 목숨도 더 살리고 자기 목숨도 보전할 목적이 컸다고 봐야죠.
17/02/09 12:27
다만 황권과의 비교는 좀 무리인게...
황권같은 경우 자기 주군이었던 유비가 자기를 이해해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위에 항복했던겁니다. 안그랬으면 자기 처자식이 다 죽을지도 모르니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 장담할수 없죠. 실제로 황권이 투항하자 촉의 신하들이 황권의 가족들을 잡아 죄를 묻자고 했는데 "내가 황권을 배신한것이다" 라며 유비가 거부했습니다. 훗날 위에 항복한 사람들로부터 황권의 가족들이 처형되었다는 말이 돌았지만 황권은 믿지 않은거만 봐도 자기가 섬겼던 주군에 대한 이해가 우금과는 달랐다고 봐야죠.
17/02/09 12:37
그것도 있지만 황권의 경우 유비가 결과적으로 황권을 사지로 몬 셈이 된 거나 마찬가지라서
거기서 황권 항복했다고 가족들에게 죄를 연좌시키기엔 유비 본인이 이릉에서 말아먹은게 워낙 커서 면도 안 섰을 겁니다. 우금의 경우 전력상 확실히 더 우위였고 지원도 빵빵하게 내준 편이었는데 패배 후 항복이라 황권하고는 다른 케이스로 봐야죠.
17/02/09 13:59
유비가 붕어했을때 위의 다른 신하들은 다 기뻐했지만 황권만은 슬퍼했다고 하고 유비가 가솔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아도 유비는 그럴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했죠. 그런 책임관계도 있었겠지만 유비와 황권간의 어떤 신뢰와 이해관계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실제로 유비가 한중이나 이릉에서 황권에게 중요 직책을 맡긴것도 있었고.
17/02/09 13:10
발음 같은 다른 우금도 조조 휘하의 장수였던걸로 아는데, 삼국지연의 내에서 활약은 여기서 나온 우금이 거의 대부분이었던게 맞겠죠? 다른 우금 때문에 헷갈려서...
17/02/09 13:30
전 조비보다도 조조가 더 이해가 안가네요. 사정이 없음을 몰랐던게 아닌데 그런식으로 디스하다니..
조비입장에서야 조조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알게 뭔가요 자신이 성장해서 겪은것은 관우라는 재앙이 나타난 힘든 상황에 정예를 이끌고 가더니 항복해버린 항장일 뿐이니 우금이 곱게 보일리가 없지요 조조는 우금이 세운공이 어마어마한데 7군을 살리려 항복한 장수를 그렇게 디스했다는점이 유비와 비교되는 점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윽씨 인성쓰레기 조비다(2)
17/02/09 13:46
조조 초기 조인, 악진과 함께 조조를 먹여살린 3명의 장수중 하나.
악진이 조인과 우금과 동급으로 취급받을 장군인가요??? 일반적으로 하후연이나 서황 등과 비교해서 악진이 더 우월하다고 쳐주나요??
17/02/09 13:48
동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오대양장에 들어가니 비슷한 급으로 취급해줄만한 장수라고 봅니다.
다만 조인, 우금이 악진보다는 대부분 높게 평가되죠. 하후연과의 비교는 애매하네요. 둘의 위치나 역할 자체가 많이 달라서...
17/02/09 13:51
초창기에 조인,악진,우금의 공적이 걸출했던것은 사실입니다.
하후연은 초창기 군량 수송 셔틀이었고 서황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시작한건 원소와의 대결부터긴 합니다.
17/02/09 14:29
기록에 나와있는 식읍만 보면 악진과 우금은 1200호로 식읍이 같습니다.
식읍은 관직과 상관없이 공적에 따라 주어졌고 훗날 위나라의 경제상황이 더 좋아지면서 후대에 활약한 장수들이 더 많은 식읍을 받긴 했습니다만 악진과 우금은 둘다 조조의 창업공신들이니 활동시기도 비슷해서 둘의 공적이나 활약상은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될것 같습니다. 참고로 조인은 식읍이 3500호로 둘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위나라에서 가장 저평가된 인물로 만총을 꼽는것도 이 때문입니다. 기록에 보면 만총의 식읍은 9600호인데 위에서 만총보다 많은 식읍을 가졌던 장수는 촉한을 멸망시킨 공으로 엄청난 식읍을 받았던 등애와 종회, 그리고 왕으로 봉해진 조창밖에 없습니다. 만총이 한창 합비에서 손권을 손제리로 만들때 반대편에 있는 대촉전선에서 맹활약했던 장합의 식읍이 4300호인데 장합보다 약 10년 더 살았을뿐인데 식읍은 장합의 두배가 넘는걸보면...만총과 동시대에 활약한 위나라 문-무관중 만총보다 많은 식읍을 받은 인물이 없습니다.
17/02/09 14:59
만총이 워낙 검소하게 살아서 조예까 면 세워주려고 막판에 한번에 많이 하사한 것도 감안은 해야합니다.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장수인건 맞지만요
17/02/09 15:31
하필 둘이 똑같은 식읍이라니...!
식읍으로 따지니... 눈앞의 데이터에 더이상 할 말이 없네요. 크크크 만총 저평가 이야기는 저도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삼국시대 후반기에 전체적으로 식읍'인플레'가 있었다는 걸 감안해도... 정말 대단한 인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저평가 받는다고...ㅠ
17/02/09 16:01
연의에서는 유비 사후에는 동오를 다루는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버리고 제갈량의 남정-북벌에 포커스가 맞춰지다보니 대촉전선에서 활약하지 않은 인물들은 그냥 아예 묻혔지요.
그러다보니 합비에서 철벽수문장 노릇하던 만총이나 강릉에서 철벽수문장 노릇하던 주연같은 인물들은 거의 비중이 없습니다. 쟤들은 제갈량의 세례를 받지 못했거든요. 학소같은 개인열전이 없는 기록 부실한 인물도 제갈량 상대로 한번 잘싸우니까 뭐...
17/02/09 14:16
화봉요원이 생각나네요
진정한 영웅은 살아남아야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음을 알고 있다고 했었죠 우금은 항복 이후로 세운 공이 없어서 더 평가절하된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17/02/09 14:46
우금이 가진 이미지의 파괴력이 너무 커서 당대에 있떤 위에 있던 장수나 책사나 주군이 모욕을 너무 심하게 줬네요..우금 나름대로도 항복했을때의 상황을 넌지시 그려봤을텐데 이정도로 악랄하게 디스 당할줄 몰랐나보네요.그래도 조조는 내편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을텐데 조조가 디스하고 다른사람들이 끝까지 디스하고 조비마저 여윽씨 또라이짓을 하네요.물론 조비 입장에선 우금따위 알게 뭐야 해도 상관없긴 한데 조조는 그러면 안됬습니다.
17/02/09 14:49
조조 뿐만 아니라 조비 입장에서도 우금에게 저래서는 안되는게
완성퇴각 당시 가장 먼저 조조와 조비 자신의 위급을 구원한 사람이 바로 우금 본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조조와 조비의 생명의 은인이 우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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