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스펙남의 유쾌발랄한 인생사 -1- (링크를 잘못 올렸었네요. 수정했습니다.)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62407&page=2
원래는 파트를 잘게 나눠서 천천히 올릴려고 계획중이였는데.. 현기증 느끼시는 분들을 위해... 좀 서둘러서 쓰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길게 가면 저도 힘들고 보시는 분들도 지루해 하실 것 같아서 중요한 포인트 외의 부분은 압축해서 써볼려고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그리고 이번 편은 분량이 적은 점 양해해 주시길.. 일 끝나고 올 때마다 너무 피곤하네요.. 흑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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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바로 왕따와 괴롭힘이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는.. 괴롭힘이라고 하기엔 강도가 세진 않았다.
옆의 덩치 큰 짝지가 식사시간에 내 반찬을 뺏어먹는 정도였을 뿐이다. 물론 화를 낸다는 개념 자체가 내겐 없었다.
이 상황이 화내야 되는 상황인지도 몰랐다. 그냥 별 일 아니다? 이 정도로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5학년이 됬다. 덩치 큰 짝지는 다른 반으로 갔지만 엉뚱한 놈이 날 괴롭혔다. 내가 어디 갈 때마다 종종 따라다니며 연신 꼬집어댔다.
물론 화를 낸다는 개념은 역시 없었다. 그냥 당했다. 중간에 그걸 막아준 친구가 아니였다면 .. 난 5학년 내내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그걸 막아준 친구는 날 참 잘 챙겨줬다.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맛나는 음식도 먹이고... 축구도 가르쳐 주고.. 사람이랑 어울리는 게 좋다는 걸
처음으로 일깨워 준 친구였다. 하지만 얼마 안되서 서울로 이사가 버렸다. 그녀석이 이사한 후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는데 그 쪽지를 잊어버렸다. 지금도 평생의 한으로 남는 기억이다.
그렇게 6학년이 됬는데 이때가 참 웃겼다. 친구도 많이 생겼지만 괴롭히는 애들이 더 늘어났다. 이번엔 2명이 번갈아 가면서 괴롭혔다. 그래도
이놈들은 그냥 말로만 좀 놀리는 정도여서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생활은 마무리되고 중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본격적인 비극의 서막이 시작됬다. 우리 반에서 나름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날 번갈아 가면서 괴롭혔다. 가위바위보 게임해서 멍들 때까지
때리고 땡고 때리기 게임을 해서 내 이마에 멍을 상냥하게 새겨줬다. ( 참고로 난 피부가 약해서 멍이 생기면 엄청 오래 간다. )
이때도 난 화를 낸다는 개념이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가 싫었다. 사람이 싫었다.
"난 이놈들에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난 왜 괴롭힘을 당해야 되지? " 지금 생각하니.. 공부도 30명 중에 28등이었고 운동도 잘하지 못했다.
100미터 달리기가 21초 나올 정도였으니까. 성격도 어리숙했고 어리버리했고... 승냥이들의 타겟이 되기 딱 좋은 어린 양이었다.
그런 과정을 반년 이상 겪고나서 결국 부모님이 아시게 됬다. 학교로 찾아왔다. 난 한심한 놈 취급을 당했다. 부모님에게 말이다.
"사내새끼가 한심하게 말이야.." 라고 말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피해자일 뿐인데? 내가 왜 욕먹어야 되지? 난 부모님이 최소한
감싸줄 줄 알았는데? 잘못한 건 저녀석들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쳤다. 이때 난 처음으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학교에서의 왕따... 결코 끝난 게 아니였다. 물리적인 폭력은 더이상 없었다. 하지만 은따가 시작됬다. 모든 애들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뱉는 말투가 차가워졌다. 난 사람이 아니였다. 그저.. 화풀이 대상인 심심풀이 땅콩일 뿐이였다. 모든 게 싫었다.
공부? 개나 줘버려.. 내가 마음이 너우 아픈데 공부 따윌 왜 해야 되지? 아니.. 공부 자체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게 그 당시 상황이었다.
왜 해야 되는지도 몰랐고 할 필요도 못 느꼈던 게 공부다. 그렇게 성적은 만년 꼴찌였다. 유일하게 잘 했던 건.. 국어 하나뿐이였다.
은따는 중2땐 잠시 잠잠하다가 중3때 다시 심해지고 내 마음에 난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채 농업쪽 실업계 고등학교로 가게 된다.
이때도.. 고1땐 잠시 은따당했다가 2학년 때 친구들을 잘 만나게 되면서 마음의 상처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어리숙하고 멍청했던 내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공부? 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왜 그렇냐고 물어본다면.. 논리적으로 답변할 자신이 없다. 변명이라고 한다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위로받고 싶은 감정만 가득했기 때문에 공부 따윈 전혀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았던 걸로 밖에 답변이 안 된다.
그렇게 여전히 내 인생은 막장인 상태로 전문대에 진학했다. 은근슬쩍 시비 거는 놈이 있긴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뭐.. 여전히 공부는 안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난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그 때 같이 따라간 친구가 담배를 권했는데... 참 맛이 없었다.
대충 담배를 피고.. 어머니한테 전화했다. 흐느끼셨다. 많이 걱정되셨나 보다.
이해가 안 된건 아니다.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머리도 잘 못쓰니.. 뭐 하나 믿음직한 부분이 없는 막둥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군대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지만.. 몸이 그렇지 않다고 연신 외쳐대니... 갈 수밖에 없는 것을... 그렇게 부모님의 흐느낌을
뒤로 하고 군대에 가게 된다. 내심 생각했다. 뭐..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인데 별 게 있겠어? 이제 학교에서의 참혹했던 기억은 많이 지워졌으니
새 출발이 가능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비극의 전조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훈련소에서는 별 문제 없었다. 하지만 후반기 때부터 뭔가 좀 이상했다. 동기들이 대부분 내
나인데.. 날 은근슬쩍 멀리했다. 안 어울려줬다. 아무래도 난 동갑이랑 잘 못사귀는 것 같다. 뭐 아무것도 어필할 게 없으니.. 대놓고 물어뜯진
못해도 전혀 어울리고 싶지 않은 존재였었나 보다.
자대에서 그 전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됬다. 대구 사람인 내 맞선임은 허구한 날 집합해서 연신 뺨을 때렸다. 5기수 선임이었던 놈은 탄약고에서
날 미친듯이 때려서 양쪽 허벅지에 피멍이 들었다. 일주일 동안 못 걸어다녔고 샤워도 새벽에 몰래 했다. 물론 난 선임들에게 전혀 인기없는
존재였다.
운동도 못했고 공부도 못했고 성격도 어리숙했으니.. 선임도 후임도 날 호구로 봤다. 연신 물어뜯겼다. 다행인 건 그 중에서도 천사가 있었다.
내 10기수 선임이고 같은 부산 사람이였던 형과.. 성격 착했던 걸 좋게 보고 나와 같이 놀고 싶어했던 몇몇 선임과 후임들..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난 그들의 중심축에 끼지 못했다. 동기들한테까지 무시받았다.
지금도 그 중에서 날 잘 챙겨줬던 동기가 한 말이 기억났다. " 넌 좀 더 독해져야 되. " 그 당시엔 이 말이 무슨 의민지 전혀 몰랐다.
그 충고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전역할 때까지 선 후임들 밥이었다. 분노만 미친듯이 쌓이는데.. 그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전혀
몰랐다. 더 웃긴것은 나를 밥으로 봤던 걸.. 군대에 있을 땐 날 무시하는게 아닐 거라고, 별 문제 없다고 생각했던 내 순진무구함이었다.
그저 좋게 대해주면 나도 좋게 대해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진심으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였는데 말이다.
그렇게 상처 아닌 상처가 전혀 아물지 않은 채로 난 전역했다. 학교에 복학했다. 여전히 공부는 하지 않았다. 학점도 엉망이였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속됬던 아버지의 술버릇과 행패, 어머니의 고통어린 절규.. 형은 학교생활에 바빠서 집안 상황을 돌봐줄 틈이 없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내게로 미쳤다. 아버지는 형이 오면 잠잠했지만 내가 있으면 아무 거리낌없이 분노조절장애란 무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썼다.
난 집에서 아무 힘이 없는.. 그저 가죽이였을 뿐이였다.
숨이 막혔다. 친구도 없고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누구 하나 위로해줄 사람이 없었다.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탈출하고 싶었다. 이 지옥에서. 그 상황에서 한줄기 빛같은 정보가 왔다. 대학 동기중에 아는 형이 서울에서 의류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단다. 그런데 자기가 갈려니 자격증 시험 때문에 갈 상황이 안되서 나한테 대신 갈 생각 있냐고 물어봤다.
난 바로 승낙했다. 무슨 일이든지 이 지옥을 탈출하고 싶었다. 절망밖에 남아있지 않은 비참한 인생을 한 번이라도 바꿔보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에겐 대충 말씀드리고 서울로 갈 짐을 챙겨서 떠났다. 마음이 복잡하지만 단 하루라도 지옥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1순위였다.
마침 겨울이라 서울의 공기는 부산에 비해 매우 차가웠다. 내게 잘 어울리는 계절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반 나절이 지난 후 만나기로 했던 장소인 서울 송파구에 도착했다. 마침 그 형이 따뜻한 커피캔 2개를 손에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권했다. 말을 나눠보니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 형을 따라가면 최소한 손해볼 장사는 안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약속장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사무실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네트워크 마케팅. 즉 다단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