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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5/08 20:44:42
Name 바위처럼
Subject [일반] 헥스밤님의 그 모든 노래들을 읽고.


https://pgr21.co.kr/?b=1&n=541

제목의 글은 추게에 있으며 위 링크를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제가 민가를 자주 듣기 시작한건 제작년 말 즈음이 시작 아닐까 합니다. 요즘까지도 자주 듣고 있죠.
저는 서울 강남3구에 부모님 덕에 거주중입니다. 그래서 산책을 나가면 고층 빌딩들과 화려한 옷과 번쩍이는 네온사인들, 늘씬한 미녀들과 멋드러진 남자들, 엔진소리가 웅웅 귓가를 때리는 외제차를 흔하게 봅니다. 길거리에 술 취한 사람들의 옷깃에는 뱃지가 달려있는 사람도 많죠. 근처의 아파트는 21세기라는것을 온 몸으로 표현합니다. 새벽이 늦도록 24시간 가게들이 불을 밝히고, 택시는 끊이지 않습니다. 번화한 도시의 삶이란 쉴 새가 없습니다.

여느날처럼 산책을 했습니다. 정태춘씨의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정태춘씨의 노래를 듣게된건 작년 말 정도, 92년 장마, 종로에서 라는 곡이 처음이었던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주변 지인들이 몇 번 곡을 들려주었습니다만 한 두어번 듣고 넘겼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위 글의 표현을 빌려쓰자면 '바위처럼'같은 노래로 시작했는데 '자기 스스로 집회를 나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처음 집회에 참가해 본 학생이었습니다. 좀 독특한 케이스죠. 운동권 선배를 따라 과 방에서 바위처럼을 듣고 노동절 집회에 쭐래쭐래 따라간 학생도 아니지만, (운동권 선배도 존재하지 않았고) 집회에 나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으며 '빡세진'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어중간하죠.

그러다보니 저는 빡센 노래를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조금 더 밝거나 서정적인 노래를 좋아하는 편이죠. 그러나 그 날은 우연히도,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정태춘씨의 앨범을 벅스뮤직에서 듣다가 우연히 나온 노래는 단순히 노래라기 보다는 쏟아냄에 가까웠죠.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고층빌딩 사이를 유유히 걷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모순이 어쩌구 신자유주의가 어쩌구 노동자들을 위한 세상이 어쩌구 근로기준법이 어쩌구를 외치던 제가 있었죠. 그러나 제 손에는 최고의 반도칩 기술이 들어있는 스마트폰이 발에는 세계 온갖 곳에서 살 수 있는 나이키 신발이, 제가 걷는 길은 잘 닦이고 푹신한 산책로였죠.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름 모를 고층빌딩들의 창문이 밝습니다. 도로에는 온갖 외제차가 지나다니고. 그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다니는 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노래가 민중가요가 말할 수 있는 아주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로 가릴 수 없는, '노력한 만큼의 댓가가 공평한' 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그렇지 않은 곳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노래들이요. 이 노래는 서정적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빡센 투쟁가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계' 나 '솔아솔아 푸른 솔아'보다 더 직설적이면서도,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 곡은 제게 또 하나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죽음이라고 인정한다면, 세상에 어디든 비극은 있는거라고 말한다면 편해질 이 죽음에 대해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죠. 이 땅 위에 태어나서 누구의 노력이 더 컸다고 한들, 저 고층빌딩의 파티룸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노력이 보상받는게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고 한들, 이 아이들이 엄마아빠에게 안녕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는 당장의 사회에서 저 노력들에 대한 거대한 보상들은 정말로, 그 부가 분배되는 시장의 규칙들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의견은 많이 다를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민가의 가치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매우 강렬하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이론으로 무장하는 것 보다도 그 사람의 마음에 무거운 돌을 얹어놓는 것, 그래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땅 위에 설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사람으로 태어나 마치 하늘 위에서 남들에게 권세를 휘두를 수 있고 자신의 삶만이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취급받아야 한다고 믿는 붕 뜬 모든 걸음걸이들을 다시 땅 위에 닿게 해 주는 것.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듣는 제 모습이 매우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정말 우연히 윗 글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저 글이 올라올 때에도 피지알을 하고 있었지만 그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읽고 나서 민가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는데, 어설프게 민가를 추천하느니 제가 민가를 듣고 느꼈던 경험을 이야기 하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의 글을 언급한 이유는, 제가 말한 곡 이외에도 많은 민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사라진 것 처럼 보이는 민중가요가 여전히 누군가의 삶과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섹시보이 컴온 컴온 베이비가 줄 수 없는 것들을 남겨주는 노래들이 여전히 역사속에서 남겨지고 소비되고 사람들 마음에 닿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민중가요에 대한 이야기는 윗 글과 윗 리플에서 좋은 내용을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민중가요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너무 이쁘고 세련된 사운드긴 해도) 최근 발표된 옥상달빛의 희안한 시대를 링크걸어놓겠습니다.



민중가요의 좋은 점이라면, 어떤 스타일로든 사람, 삶, 시대,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고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요.
민중가요가 대중가요와 함께이기를 소망하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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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08 22:50
수정 아이콘
저는 민중가요 중에 애창곡이 하나 있는데 "내 눈물에 고인 하늘" 이란 곡입니다. 옛날생각 나네요
바위처럼
15/05/08 22:56
수정 아이콘
좋은 곡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찡하네요.
ridewitme
15/05/08 22:56
수정 아이콘
딱 90년대에 묶여있는 그 노래들이, 정말 안타까워요.
드라고나
15/05/09 20:48
수정 아이콘
이런 노래 저런 노래 있지만, 청년시대처럼 무슨 화끈한 애니메이션 오프닝 같은 노래도 있습니다.
아케미
15/05/09 21:50
수정 아이콘
위의 노래는 괴로워서 끝까지 못 듣겠는데... 괴로워하는 스스로가 또 기만적으로 느껴지고... 뭐 그렇네요. 아래 노래는 처음 알았습니다.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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