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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2/03 14:58:30
Name Jace T MndSclptr
Subject [일반] 수련회하면 항상 생각나는 고1 담임의 스웩


학창 시절에 적어도 적게 잡아도 20번은 넘게 수련회를 간거 같습니다. 날짜로만 쳐도 거의 60일 가까이 갔다는건데, 그러면서 정말 별의 별 신기한 일을 다 겪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고 뇌리에 깊게 남아서 수련회의 수자만 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고1 수련회때 보여준 담임 선생님의 스웩입니다. 

사실 그분이 정말 행동과 생김새가 개성있는 분이기는 한데, 정작 첫 인상이 어땠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중학교 생활을 마치고 친구 한명 없이 혼자서 타지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어서 그거 적응 하느라 고1 초반기의 온 집중력과 기력을 다 써서 그런것 같습니다. (아직도 미스테리입니다. 대체 왜 나만 그렇게 멀리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지... 이사를 간것도 아닌데.)

대충 수련회를 갈 4월 초 당시에 머리속에 든 인상은 [나이가 좀 많다. 키가 좀 작다, 말투가 재밌다. 담배를 많이 핀다. 본지 얼마나 됐다고 애들한테 야 야 하면서 헤드락도 걸면서 살갑게 대한다] 정도? (아마 이 정도만 얘기해도 동문이신분들은 누군지 감이 딱 오실겁니다. 워낙 교직 생활을 오래하셨고 워낙 개성있는 삶을 사시는분이라 크크) 막 그렇게 임팩트 있는 인상은 아니었다는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네요.


여튼 그렇게 처음 보는 애들하고 처음 가보는 동네에 있는 학교에서 겨우겨우 친구 몇명 만들어가며 적응하다보니, 수련회를 간답니다. 아... 여태까지 그 노잼에 돈내고 고생만하는 수련회를 꾸역꾸역 참석한 이유는 여자애들이랑 노는게 재밌어서인데, 꺼추들끼리 수학여행도 아니고 수련회? 그걸 꼭 가야되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그렇다고 가뜩이나 타지에서 와서 기면인 얼굴이 반은 물론이고 전교에 한명도 없는데 수련회라도 안 갔다간 고교 생활이 피곤해질거 같아서 결국 참석하기로 했는데, 그때는 그게 제 수련회와 담임에 대한 인상을 싹 바꿔놓을 문화 쇼크가 될 결정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크크크


수련회 첫날, 항상 하던대로 머 쓰잘데기 없이 하느냥 마느냥 하는 입소식 후에 어차피 대충해서 걸리지도 않을 주류 담배 검사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간단한 야외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되었습니다. 17세 남자들 모아놓고 이것저것 하려고 하니까 당연히 딴짓 하는 애들도 나오고, 말 안 듣는 애들도 나오고 그랬죠. 

여튼 그래서 여느 수련회에서 다 그렇게 하듯이 그렇게 튀게 이상한 짓을 애들은 뒤로 모아서 격리 조치 한뒤 가볍게 팔굽혀 펴기 15회 정도를 시키고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었는데, 우리반에서 한명이 걸리자마자 담임이 와서 조교를 제지하더니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제가 1-8 담임인데요, 내 새끼들이 잘못한건 내가 혼낼테니까 혼내지 마시고 저한테 보내세요'

조교는 뻘쭘해하더니 알았다고 걸린 애를 담임 옆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걔는 담임 옆에 한 10초 서서 담임이랑 잡담하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우리반에서 딴짓하다 걸린 애들은 다른 애들 팔굽혀펴기 하는걸 구경만 하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너무 노골적인 편애?에 다른 반 애들이나 우리반 애들이나 다들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편애(?)는 그 날밤에도 이어지는데, 당연히 남자들끼리 수련회를 왔기 때문에 당연히 몰래 주류를 숨겨와서 방에서 몰래 먹다가 당연히 걸렸습니다만, 그때도 조교는 '으휴 니들 그럴줄 알았다' 라는 실없는 소리만 남기고 우리를 어느 으슥한 곳에 있는 방으로 그저 끌고만 가더군요. 방에 들어가니까 이미 걸린 반 애들 몇명이서 담임이랑 같이 앉아서 과자 몇개 뜯어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담임이 이야기하길

'담임이 주는 한잔만 마셔라 니네 그 나이에 술먹고 사고쳐서 어디 망가지고 망가트리면 인생 조지는거야' 

그렇게 우리는 수련회에서 술먹다 걸렸지만 독방에서 담임이랑 독대하며 맥주 한잔을 까고 노가리를 까다가 방에 돌아와 다시 취침을 하게 되었습니다. -_-


그 이후 수련회 내내 이런 저런 힘들고 짜증나는 프로그램은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담임은 조교가 우리에게 손을 대는것을 사전에 전부 차단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미친짓을 한 놈은 담임에게 끌려가서 트레이드 마크인 등짝 스매싱을 맞기도 했지만, 얼차려식 벌주기나 의미없는 신체적 고문행위는 전혀 당하지 않고 수련회를 마칠 수 있었죠. 

사실 엄격 근엄 진지하게 따져보면 담임이 한 행위가 정말로 보편적으로 잘 한 행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반 애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고, 다른 반 담임들에겐 그 모습이 좀 유별나고 주책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을것 같거든요. 조교들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테구요. 그러나 조교가 어쨌건 다른반 애들이 어쨌건 다른 선생님들이 어쨌건 반 학생으로서는 담임이 너무나 고맙고 위대하고 멋있어 보였고 (내 새끼는 내가 혼낸다니 크... 홍콩 영화인줄) , 당연하다는듯이 우리반 애들은 그 수련회 이후 그를 단순한 반 담임이 아닌 배의 선장, 조직의 오야붕처럼 따르고 모시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10년도 더 넘게 지난 일이라 요새 수련회 분위기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귀찮고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재미가 좀 없어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얼차려나 당하는 괴롭힘만 없어도 수련회가 그렇게 재미없지는 않다는것을 알려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1년 내내 참 많은 독특한 스웩과 미담이 있었는데,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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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rschach
17/02/03 15:05
수정 아이콘
좋은 선생님이시네요.

제가 기억나는 일화는, 수련회 가면 다들 카드놀이나 동양화 놀이 한 번쯤 해보고 그러지 않습니까?
고2때의 수련회였던 그 날도 담요 비슷한거 깔아놓고 몇몇이서 카드놀이를 배팅을 수반해서 하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은 아니셨던) 수학선생님께서 급습을 하셨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아예 치울 시간은 없다는 판단을 모두가 동시에 내리고 눈빛을 교환 후 "돈만" 숨겼습니다. 뭐 그래도 카드놀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들어오셨음에도 인사만 하고 자연스럽게 두어판 게임을 진행했는데 몇 분 게임하는거 지켜보시더니 나가시면서
"됐으니까 돈 꺼내라. 적당히만 하고." 라고 말씀하시고 나가셨습니다. 뒷모습이 멋있으시더군요 크크크
LG twins
17/02/03 15:25
수정 아이콘
수련회/수학여행 때 학생들 불러다가 술 한잔씩 따라주는 선생님은 어느 학교에나 한명씩 꼭 있지 않았나요 크크
tannenbaum
17/02/03 15:37
수정 아이콘
수련회라는게 참 생소한게 고등학교 3년 내내 1학년 1학기에 수학여행 제외하고는 체육대회, 소풍도 아예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2부터는 음악, 체육, 미술, 교련 수업은 시간표 상에만 존재하고 실제론 국,영,수로 대체수업을 했었죠.
아마 그런 쓸데 없는 데 시간 보내느니 그 시간에 영어단어 외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학력고사 시대라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그 수학여행도 1학년 1학기 4월달에 갔으니 애들끼리 친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간지라 3박 4일 내내 서로 뻘쭘허니 시간 보내다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적고 보니 참 지루하고 재미 없는 고교생활이네요.
17/02/03 15:39
수정 아이콘
기실 수련회에 대한 악평은 교사들이 흔히 보여주는 행동들도 한몫 거든 결과잖아요. 애들 구르는 동안 술 먹으며 논다거나. 전 근데 수련회 말고 묘한 경험이 하나 있는데요. 초4때인가 수련회를 갈 때쯤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수련회를 했습니다. -_- 침구 하나씩 챙기고 학교에서 하루를 보내는 거였는데, 어디 멀리 가질 않았다는 점만 빼고 수련회랑 똑같이 보냈습니다. 벌주고 굴리는 조교 역할을 담임 선생님들이 하구요(?). 그 조교들보다야 훨씬 살살 하시긴 했습니다만, 보통 초등학교에서 받던 체벌보다야 한참 높은 수위였고 기분 묘~하더군요.
사막여우
17/02/03 15:50
수정 아이콘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다른 동료들 눈쌀에 못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멋진 선생님이시네요.
다만 저 나이대 애들이 그렇듯 사고치는걸 막기위해선 누군가의 감시가 필요하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들은 피곤해지겠지만 당연히 저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17/02/03 15:54
수정 아이콘
다 좋은데 맥주 한잔은 좀 아쉽네요
사악군
17/02/03 16:12
수정 아이콘
석잔은 줘야하는데요? 크크
17/02/03 16:31
수정 아이콘
고2때 현장학습으로 몇몇 반만 여행을 갔는데 밤이 되자 하나둘 준비한 술을 꺼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왠만한 맷집도 그 선생님 매를 세 대만 맞으면 개구리처럼 뻗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 정도의 완력 소유자셨고
(자리에 항상 10kg 아령과 완력기를 놓고 애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분이셨습니다.)
혹여 들킬까 선생님 방쪽에 돌아가면서 망보는 조를 세워놓고 새벽까지 들킬까 노심초사하며 숨죽여 술을 마셨지요.
저는 타지 가면 잠을 잘 못자는 편이기도 하고 술이 좀 센편이기도 해서 끝까지 남아있다 자려고 누웠는데
새벽 3시쯤 선생님 세분이 내려오시면서 복도쪽에서 한마디 하시더군요.
"이제야 다들 자나보네요"
다음날 아침 일찍 전원 운동장 구보 시킬 때 깨달았습니다.
'아... 다 알고 계셨구나'
17/02/03 16:37
수정 아이콘
전 고2,고3때 영어선생이 기억에 남네요.

자신이 인디언의 후예라며 아메리칸 색깔 치료법이라고 형광펜 세트를 들고다니며 아이들의 손에 형형색색으로 별의별 문양을 칠하고 다니던 분이었죠. 물론 강제적인 체벌의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혹행위로 받아들이는 학생들은 없었습니다.

고3 스승의날때 애들이 손발 붙잡고 케이크를 담임 얼굴에 직통으로 떡칠 시켜놨는데 이게 간지라면서 그 상태로 종례까지 마치고 퇴근까지 했었습니다.

원체 인상적인 분이라 졸업하고 한번 찾아가서 밥까지 같이 한번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같이 술을 먹을걸 그랬네요.
동전산거
17/02/03 16:55
수정 아이콘
음... 지금 고3인데 수학여행같은걸 가본 적이 없네요... 갈만하면 그때마다 전부 사건터지고 그래서...
이런거 보면 마냥 부럽기도
유스티스
17/02/03 17:13
수정 아이콘
전 고1수련회 때 대놓고 챙기는 쪽의 차별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애들이 안착했으면 따?비슷하게 당했을 수준이라 글 보고 순간 움찔했네요.
래쉬가드
17/02/03 18:48
수정 아이콘
이사가 아닌데 갑자기 먼 고등학교로 전학가셨으면 2가지중의 하나겠죠
너무 사고를 많이쳐서 중학교때 애들이랑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거나
아니면 워낙 성적이 우수해서 외지에 있는 명문고등학교에 입학시키셨던가

선생님은 멋지시네요 웬만하면 다른반 애들도 거해주시지
17/02/03 20:06
수정 아이콘
지금의 학교는 위의 사례나 댓글과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수학여행에서 자율을 많이 주면 학부모들이 청와대 신문고에 담임이 아이들을 방치하고 모른척했다고 민원을 넣고, 반대로 지랄같이 단속을 하면(가방이라도 뒤질라 치면) 인권을 탄압했다며 인권위에 민원을 넣습니다. 요즘엔 다들 학교에 항의 전화를 넣기 전에 청와대, 인권위 같은 곳에 바로 민원을 넣습니다. 시험문제를 쉽게 내면 변별력이 없다고 청와대에, 기말고사에는 조금 어려운 문제 두세개를 더 넣으면 내신을 망쳤다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습니다. 어느날 아이들이 교사가 이야기하는 진심을 정말 홈빡 이해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끄떡끄떡합니다. 교사는 울컥하면서 '역시 진심은 통한다'며 내심 이런 순간이 교사가 된 보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교육정에서 연락이 옵니다. 수업시간에 공부랑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서 진도를 늦으면 그 손해를 어떻게 감당할꺼냐며 청와대로 민원이 올라갔으니, 해명서를 문건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원평가 기간이 끝난 후, 평가란에 누가 썼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날 교사가 수업은 안하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해서 본인의 혹은 우리 아이의 학습권을 침해했다며 필설로 남기지 못할 만큼 극악한 말로 한가득 써놓은 것을 보게 되면, 교사들은 이제 깨닫습니다.
'학교에 낭만은 없다. 어쩌면 아무 것도 안하고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수업만 하고 형식적으로 격려가 될 이야기만 해주고 나무라지 말아라. 괜시리 오지랍 넓어봐야 내 능력으론 어림없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상처받지 않을 강철멘탈일지도 모릅니다.
사악군
17/02/03 21:04
수정 아이콘
요새는 진상들이 자기 권리의식높다고 자뻑까지하는 시대죠..
히오스
17/02/04 02:01
수정 아이콘
괴물은 우리가 만들고 있네요.
켈로그김
17/02/04 05:53
수정 아이콘
지금 민원넣는 세대가 아마 '내가 당해왔던걸 자식은 당하지 않게 하자' 라고 생각하고 또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세대니까요..

어느 직종에나 선배들의 업보를 후배들이 떠안는 면이 있긴 합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ANTETOKOUNMPO
17/02/04 17:13
수정 아이콘
흔치 않은 좋은 선생님 이시네요. 보통 수련회가면 선생님들이 학생들 프로그램하는 장소에 있지도 않지요. 조교들한테 맡겨놓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놀지요. 학생들 프로그램에 함께 하셨다는 것 만으로도 이미 좋은 선생님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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