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 때문에 원래 북한 핵 개발의 이유나 진행 과정에 관한 글을 하나 쓰려다가 글도 너무 길어지고 해서 일단 찾은 자료를 가지고 94년 전쟁 위기에 대해서만 다시 되짚어 보려 합니다.
저는 이 당시를 직접 격었는데 아직도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공포 스러웠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간 1950년 휴전 이후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는 거죠.
아래에 링크 할 한겨레 기사를 보면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 및 라면 사재기가 나오긴 하는데요.
이걸 보고 오해 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봤을 때 그 당시 어른들의 반응은 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에이 설마였고 그리고 라면 사재기는 일부의 오버라고 보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였어요.
워낙 북한 관련해서는 가끔 하나씩 뭐가 터지니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봤죠.
"설마 전쟁나서 죽기야 하겠어? 가끔씩 늘 이런데 뭐." 하는 뭐 그런 분위기.
무엇 보다 문제는 당시 북한 핵개발 => 미국 선제 북폭 => 전쟁 가능성으로 이어 지는 그림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그 때는 인터넷이 없었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조중동이나 공영(실은 관영) 방송 뉴스 왜곡이 장난이 아닌데 그 당시는 훨씬 더 심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은 없는거죠.
얼마든지 모르고 넘어가는 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왜곡도 왜곡인데 뭔가 파편적으로 팩트가 보도가 되긴 하는데 그거 이어서 전체적인 사실을 알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무튼 기사나 보도를 보면 진짜 궁금한 부분은 뭔가 두리뭉실 해요.
뭐 정권 입장에선 국민들이 제대로 된 큰 그림을 알아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아무튼 저 같은 경우도 나중에 98년 경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을 접하고 나서야 당시 상황의 그림이 그려 지더군요.
그 전까지는 CNN이 와서 위성 안테나를 폈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진짜 전쟁이 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 제가 특이한 경우고 대부분의 경우는 사실 그 이후에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오늘날까지도 잘 살고 있죠.
아무튼 기사를 링크하자면 클린턴 회고록에 언급된 개전시 피해 규모에 관한 언급이구요.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5059
"6월 1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 방문 용의를 밝혔다. 나는 앨 고어 부통령 및 국가안보팀과 협의 후 시도해 볼 만하다고 결정했다. 그에 3주 앞서 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양측이 입을 막대한 피해 규모에 관해 정신이 번쩍 드는 보고를 받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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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격이 북한 당국을 자극해 "(미국 정부는) 100만명이 희생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쟁을 불러 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CNN은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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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은 영변 폭격이 불러 올 북한 당국의 대응 등을 둘러싸고 클린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백악관에서 심각한 논의가 벌어졌고 폭격 취소로 결론이 났다고 전했다. "
<=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대목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벌어지는냐 마느냐가 결정 되는데 한국 정부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죠. 우리땅에서 전쟁이 안 난건 오로지 상식이 살아 있던 미국 지도부의 시혜 덕 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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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폭을 주도했던 게 클린턴이었는데 나중에는 햇볕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지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나중에 엘고어가 대통령이 되지 못한게 대한민국의 운명을 아직까지도 이렇게 힘들게 하네요.
당시 사태를 수습하는 게 아니라 전쟁으로 몰고 갔던 김영삼의 어처구니 없는 대응에 대한 한겨레 기사입니다.
사실상 현 대통령께서도 도찐개찐이죠.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4455.html
"“북한에 대한 제재를 시종일관 밀어붙인 것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었고, 한국은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북핵 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 협상>, 조엘 위트·대니얼 폰먼·로버트 갈루치 지음)
그때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무능과 대북 강경파들의 오기였다. 미국에서 군사적 선택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이 멀어졌을 때 논의되기 시작했다. 누가 협상의 길을 막아섰는가. 김영삼 정부의 책임이 크다. 한-미 관계에서 ‘한바탕 소동’으로 기록된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자리에서 한-미 양국의 외교 실무자들이 합의한 ‘포괄적 접근 방안’을 김영삼 대통령은 현장에서 뒤집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과 미국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고, 1994년 2월18일 이른바 ‘슈퍼 화요일 합의문’을 만들었다. 그해 3월1일 화요일을 기해 팀스피릿 훈련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남북 특사 교환, 그리고 3월21일 북-미 회담 개최를 동시 발표하자는 묘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이후 어떻게 대응했는가. 특사 교환을 위한 남북 대화를 북-미 회담 이전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렸다. 남북한의 상호 불신이 여전한 상황에서 남북 대화를 북-미 대화와 연계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가 제대로 되겠는가. 3월19일 ‘불바다’ 발언은 어쩌면 예고된 사건이었다. 박영수 북쪽 회담 대표는 송영대 남쪽 대표에게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그쪽이 전쟁을 강요하는 데 대해서는 피할 생각이 없다.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송 선생 쪽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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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놓고 자기가 북폭 막았다고 언플하시는 김영삼 클래스 되시겠습니다.
게다가 북폭을 했었어야 했다고 떠벌리는.... 정말... 아 욕쓰고 싶네요.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94894.html
아래는 기존글에 착오가 있어 수정한 부분입니다.
기사 링크가 여러개다 보니 착각을 했네요.
결정적으로 전쟁을 막은 지미 카터를 북한에 보낸 것은 윌리엄 페리가 아니라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였네요.
김영삼의 클래스는 여기서도 빠지지 않고....
"물론 6월13일 북한이 IAEA를 탈퇴했을 때, 선제공격설이 거론된 적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과의 협의를 전제했다. 그것도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회담으로 취소됐다. 북한이 IAEA를 탈퇴하던 날 오후에 카터 전 대통령이 서울에 도착했다. 방북을 성사시킨 것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였다. 그해 5월 국회에서 국방부 장관이 한-미 연합군의 전쟁 계획을 상세히 밝힐 때, 레이니 대사는 미 조지아주로 달려가 오랜 친구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부탁을 했다. ‘제2의 한국전쟁’을 막는 데 앞장서달라고. 카터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마다하지 않았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카터의 방북은 실수’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카터의 방북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결국 카터-김일성 회담 결과를 협상 국면으로 전환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카터와 레이니 대사에게 한국 사람들은 큰 빚을 졌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