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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16 09:37
정성들인 영화평 잘 읽었습니다. 즐겁습니다. 두 달을 기다려 덧글을 쓰게된 보람이 있네요.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제대로 해석해 주셨네요.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만큼 실망했던 작품입니다. 반면에 언급하신 <시>나 <시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수작이죠. 생각날 때 가끔 돌려봅니다. 부부의 갈등이 '바람피우는 남편'과 '결혼의 판타지가 깨어진 아내'의 구도인 것은 너무나 흔하지만 그 구도가 '미처 눈돌리지 못한 갈등'을 재조명 하는 것이 아니라 흔한 갈등 구도의 무한확장일 뿐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저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다 영화적인 재미를 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여자를 제대로(?) 다루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싶기도 합니다. 위에 언급하신 작품 말고도 결혼한 여자의 갈등과 방황을 다룬 작품중 아주 색다른 작품이 있어요. 토마스 핀천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입니다. 에이미처럼 음모와 망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하지요.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이미 보셨을지도...
14/12/16 09:46
추천 감사합니다. 근시일내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핀처 영화에 나온 여성상 중 구체적이고 리얼한 욕망을 명료하게 드러낸 케이스는 좀 없지 않았나 싶긴 하네요. 본문에도 언급하긴 했지만 결국 에이미의 셀링 포인트는 불가해함에서 온다는 점에서 남성들의 여성 판타지 - 미화는 아닐지언정 결국 윤색된 편견 - 를 자극하는 것이며, 女리엔탈리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요.
14/12/16 10:17
에이미는 한꺼풀만 벗기면 그 실체가 드러나는 악녀일 뿐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남자란 여자의 '한꺼풀의 공포'가 지나치게 심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의 옷을 한꺼풀 벗기는 것도 힘들지만, 그녀 마음을 한꺼풀 벗기는 것은 더 힘들지요. 아마 그 공포를 극대화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에이미의 옷은 벗겼으나 마음은 벗기지 못했다 정도가 되려나요. 가끔 제가 영화를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문학적(또는 소설적)이 아닌가 반문해보기도 합니다. 영화에 이런 기대, 즉 전체주의적 존재론과 양립할 수 없는 입체적인 인물을 기대하는 것 말이지요. 그러나 제 기대를 충족하는 작품이 있다는 것으로 이런 기대는 '정당하지 않다'는 의심을 불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토마스 핀천의 작품은 이런 싸구려 존재론에 제대로 싸다구를 날리는 작품일 듯 합니다. 끝까지 열린 존재, 끝까지 열린 결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지요.
14/12/16 10:06
와 제가 생각한 것을 정말 잘 풀어써주셨네요. ^^
나를 찾아줘를 수작이라 평하는 평론가들 가운데 왜 수작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이 없고, 그저 거장이 만들었고 그럴듯해보이는 요소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수작으로 결론을 낸 듯한 평들만 가득해서 불만이었거든요. '나를 찾아줘'는 전반부의 압도적인 밀도는 칭찬할 만 하지만, 그 때문에 후반부의 형편없음과 진부함, 그로 인한 불쾌감이 더욱 도드라지는 영화입니다. 물론 핀처가 어떠한 의도로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의도 자체가 납득할 만하지 않거나 혹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야죠.
14/12/16 10:14
네 저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극장에서 영화 보고 나서 실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온라인의 반응은 찬양일색이라 제가 영화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나를 찾아줘에 대해 불만이 있는 관객층도 분명히 있는 것 같은 것이, 영화 평점 앱인 왓챠에서 보니 나를 찾아줘가 5점 만점에 4점이던데, 제 경우에는 기대 평점이 3.2점 밖에 안 되더라고요. 왓챠에서 제공하는 기대 평점의 경우 자신과 비슷한 영화 평가를 내린 평가군의 평균점수를 반영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와 영화에 대한 관점이 비슷한 사람들 중 혹평을 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는 이야기겠죠.
14/12/16 13:48
전 <나를 찾아줘>가 수작인 이유로 단 한 컷도 버릴 컷이 없기 때문이라고 썼었죠.
뭐 저도 영화의 진정한 의미는 훌륭한 내러티브와 독창적인 스타일에 있으며 편집이나 몽타주는 그러한 것들을 위한 수단이 되는 기교와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근데 핀처는 그 기교의 수준이 너무 쩐다고나 할까요. 컷의 연결이 너무나 유기적이라 붕 뜨는, 사족이 되는 신이 존재하질 않죠. 여기에 특유의 교차편집과 플롯의 배치가 가미되면 정말 편집의 기교만으로도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에이미가 데시를 잡아먹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정말 소름끼치는 장면이었죠. 살인의 행동과 그 준비과정을 재배치하여 뻔할 수 있었던 살인을 사냥으로 바꿔 버렸죠. 저도 이 영화에서 에이미의 반전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도들도들님과 비슷했습니다. '도대체 핀처라고 너무들 빠는 거 아닌가? 이런 뻔한 스릴러를 뭐라고...' 근데 거기까지가 그냥 전반전이더라구요. 후반전 들어가고 나서 부턴 '이야~'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14/12/16 10:11
저는 약간 다르게 느꼈던 게,
에이미에게 닉과의 결혼은 진짜 삶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어메이징 에이미의 허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던거 같아요. 영화가 연애초기의 로맨틱함을 강조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이구요.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그 허영을 채울수없는 결혼생활을 하게됐고, 그제서야 자기 진짜 삶을 살기위해 사건을 벌인거죠. 강도를 당한 후의 절규는 '난 어메이징 에이미를 떨쳐낼수 없구나,' 라는 한탄 같았구요. 결국은 남편이 새로운 방식으로 허영을 채워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돌아간거죠. 그렇게 치밀하던 에이미가 그렇게 쉽게 강도당한건 옥의티라고 보지만, 후반부에 보인 닉과 에이미의 애매한 감정선이 이영화의 포인트라고 보기 때문에, 눈 감아주고 싶어요 허허
14/12/16 10:33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인생을 살아보려는 욕망과 허영을 충족하려는 욕망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래서 [평범함과 진부함과 허위에 점철된 껍데기 같은 현재의 삶을 벗어나 진짜배기 인생을 희구하고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결국 인생의 너절함에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의 욕망이 허영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삶에 패배해가는 여성상] 같은 구절들을 본문에 썼던 것이고요. 본문에서 언급한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나를 찾아줘>와 아주 좋은 대비가 되죠. 남들과는 다른 진취적이고 화려한 삶을 꿈꾸었지만 이를 이루는 데에 실패하면서 자신의 진정어린 열망이 결국은 허영에 불과했음에 절망하지요. 여하간 결혼 전에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자신이 꿈꾸던 인생일 줄 알았던 결혼생활은 갈수록 실망스러워지니, 진짜배기 삶을 살기 위해서 도주를 택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죠. 강도를 당한 후의 에이미의 반응은 매우 평면적입니다. 딱 3초 동안 베게로 얼굴 가리고 소리 지른 다음 신이 바뀌면서 쓰레기 버리러 나가죠. 이는 그냥 돈 뺏겨서 빡친 것이지, 자신의 한계와 인생의 굴곡에 절망하는 심각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혹 감독이 그런 것을 의도했다고 하더라도 - 아무리 봐도 그리 보이진 않지만 - 아주 미진한 묘사라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서 에이미는 설정은 어마어마하고 복합적인 데에 비해 너무 고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이익 이외의 다른 동기나 욕망들이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의 축생적이죠.
14/12/16 12:15
에이미는 사실 평범한 여자죠
돈도 아버지의 재산이고요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허구의 인물을 책 팔기위한 수단으로 실제인물인것 처럼 해버리니 에이미는 어메이징 에이미가 되기 위해 삽니다 진짜 에이미를 잃어버린거죠 그 와중에 평범한 닉이 나타납니다 어메이징한 에이미가 아니라 평범한 에이미가 되고 싶었기에 그와 만납니다 그러나 그 닉도 연애초반 보여줬던 모습은 원래 닉에 비하면 어메이징 닉이었던거죠 에이미는 현실을 깨닫고 도주하죠 그러나 평범한 에이미는 개털이되고 옛사랑을 죽이면서 결심합니다 돌아가자 어메이징 에이미로 그리고 닉을 어메이징 닉으로 만들고 본인도 어메이징 에이미로 돌아갑니다. 어메이징한 두 사람은 그렇게 행복한?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14/12/16 14:14
<트라이앵글>등의 B급 스릴러가 은근히 흥행을 하면서 2010년 전후로 양산형 호러와 스릴러들이 쏟아졌는데
<나를 찾아줘>의 1시간 10분 까지는 딱 그 양산형 스릴러 수준이었습니다. 뭐 이건 핀처가 못났다기 보다 양산형들의 퀄이 핀처수준의 탄탄함을 갖춘게 더 대단한거 겠지만.... 아무튼 에이미의 범행은 그 자체만으로 탄복할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양산형들 덕분에)뻔하고, 평범하며 심지어 완전범죄도 아니죠. 에이미는 완전무결한 치밀한 두뇌파 살인마가 아닌거죠. 오히려 눈앞의 욕망만을 쫓는 아이같은 성격이랄까요. 애시당초 자아를 찾는다는 고차원적인 수준이 가능한 성격도 아니네요. 이 영화는 에이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가 아닙니다.('나를 찾아줘'라는 제목이 에러) 에이미는 사이코패스고 닉은 형편없는 새끼죠. 그리고 그들은 화목해 보이는 가정을 이루고, 그 위선을 부각시키는 것이 영화의 목표이며 우리도 그 위선 속에 살고 있다는 냉소가 감독의 의도죠. 그런면에서 에이미의 강도 시퀀스는 필수적인 장치입니다. 가정을 벗어난 존재가 겪어야 하는 위험은 위선을 감내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요. 그나저나 팟캐로 영화 방송을 하는 피잘러를 또 한분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14/12/16 15:16
바로 그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미를 눈앞의 욕망만을 쫓는 아이같은 평면적인 인물로 처리해버리면서 영화도 평면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거죠. 고작해야 작위적인 소시오패스와 흔해빠진 개새끼가 나와서,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가는 게 결혼이라는 식의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근대 문학 이래로 수도 없이 울궈먹은 서사입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그 정도면 굳이 극장까지 가서 13000원이나 주고 볼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마지막 전쟁>이나 <마누라 죽이기>를 예로 들기도 했지만, '결혼은 사기고 기만이며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라는 식의 이야기는 숱한 드라마와 케이블용 싸구려 영화들이 다 하는 것이니까요. 이건 너무 뻔하고 질박합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서사가 가지는 역동성과 비교하면 처참해지죠. 또한 초반부에 감독이 심어두었던 제반 설정들은 아무 의미가 없이 버려집니다. 어메이징 에이미가 항상 자신을 앞서나갔는 것에 , 허영과 탐욕 속에서 자신들 뿐만 아니라 딸의 인생까지 낭비하는 부모, 결혼생활이 기대와는 달리 서서히 침몰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느끼는 인간적인 실망과 같은 것들 말이죠.
스토리가 평면적이니 결국에는 인물과 사건의 자극성과 선정성에 의존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적었지만, 데지 콜린스는 에이미에게 살해당할만큼 죽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집착은 엿보일지언정 오히려 비교적 젠틀하게 그려지죠. 데지 콜린스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래야만 예수가 '다 이루었다'를 외치듯 에이미라는 캐릭터가 날아오를 수 있으니까요. 마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그런 것처럼 배고픈 사자 앞에 일부러 가젤 한 마리를 갖다 주며 사냥을 인위적으로 <연출>하고 사자의 광포함을 부각시키는 격이죠. 데지의 죽음이 보여주는 몰개연성을 커버치는 것은 '에이미는 원래 미친 년이니까'라는 인물빨과 '이런 식으로 사람 하나 손쉽게 잡아먹을 정도로'라는 연출빨과 '저렇게 해야 에이미 집으로 보내고 영화 끝낼 수 있으니까'라는 서사적 필요입니다. 본문에도 적었듯이, 만약 이 영화가 오래 전에 상실되어버린 Gone Girl에 대한 갈망과 집착과 비탄을 그린 영화였다면, 그리하여 레볼루셔너리 로드나 시, 밀양, 디 아워스,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작품들이 지시한 지점들을 우회하지 않았다면, 우리 시대의 마담 보바리나 안나 카레니나를 영화로서 재창조해내는 위대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저 맛이 간 여자(gone girl)에 대한 영화가 되었을 뿐이죠. 마녀 이야기, 광년이 이야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위대해져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대하지도 않은 영화가 위대함을 참칭한다면, 기껏해야 사랑과 전쟁 수준의 이야기가 여성과 남성 관계를 다룬 영화의 교범으로 숭배된다면, 이것은 닉-에이미 부부의 위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불건전한 위선이겠죠.
14/12/16 15:50
저는 그 욕망만을 쫓는 아이같은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 이 영화가 양산형 스릴러들과 차별화 되는 순간으로 봤거든요.
물론 처음의 치밀함이 말씀하신 자아를 찾는 방향으로 갔다면 훌륭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대게의 흔한 스릴러의 주인공들 보다는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뭐 이거야 기준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다만 기준에 따라 스토리를 평면적이라 비판하더라도, 이 때문에 영화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조금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이 존재하고 그 원작을 꽤나 충실하게 구현했다고 평가받거든요 (국내 개봉명이 저따구인 것도 먼저 출시한 원작 소설때문이죠.) 스토리가 불만이라면 핀처가 아니라 원작자인 길리언 플린에게 화살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전 자주 한국 평단과 관객이 스토리에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이 글도 영상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영화로 비판을 하고 있죠. 하지만 이 영화가 찬양받는 이유는 스토리 보다는 플롯과 몽타주에 있다고 봅니다. 사냥을 인위적으로 '연출'했다고 하시는데 그야 말로 데지를 잡아먹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덜미가 서늘하게 만드는 연출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냥을 '연출'한 것은 스토리적으로는 몰개연성이겠지만, 그러한 감성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종합적 연출로서는 훌륭한 장면이 됩니다. 특정 장면이 아니라 영화 전체적으로 보자면 반전과 그 이후의 촬영 뉘앙스가 확연히 달라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영화를 두개 찍어버리는 수준의 변주 또한 절대 쉬운 것이 아니구요. (보통 이렇게 되면 일관성 없는 망작이 된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연출이죠) 과연 이 영화에 열광한 평단과 관객은 핀처라는 이름의 후광에 눈이 먼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뭐 그 후광 덕분에 스토리에만 목매는 분위기에서도 그것의 평면성을 뚫고 장점들이 드러날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14/12/16 16:07
<각색>의 힘이 있으니까요. 예컨대 <홍등>이나 <대부>나 <시계태엽 오렌지>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본문에서 언급한 <디 아워스> 같은 것들은 적절한 각색을 통해 원작을 뛰어넘어버린 영화들이며, 개인적으로는 반지의 제왕은 소설보다 영화로서 더 나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롯의 대부분은 살리되 일부는 오리지날 스토리 라인을 편성한다든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해내어 보다 더 생동감 넘치게 만든다든가,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도려내버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일단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면 영화적인 평가받아야하며, 원작을 통해 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것이면 애초에 원작을 차용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식의 응답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데지를 살해하는 시퀀스의 정교함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정교하고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귀결되는 바가 진부한 이상, 그 박력 있는 연출이 향하는 지점이 고작 '이걸 에이미가~~~~'라는 오관참육장과 '자~결혼 생활이야~'라는 부부 클리닉 수준일 따름인 이상, 감흥이 클 수가 없더군요. 본문에서 말했듯이 본질은 상실된 채 영화적 매너리즘적인 완성도만이 있을 뿐이니까요. 일전에 어느 게이머가 스카이림을 플레이한 이후 한탄하는 것 http://deadly-dungeon.blogspot.kr/2011/11/blog-post.html 을 보며 깊이 공감했던 적이 있는데, 나를 찾아줘를 본 제 심정이 딱 저랬습니다. [오블리비언에서는 내가 꿈꾸던 게임을 마치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내가 꿈꾸던 그 게임이 그냥 바로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울티마6을 하면서 느꼈던 충격, 그때 이후로 항상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미래의 어떤 게임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 울티마 언더월드를 하면서 가졌던 그것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스카이림은 20년 간 꿈꿔왔던 그 이미지와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그래픽, 플레이어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삶을 사는 놀라운 AI의 NPC들, 주변 환경과의 엄청난 상호작용, 판타지 세계관에 흠뻑 빠져들게 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몇 년은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볼륨 등 거의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 게임. 오로지 게임만 빠져있다. 세계 최고의 부품들로 만들어진 차가 엔진이 없고 세계 최고의 요리에 메인 디쉬가 없으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단한 엔진을 바라는것도 아니다. 그저 차가 굴러가기만 해도 만족한다. 대단한 요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 끝내주는 사이드 디쉬를 망치지만 않을 정도면 그만이다. 그 최소한의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는 베데스다를 보면 미치고 환장할 것 같다. 내 오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본과 기술이 있는 유일한 회사가 꿈이 든 상자를 던져주고는 절대로 열쇠를 내놓지 않는다. 난 그 상자의 뚜껑이나 핥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14/12/16 16:35
최고급 한우라서 기대했는데 스테이크가 아니라 쇠고기 카레가 나와 불만이신 느낌이네요.
하지만 좀만 너그럽게, 그리고 한발 물러서서 즐겨본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향신료의 절묘한 배합이 매우 훌륭한 요리가 될 수도 있을겁니다. 스카이림도 조금 너그럽게 모드의 존재를 평가에 반영한다면 그야말로 꿈과 모험이 넘치는 신세계가 가능하니까요. 각색 이야기를 하셨는데, 핀처의 의도가 소설과 일치했기에 별다른 각색을 하지 않았겠죠. 때문에 스토리의 부진함에 핀처의 책임도 있다고 한다면 인정할 수 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그걸로 영화 전체의 가치를 낮추거나, 다른 평들을 후광효과로 치부하면 안되겠죠. 중간의 댓글에서 왜 수작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글을 보고 이 영화의 스토리를 제외한 다른 장점들을 댓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스토리가 뻔하고 볼륨이 작아도 영화는 잘 만들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14/12/16 16:49
뭐 예시로 언급한 것 뿐이니 자세히 논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만, 여하간 저 게이머의 이야기는 '메인퀘스트가 시시하고 메인퀘스트와 서브퀘스트의 연계가 없다시피하여 게임 자체를 일관적으로 꿰뚫는 목적이 없어져버렸다. 게임의 고유한 묘미는 게이머가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며 이를 성취해나가는 서사를 스스로 게임 플레이를 써나감으로서 영화의 관객이나 소설의 독자나 음악의 청자와는 달리, 무기력한 감상자의 처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추구할 목적이 없으므로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관광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모드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는 것입니다. 메인 퀘스트는 모드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제작자가 손을 떼는 이상 업데이트가 불가능한 성경마냥 언터쳐블한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굳이 이 예시를 강조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좀 절묘하게도 제가 나를 찾아줘에 대해 가지는 인상과 일치한다 싶네요.
더불어 저는 이 영화의 흥행과 호평이 단순한 후광효과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우리 시대의 마담 보바리가 될 수 있었던 영화가 고작해야 뭇 남성들에게는 연애나 결혼에 있어 어려움을 자위해주는, 말하자면 관객들의 나르시즘을 자극하는 것에 그치는 천박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핀처는 조커에게서 미국인들은 미국의 적대자들을 보면서 경도되었던 것처럼, 에이미에게서 이성애자 남성들은 자신의 여자친구나 부인을 읽어내면서 스크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도취해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포르노와 같은 대리만족 기능을 수행하며, 이 영화가 가지는 가치는 심혜진과 강남길이 주연으로 나온 99년 작 드라마 <마지막 전쟁>보다 크게 낫지 않다.] 고 적었는데, 말하자면 감독이 대중의 니즈를 제대로 읽어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 포퓰리즘적인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고요.
14/12/16 17:10
음.. 예시일 뿐이라 저도 깊이 말씀 안드리겠지만, 스토리와 퀘스트, 신규지역을 포함하는 모드들도 있어서요. 최근에 vilja 모드 해보느라 스카이림 10 몇회차 플레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20회차는 안되겄지;;)
후광효과를 언급한 댓글에 흔쾌히 동의하셔서, 그건 아니라고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대리만족에 열광하는 것으로는 다양한 계층의 호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 만해도 결혼도 안했고, 여자친구한테 에이미에게서 느껴지는 부정적이고 불편한 감성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 여자의 끔직함을 고발하는 것에 열광하진 않았거든요. (오히려 저런 미친 여자랑 같이사는 닉에게 한탄을 많이 했죠.) 대신 핀처의 기교에 탄복했습니다. 저 뿐만 영화를 호평하는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 정교함을 칭찬하더라구요.
14/12/16 17:27
음...저도 퀘스트 MOD들은 많이 해보긴 했습니다. 근데 그게 메인 퀘스트의 충실함을 강화시켜주고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서브 퀘스트를 자율적으로 선택함으로서 메인 플롯의 볼륨을 두텁게 해주지는 못하니까요. 어쨌든 메인 퀘스트는 드래곤본으로 태어나서 알두인 때려잡는 전형적인 양판소로 끝나버리고 남는 것은 '마음 내키면 각기 독립되어 있어 딱히 연결성이 없고 낱알로서의 의미 밖에 없는 서브 퀘스트들 하나하나 섭렵하면서 스카이림 세계를 관광하고 다니든가, 그게 지루해지면 이쯤에서 그냥 게임 때려치든가' 밖에 없지요. 뭐 이 부분은 관점이 좀 갈릴 수 있다고 보긴 합니다만.
여하간, 아마 남성들은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여자친구 개년'을 읽었을 테고, 여성들은 막장드라마의 '저런 나쁜 년'을 읽었겠죠. 왜, 드라마의 악녀들을 보고서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는 사람들은 할머니들이지 할아버지들이 아닌 것처럼요. 악녀를 그리는 막장드라마의 주 타겟 자체도 중년 여성들이고. 사실 다양한 계층이 호평하기로 치면야 막장드라마만한 것이 없기도 하고... 말씀대로 핀처가 보여준 기교에는 저도 탄복했습니다. [본디 특정 장르의 고유하고 특유한, 장르의 본질을 극대화하는 것을 매너리즘이라고 하며, 기술적 요소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그 점에서 매너리즘은 단순한 나태함은 아니며, 절정의 완성도를 성취하려는 태도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너리즘이라는 어휘가 일상에서 흔히 통용되는 의미처럼, 본질을 포기하면서까지 기술적인 요소에 집착하는 경직성이라는 양면적인 속성을 띠기도 한다.]라는 구절을 쓴 것도 그런 양면성을 묘사하려 했던 것이고... 여하간, 사람에 따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있게 봤으니까요. 다만, 일련의 작품군들과 비교해봐도, 그리고 핀처의 이전작들과 비교해봐도, 혁신적인 장르적 발전을 일구어낸 작품이라는 데에는 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네요. 막장드리마계의 신기원...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궁색해뵈고.
14/12/16 17:37
뭐 저도 핀처의 역대 작품들과 놓으면 상당히 하위권에 놓이는 작품이긴 합니다.
근데 그게 올해본 영화 best5 에 들어가버리네요;;;; 나름 한 작품에 두 영화 찍어버리는 문법 파괴적인 부분이 있기에 신선함이 부족할지언정 (일상적 용어로) 매너리즘에 빠진 작품으로만 볼수도 없을 것 같네요. 막장드라마의 신기원이란 평은 제가 봐도 참 없어뵈네요.
14/12/16 18:23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감독이 어떻게 입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인지요? 악녀로서의 이미지만을 부각시킨 것이 어떻게 입체적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오히려 단순함을 극대화시켰다고 하면 더 그럴듯 합니다. 모든 욕망은 단순합니다. 다만 욕망을 좇는 방법이 복잡할 뿐이지요. 쟝르적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별로 재밌지 않았어요. 하나도 안무서웠거든요. 만약 에이미에게 사냥당하는 데지가 소름끼쳤다면 하나만 죽일거 뭐 있나요. 여럿죽이면 에이미는 더 단순한 에이미가 될텐데요. 욕망을 좇는 단순한 에이미의 진심을 끝까지 드러내지 말았어야 더 입체적이 되었겠지요. 스릴로서도 이 영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결과가 예상되는 스릴러라니... 너무 진부하잖아요.
14/12/16 18:36
반전까지의 에이미가 철두철미하고 냉철한 살인마였다면
이후의 에이미는 엉성하고 아이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 영화가 불행한 결혼생활에 지친 여성이 자아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죠. 눈 앞의 욕망을 위해 위선이라는 이름의 결혼생활을 이루는 자들에 대한 냉소로 결론짓게 되구요. 때문에 전반전이 흔한 양산형 스릴러였다면, 후반전에 비로소 핀처표 영화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전개에서 에이미라는 캐릭터의 내적인 심경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에 의해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이나믹하게 변화합니다. 캐릭터 스스로가 입체적으로 피어난다기 보다는 주변 조명이 달라지면서 입체적 면모가 드러난다고나 할까요. 때문에 전형적인 평면형 캐릭터와 비교한다면 입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12/17 10:28
사실 후자의 에이미가 우리가 바라보는 에이미고, 전자의 에이미는 에이미가 보여주는 에이미인 거죠.
그러니까 그 두 개는 자신을 찾는 과정이나 각성이나 이런게 아니라 그냥 달라야 정상인 거죠. 이 영화는 무슨 에이미의 심경 변화가 나타나는 영화가 아닙니다. 에이미는 한결같지요. 그게 화자가 누가 되느냐, 사건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시청자가, 또 영화 속 사람들이 에이미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이 영화의 진짜 핵심이고. 그래서 충달님 말씀대로 타인에 의해 드러나는 입체적 면모가 중요한 영화죠. 에이미 자체가 입체적인 캐릭터라면 아마 이 영화의 주제의식에도 어긋나고 감흥도 덜 할 겁니다.
14/12/16 16:53
아옹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그냥 본문 길이만으로도 이런 압도적인 리뷰가 올라오니 미루고 있던 감상문을 어서 써야겠다는 초조함만 드네요
14/12/16 18:01
전 오히려 앞부분이 전형적이고 뻔한 스릴러라는 매너리즘이 느껴졌구요. 물론 완성도는 정교했지만요.
후반부에서 핀처영화에서 느꼈던 강렬함, 임팩트를 느껴서 감탄했었네요. 세븐에서 느꼈던 그런 느낌이랄까요. 물론 그 전개 과정에서 분명히 이게 대체무슨영화야 싸이코패스는 너무 뜬금없는데 이런 느낌도 받긴 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디악+세븐 느낌으로 감상했고 기대했던만큼 핀처스러움을 충분히 느꼈으며 여운이 남는 연출에 감동했네요~ 사람마다 감상 포인트가 달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14/12/16 18:44
저도 앞부분이 전형적인 스릴러였다고 봅니다. 핀처 특유의 호흡이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스릴러였어요.
근데 그게 끝나도 영화가 안끝나더군요;;
14/12/16 18:54
저번 인터스텔라 리뷰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네요.(인터스텔라 리뷰에는 제가 그 영화를 너무 늦게 봐서 댓글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공감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영화를 너무 플롯 위주로 보시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별 5개를 줬는데, 그 이유는 많은 장면들에서 핀처식의 호흡과 카메라 구도가 완성형을 넘어 자신만의 왕국을 완성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소설이 아니거든요. 이 영화 플롯의 단점으로 지적된 것은 원작 소설로부터 이어받는 부분이 많고요. 근데 그걸 핀처나 각본가의 잘못이라고 하긴 어렵죠. 미국에서 1위 먹은 베스트셀러 소설인데요. 그래서 소설에서는 다양한 부가적인 묘사들을 통해 그 플롯의 단점을 극복하려 했고 영화에서는 그러기엔 극이 너무 늘어지니 많이 쳐낸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작진이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4/12/17 11:01
원작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논한 바가 있기에 해당 코멘트로 갈음하려 합니다. https://pgr21.co.kr/?b=8&n=55457&c=2070569
더불어, 제가 요구하는 것은 플롯, 즉 문학적인 구성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위에서 반지의 제왕의 경우 소설보다 영화가 낫다고 평했을 리도 없었을 테고, 소설 원작이 따로 있는 디 아워스를 위에서 굳이 언급했을 이유도 없겠죠. 애초에 영화의 플롯은 소설만큼 대단할 수가 없으며 아무리 용을 써도 차이나 타운 이상이 되기가 어렵죠. 매체의 특성상 텍스트 쪽이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정보량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영상 매체는 서사의 볼륨과 밀도에서 절대 텍스트를 따라잡을 수 없고 그 점에서 영화가 소설보다 플롯이 좋기는 어렵죠. 제가 요구하는 것은 플롯이 아니라 내러티브입니다. 그 자체로는 영화가 될 수 없는 문학적인 플롯을, 어떤 식으로 카메라를 통해 영화적으로 형상화해는지에 평가의 초점을 둔 거죠. 이 과정에서 플롯은 그저 기본적인, 무난한, 기성품으로서 흠 잡을 것 없는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 정도면 감독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환상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예컨대 그래비티라든가 메멘토, 샤이닝, 조디악, 다우트 같은 경우 플롯의 측면에서 위대하다고할 것은 없을지언정 내러티브가 훌륭한, 지극히 영화적인 가치에 충실한 영화다운 영화들이라고 봅니다. 반면 나를 찾아줘 같은 경우에는 서사라고 할 것이 너무나도 엉성하기 때문에 이를 어떤 식으로 형상화했든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것이고요. 위에 인용했던 것입니다만, [세계 최고의 부품들로 만들어진 차가 엔진이 없고 세계 최고의 요리에 메인 디쉬가 없으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단한 엔진을 바라는것도 아니다. 그저 차가 굴러가기만 해도 만족한다. 대단한 요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 끝내주는 사이드 디쉬를 망치지만 않을 정도면 그만이다.]라는 구절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촬영과 영상 그 자체로는 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 경우에는 멋진 풍광을 찍어낸 슬라이드 사진쇼나 출발 비디오 여행 따위에 나오는 많은 UCC 영상들도 영화가 되어 버리겠죠. 실제로 영상의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야 유투브에도 좋은 것들은 많고요. 그렇다고 이 작품이 해체주의적이라든가 미니멀한 시도를 통해 영상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아트무비는 전혀 아니니까요. 그 점에서 매너리즘의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영화로서의 틀을 갖추기 위해서 기술적인 완성도 역시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결여되었다고 꼭 영화가 아닌 것도 아니니까요. 촬영과 연출과 편집에 있어서는 대단할 것이 없지만 뚝심과 강단만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처럼 말이죠.
14/12/17 00:24
제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잘 읽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중반 이후에 중요한 부분이 되는데 오히려 김이 빠지더군요. 고작 이거였어? 하는 느낌으로. 인터스텔라에서 나온 만 박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는데... 윗 분 댓글보고 인터스텔라 리뷰도 읽어보러 가봐야겠습니다. 흐흐
14/12/17 10:08
영화본지 꽤 돼서 자세한 얘긴 못 하겠고.. 하려는 얘기가 고작 이거냐....에는 글쎄요...
전 이게 결혼 생활이 이런거야...로 한계를 지을 수 있는 영화인지 의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관찰자에 대한 조롱이랄까요. 좀 친절하게 풀어보면 니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렴이랄까요. 원작은 안 읽어봤지만, 영화의 경우 하필 대상이 결혼생활이었던 것이고 주제는 그 결혼생활을 밖에서 바라보게 된 우리들이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부터 매스미디어, 미국법정, 가족이나 주변 이웃과의 관계 등등이 겉모습에 속고,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며 움직이는지가 핵심이고. 가장 겉으로 보는 것과 이면적으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결혼생활의 이중성까지도 동시에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이 된 거죠. 그래서 전 전체적인 평 자체가 동의가 잘 안 갑니다. 이게 과연 결혼 생활을 진지하게 다룬 영화인 것부터가 의문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천재소년 두기가 끔살당하는 것은 에이미를 사이코패스로 치장하기 위함이 가장 큰 목적이 아닙니다. 그게 묻히는 과정이 핵심이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뜬금포 살인인데, 건드릴 생각조차 못하잖아요.
14/12/17 11:24
그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나를 찾아줘>보다 훨씬 좋은 영화들이 많지요. <차이나타운>이 이 계통의 전설이며,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라든가, <시티 오브 갓>이라든가, 핀처의 이전 작품인 <조디악>도 있고, 넓게 보면 <파이트 클럽>도 이런 소재를 활용했었고, <다크 나이트> 같은 경우도 일정 부분 이러한 지점을 경유하면서 미국 사회의 기만성을 논하는 작품이죠. 위에서 언급한 <홍등>도 좋은 예고...한국 영화 중에도 <추격자>나 <살인의 추억> 등이 있고요. 사실 본문에서 언급했던 시나 레볼루셔너리 로드 같은 경우만 해도 <위선적인 표층에 가려진 이면의 진실>의 문제를 더불어 다룬 것이고요. 이러한 작품들 중 상당 수가 등장 인물들이 기만적으로 포장된 표층과 긍정하기 어려운 심층 사이의 괴리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며 내외적인 투쟁을 진행해나가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실존적인 고민을 환기시키거나,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처연함을 보여준다든가, 정교한 형상화를 통해 묵직함을 전해주는 반면, 에이미를 포함한 나를 찾아줘의 등장 인물들은 전혀 생각이 없어 재고 따질 것이 없으며 너무 담백하고 평면적이라 무게감을 느낄 것이 없지요. '표층과 심층의 괴리가 크다고? So What? 난 잘 먹고 잘 살 거라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여기에는 어떠한 참신함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은 멍청하고 언론은 협잡을 일삼으며 경찰은 무능하다는 것 정도야 새로울 것이 없지요. 고전으로 가면 <이브의 모든 것>도 있고...
저 역시 이 작품이 결혼 생활을 진지하게 다룬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룰 게 없으니 '결혼은 판타지야!'라는 새로울 것 없는 클리셰로 도피한 것이고, 이것이 진지한 시도일 리 없겠지요. 도발적으로 한 발 더 나아가보자면, 본문에는 의혹 정도로 제기했습니다만, 저는 감독이 의도한 이 영화의 진짜 주제의식은 [많은 관객들이 극중에서 에이미에게 기만당하는 대중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지만, 사실 그 대중들은 핀처가 생각하는 관객들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닉과 에이미의 파란만장한 애투를 보면서 미국 전역이 들썩거렸듯이, 핀처는 관객들이 대학의 과CC나 사내 연애를 보면서 웃고 떠드는 집단 구성원들처럼 이야기를 소비하도록 유도했다. 결말 시점에서 미국 시민들이 여전히 ‘어메이징 에이미’의 동화같은 스토리를 진실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듯, 관객들은 ‘저런 미친년을 보았나’는 식의 감탄을 연발하지만, 정작 에이미의 본질, 에이미가 희망했어야하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가 도달할 수 있었던 지점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극장을 떠난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에이미는 불가해한 대상으로 남아 있고, 그럼으로써 여신이 된다.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가면에 가려져있던 아이돌 에이미는 ‘Fucking bitch'라는 또다른 가면으로 가리워지면서 여전히 아이돌로 남는다. 우상은 지성적인 파악이 멈추는 순간에 배태되는 것이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감독의 풍자의 대상은 미국사회, 세상사만이 아니라 관객이었다고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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