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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2/28 19:25:15
Name 王天君
File #1 Dressmaker_1_1024x527.jpg (99.0 KB), Download : 43
Subject [일반] [스포] 드레스 메이커 보고 왔습니다.


버스 한 대가 모직처럼 펼쳐진 을 지나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버스에서 내린 여자의 한 손에는 재봉틀 가방이 들려있고, 화려한 옷차림은 이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순찰 중이던 경찰 파렛 아저씨는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쫓겨난 머틀 더니지가 돌아온거죠. 더 이상 머틀이라 불리길 거부하는 틸리 더니지가 온 이후 마을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촌스럽기만 하던 여인네들의 옷차림이 점점 화려해지고 마을에는 활기가 넘치죠. 이 모든 변화를 일으킨 틸리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기가 사람을 죽인게 맞는 건지, 정말로 행복해 질 수 없는 운명인지 틸리는 알아내야 합니다.

<드레스메이커>는 행복해지고 싶은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불행한 과거를 지닌 여자가 마법 같은 능력을 가지고 운명을 바꾸려한다는 이야기죠. 영화 속 프로타고니스트들은 전부 다 여성입니다. 틸리의 지원세력인 경찰관 파렛도 아름다운 옷에 정신을 못차리는, 여성적 면모를 지닌 남성이구요. 틸리를 비롯한 여자들은 이 촌구석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바로 “아름다워진다”죠. 틸리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디자이너입니다. 틸리의 옷을 입고 여자들은 이전과 다른 존재감을 획득합니다. 그렇다고 꼭 사랑받는 게 이 영화의 지상목적은 아니에요. 틸리와 맺어진 동네 훈남 테디는 행복을 주는가 싶다가도 곧바로 죽어버리거든요. 오히려 이 영화는 여성의 존재를 나름 독립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끝에 가면 남자들은 죗값으로 험한 꼴을 당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두고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죠.

그러나 <드레스메이커> 는 이 주제를 뚝심있게 풀어놓지 못합니다. 일종의 칙릿Chick Lit처럼 여성의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고 해요. 일단 주인공인 틸리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미친 여자의 자식, 문란한 여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도 떼어내야 합니다. 사랑도 쟁취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여성의 세상을 바꿔야합니다. 개인의 성장, 성공, 관계, 계몽, 이 모든 이야기가 갖가지 장르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입니다. 영화는 미스테리처럼 폼을 잡다가 갑자기 로맨틱 코메디로서 발랄해지고 관계나 성장을 이야기할 때는 드라마로서 잔잔해집니다. 심각, 진지, 귀여움, 비극 이런 식으로 해리성 인격장애 환자처럼 영화의 톤 자체가 휙휙 바뀌는거죠. 보다보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까지는 달콤살벌하게 폼을 잡고 있더니 다음 씬에서는 바로 무거운 신파를 보여주니까요.

혼합된 장르들은 오히려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 훈남 동창은 틸리와 사랑에 빠지고, 반쯤 정신이 나간 엄마가 딸을 꾸짖으면서 일과 연애 모두 도와주고, 그러면서도 코메디 감초 역할을 계속 하고, 동네 사람들은 박쥐처럼 태도를 바꾼 후 틸리를 핍박하고… 영화는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이 없습니다. 때문에 틸리의 삶에서 뭔가 재미나 감동을 느낄 구석도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되겠거니 하면 딱 그렇게 돌아갑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틸리의 인생은 우리가 다른 영화들에서 숱하게 봤던 것들이라 오히려<드레스메이커>전체가 어떤 짜집기처럼도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건과 갈등이 유기적으로 이어져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르나 주제가 다른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고 이것들이 섞이면서 전체 이야기가 뚝뚝 끊어집니다. 그 와중에 케이트 윈슬렛 혼자 정극연기와 가벼운 연기를 넘나들며 혼자서 붕 떠 있구요.

무엇보다도, 문제는 이 영화가 복수극을 표방한다는 점입니다. 틸리에게 충분한 동기가 있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위선적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복수로 마무리짓기에는 출발점과 과정이 들어맞질 않습니다. 틸리는 복수하고 싶어했던 게 아닙니다. 뭔가를 바꿔보려고 했고, 어느 정도는 바꿔냈죠.  자기가 떠나있던 집과 어머니를 포함해 자신을 바라보는 이웃들, 아들을 잃고 자신을 원망하던 일마낙 여사까지 자신을 향한 편견과 불신의 세계를 극복하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부터 이상하게 신파로 흘러가요. 틸리는 기억을 되살려 자기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진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틸리는 사람들에게 믿어달라며 애걸하고, 호의적이던 사람들은 갑자기 틸리를 냉대합니다. 당당하던 틸리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거죠. 영화가 난데없이 복수의 동기를 마련하는 겁니다.

영화는 파괴적으로 급선회합니다. 인정받고, 성장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해코지하고 죽이는 이야기가 되는거죠. 마을 사람들은 틸리를 등한시하고 틸리의 조력자이던 어머니와 프랫 아저씨도 곁을 떠납니다. 틸리는 자기 마을 사람들 대신 라이벌들의 옷을 만들어주고 이들을 돕죠. 틸리를 괴롭히던 사람들은 죽습니다. 연극에서 진 채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잿더미가 된 마을에 벙찝니다. 이렇게 되면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잘 해볼려고 했지만 그게 안되니까 결국 화내고 다 박살내버리는 왕따의 복수극이 되버립니다. 이 복수는 애초에 계획되었던 것도,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희망과 변화를 노리던 사람이 절망과 울분에 차서 모든 것을 파괴한다면, 여기에서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을까요. 오히려 실패한 사람의 울적함이 더 진할 뿐이죠.

결국 이 영화는 결말이 제목을 배반하는 형태를 띄게 됩니다. <드레스메이커>, 즉 뭔가를 만들고 입혀서 변화를 꿈꾸던 사람이 모든 걸 다 불태우고 자포자기하는 이야기가 되지요. 창조를 이야기하는가 싶다가도 종래에 도달하는 것은 부정과 환멸이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틸리 더니지는 외톨이로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결말은 전혀 쿨해보이지 않습니다. 그 모든 패션쇼와 미스테리는 대체 뭘 위한 거였을까요.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40살인 케이트 윈슬렛이 30도 안된 사라 스누크나 리암 햄스워스와 동갑내기인 척 하는게 말이 되나요.

@ 시골 사람들이 오뜨 쿠튀르 스타일의 옷에 그렇게 쉽사리 적응한다는 건 좀 많이 이상합니다.

@ 애정합니다 사라 스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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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28 19:38
수정 아이콘
신종 연참인가요. 잘읽었습니다.
16/02/28 20:32
수정 아이콘
저는 극장에서 참 재밌게봤습니다. 같은 날 데드풀 캐롤을 같이 봤는데 가장 좋았네요 크크
빵pro점쟁이
16/02/29 18:47
수정 아이콘
저는 흥미진진하게 보다가 남친 다이빙.. 부터 약간 어이가 외출하더니 앞에 깔아놓은 복선들 연달아 작렬할 때 무슨.. 도그빌 코믹 버젼인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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