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가 근래에 국문으로 번역되어 보급되었다. 따라서 삼국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삼국지를 역사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긍정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현상도 따른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의 연구 서문에 의하면,
- 기록이라는 것은 원래 그 당시 너무 당연한 일은 적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라도 다음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 되지않고,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느 시대의 당연한 일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가장 소중한 것이다.
(중략) 고전의 고증이 청나라의 고증학에서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청나라의 고증학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가법家法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쓰여있지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라고 하는 손쉬운 방법은 고증의 결과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지만, 그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되어 고증학의 커다란 한계로 나타난다. 청나라 고증학이 하나하나의 부분적 고증에만 그치고 적극적인 체계를 수립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이다. 고증은 어느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일단의 비약이 요구된다.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록에 쓰여 있지 않는 부분도 복원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기의 철학이나 관념으로 보충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사실의 연장으로서, 사건 그 자체로 사건을 메워 복원해야한다.
라는 부분을 읽었을땐 정말 지극히 공감을 하고 감탄했다.
정사 삼국지 자체는 국문으로 쓰여있어서 읽기는 편하지만 대개 가공되지않은 data이다. (엄밀히보면 진수에 의해 최소한의 1차적 가공은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즉, '날것'이다. 그것을 먹을만한 체질이나 먹을수 있는 몸이 아니라면 탈이 나기 십상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날것을 그대로 먹으면서 병이 난 상태로 전혀 자신의 몸을 의심해보지않는다.
따라서 '역사'로서 '삼국지'를 접한다면, 어느정도의 날것을 조리할 수 있는 실력이나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몸이 되어야한다.
그럼, 조리된 음식과 기구는 무엇일까?
'자치통감'은 간단히 조리된 음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충 밥, 회, 삼겹살구이 정도랄까?
'사통'이나 '중국사학사', '구품관인법의 연구', '사대부와 중국 고대사회'와 같은 책은 밥솥이요, 가스/전자렌지같은 도구 정도가 되겠다. 이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 '개설서' 등인데 이것은 삼국지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이게 안되면 제대로 먹을 수 없다.
근데 밥을 먹을려면 밥만 먹을 수 없다. 반찬들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논문'과 '당시 지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그것이 반찬 정도가 아닌 도구 자체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중에 나와있는 '제갈량 평전' '삼국지의 세계' '김경한 삼국지' '리중톈 삼국지강의' 등의 해설서는 가공 식품이다. 만두도 될수 있고 짜장면도 될수 있고 라면도 될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어떤이에게는 입맛에 맞을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먹는 법과 조리하는 법을 배우고 먹을 것들도 준비했다면 비로소 날것을 조리할 수 있게된다. 다만, 이 날것이라는 정사삼국지를 제대로 먹을려면 부차적으로 '후한서 군국지' '후한서 백관지'와 '삼국 직관표' '진서 직관지' 등의 당시 사회적 시스템을 알려주는 것들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때문에 어렵고도 머나먼 길의 향연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웅사관'에 기대어 소설보듯 역사도 본다. 물론 영웅사관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병신론과 맞물려 가장 많이 다루는 분야인데, 사실 영웅사관이나 병신론이 다 틀렸다고 볼수는 없지만 확률적으로 본다면 그것이 해당되는 것들은 개인적으로 희소한 사례라고 본다. 얼마되지않는 희소한 사례로써 많은 부분을 재단하게되면 오류가 많아진다.
사람은 기후, 환경, 구조적 시스템에 의한 많은 영향을 받는다. 군대에 있는 사람은 군대안의 규제를 벗어나기 힘들고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국의 문화나 법 등을 이탈하여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당시에 살던 사람의 선택은 대개는 그럴수 밖에 없던 선택이 많았었을 것이라 본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고 우리보다 지식수준이 낮은 용렬한 필부匹夫가 아니라 책 몇권 정도야 우습게 외우는 지식인들이고 무용이 뛰어난 장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선택을 마냥 비판하고 우습게 생각할게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그들의 입장은 어떠했나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삼국지에 대한 이해는 많이 심화될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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