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들이 쭈뻣쭈뻣 유민 선배의 장단에 맞춰 건배한다.
다 같이 어색한 잔을 부딪히고, 원샷. 캬.
술 맛 한 번 죽인다.
이후로 이어지는 유민 선배의 토크쇼 덕분인지,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해졌다.
그래봐야 신입생들보다 두 살 많은 사람인데 좌중을 장악하는 입심이 대단하다.
어린 나이부터 크게 될 싹이 느껴진다. 성격이며, 입담이며, 외모까지.
지금이야 은하에 집중하고 있다지만, 유민 선배도 정말 괜찮은 여자같다.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들과는(그래봐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또 다른 매력이 있달까.
[은하야.]
한창 얘기 도중 옆에 앉은 은하의 귀에 소곤거린다.
- 왜?
귀여운 것.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소곤소곤 대답한다.
[너 번호 물어보고 싶었다며, 지금이 기회야 다른데 가기 전에
빨리 번호 물어봐.]
- 아...
내 말에 은하가 핸드폰을 슬쩍 만지작거린다.
- 괘, 괜찮으려나?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은하의 모습을 비웃는 게 아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 순수한 모습에 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 야 너희 둘!
둘이서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을 본 유민 선배가 외쳤다.
나야 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은하는 깜짝 놀랐는지 흠칫 어깨가 올라갔다.
- 딸꾹.
아주 찰나의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깨는 은하의 딸꾹질.
- 니네 뭐야? 벌써부터 그렇고 그런거야?
유민 선배가 씨익 웃었다.
저렇게 대놓고 유쾌한 웃음을 짓는 걸 보면 그냥 장난에 불과한데,
- 아, 아, 아니에요! 선배님. 딸꾹.
은하의 반응이 참... 읽기가 쉽다. 뭐 이런 반응이 나한테는 호신호이기 때문에
더욱 좋았지만.
- 그럼 뭐야? 뭘 둘이 소근거려. 나도 좀 같이 재밌자고. 후배님?
- 그, 그게... [제가 은하한테 선배님 번호 좀 물어보라고 했거든요.]
당황한 은하를 대신해 대답한다.
- 읭? 내 번호? 그걸 왜 굳이 귀에 대고 얘기해. 시원하게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지난 번 일도 있어서 그렇고, 은하가 선배님이랑 많이 친해지고 싶어하거든요.]
- 지난 번일?
하긴 이 양반(?)은 잘 기억 못 하려나. 2차를 가서 얼마나 술을 더 먹었을지도 모르는 거고,
술자리에서 가는 사람 붙잡는 인간들을 하루 이틀 한 번 보는 것도 아닐테니.
[예전에 어떤 선배님들한테 2차가자고 붙잡혀서 은하가 좀 곤란했는데 선배님이 도와주셨거든요.]
- 아?
유민 선배는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몇 초.
- 아! [기억나세요?]
- 은하가 그 강아지였어?
- 강아지요?
개자식이라는 의미는 아닐테고. 은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 아아. 그런 자식들한테 붙잡혀서 낑낑대는 게 귀여운 강아지 같았거든. 키득.
풋. 표현이 아주 적절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오구오구. 이리 줘봐 핸드폰.
유민 선배는 그대로 은하의 폰을 낚아쳐 꾹꾹 번호를 눌러줬다.
어찌되었건 유민 선배의 번호를 따낸 은하는 살짝 기쁜 듯한 표정이었다.
- 이제 다른 데도 좀 돌아다녀봐야겠다. 나 없이도 재밌게 놀고 있어 애들아.
적당히 분위기를 띄운 채 유민 선배가 유유히 사라진다.
한 껏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만들어주고, 신입생들끼리 놀 시간도 만들어주다니.
유민 선배는 괴, 굉장한 선배였다.
2.
유민 선배가 사라진 뒤에도 다행히 좋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은하조차도 조금씩 말을 트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기쁜 듯 은하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있다.
아니, 그냥 술 때문이려나?
어쨌든 중요한 건 새내기들끼리 편하게 얘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잡혔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서브미션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 고백해버리고 나면, 그게 성공이든 실패든 서브미션인 박재신 엿먹이기를 실행할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으니까.
사실 이미 박재신을 엿 먹일 준비는 다 되어있었다. 내가 미리 뿌려둔 씨앗들이 발아하고 있을테니.
이름하여 박재신 씨 발아. 오해 말자. 박재신을 향해 뿌려둔 씨가 발아했다는 뜻일 뿐이니까.
말한 것처럼 그렇게 거창한 일을 벌일 것은 아니다.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눈덩이하나를 쓱 굴리는 것 뿐이다.
물론 소문이라는 것은 구르고 굴러 아주 큰 스노우볼이 되어 박재신에게 날아들겠지만.
[어? 뭐가 자꾸 그렇게 와? 은하야.]
은하가 누군가의 문자에 답장하는 순간을 매의 눈으로 캐치!
누군지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키득키득.
안 봐도 박재신이겠지.
과연 니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에게 작업을 쳐 뒀을지 기대되는구나.
만약, 은하에게만 이렇게 들이댔던 거라면 내 작은 계획은 무용지물이 된다.
서브 미션은 당연히 실패.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점에서만큼은 박재신을 골탕먹일 이유도 여지도 없는 셈이었으니까...는 개뿔
안 먹힐리가 없다. 내가 아는 그 박재신이라면.
- 응? [재신선배님? 아, 박재신 선배님이었어? 매번 그렇게 문자오던게?]
선배님이라고 호칭해주는 것도 구역질이 나오지만, 한 번 참아준다.
- 아 그게...
일부러 살짝 주변 아이들에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또렷하게 얘기한다.
[되게 문자 자주한다. 은하 좋아하나...?]
덤으로 시무룩한 표정까지 짓는다. 은하는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한 듯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 아, 아냐 그런거!
- 어? 재신 선배님? [너도 알아?]
건너 건너에 예쁘장하게 생긴 새내기 여자애 한명에게서 입질이 온다.
크,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동그랗게 뜬 눈을 꿈뻑거렸다.
- 알지. 나한테도 되게 문자 많이 오는데...
- 너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릴레이. 도화선은 그대로 악셀레이트.
- 하... 뭐야... 특별히 나만 챙겨주는 거라더니...
- 뭐?
크크크. 아주 재밌는 상황이다. 역시 제일 재밌는 건 불구경이다.
그게 실제로 타는 불이든, 마음의 불이든. 팝콘만 있다면 금상첨화일텐데.
에잇, 아쉬운대로 안주로 놓인 강냉이를 수북이 집어 입에 구겨넣는다.
- 이상하다... 나한테도 그랬는데...
아주 사소한 소문의 근원.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궐하리라.
소문은 돌고 돌아 최소한 신입생들 사이에, 특히 여자들 사이에 박재신에 대한 평판은 쓰레기가 되겠지.
이 여자 여자 찔러보는 새끼로.
<<< >>>
서브미션 달성.
달성률 - ???
현재로썬 달성률을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서브미션을 달성했습니다.
스킬 포인트 + 1을 획득합니다.
스킬포인트라... 어디에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게 되겠지.
어쨌든 조금이나마 박재신을 물먹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더 심한 짓을 해주고 싶었지만, 당장 과에 대한 장악력이 0인 나로써는 이 정도에도
충분히 만족한다. 무엇보다 손 안 대고 코 푼 셈이 되었으니까.
더 이상 내가 뭘 하지 않더라도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는 신입생 동기들이 알아서 해줄테니까.
자, 이제 남은 건 은하 뿐이다.
8끝 9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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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재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습니다.
잠시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왔고, 누나가 결혼해서 이것저것 부탁을 해서요.
모쪼록 그래도 잊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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