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5/04/26 04:12:03
Name 리듬파워근성
Subject [일반] [도전! 피춘문예] 아주 오랜 눈맞춤






보자, 너의 검은 눈을.
골똘히 오롯이 나를 비추는 그 두 눈을.
내가 너의 눈을 보듯, 너도 나의 눈을 보고 있구나.

나는 부끄러운 것이 많다.
네가 보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겐 상처이자 고통이다.
원망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더라.
모든 것이 내 탓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나는 여전히 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너의 입가가 궁금하다.
얼굴은 창이며 또한 기록이지.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다면, 그래 그것은 이 얼굴이 나의 역사이며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 역시, 네 얼굴의 흔적들이 궁금하다.
특히 너의 그 입가가.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그 입가가 궁금하다.
그러나 너는 말이 없구나. 나처럼.



너에게서 나를 본다.
내가 너를 선택했을까? 아니면 네가 나를 알아봤을까?
다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첫 눈에, 혹은 운명적으로 이런 말들을 믿지 않아.
대신 그 후의 일들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너의 눈 속에, 고통과 슬픔이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와 증오는 보이지 않는다.
입가와 목의 상처도 너는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구나.
네가 나보다 낫다.
정말로 네가 나보다 낫구나.

너는 현명해 보이니 나에게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는 자상해 보이니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내가 너에게 괜한 기대를, 괜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제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철쭉이 흐드러진 것을 보았다. 아찔할 정도로 많아서 나는 봄의 잔인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영원히 해는 뜨지 않을 줄 알았다. 영원히 눈은 녹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차를 돌려 이곳에 왔고 너와 눈이 마주친 후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게 될까?
내일 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니?
나에게 내일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공포였다.
내일로부터 도망치려 난 발버둥을 쳤다.
술에 의지해 살았던 날이 있었지. 증오에 온 마음을 내던졌던 날도 있었지.
모든 걸 포기한 채 하염없이 울었던 날도 있었지.
되돌리고자 발악했던 날도, 바로잡고자 몸부림 쳤던 날도 있었다.
다만 어제는 너를 만났고 오늘은 너를 만나러 왔다.





“꼬비 데려가기로 하시겠어요?”


나는 신분증을 내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 답을 했다.
서류를 작성했고 정신과 치료중 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몇 장의 지폐를 꺼내고 연락처를 기재한 뒤 나는 꼬비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부시다.

오늘은 4월 어느 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지 1년 하고 9개월 어딘가 쯤 되는 날이다.



가자.
피투성이 둘이서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보자.
어쩌면 언젠가, 이 봄이 반갑게 느껴질 날도 오겠지.
그러려면 일단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맛있는 것부터 먹자.



택시가 서지 않아 나와 꼬비는 집까지 한참을 걸어왔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5/04/26 08:07
수정 아이콘
이번엔 유기동물 입양 장려인가요 흐흐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리듬파워근성
15/04/28 02:00
수정 아이콘
자주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것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대가부네요
15/04/26 11:44
수정 아이콘
잘 읽고있습니다 감사해요 ^^!!!
리듬파워근성
15/04/28 02:00
수정 아이콘
제가 더 감사합니다.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게 훨씬 어려워요.
15/04/26 15:55
수정 아이콘
연이는 봄비를 좋아해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가 않았는데 또 글 올려주셔서 반가워하며 클릭해 잘 읽었습니다. 애완동물을 키워보고 싶던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유기동물에 관심이 생기네요. 꼬비와 주인공 잘 살아가겠죠?
좋은 글에 감사드리고 또 글 많이 기다릴게요.
리듬파워근성
15/04/28 02:01
수정 아이콘
저도 댓글이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5/05/11 09:26
수정 아이콘
하아 꼬비와 주인공이 잘 살았으면 좋겠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8052 [일반] 헥스밤님의 그 모든 노래들을 읽고. [5] 바위처럼3922 15/05/08 3922 4
57947 [일반] 사카모토 마아야 20주년 콘서트 관람 후기 [20] 랜덤여신7884 15/05/03 7884 2
57910 [일반] [DATA주의,BGM] 환율도 떨어졌는데 일본 여행을 가볼까? - 4.온천 <코모레비> [4] 페르디난트 3세5477 15/05/01 5477 1
57789 [일반] [스포주의] WWE PPV 익스트림 룰즈 2015 최종확정 대진표 [4] SHIELD5368 15/04/26 5368 0
57774 [일반] [도전! 피춘문예] 아주 오랜 눈맞춤 [7] 리듬파워근성3701 15/04/26 3701 5
57758 [일반] <약장수> - 현실은 역시 쓰다 [14] 마스터충달5877 15/04/24 5877 2
57675 [일반] 새벽에 사우나 갔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이야기 [42] 유라71042 15/04/20 71042 0
57600 [일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저의 생각 [128] Rated8580 15/04/16 8580 0
57591 [일반] [연재] 웃는 좀비 - 2 [2] 드라카2001 15/04/16 2001 3
57310 [일반] 심야 택시 타는 이야기 [58] 파란코사슴7133 15/04/01 7133 3
57048 [일반] 맛탱이가 갈거 같습니다 [57] 사랑비11286 15/03/19 11286 6
57027 [일반] (노스포) 이 영화를 보십시오 [62] 리듬파워근성13971 15/03/18 13971 5
56992 [일반] 택형 이야기 [2] 토요일에만나요3693 15/03/15 3693 1
56703 [일반] 밥알사건 이후 여자사람 만난 이야기 (1) [25] 실론티매니아6075 15/02/23 6075 6
56619 [일반] 경험했던 고통중 특히 기억에 남아있는것.. 그러니까 관장의 추억 [17] 바람모리6692 15/02/17 6692 2
56215 [일반] 어제의 멘탈붕괴들 [44] 리뉴후레시8545 15/01/27 8545 0
56173 [일반] 자장면 네 그릇 [11] Eternity6519 15/01/25 6519 19
56029 [일반] 그녀와 헤어져야 될까요?? [92] Anti-MAGE15622 15/01/18 15622 1
55926 [일반] 2박3일 일본 여행 후기 [33] BessaR3a13154 15/01/12 13154 0
55844 [일반] 2015년을 맞이한 (개인적인) 기쁜소식 3개와 슬픈소식 3개. [18] 단신듀오3825 15/01/07 3825 1
55833 [일반] 글 쓰는 여자 [14] 당근매니아4751 15/01/07 4751 11
55831 [일반] 너 누나랑 잘래요? [81] 바위처럼13572 15/01/07 13572 17
55801 [일반] 드라마 <미생>의 힐튼호텔 - 대우빌딩 구름다리 이야기 [28] redder8378 15/01/05 8378 4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