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할매 손 좀 찍어보자"
"와?"
"이리 내봐라"
"지랄하고 자빠졌네. 다 쪼그라지고 구부러진 거 뭐하러 찍노."
할머니의 손은 투박하고, 쪼그라들고, 이리저리 굽어진 볼품없는 손이었다. 노환으로 쭈글쭈글해진 건 그렇다쳐도, 마디마디가 성한 곳이 없이 구부러진 건, 볼 때마다 착잡했다.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수십년 전 냉동식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구부러졌다고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잘려나갈 듯이 아프고 시려도 어쩔 수 없었을게다. 서른 일곱에 하루 아침에 과부되어 아들 다섯을 홀로 키우시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할머니께서 서른 일곱이시던 해에 교통사고로 비명횡사 하셨습니다.) 충분한 치료도, 아니 그 흔한 찜질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수십 년의 세월을 흘려 보냈다.
그러나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온 관절 마디마디에 통증이 몰려와도 정신만은 또렷했던 할머니였다. 혼자서 집 앞 밭일을 소일 삼아 살림을 꾸렸고, 매번 당신의 손으로 직접 머리 염색을 하시고, 큰 행사가 있으면 화장까지 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어디가면 10년은 젊어보였다. 80이 넘은 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 깜짝 놀라곤 했다. (솔직히 내가 봐도 팔순이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성깔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고, 때로는 사자후를 토할 정도였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아들 다섯을 잘 키우고, 둘째 며느리가 내팽개치고 간 손주까지 키워내셨다. 강단 있게, 활기차게, 그렇게 스스로를 이겨내셨다. (그래서 나는 항상 할머니로부터 '니는 누구를 닮아 그리 흐리멍텅하냐'는 핀잔을 자주 들었다.)
그랬던 할머니께서,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셨다. (참고 :
https://pgr21.co.kr/?b=8&n=65857)
뇌출혈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치지 않아 수술 없이 회복되셨지만, 그래서였을까. 쉬이 지치고,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 못하고, 거동이 불편해진, 우리가 흔히 떠올릴만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걷는 게 좀 불편해도 정신만은 또렷했던 분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걸 보면서 무서우면서, 서럽고, 미안했다.
할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문제에서, 가족들간의 지난한 다툼이 시작됐다. 서로가 자기가 잘났네, 자기가 최고로 모실 수 있네 하면서 끝도 없이 싸워댔다. 그것도 할머니께서 보는 앞에서, 여러 번. 나는 그 때마다 화가 나고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내 원죄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할머니도 말이 없었다. 촛점이 풀린 눈을 그저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을 뿐. 한 달은 일반병원, 한 달은 본가, 한 달은 노인요양병원...... 당신의 아들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할머니를 한 달씩 모시기로 하였으나, 이는 할머니 당신께는 아예 모시지 않는 것보다 더 못한 상황을 초래했다. 떠돌이 아닌 떠돌이 생활임을 직감한 할머니께서는 누구의 간병도 받길 거부하셨고,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셨다. 천만다행으로 뇌출혈이 치매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사이 몸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서, 지팡이나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거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변의 간호 없이는 일상생활이 안되는 상황. (※ 이는 노인장기요양등급 2~3급에 해당됩니다.)
숙부님 두 분과 나는 할머니를 요양시설에 모시기로 하고 할머니를 시설에 모셨으나...... 다른 숙부가 이를 알고 노발대발하여, 3일만에 할머니를 시설에서 모셔와 일반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다고 일반병원에서는 딱히 하는 게 없었다. 링거를 꽂을 일도, 치료를 받을 일도 없었다. 다만, 노인요양시설에서 힘없이 다른 노인들과 늙어가는 것보다는 일반병원에서 젊은 환자 혹은 가족들과 지내는 게 조금이라도 더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숙부의 말도 안되는 똥고집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성을 다해서 돌보는 것도 아니었고, 거의 방치하다시피 만들어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병원비 부담은 되었는지, 나에게 할머니를 기초생활수급자로 만들 수 없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기어이 폭발해버렸다. "쪽팔린 줄 아소. 아들이 다섯인데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한다고? 거기 공무원들 다 쌍욕 할겁니다. 저 집구석은 뭐 때문에 아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수급자 신청하는거냐고."
며칠 뒤, 병원비 부담이 너무 컸는지 결국 그 숙부도 포기하고 다시 할머니를 시설에 모셔다 드렸다.
무더운 여름에 들어가,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왔다. 그 동안 할머니를 가장 적극적으로 모셨던 막내 숙부는 연락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저에게서 돈 빌려간 그 삼촌입니다.), 다른 가족들도 할머니를 거의 찾지 않았다. 나 혼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할머니를 뵈러 갔을 뿐.
"이노무 새끼들이 뭔 짓거리를 하는지, 이제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는다. 나를 잘 갖다 내버렸다 생각하겠지."
"아무도 전화 한 통도 안하나?"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는다. 그마이 오던 막내도 통 연락이 없다."
시설 과장에게 물어보니, 진짜로 그랬다. 자주 오시던 분들도 최근에는 기별이 없다고 했다. 열이 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내 손으로 새로 쓰고, 과장에게 '나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결제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다. 남이사 지랄을 하든가 말든가, 이제는 내가 모실 수 밖에 없다는 걸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조금 무리를 해서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중고차도 한 대 샀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할머니를 모시고 어디든 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
그 생각을 처음 실행한 게 이번 설 연휴였다. 다른 사람들은 할머니를 모시러 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내가 외박신청을 냈고, 또 내 손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가고 싶다는 곳으로 모시고, 좋은 곳으로 데리고 다녔지만, 막상 거동이 불편하고 몸이 안좋으니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곳을 가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진작에 이렇게 할 걸'이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임용하자마자 면허를 따고 차를 샀으면, 행사 핑계 안대고 주말마다 놀러다녔으면 이런 후회까지는 안할 것을... 이런 후회를 하기에도 시간은 너무 야속하게 흘러버렸다.
그래도 명절이니 친지들 얼굴은 뵈어야 하겠다 싶어, 할머니께서 가자 하시는대로 큰 댁, 숙부댁 등을 차례차례 방문하였다. 그 때마다 할머니는 집에 들어간 지 30분도 안되어 나에게 '빨리 일어나자'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쌍욕을 해댔다.
"씨발년놈들이 왔으면 왔나 소리도 안하고, 식사 하고 가라는 소리도 안하고, 뭔 이런 새끼들이 다 있노. 개씹이다 개씹."
"와?"
"에미를 보러 올 생각도 안하고, 내가 이래 나와가 내가 직접 와갖꼬 봐야겠나. 아들 다섯 키워가 득 보는 게 하나도 없노 우째. 내 동서는 딸만 다섯이라고 시집에서 그마이 핀잔을 들었는데, 인자 보니 그 복이 다 내한테 와뿠네. 아이고 씨발 내 팔자야. 내 다시는 이새끼들 면회 오면 얼굴 보나 봐라. 앞으로 절대 외박 같은 거 안나온다."
'불편'하셨던게다. 아들놈들 집에 가도, 당신께서는 '불편'하셨던게다. 아무리 좋은 걸 얻어먹어도, 아무리 좋은 옷을 얻어입어도, 아무리 넓고 깨끗한 집에 있어도,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불편'하셨던게다. 자리에 앉은지 30분도 안되어, 손주의 좁고 어두운 원룸으로 가자고 보채는 할머니를 보며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했다.
허공을 힘없이 보는 할머니의 손이 그 때 눈에 들어왔다. 팔십년이 넘는 시간을 오롯이, 아득히, 바스라지도록 버텨내야 했던 세월을 보증하는 이 힘없는 손이, 그 때서야 눈에 들어왔다. 그 때서야 할머니의 분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팔십년 세월의 증표를.
시설 귀원을 앞두고, 좁은 내 자취방에서 할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계신다. 그 어디에도 마음 편히 의지할 곳 없는 팔순이 넘은 늙은이의 얕은 숨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이 슬픔과 노여움을 누구에게 풀 수 있을까. 이 외로움을 어디에 기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