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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3/25 15:27:48
Name 아무무
Subject [일반] [번역] What's expected of us
이 메시지는 경고입니다. 주의 깊게 읽어주세요.

아마도 당신은 '예측기'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 경고를 받는 시점에는 이미 수백만개가 시중에 팔린 후이기 때문이죠. 혹시 이 기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을 해 드리자면, 예측기는 버튼과 LED 화면 각각 하나씩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동차 키 정도 크기의 작은 기기입니다. 버튼을 누르면, LED 화면이 반짝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버튼이 눌리기 1초 전에 불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것을 처음 사용하면,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난 뒤에 버튼을 눌러야 하는, 별로 어렵지는 않지만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게임을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규칙을 깨려고 시도하면, 곧 그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화면이 반짝이는 것을 보기 전에 버튼을 누르려고 시도하면, 그 즉시 불빛이 들어오게 되며 아무리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여도 항상 빛이 반짝이고 난 뒤 1초 후에야 버튼을 누르게 됩니다. 반대로 화면에 불이 들어오더라도 버튼을 누르지 않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면, 절대로 깜박거리지 않습니다. 어떠한 시도를 하든, 불빛은 항상 버튼이 눌리기 1초 전에 나타납니다. 당신은 절대 예측기를 속일 수 없습니다.

예측기의 핵심은 음량의 계수를 갖는 시간지연 회로입니다. 일정한 시간 전으로 신호를 발송하는 회로이죠. 이 기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1초를 초과하는 시지연 회로가 개발되고 난 후에야 명확해 지지만, 이 경고는 그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측기가 즉각적으로 인류에게 불러온 문제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증한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허구성에 대한 논증은 물리학이나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논증의 무결점성을 인정하면서도, 결과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환상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반박이 불가능한 논리조차도 이를 소멸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측기는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유의지의 부재를 증명함으로서 말이죠.

일반적으로, 예측기를 처음 가지게 된 사람은 수일 동안 친구들과 함께 이 기기를 이겨보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가지고 놀게 됩니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흥미를 잃고는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함의하는 것을 잊지 못합니다. 향후 몇 주 동안, 예측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이들의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게 되고, 일정 비율은 본인의 선택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을 중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필경사 바틀비'처럼,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 행동을 하지 않게 되고, 예측기를 가지고 놀았던 사람들 중 약 삼분의 일 가량은 음식을 먹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무동무언증 진단을 받고 일종의 자발적인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사물을 바라보기도, 가끔 몸을 뒤척이기도 하지만 그 뿐입니다.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예측기가 발명되기 전, 무동무언증은 뇌의 전대상 피질 부위 손상으로 야기되는 매우 희귀한 질병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공포를 자극하는 것부터 뇌의 사고 회로를 파괴할 수 있는 괴델의 문장까지, 인류는 사유자의 정신을 파괴하는 생각의 존재에 대해 수 많은 추측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사고를 중단시켜버린 관념은 이미 대다수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자유의지의 허구성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것을 실제로 믿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환자들이 완벽한 소통 불가능 상태로 접어들기 전, 의사들은 이들의 생각을 반박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행복하고 활동적인 삶을 살았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어주며, 당시에 비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설득합니다. "당신이 저번 달에 내린 결정은 오늘 하려는 결심보다 절대로 더 혹은 덜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생활할 수 있어요" 라며 환자들의 상태를 호전시켜 보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질문에 "하지만 지금은 (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요" 라고 대답합니다. 몇몇은 그 이후 다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이러한 현상 자체가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낙담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에게서만 확인될 수 있는 현상이고, 로봇처럼 의지가 없는 대상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측기가 일부에게만 무동무언증을 유발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 - 즉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모든 형태의 행동은 결정론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추론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동적 시스템은 일정한 계수에 영향을 받아 고정된 결과값에 수렴할 수도 있고, 일정한 패턴이 없이 무작위적인 결과를 무한히 생성해 낼 수도 있지만, 둘 모두 완벽히 결정론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고는 당신을 기준으로 약 1년 후의 미래로부터 전송된 것입니다. 초 단위를 초과하는 시지연 회로 기술이 적용된 통신기기를 사용하여 과거로 발송된 최초의 장문 메시지입니다. 이후로 다른 사안들과 관련된 추가적인 메시지들이 전송될 것입니다. 제 경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십시오. 비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만이 당신이 걸어다니는 시체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문명은 이제 자기기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항상 그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 자유의지가 허상이기 때문에 누가 무동무언증에 걸릴지 혹은 그렇지 않을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것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측기가 당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지 당신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혼수상태에 빠져들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제 경고는 둘의 비율을 한 치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왜 이 메시지를 전송했냐고요?

제게 다른 무슨 선택이 있겠습니까.

Ted Chiang - What's expected of u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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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매우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소설입니다. 번역본을 찾아 보았으나 국문으로 번역된 것은 없는 것 같아, 시간을 내어 번역해 본 김에 PGR 여러분께도 소개해 드리고 싶어 옮깁니다.

국내에 단편소설 모음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 및 중편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두 작품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둘 모두 소장가치가 있는 훌륭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 되시면 한 번 읽어 보세요.

소설 원문은 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436/n7047/full/436150a.html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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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nyDaddy
16/03/25 15:41
수정 아이콘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읽고 눈물을 흘렸었죠. 안읽어보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권유드립니다.
아무무
16/03/25 15:56
수정 아이콘
저도 이 작품을 읽고 SF라는 장르를 이렇게 따뜻하고 감성깊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이 작가 제발 다작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16/03/25 18:20
수정 아이콘
연간 평균 1편도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ㅠㅠ
절름발이이리
16/03/25 15:44
수정 아이콘
16/03/25 16:42
수정 아이콘
닥터 후 생각나네요
나의규칙
16/03/25 16:5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에 좋은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무
16/03/25 17:27
수정 아이콘
앞으로 종종 시간 나면 번역해서 올릴게요. 잘 읽으셨다는 댓글 보니 기분이 덩달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Teophilos
16/03/25 17: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아무무
16/03/25 19:10
수정 아이콘
넵 앞으로 시간 되면 더 많이 공유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쩌글링
16/03/25 17:50
수정 아이콘
굉장하네요.
16/03/25 18:19
수정 아이콘
이야. 읽으면서 '이거 엄청나다, 그저 인터넷에 누가 올리는 수준의 글이 아니다' 싶었는데 테드 창이었군요! 번역 감사합니다.
아무무
16/03/25 19:09
수정 아이콘
혹시 비슷한 작가나 작품 아시면 추천 좀 해 주세요. 이런 작풍은 참 찾기 힘든 것 같아요 ㅠㅠ 혹 국문으로 출품은 안되었지만 공개된 작품이 있으면 시간 될 때 추가로 작업해 보고 싶습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16/03/25 19:19
수정 아이콘
와우.
대단하네요.
인생의 마스터
16/03/25 22:25
수정 아이콘
픽션인거 모르고 읽다가 섬찟 했네요;
내맘에미네랄
16/03/25 23:0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소개와 번역 모두 감사드립니다.
염치없지만 ^^ 자주 부탁드립니다~ (__)
아무무
16/03/26 13:07
수정 아이콘
네 혹시 좋은 작가 아시면 추천해 주세요~ 앞으로 종종 제가 아는 작품들 공유드리겠습니다!
16/03/26 00:53
수정 아이콘
의지는 인간이 제어할수 있는 인식의 범위에서는 자유롭다고 할수 있죠 원자물리계층까지 내려가면 어차피 인간이라는 물질조합은 의미 없으니까요
16/03/26 15:45
수정 아이콘
STS라는 학문을 소설로 나타내면 테드 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번역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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