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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2/28 19:35:03
Name 王天君
File #1 movie_image_(5).jpg (66.6 KB), Download : 56
Subject [일반] [스포] 자객 섭은낭 보고 왔습니다.


때는 당나라, 가신공주 아래서 섭은낭은 자객으로 길러집니다. 검은 옷을 입고 단칼에 목숨을 빼앗는 그는 이미 최고의 살수라 할 수 있었죠. 허나 섭은낭은 어떤 암살을 실패하고 맙니다. 죽여야 할 상대가 껴안고 있던 어린 아들이 너무 귀여워 차마 베지 못했던 것이죠. 스승인 가신공주는 이를 나무랍니다. 그리고 자객의 마음가짐을 단련하기 위해 섭은낭에게는 더 가혹한 임무가 내려옵니다.  섭은낭은 자신의 사촌이자 한때 약혼자인 계안을 죽이라는 명을 받습니다. 이 무정의 길을 완수하기 위해 섭은낭은 계안이 다스리는 위벽으로 향합니다.

<자객 섭은낭>은 그렇게 친절한 영화는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의 짤막한 설명이 끝나면 무표정한 주인공과 암시적인 대사를 따라가느라 줄거리를 이해하기가 좀 벅차죠. 템포 역시 일반적인 무협영화와는 다릅니다. 북소리가 긴장감을 울리지만 서사에 따라 뭔가 쌓여간다는 느낌도 거의 없습니다. 짧은 결투씬이 지나가면 영화는 풍경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정적이고, 나른합니다.

영화는 “강호”라는 낱말 그대로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데 더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인물들이 튀어올라 부딪히는 에너지의 발판이 아닙니다. 영화에는  의례 나올 법한 경공술의 묘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낙하를 강조하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들을 보여주죠. 높은 산은 구름에 쌓여있습니다. 강은 빠르지 않고 호수는 물결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태초의 자연이 화면을 채우고 그 사이에서 인간은 부분으로 존재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사람이 녹아나있는 속세의 모습 또한 걸어놓습니다. 고아한 녹음이 무성한 가운데로 햇빛이 쏟아지면, 인물들은 나무 사이사이를 걷고 뛰면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풍경에 더합니다. 갈대가 결을 자아내고 그 가운데를 말과 함께 사람이 가로지릅니다. 민화와 산수화가 교차하듯 다른 종류의 시각적 심상이 한 화폭에 세계를 담아내는 것이죠. 영화 속 인공적인 미 또한  그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의상이나 궁궐의 장식은 인위적인 화려함을 뽐내며 시선을 붙들어놓습니다. 어느 쪽이든 영화는 현실과는 유리된 별도의 세계를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존재하는 현실을 필름에 담고 화면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변모시키는, 씨네 아티스트의 원초적 욕망을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죠.

영화 속 섭은낭이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초반의 첫 장면 뿐입니다. 나머지는 그를 향한 공격을 막고 피하는 동작과 상대를 무력화시는 한번의 반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연출적인 면에서 미니멀한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점점 고조되는 대결이 찰나의 순간 섭은낭의 반격으로 치솟아오르며 정과 동 사이를 예고 없이 넘어가는 거죠. 그래서 영화는 한 없이 느긋하다가 더 없이 격렬해지고, 결국 정이 동을 삼키며 다시 고요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한번 깨진 고요는 섭은낭의 단도처럼 다시 격激을 품고 무거우면서 멈추지 않는 흐름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영화는 안개를 뚫고 낮게 나는 제비와 같습니다. 순간 흩어지고, 무언가가 지나가지만 저 너머의 세계는 다시 어슴푸레해지며 깨질 것 같지 않은 정의 상태에 휩쌓입니다.

이 액션은 섭은낭이 추구하는 인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섭은낭은 말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적의와 분노를 다 받아내줍니다. 그리고 상대를 제압하면서도 상처 입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싸움은 다른 이를 지키고, 자신의 협을 정진하는 수련이며, 폭력과 감정이 요동치는 외도의 유혹을 뿌리치고자 함입니다. 섭은낭이 처음으로 검에 회의를 품었던 장면은 바로 어린 아이의 귀여움이었습니다. 정을 억누르고, 힘의 세계 속에서 도구로 존재하는 이가, 처음으로 인간다움에 맞닥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었죠. 섭은낭은 베지 않기 위해 검을 휘두릅니다. 자신을 베려는 자의 가면을,옷깃을 베어 뜻을 전할 뿐입니다.

<자객 섭은낭>의 화면에는 일관된 특징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인 인물들은 무언가에 반쯤 가려져서 불투명하게, 또는 사이 사이로 보입니다. 나무, 억새, 연기, 구름, 장막 등의 물체 뒤에 인물들은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는 이들을 자연스레 훔쳐보는 구도가 됩니다. 훔쳐본다는 것은 넘어갈 수 없는 경계가 있을 때 생기는 행위입니다. 일차적으로 이는 섭은낭의 시선을 재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섭은낭은 커튼 너머로 계안과 그의 둘째 부인 호희를 훔쳐봅니다. 과거의 연인이,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을, 현재 정을 주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죠. 거기에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경계가 있고, 적이라는 경계가 있고, 전하지 못하는 감정의 경계가 있습니다. 계안의 이야기 속에서 과거 은낭은 병으로 죽어가던 계안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가 생겼고 본다는 행위의 본질은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섭은낭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카메라의 시선이 섭은낭을 대변하지만은 않습니다. 섭은낭을 비출 때도 카메라는 계속 사이사이로 시선을 향합니다.이는 결국 스크린 속 세계를 향한 관객의 훔쳐보기가 됩니다. 훔쳐보는 것은 불완전한 관찰입니다. 어떤 세계가 존재하지만 관객은 이를 온전히 인지할 수 없습니다. 가리워진 것은 모르는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완전히 꿰뚫고자 하는 욕망은 경계 너머의 세계와 부딪힙니다. 전부를 파악하는 행위는 모르는 상태의 신비를 들춰내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허구의 세계 뒷편에 인물들이 안겨있는 듯,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인간이 스크린 너머의 세계로 완전히 흡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섭은낭은 끝내 아무도 베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여야 했던 계안을 죽이지 않고, 아이를 가진 호희를 지킵니다. 자객 정정아의 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베려는 스승의 옷 위로 피 없는 칼자국을 남길 뿐입니다. 검에는 검으로, 악에는 인으로. 꺾어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힘이라면, 꺾이지 않아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 멋대로 인이나 협 같은 단어를 빌려오긴 했지만 그 고고한 뒷모습을 하나로 축약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꼿꼿하고 단호한 침묵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요. 끊을 수 없던 것과 끊어야 할 것 앞에 망설이지 않는 섭은낭을 보며 모든 말을 도로 삼킵니다. 아름답다는 말조차도 끝내 꺼내서는 안될 것처럼.

@영화의 아름다움을 제 멋대로 어지럽히고 마는 언어의 한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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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nenbaum
16/02/28 21:53
수정 아이콘
연작(?) 잘 보았습니다.
상대 취향 무시하고 본인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영웅본색을 제외하고 세편 중 딱 하나만 추천을 한다면 어떤 영화이신가요?
王天君
16/02/28 21:56
수정 아이콘
자객 섭은낭입니다 :)
드라고나
16/02/28 22:48
수정 아이콘
본문 글이나 스틸사진을 보니 호금전의 후기 영화들이 떠오릅니다. 풍경으로 가득찬 모습은 70년대 호금전 영화들의 특징이죠.
허우 샤오시엔이 무협 영화를 찍는다는 말 봤을 때부터 액션물은 안 나오겠거니 했는데 예상대로군요. 극장에서 보긴 힘들고 나중에 블루레이 등으로 한번 꼭 봐야겠습니다.
王天君
16/02/28 22:52
수정 아이콘
오 좋은 영화 추천 감사합니다. 요즘 들어 홍콩 영화에 점점 관심이 가고 있어요.
큰 화면으로 보셔야 제대로 느끼실 수 있을텐데!! 어떻게든 꼭 보시길 바랍니다.
드라고나
16/02/28 23:09
수정 아이콘
본문만 봤을 때 섭은낭과 제일 가까운 스타일은 공산영우 아닌가 싶고, 협녀와 충렬도도 보통 무협영화에 원하는 재미와는 좀 거리가 있지만 본문 스틸컷에 나오는 연기를 이용해 수묵화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이 영화들이 원조입니다.
제가 호금전 감독 영화중 제일 재밌게 본 건 용문객잔하고 대취협 같은 초기작들인데 이 쪽은 스타일이 후기와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수면왕 김수면
16/02/29 07:46
수정 아이콘
크으 용문객잔. 명작입니다.
王天君
16/02/28 23:15
수정 아이콘
참고로 저건 촬영용 연기가 아니랍니다. 진짜 안개죠!
아무래도 무협지를 좀 읽어야 호금전 영화들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겠죠? 김용 작품 정도는 좀 읽어놔야 할 것 같은데
드라고나
16/02/28 23:20
수정 아이콘
호금전 감독 영화들은 王天君님이 지금 본문같이 감상하신다고 하면 딱히 무협소설 읽지 않아도 감상에 별 문제 없을 겁니다. 꼭 호금전 감독 영화가 아니라도 무협영화들 중 무협소설 읽어야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없지 싶군요.
王天君
16/02/28 23:22
수정 아이콘
알겠습니다. 살짝 검색해봤는데 호금전 대단한 감독이군요.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임청하 필모를 흝고 싶은데 그 중에 신 용문객잔이 있어서 원조 용문객잔에 대한 동기가 부여되네요 하하
드라고나
16/02/28 23:48
수정 아이콘
영화 완성도야 어쨌든 임청하가 예쁘게 나오면 된다 생각하시면, 도마단과 몽중인을 권합니다.
王天君
16/02/29 00:01
수정 아이콘
일단 괜찮은 것부터 보려구요. 백발마녀전이나 동사서독 같은 것들. 말씀해주신 호금전 영화들도 먼저 보고 나서요.
yangjyess
16/02/29 00:37
수정 아이콘
홍콩영화 좋아해서 많이 봤었는데 앞으로 王天君님의 홍콩영화 리뷰 정말 기대됩니다 !
킹이바
16/02/29 02:45
수정 아이콘
화려한(혹은 유치한) 경공술이나 권법과 같은 이미지 탓에 개인적으로 무협장르를 선호하진 않는 편인데, 덕분에 훨씬 만족했던 영화입니다.
흡사 무성영화 같기도 하고.. 무협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 있다니 좋았습니다. 말 그대로 정중동의 미학이 돋보이던 영화였네요.
candymove
16/02/29 10:00
수정 아이콘
무협영화라는 말에 속아..허우샤오시엔 회고전 때 보러갔었는데...제가 생각한 무협영화는 아니어서 졸음을 참으면서 봤습니다.
댓글에도 언급된 신용문객잔 같은 걸 생각하고 갔는데 대망..

왕천군님이 재밌게 보셨다니 이런걸 재밌게 보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씨네21에서도 극찬일색이긴 하던데..
감독인터뷰를 보니까 현실적인 무협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데 이건 너무심하지 않나-_-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사서독보다 지겨웠던듯...
이런 영화가 다시 메이저하게 개봉된다는 사실 에 좀 놀랐습니다 크크 이 감독 네임밸류가 꽤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천군님의 리뷰를 좀 더 관심있게 정독했는데, 점점 영화를 보시는 폭이 넓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 남는건 서기가 생각보다 예쁘다, 쯔마부키사토시 비중이 생각보다 적다, 음악은 좋았다..정도밖에..

개인적으로는 신용문객잔이나 동방불패 류의 무협영화들의 전성기가 다시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영화기술로 훨씬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 2000년대 나오는 무협들은 죄다 cg떡칠에 스토리도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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