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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2/16 07:34:49
Name 구밀복검
Subject [일반] 나를 찾아줘 : 매너리즘을 탈피하지 못한 범속함
* 본문에는 <나를 찾아줘> 뿐만 아니라 <밀양>, <시>, <디 아워스>, <레이첼 결혼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창백한 말> 및 여러 문학 작품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나를 찾아줘>의 오프닝은 화면에는 에이미가 전면에 나오고 손밖에 나오지 않는 닉이 머리를 깨서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내레이션으로 구성된다. 눈치가 빠른 이라면 엔딩과 수미상관을 이룰지 모른다는 인상을 받을 법하다.

닉이 바에 가서 쌍둥이 누이와 대화를 나누며 5주년 결혼기념일이라는 정보를 관객에게 준다. 곧이어 장면이 전환되며 에이미의 내레이션과 함께 일기장을 작성하는 모습이 나오고, 닉과 에이미의 첫 만남 장면으로 전환된다. 둘이 함께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것도 매끄럽고, 이 신에서 닉의 '나쁜놈 턱'이 나오는 것도 적절하다. 둘은 길을 걷고, 키스하고, 섹스하며, 다시 닉의 바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렇게 보여줄 걸 다 보여주고 닉이 이웃 주민의 전화를 받고 고양이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고 아내는 사라졌다. 여기까지의 도입부 시퀀스는 매우 리드미컬하다.

이 시점부터 서사의 진행은 닉, 론다, 일기장을 기술하는 에이미의 내레이션의 세 가지 축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주로 닉의 시점에서 메인 서사가 진행되는데, 이 와중에 론다의 수사라는 방식을 통해 부부관계 및 닉의 실상과 그가 처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자연스럽게 객관적으로 드러난다는 점도 적절하다. 닉의 시점만이 있었다면 관객에게 작품 내의 배경 상황이나 사전 지식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해서 매우 어색하게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고 닉 스스로 변사 노릇을 해야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론다의 시점이 추가되니 매우 손쉽고 수월하게 다루어진다. 예컨대 첫 가택 수색에서, 론다는 에이미가 하버드 졸업생이며 Amaging amy의 실제 모델임을 알게 되고 이것이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인상적인 에이미의 내레이션 시퀀스의 첫 장면으로 이어진다. 일기장에 기록된, 에이미의 내레이션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거 회상에서 ‘어메이징 에이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객에게 설명을 해주는 동시에 에이미가 가지는 열패의식, 그리고 닉이 이것을 어떻게 공략하는지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론다의 시점에서 에이미의 내레이션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이후 론다에 의해서 닉의 사무실에서는 여자 속옷이 발견되고, 닉은 재정적으로 놓고 볼 때 기둥서방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 같이 길 가는 친구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소개 시켜줄 수 있었을 텐데.

론다는 또한 <수사>라는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작위성, 그러니까 감독이 관객에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 인물을 도구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쨌든 실종자가 생겼으니 형사가 와서 수사를 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고,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가리워져 있던 진실들이 공개되고 의혹이 제기되는 것 역시 필연이다. 필연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필연적인 행동을 하니 어색할 것이 없다.

여기서 일기장의 기능은 양면적이다. 이것은 현재의 닉의 시점이나 론다의 시점에서 드러날 수 없는, 에이미의 시점에서만 회상할 수 있는 닉과 에이미의 과거지사를 관객에게 설명해주는 동시에, 에이미가 닉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서 편향적으로 서술된다는 점에서 진실을 투명하고 중립적으로 전달하는 진술이 아니며 트릭의 수단이고, 작중에서 경찰과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닉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아서 총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는 서술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중간중간 TV 등을 통해서 제공되는 정보들 역시 복선들을 제시하고 개연성을 한층 강화해준다. TV에서 닉은 여러 차례 토크쇼 진행자에 의해 공격받으며, 이후에 닉을 변호해줄 변호사가 한 차례 등장하기도 하고, 에이미의 실종이 얼마나 전국적인 사건인지에 대해 작중의 분위기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한다.

둘의 애정에 균열이 생기는 시점을 그리는 것도 절묘하다. 부부가 침실에서 마치 꽁트 같은 역할극에서 기믹을 수행하는 것처럼 하더니, 다음 신에서는 실제로 둘 모두 실업했으며 자산의 대부분은 에이미의 부모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처리되고, 에이미가 시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현재의 집으로 오게 되는 시퀀스가 나온 다음, 닉의 불륜 상대인 앤디가 바로 그 집으로 급작스레 - 아마 많은 관객이 에이미가 아닐까 싶었을 것이다 - 찾아오고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그 다음 대비되는 듯이 에이미와 닉의 정사가 나오고, 에이미는 내레이션으로 닉이 자신을 섹스할 때만 찾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닉은 에이미의 추궁에 위에서 언급한 '나쁜놈 턱' 심볼을 보여주며, 둘의 물리적 충돌까지 보여준다. 그렇게 에이미와 닉은 결혼 전에 그토록 혐오하던, 결코 되고 싶지 않았던 평범한 커플이 되었다는 것을 아주 영화적인, 소설이나 만화나 연극으로는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뒤이어 나오는 닉이 군중들 앞에서 체신머리 없이 자기변호를 하다가 대중들이 분개하고 도주하는 장면은 백미다. 론다는 에이미의 일기장을 찾아내며, 닉은 에이미의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고 마고의 창고에서 비디오 게임 세트를 발견하면서 에이미의 의도를 드디어 알아차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에이미의 트릭들을 백일하에 공개되며, 마고는 미주리에는 사형제도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여기까지의 1시간 즈음까지 영화는 완벽에 가깝다.



2.
이 시점에서, 의식적인 관객이라면 에이미가 대외적으로 포장된 ‘어메이징 에이미’와 자신 간의 모순에 대해 콤플렉스를 강하게 느끼며, 그 사이에 모두에게서 사라져버린,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진짜 나, 진짜 인생에 대한 갈망이 대단히 클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미처럼 미화된 자신의 이미지와 실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의 간극 때문에 괴리를 겪는 이들은, 타인들이 자신의 실체를 모른 채 표층만을 보고 자신을 숭배한다거나 경애할 때에 그들의 어리석음과 허위에 환멸을 느끼고 세간의 인식의 덧없음에 조소를 보내며 누군가와 진실된 관계를 맺을 것을 소망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초라한 진면목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려드는 양면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비치는 외양에 비해 자신의 실재가 크게 못 미친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이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외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타인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프레텍스타 타슈 같은 인물이 전형적이다. 작중에서 타슈는 허위를 조롱하면서도 허위로 점철되어 있고, 남들이 자신의 소설을 읽지도 않은 채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경멸하면서도 누군가 자신의 소설을 전부 읽고 그 조야함을 간파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은유적으로 노출하면서도 막상 니나가 범죄의 진상을 파헤쳐지니 부정한다.

이런 식으로, 평범함과 진부함과 허위에 점철된 껍데기 같은 현재의 삶을 벗어나 진짜배기 인생을 희구하고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결국 인생의 너절함에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의 욕망이 허영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삶에 패배해가는 여성상은 실상 어제 오늘 나왔던 것은 아니다. 당장 마담 보바리나 안나 카레니나라는, 각기 19세기의 서유럽과 동유럽을 대표하는 모범적인 본들이 있다. 이것들이 문학의 예라서 무리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영화로 가도 사례는 많다.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연결고리를 가지는 세 여인인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 로라(줄리언 무어 분), 클래리사(메릴 스트립 분) 가장 대표적 - 만약 영화의 소재가 되는 소설의 이름이자 주인공인 델러웨이 부인까지 포함한다면 네 명 - 이며, 이창동의 <밀양>의 신애(전도연 분)이 그러하고, <시>의 양미자(윤정희 분)도 이 범주에 속하며, 특히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분)과 프랭크(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의 관계는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닉의 관계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대응된다. 이뿐 아니라, <레이첼, 결혼하다>의 킴(앤 해서웨이 분) 역시도 좋은 사례다.



* 이런 노래도 있고...

버지니아 울프는 미치광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자신의 재능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서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인생과 거듭 싸워나가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그녀의 결말은 자살로 끝이 난다. 리차드(에드 해리스 분)와 더불어 일상의 안락함을 영위하고자 했던 종국에는 그의 자살을 목도하게 될 따름이고, 그런 클래리사에게 로라는 죽음 대신 삶을 택하기 위해서는 자식인 리차드와 남편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한다. 신의 섭리가 가져다주는 절망감과 공허함 속에서 참한 과부마냥 극기하던 신애는 반항적으로 타락해간다. 양미자는 인생의 마지막 희망으로 여기던 외손자가 윤간을 범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치매로 오락가락 하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며 손자에게 항변한다. 에이프릴은 연극계에서의 성공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차갑고, 남은 것은 프랭크와 교외 근교의 그럴 듯한 집에서 그럴 듯한 삶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인생뿐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시시한 여생을 시시하게 살아가는 것을 감당할 수 없던 에이프릴은 프랭크에게 이곳을 떠나 함께 파리로 가서 평소 꿈꾸던 야망을 실현하라고 용기를 북돋지만, 이미 프랭크는 가정에 충실한 견실하고 평범한 가장이 되었으며 자신의 한계을 초극하고자하는 기백과 강단은 사라진지 오래다. 가장 보통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에이프릴은 남편에게 마지막 식사를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로 대접한 이후 스스로 낙태를 하며 죽어간다. 킴은 실수로 동생을 죽게 만든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소위 올바르고 정상적인 번듯한 삶을 상상할 수 없으며, 비틀리고 어긋난 행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기에 “그 당시엔 제정신이 아니었어. 하지만 멀쩡한 지금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며 절규한다.  

이것은 단지 소설이나 영화 속에 박제된, 우리의 일상과는 괴리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미지만 보고 자신을 단정 짓는 타인들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그들을 얕잡아보면서도,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까지 알아채버리는 눈치 빠른 이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 노출과 폐쇄 사이를 오르내린다. 언뜻 보면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모순적인 것 같지만, 많은 것이 그러하듯 심층에는 거대한 일관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채주기를 기대하지만, 그 진면목은 진짜 진면목이 아니며 자신이 평소에 외면하고 있던 추함과 나약함과 왜소함은 빠진, 화장실 거울에 비친 밝디 밝은 자신의 얼굴과 같이 미화되고 윤색된 면모인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조차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남들도 자신에게서 같은 것을 보아주기를 원하므로, 그러한 환상이 깨지고 잔혹한 진실이 자신을 도려내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절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히트쳤겠죠.

그와 같이, Amaging-Fucking-Amy를 저주한 그 순간부터, 자연스러운 귀결로 에이미는 디 아워스의 네 여인이 되어야 했고, 밀양의 신애가 되어야 했고, 시의 양미자가 되어야 했고, 레이첼 결혼하다의 킴이 되어야 했으며, 최소한도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프릴이 되어야 했다. 실제로 에이미가 닉을 배필로 선택한 이유도 이 남자라면 허위와 가식과 치장과 진부한 세상살이 와중에 가려진 진짜 나를 찾아주고 인생 이상의 인생을 살게 해줄 것이라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대는 지당한 것이었다. 남편과 삶에 대한 기대가 배반당하고 부박함과 범속함을 끝끝내 떨치지 못했을 때, 이 여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말이다.


* 스트립쇼 시작!



3.
그러나 에이미가 내레이션의 형태가 아니라 직접 등장하게 되는 시점부터 에이미의, 아니 데이비드 핀처의 선택은 파괴와 혼돈과 망각이다. 즉, 1시간 10분 시점까지 에이미의 실존적인 선택을 다룰 것 마냥 단서는 잔뜩 주어놓고 그 이후로는 그것들을 잊어버린 양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소재와 주제의식이 되어야할 것이 상실되면서 영화는 포맷되며, 남은 것은 에이미의 엽기적인 원우먼쇼 뿐이다.


* 파괴! 혼돈! 망가!

먼저 핀처는 완전범죄를 실행한 천상계의 에이미를 실론즈로 전락시켜버린다. 화려한 새출발을 꿈꾸는 돌싱이 양아치 커플에게 빵셔틀처럼 두들겨 맞고 돈을 갈취당하는 장면은 정치적 올바름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파워 밸런스도 해친다. 그토록 용의주도하게 남편과 경찰을 속이고 미국 전역을 뒤흔들던 에이미가 순진하고 무기력하게도 햇병아리 그레타 커플에게 어설프게 약점을 노출하여 표적이 된 다음,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훈계까지 듣는 것은 한숨을 나오게 한다. 그야말로 ‘길 가다 보니 저 년이 만만해 보여서 삥 뜯었어요’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신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에이미는 에이미는 이 신에서 그저 분개하며 베게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돈을 강탈당한 상황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어메이징하게 될 수 없는 자신을 뼈저리게 체감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의 벽에서 다시금 무너지는, 하지만 결코 이를 용인할 수 없는, 절망감과 자괴감이 뒤섞인 ‘슬피 울며 이갊’이 있어야 했다. 알맹이 없는 결혼과 인생을 견딜 수 없어 뛰쳐나온 그녀가 고작 삥 뜯겨서 다시 결혼 생활로 리턴한다는 것은 너무 허섭하지 않은가.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5장 30절)

사실 에이미가 닉의 불륜 현장을 발견하는 장면 같은 경우도 위의 주제를 다루면서 에이미의 정체성과 인격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메이징 에이미’와 현실의 자신 사이의 괴리감은 극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이미 젊음과 활력을 상실하여 더 이상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 같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와중에, 자신과는 달리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새파란 계집애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남편과 흘레붙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하여 ‘어메이징 에이미’와 실제 인생의 간극, 결혼을 결심하던 순간의 희망과 현재의 권태로움 사이의 간극, 그리고 노쇠한 자신과 젊디젊은 적수 사이의 간극이 교차하는 그 순간에는 에이미가 느낄 절망감과 비통함을 명확하게 묘사하여 이 사건이 에이미에게 가지는 무게감을 충분히 전달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때에 에이미는 그저 앙심을 품는 데에 그친다. 실존을 고민하던, 나를 찾아달라고 호소하던 자의식 강하던 여인이 갑자기 자의식은 날려버린 채 그저 즉물적이고 단순한 수준의 분노에 머무른다.


*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사는대로 사니, 가는대로 사니, 그냥 되는대로 사니~

닉의 시점에서 드러나는, 즉 닉이 에이미의 과거 연애지사를 추적하면서 알게디는 에이미의 실체 역시도 지극히 평범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에이미는 단순하고 알기 쉬운 평면적인 악녀로 묘사되며, 번민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에이미는 원래부터 어장관리 기똥차게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남의 통수 잘 치는 빌어먹을 년’이라는 것 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에이미의 시점에서도 딱히 주목할 만한 내면 묘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에이미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에이미는 그저 복수귀에 불과하며, 복수귀라는 측면을 놓고 볼 때는 복수귀 오브 복수귀인 오자서의 입체성에도 한참 못 미친다.


* 해는 지는데 갈 길이 머니 순리와 역리를 가리지 않겠다.

에이미가 데지 콜린스(닐 패트릭 해리스)를  살해하는 것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봐도 데지는 그렇게 죽어야할만한 이유가 없다. 아마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어린양마냥 죄없이 죽어간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데지에 비해서는 결백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죽어야하는 이유는 그래야 얼마나 에이미가 정신나간 ‘Funking bitch’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자아를 고민하고 인생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야할 에이미가 그저 자기 이익에 눈이 먼 소시오패스로 묘사되어버린다. 이것이 ‘이걸 나진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걸 에이미가~~~’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라스트 신 만큼 온 정력과 열정과 자원과 에너지를 쏟아 에이미라는 개인의 내적 갈등을 전율 넘치게 표현해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에이미라는 인물의 극단성과 과격성으로 관객을 기망하는, 즉 캐릭터에 대한 의존도가 극심해지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는 거장의 새로운 걸작이 아니라 오락 영화에 불과하게 되어버린다. 이것은 너무 she she 하지 않은가. 에이프릴이나 로라 같은 처참함과 처연함은 에이미에서 엿보이지 않으며, 신애와 김종찬(송강호 분)의 관계가 에이미와 닉의 관계보다 절절하고, 킴이 에이미보다 불행하며, 양미자가 에이미보다 어메이징하다. 그럼으로써 ‘그년도 알고보면 좋은 년이었어’가 되어야 할, 그녀가 미쳐버린 사연을 그려야할 이야기가, 그저 ‘내 여자친구, 내 마누라 개년’이 되어버리면서 <마누라 죽이기> 수준의 영화가 되었다. 전반부에서 Who am I를 되뇌일 것 같던 에이미는 후반부에서 단순한, 그저 수위가 높은 개년에 머무르며, 그저 마력이 무시무시한 마녀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저기 마녀가 나타났다! 흐드드드드’, 보다 비근하게는 ‘여기 Fucking 김치녀가 있어요!’와 같은, 반여성적인, ‘女리엔탈리즘’을 드러내는 클리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이는 문학에서 설화로의 퇴행이며, 예술에서 객담으로의 추락이다. 심지어 매체의 특성상 영화 이상으로 포퓰리즘적일 수밖에 웹툰으로 가도, <창백한 말>의 진짜 마녀인 로즈가 있다. 로즈 같은 진짜 마녀조차도 작중에서 그저 죽어 마땅할 마녀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하물며 실제로 마녀인 것도 아닌 에이미는 어떤 인물로 그려져야 하겠는가.


* 3D가 2D를 이길 수 없는 이유.


* 이런 마녀도 있고...

결말부에서 협박하다시피 결혼을 유지할 것을 강요하는 에이미에 대한 닉의 항변은, 사실상 핀처에 대한, 그리고 핀처가 예상한 관객의 항변이다. ‘이런 결말이 말이 되나요!’ 그리고 그에 대해 데이비드 핀처의 답은 이렇다. ‘이게 결혼 생활이야’ 이것은 말 한 마디로 때워먹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창렬스럽다. ‘사랑으로 결합하여 밀어를 주고받던 연인들이 결혼하면 결국 이렇게 되기 마련이다. 결혼 판타지는 환상이다’는 식의 결론은 기실 뻔한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영화 중반까지 절정에 달했던 핀처식 스릴러는 휘발되어 버렸으며, 2시간 20분 간의 영화의 진행은 고작해야 진부한 일상적 교훈으로 귀결되어버린다.


* 창렬...


* ‘자! 결혼 생활이야~알아서 기어~아니면 쉬어~알았으면 뛰어’



4.
데이비드 핀처 쯤 되는 감독이 위와 같은 문제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실제로 그는 초반부에서 일부러 명작이 되기 위해 필요한 퍼즐은 다 보여줘놓았다. 마치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의식할 법한 요소들을 미리 설정으로서 언급하면서, 영화가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 어떠해야하는지를 자신도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부러,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렇게 안 해도 잘 볼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서 말의 구슬을 꿰지 않아도 보배로 오인되어 잘 팔리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듯이, 그 전까지의 퍼즐들을 똥물에 쳐박는다. 만약 핀처가 정말로 의식적으로 이런 시도를 행했다면 매우 불쾌한 일이다. 이것은 핀처가 관객과 대중을 개돼지로 보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감독이 영리했기 때문에 영화가 개판이 되었다는 것은 역설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에이미에게는 감정이입할 여지는 증발해버리고, 오로지 에이미의 극단성과 과격성,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불가해함만이 결정처럼 남는다. 에이미는 관객을 납득시키는 인물이 아니라, 반대로 납득할 수 없는 인물로서 관객들을 경도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문자 그대로 도행역시이다. 이것은 상궤에 어긋난 것이며, 영화는 진지하게 감상할 대상이 아니라 해학과 환락을 주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 시대의 마담 보바리가 될 수 있었던 영화가 고작해야 뭇 남성들에게는 연애나 결혼에 있어 어려움을 자위해주는, 말하자면 관객들의 나르시즘을 자극하는 것에 그치는 천박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핀처는 조커에게서 미국인들은 미국의 적대자들을 보면서 경도되었던 것처럼, 에이미에게서 이성애자 남성들은 자신의 여자친구나 부인을 읽어내면서 스크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도취해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포르노와 같은 대리만족 기능을 수행하며, 이 영화가 가지는 가치는 심혜진과 강남길이 주연으로 나온 99년 작 드라마 <마지막 전쟁>보다 크게 낫지 않다.  



* 기억나시는 분들 많으실 듯. 저는 초딩 때 봤습더랬죠...

많은 관객들이 극중에서 에이미에게 기만당하는 대중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지만, 사실 그 대중들은 핀처가 생각하는 관객들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닉과 에이미의 파란만장한 애투를 보면서 미국 전역이 들썩거렸듯이, 핀처는 관객들이 대학의 과CC나 사내 연애를 보면서 웃고 떠드는 집단 구성원들처럼 이야기를 소비하도록 유도했다. 결말 시점에서 미국 시민들이 여전히 ‘어메이징 에이미’의 동화같은 스토리를 진실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듯, 관객들은 ‘저런 미친년을 보았나’는 식의 감탄을 연발하지만, 정작 에이미의 본질, 에이미가 희망했어야하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가 도달할 수 있었던 지점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극장을 떠난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에이미는 불가해한 대상으로 남아 있고, 그럼으로써 여신이 된다.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가면에 가려져있던 아이돌 에이미는 ‘Fucking bitch'라는 또다른 가면으로 가리워지면서 여전히 아이돌로 남는다. 우상은 지성적인 파악이 멈추는 순간에 배태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매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디 특정 장르의 고유하고 특유한, 장르의 본질을 극대화하는 것을 매너리즘이라고 하며, 기술적 요소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그 점에서 매너리즘은 단순한 나태함은 아니며, 절정의 완성도를 성취하려는 태도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너리즘이라는 어휘가 일상에서 흔히 통용되는 의미처럼, 본질을 포기하면서까지 기술적인 요소에 집착하는 경직성이라는 양면적인 속성을 띠기도 한다. 그와 같이, 결국 에이미는 매너리즘인 인생으로부터 탈출하여 본질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완성도 높은 기행과 악행을 꾀하는 매너리즘적인 마녀로 전락하면서 어쭙잖은 인물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영화도 본질을 상실한채 매너리즘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 어쭙잖은 작품이 되었다. 작중 인물의 한계가 곧 영화의 한계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실로 절묘한 파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엄재경급 포장에 둘러싸여 있던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체가 고작해야 정신나간 소시오패스 수준이 아니라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입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저 에이미가 미친년이라는 식의 일방통행적인 방향이 아니라 닉과 에이미의 실체가 론다 같은 인물에 의해 조금씩 벗겨져나갔다면, 모든 장막을 걷어내었을 때에 이런 게 결혼이라는 식의 얄팍함이 아니라 보다 관객의 심부와 폐부를 찌르는 인간적 진실이 드러났다면, 그리고 이를 서로가 정면으로 응시하는 - <레볼루셔너리 로드>처럼 그러한 나약함에 절망하거나, 혹은 <레이첼 결혼하다>처럼 서로를 감싸안거나 - 쌍방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로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스릴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은폐하고 있던 사실들이 차례차례 하나씩 드러나고, 그때마다 관객이 이전까지의 정보를 토대로 내렸을 법한 도덕적인 결론들이 거듭하여 전복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밀도 깊은 스릴을 준다. 그러나 <나를 찾아줘>에서 에이미가 감추고 있던 진실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 나오는 가정부 여인인 라지에(사레 바얏 분)이 감추고 있던 것만도 못하다. 공교롭게도 둘 다 임신했고, 임신공격을 하며,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점도 일치한다. 그저 에이미는 위장된 임신이 공격 수단이고 라지에는 위장된 유산이 공격 수단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모든 영화가 항상 보다 깊은 층위의 함의를 캐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관객들 역시 영화에서 무언가 성찰이나 자기반성이나 깨달음 따위를 얻어야 할 필요도 없고 이를 기대해야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오락영화로써 즐긴 것은 별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성룡 영화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가 아트하우스 무비들보다 반드시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락 영화 이상의 무언가로, 문명과 교양과 지성 속에 가리워진 인간의 날것어린 본질을 보여주는 스릴러로, <세븐>, <파이트클럽>, <조디악>, <패닉룸>, <소셜 네트워크>보다 발전된 영화로, 나아가 흔해빠진 상업영화가 아니라 격이 다른 ‘진짜 영화’로 수용되고 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영화 속에서 에이미 부부가 대중들을 농락한 것처럼, 핀처가 관객들을 농락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표하고 싶다.

★★★ 3/5 가점 요소만큼이나 감점 요소도 많아 정량적으로 평가하기가 난감한 영화. 용이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이를 포기한 이무기.



* 지난 달부터 고등학교 친구 둘과 더불어 영화 팟캐스트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영화계契>로, 전문적인 분석보다는 영화'빠'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제들과 관점들을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이 글에서 다룬 <나를 찾아줘>는 2회차에서 방송했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과 더불어 감독의 전작들 등의 보다 포괄적인 이야기를 논했었습니다.

영화계 2화 : 나를 찾아줘 1부
http://www.podbbang.com/ch/8454?e=21549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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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베스트
14/12/16 09:22
수정 아이콘
꼼꼼한 분석 잘 읽었습니다.
에디파
14/12/16 09:37
수정 아이콘
정성들인 영화평 잘 읽었습니다. 즐겁습니다. 두 달을 기다려 덧글을 쓰게된 보람이 있네요.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제대로 해석해 주셨네요.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만큼 실망했던 작품입니다.
반면에 언급하신 <시>나 <시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수작이죠. 생각날 때 가끔 돌려봅니다.
부부의 갈등이 '바람피우는 남편'과 '결혼의 판타지가 깨어진 아내'의 구도인 것은 너무나 흔하지만
그 구도가 '미처 눈돌리지 못한 갈등'을 재조명 하는 것이 아니라 흔한 갈등 구도의 무한확장일 뿐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저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다 영화적인 재미를 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여자를 제대로(?) 다루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싶기도 합니다.
위에 언급하신 작품 말고도 결혼한 여자의 갈등과 방황을 다룬 작품중 아주 색다른 작품이 있어요.
토마스 핀천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입니다.
에이미처럼 음모와 망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하지요.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이미 보셨을지도...
구밀복검
14/12/16 09:46
수정 아이콘
추천 감사합니다. 근시일내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핀처 영화에 나온 여성상 중 구체적이고 리얼한 욕망을 명료하게 드러낸 케이스는 좀 없지 않았나 싶긴 하네요. 본문에도 언급하긴 했지만 결국 에이미의 셀링 포인트는 불가해함에서 온다는 점에서 남성들의 여성 판타지 - 미화는 아닐지언정 결국 윤색된 편견 - 를 자극하는 것이며, 女리엔탈리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요.
에디파
14/12/16 10:17
수정 아이콘
에이미는 한꺼풀만 벗기면 그 실체가 드러나는 악녀일 뿐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남자란 여자의 '한꺼풀의 공포'가 지나치게 심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의 옷을 한꺼풀 벗기는 것도 힘들지만, 그녀 마음을 한꺼풀 벗기는 것은 더 힘들지요.
아마 그 공포를 극대화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에이미의 옷은 벗겼으나 마음은 벗기지 못했다 정도가 되려나요.

가끔 제가 영화를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문학적(또는 소설적)이 아닌가 반문해보기도 합니다.
영화에 이런 기대, 즉 전체주의적 존재론과 양립할 수 없는 입체적인 인물을 기대하는 것 말이지요.
그러나 제 기대를 충족하는 작품이 있다는 것으로 이런 기대는 '정당하지 않다'는 의심을 불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토마스 핀천의 작품은 이런 싸구려 존재론에 제대로 싸다구를 날리는 작품일 듯 합니다.
끝까지 열린 존재, 끝까지 열린 결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지요.
리니시아
14/12/16 13:03
수정 아이콘
여자 다루기 어려워요...특히 저의 여자친....ㅠ_ㅠ
도들도들
14/12/16 10:06
수정 아이콘
와 제가 생각한 것을 정말 잘 풀어써주셨네요. ^^
나를 찾아줘를 수작이라 평하는 평론가들 가운데 왜 수작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이 없고, 그저 거장이 만들었고 그럴듯해보이는 요소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수작으로 결론을 낸 듯한 평들만 가득해서 불만이었거든요.
'나를 찾아줘'는 전반부의 압도적인 밀도는 칭찬할 만 하지만, 그 때문에 후반부의 형편없음과 진부함, 그로 인한 불쾌감이 더욱 도드라지는 영화입니다. 물론 핀처가 어떠한 의도로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의도 자체가 납득할 만하지 않거나 혹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야죠.
구밀복검
14/12/16 10:14
수정 아이콘
네 저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극장에서 영화 보고 나서 실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온라인의 반응은 찬양일색이라 제가 영화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나를 찾아줘에 대해 불만이 있는 관객층도 분명히 있는 것 같은 것이, 영화 평점 앱인 왓챠에서 보니 나를 찾아줘가 5점 만점에 4점이던데, 제 경우에는 기대 평점이 3.2점 밖에 안 되더라고요. 왓챠에서 제공하는 기대 평점의 경우 자신과 비슷한 영화 평가를 내린 평가군의 평균점수를 반영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와 영화에 대한 관점이 비슷한 사람들 중 혹평을 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는 이야기겠죠.
마스터충달
14/12/16 13:48
수정 아이콘
전 <나를 찾아줘>가 수작인 이유로 단 한 컷도 버릴 컷이 없기 때문이라고 썼었죠.
뭐 저도 영화의 진정한 의미는 훌륭한 내러티브와 독창적인 스타일에 있으며
편집이나 몽타주는 그러한 것들을 위한 수단이 되는 기교와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근데 핀처는 그 기교의 수준이 너무 쩐다고나 할까요.
컷의 연결이 너무나 유기적이라 붕 뜨는, 사족이 되는 신이 존재하질 않죠.
여기에 특유의 교차편집과 플롯의 배치가 가미되면 정말 편집의 기교만으로도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에이미가 데시를 잡아먹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정말 소름끼치는 장면이었죠.
살인의 행동과 그 준비과정을 재배치하여 뻔할 수 있었던 살인을 사냥으로 바꿔 버렸죠.

저도 이 영화에서 에이미의 반전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도들도들님과 비슷했습니다.
'도대체 핀처라고 너무들 빠는 거 아닌가? 이런 뻔한 스릴러를 뭐라고...'
근데 거기까지가 그냥 전반전이더라구요.
후반전 들어가고 나서 부턴 '이야~'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BetterSuweet
14/12/16 10:11
수정 아이콘
저는 약간 다르게 느꼈던 게,
에이미에게 닉과의 결혼은 진짜 삶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어메이징 에이미의 허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던거 같아요. 영화가 연애초기의 로맨틱함을 강조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이구요.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그 허영을 채울수없는 결혼생활을 하게됐고, 그제서야 자기 진짜 삶을 살기위해 사건을 벌인거죠.

강도를 당한 후의 절규는 '난 어메이징 에이미를 떨쳐낼수 없구나,' 라는 한탄 같았구요.

결국은 남편이 새로운 방식으로 허영을 채워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돌아간거죠.

그렇게 치밀하던 에이미가 그렇게 쉽게 강도당한건 옥의티라고 보지만, 후반부에 보인 닉과 에이미의 애매한 감정선이 이영화의 포인트라고 보기 때문에, 눈 감아주고 싶어요 허허
구밀복검
14/12/16 10:33
수정 아이콘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인생을 살아보려는 욕망과 허영을 충족하려는 욕망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래서 [평범함과 진부함과 허위에 점철된 껍데기 같은 현재의 삶을 벗어나 진짜배기 인생을 희구하고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결국 인생의 너절함에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의 욕망이 허영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삶에 패배해가는 여성상] 같은 구절들을 본문에 썼던 것이고요. 본문에서 언급한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나를 찾아줘>와 아주 좋은 대비가 되죠. 남들과는 다른 진취적이고 화려한 삶을 꿈꾸었지만 이를 이루는 데에 실패하면서 자신의 진정어린 열망이 결국은 허영에 불과했음에 절망하지요. 여하간 결혼 전에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자신이 꿈꾸던 인생일 줄 알았던 결혼생활은 갈수록 실망스러워지니, 진짜배기 삶을 살기 위해서 도주를 택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죠. 강도를 당한 후의 에이미의 반응은 매우 평면적입니다. 딱 3초 동안 베게로 얼굴 가리고 소리 지른 다음 신이 바뀌면서 쓰레기 버리러 나가죠. 이는 그냥 돈 뺏겨서 빡친 것이지, 자신의 한계와 인생의 굴곡에 절망하는 심각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혹 감독이 그런 것을 의도했다고 하더라도 - 아무리 봐도 그리 보이진 않지만 - 아주 미진한 묘사라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서 에이미는 설정은 어마어마하고 복합적인 데에 비해 너무 고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이익 이외의 다른 동기나 욕망들이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의 축생적이죠.
낭만토스
14/12/16 12:15
수정 아이콘
에이미는 사실 평범한 여자죠
돈도 아버지의 재산이고요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허구의 인물을
책 팔기위한 수단으로
실제인물인것 처럼 해버리니
에이미는 어메이징 에이미가 되기 위해 삽니다
진짜 에이미를 잃어버린거죠

그 와중에 평범한 닉이 나타납니다
어메이징한 에이미가 아니라
평범한 에이미가 되고 싶었기에 그와 만납니다

그러나 그 닉도 연애초반 보여줬던 모습은
원래 닉에 비하면 어메이징 닉이었던거죠
에이미는 현실을 깨닫고 도주하죠

그러나 평범한 에이미는 개털이되고
옛사랑을 죽이면서 결심합니다
돌아가자 어메이징 에이미로

그리고 닉을 어메이징 닉으로
만들고 본인도 어메이징 에이미로 돌아갑니다.

어메이징한 두 사람은 그렇게 행복한?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마스터충달
14/12/16 14:14
수정 아이콘
<트라이앵글>등의 B급 스릴러가 은근히 흥행을 하면서 2010년 전후로 양산형 호러와 스릴러들이 쏟아졌는데
<나를 찾아줘>의 1시간 10분 까지는 딱 그 양산형 스릴러 수준이었습니다.
뭐 이건 핀처가 못났다기 보다 양산형들의 퀄이 핀처수준의 탄탄함을 갖춘게 더 대단한거 겠지만....
아무튼 에이미의 범행은 그 자체만으로 탄복할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양산형들 덕분에)뻔하고, 평범하며 심지어 완전범죄도 아니죠.
에이미는 완전무결한 치밀한 두뇌파 살인마가 아닌거죠.
오히려 눈앞의 욕망만을 쫓는 아이같은 성격이랄까요. 애시당초 자아를 찾는다는 고차원적인 수준이 가능한 성격도 아니네요.

이 영화는 에이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가 아닙니다.('나를 찾아줘'라는 제목이 에러)
에이미는 사이코패스고 닉은 형편없는 새끼죠.
그리고 그들은 화목해 보이는 가정을 이루고, 그 위선을 부각시키는 것이 영화의 목표이며
우리도 그 위선 속에 살고 있다는 냉소가 감독의 의도죠.

그런면에서 에이미의 강도 시퀀스는 필수적인 장치입니다.
가정을 벗어난 존재가 겪어야 하는 위험은
위선을 감내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요.

그나저나 팟캐로 영화 방송을 하는 피잘러를 또 한분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구밀복검
14/12/16 15:16
수정 아이콘
바로 그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미를 눈앞의 욕망만을 쫓는 아이같은 평면적인 인물로 처리해버리면서 영화도 평면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거죠. 고작해야 작위적인 소시오패스와 흔해빠진 개새끼가 나와서,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가는 게 결혼이라는 식의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근대 문학 이래로 수도 없이 울궈먹은 서사입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그 정도면 굳이 극장까지 가서 13000원이나 주고 볼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마지막 전쟁>이나 <마누라 죽이기>를 예로 들기도 했지만, '결혼은 사기고 기만이며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라는 식의 이야기는 숱한 드라마와 케이블용 싸구려 영화들이 다 하는 것이니까요. 이건 너무 뻔하고 질박합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서사가 가지는 역동성과 비교하면 처참해지죠. 또한 초반부에 감독이 심어두었던 제반 설정들은 아무 의미가 없이 버려집니다. 어메이징 에이미가 항상 자신을 앞서나갔는 것에 , 허영과 탐욕 속에서 자신들 뿐만 아니라 딸의 인생까지 낭비하는 부모, 결혼생활이 기대와는 달리 서서히 침몰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느끼는 인간적인 실망과 같은 것들 말이죠.

스토리가 평면적이니 결국에는 인물과 사건의 자극성과 선정성에 의존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적었지만, 데지 콜린스는 에이미에게 살해당할만큼 죽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집착은 엿보일지언정 오히려 비교적 젠틀하게 그려지죠. 데지 콜린스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래야만 예수가 '다 이루었다'를 외치듯 에이미라는 캐릭터가 날아오를 수 있으니까요. 마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그런 것처럼 배고픈 사자 앞에 일부러 가젤 한 마리를 갖다 주며 사냥을 인위적으로 <연출>하고 사자의 광포함을 부각시키는 격이죠. 데지의 죽음이 보여주는 몰개연성을 커버치는 것은 '에이미는 원래 미친 년이니까'라는 인물빨과 '이런 식으로 사람 하나 손쉽게 잡아먹을 정도로'라는 연출빨과 '저렇게 해야 에이미 집으로 보내고 영화 끝낼 수 있으니까'라는 서사적 필요입니다.

본문에도 적었듯이, 만약 이 영화가 오래 전에 상실되어버린 Gone Girl에 대한 갈망과 집착과 비탄을 그린 영화였다면, 그리하여 레볼루셔너리 로드나 시, 밀양, 디 아워스,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작품들이 지시한 지점들을 우회하지 않았다면, 우리 시대의 마담 보바리나 안나 카레니나를 영화로서 재창조해내는 위대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저 맛이 간 여자(gone girl)에 대한 영화가 되었을 뿐이죠. 마녀 이야기, 광년이 이야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위대해져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대하지도 않은 영화가 위대함을 참칭한다면, 기껏해야 사랑과 전쟁 수준의 이야기가 여성과 남성 관계를 다룬 영화의 교범으로 숭배된다면, 이것은 닉-에이미 부부의 위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불건전한 위선이겠죠.
마스터충달
14/12/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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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욕망만을 쫓는 아이같은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 이 영화가 양산형 스릴러들과 차별화 되는 순간으로 봤거든요.
물론 처음의 치밀함이 말씀하신 자아를 찾는 방향으로 갔다면 훌륭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대게의 흔한 스릴러의 주인공들 보다는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뭐 이거야 기준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다만 기준에 따라 스토리를 평면적이라 비판하더라도, 이 때문에 영화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조금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이 존재하고 그 원작을 꽤나 충실하게 구현했다고 평가받거든요
(국내 개봉명이 저따구인 것도 먼저 출시한 원작 소설때문이죠.)
스토리가 불만이라면 핀처가 아니라 원작자인 길리언 플린에게 화살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전 자주 한국 평단과 관객이 스토리에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이 글도 영상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영화로 비판을 하고 있죠.
하지만 이 영화가 찬양받는 이유는 스토리 보다는 플롯과 몽타주에 있다고 봅니다.
사냥을 인위적으로 '연출'했다고 하시는데
그야 말로 데지를 잡아먹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덜미가 서늘하게 만드는 연출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냥을 '연출'한 것은 스토리적으로는 몰개연성이겠지만,
그러한 감성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종합적 연출로서는 훌륭한 장면이 됩니다.
특정 장면이 아니라 영화 전체적으로 보자면 반전과 그 이후의 촬영 뉘앙스가 확연히 달라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영화를 두개 찍어버리는 수준의 변주 또한 절대 쉬운 것이 아니구요.
(보통 이렇게 되면 일관성 없는 망작이 된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연출이죠)

과연 이 영화에 열광한 평단과 관객은 핀처라는 이름의 후광에 눈이 먼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뭐 그 후광 덕분에 스토리에만 목매는 분위기에서도 그것의 평면성을 뚫고 장점들이 드러날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구밀복검
14/12/16 16:07
수정 아이콘
<각색>의 힘이 있으니까요. 예컨대 <홍등>이나 <대부>나 <시계태엽 오렌지>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본문에서 언급한 <디 아워스> 같은 것들은 적절한 각색을 통해 원작을 뛰어넘어버린 영화들이며, 개인적으로는 반지의 제왕은 소설보다 영화로서 더 나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롯의 대부분은 살리되 일부는 오리지날 스토리 라인을 편성한다든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해내어 보다 더 생동감 넘치게 만든다든가,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도려내버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일단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면 영화적인 평가받아야하며, 원작을 통해 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것이면 애초에 원작을 차용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식의 응답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데지를 살해하는 시퀀스의 정교함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정교하고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귀결되는 바가 진부한 이상, 그 박력 있는 연출이 향하는 지점이 고작 '이걸 에이미가~~~~'라는 오관참육장과 '자~결혼 생활이야~'라는 부부 클리닉 수준일 따름인 이상, 감흥이 클 수가 없더군요. 본문에서 말했듯이 본질은 상실된 채 영화적 매너리즘적인 완성도만이 있을 뿐이니까요. 일전에 어느 게이머가 스카이림을 플레이한 이후 한탄하는 것 http://deadly-dungeon.blogspot.kr/2011/11/blog-post.html 을 보며 깊이 공감했던 적이 있는데, 나를 찾아줘를 본 제 심정이 딱 저랬습니다.

[오블리비언에서는 내가 꿈꾸던 게임을 마치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내가 꿈꾸던 그 게임이 그냥 바로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울티마6을 하면서 느꼈던 충격, 그때 이후로 항상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미래의 어떤 게임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 울티마 언더월드를 하면서 가졌던 그것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스카이림은 20년 간 꿈꿔왔던 그 이미지와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그래픽, 플레이어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삶을 사는 놀라운 AI의 NPC들, 주변 환경과의 엄청난 상호작용, 판타지 세계관에 흠뻑 빠져들게 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몇 년은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볼륨 등 거의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 게임. 오로지 게임만 빠져있다. 세계 최고의 부품들로 만들어진 차가 엔진이 없고 세계 최고의 요리에 메인 디쉬가 없으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단한 엔진을 바라는것도 아니다. 그저 차가 굴러가기만 해도 만족한다. 대단한 요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 끝내주는 사이드 디쉬를 망치지만 않을 정도면 그만이다. 그 최소한의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는 베데스다를 보면 미치고 환장할 것 같다. 내 오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본과 기술이 있는 유일한 회사가 꿈이 든 상자를 던져주고는 절대로 열쇠를 내놓지 않는다. 난 그 상자의 뚜껑이나 핥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마스터충달
14/12/16 16:35
수정 아이콘
최고급 한우라서 기대했는데 스테이크가 아니라 쇠고기 카레가 나와 불만이신 느낌이네요.
하지만 좀만 너그럽게, 그리고 한발 물러서서 즐겨본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향신료의 절묘한 배합이 매우 훌륭한 요리가 될 수도 있을겁니다.
스카이림도 조금 너그럽게 모드의 존재를 평가에 반영한다면
그야말로 꿈과 모험이 넘치는 신세계가 가능하니까요.

각색 이야기를 하셨는데, 핀처의 의도가 소설과 일치했기에 별다른 각색을 하지 않았겠죠.
때문에 스토리의 부진함에 핀처의 책임도 있다고 한다면 인정할 수 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그걸로 영화 전체의 가치를 낮추거나, 다른 평들을 후광효과로 치부하면 안되겠죠.
중간의 댓글에서 왜 수작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글을 보고
이 영화의 스토리를 제외한 다른 장점들을 댓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스토리가 뻔하고 볼륨이 작아도 영화는 잘 만들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구밀복검
14/12/16 16:49
수정 아이콘
뭐 예시로 언급한 것 뿐이니 자세히 논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만, 여하간 저 게이머의 이야기는 '메인퀘스트가 시시하고 메인퀘스트와 서브퀘스트의 연계가 없다시피하여 게임 자체를 일관적으로 꿰뚫는 목적이 없어져버렸다. 게임의 고유한 묘미는 게이머가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며 이를 성취해나가는 서사를 스스로 게임 플레이를 써나감으로서 영화의 관객이나 소설의 독자나 음악의 청자와는 달리, 무기력한 감상자의 처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추구할 목적이 없으므로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관광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모드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는 것입니다. 메인 퀘스트는 모드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제작자가 손을 떼는 이상 업데이트가 불가능한 성경마냥 언터쳐블한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굳이 이 예시를 강조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좀 절묘하게도 제가 나를 찾아줘에 대해 가지는 인상과 일치한다 싶네요.

더불어 저는 이 영화의 흥행과 호평이 단순한 후광효과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우리 시대의 마담 보바리가 될 수 있었던 영화가 고작해야 뭇 남성들에게는 연애나 결혼에 있어 어려움을 자위해주는, 말하자면 관객들의 나르시즘을 자극하는 것에 그치는 천박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핀처는 조커에게서 미국인들은 미국의 적대자들을 보면서 경도되었던 것처럼, 에이미에게서 이성애자 남성들은 자신의 여자친구나 부인을 읽어내면서 스크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도취해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포르노와 같은 대리만족 기능을 수행하며, 이 영화가 가지는 가치는 심혜진과 강남길이 주연으로 나온 99년 작 드라마 <마지막 전쟁>보다 크게 낫지 않다.] 고 적었는데, 말하자면 감독이 대중의 니즈를 제대로 읽어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 포퓰리즘적인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고요.
마스터충달
14/12/16 17:10
수정 아이콘
음.. 예시일 뿐이라 저도 깊이 말씀 안드리겠지만, 스토리와 퀘스트, 신규지역을 포함하는 모드들도 있어서요. 최근에 vilja 모드 해보느라 스카이림 10 몇회차 플레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20회차는 안되겄지;;)

후광효과를 언급한 댓글에 흔쾌히 동의하셔서, 그건 아니라고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대리만족에 열광하는 것으로는
다양한 계층의 호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 만해도 결혼도 안했고,
여자친구한테 에이미에게서 느껴지는 부정적이고 불편한 감성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
여자의 끔직함을 고발하는 것에 열광하진 않았거든요.
(오히려 저런 미친 여자랑 같이사는 닉에게 한탄을 많이 했죠.)
대신 핀처의 기교에 탄복했습니다.
저 뿐만 영화를 호평하는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 정교함을 칭찬하더라구요.
구밀복검
14/12/16 17:27
수정 아이콘
음...저도 퀘스트 MOD들은 많이 해보긴 했습니다. 근데 그게 메인 퀘스트의 충실함을 강화시켜주고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서브 퀘스트를 자율적으로 선택함으로서 메인 플롯의 볼륨을 두텁게 해주지는 못하니까요. 어쨌든 메인 퀘스트는 드래곤본으로 태어나서 알두인 때려잡는 전형적인 양판소로 끝나버리고 남는 것은 '마음 내키면 각기 독립되어 있어 딱히 연결성이 없고 낱알로서의 의미 밖에 없는 서브 퀘스트들 하나하나 섭렵하면서 스카이림 세계를 관광하고 다니든가, 그게 지루해지면 이쯤에서 그냥 게임 때려치든가' 밖에 없지요. 뭐 이 부분은 관점이 좀 갈릴 수 있다고 보긴 합니다만.

여하간, 아마 남성들은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여자친구 개년'을 읽었을 테고, 여성들은 막장드라마의 '저런 나쁜 년'을 읽었겠죠. 왜, 드라마의 악녀들을 보고서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는 사람들은 할머니들이지 할아버지들이 아닌 것처럼요. 악녀를 그리는 막장드라마의 주 타겟 자체도 중년 여성들이고. 사실 다양한 계층이 호평하기로 치면야 막장드라마만한 것이 없기도 하고...

말씀대로 핀처가 보여준 기교에는 저도 탄복했습니다. [본디 특정 장르의 고유하고 특유한, 장르의 본질을 극대화하는 것을 매너리즘이라고 하며, 기술적 요소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그 점에서 매너리즘은 단순한 나태함은 아니며, 절정의 완성도를 성취하려는 태도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너리즘이라는 어휘가 일상에서 흔히 통용되는 의미처럼, 본질을 포기하면서까지 기술적인 요소에 집착하는 경직성이라는 양면적인 속성을 띠기도 한다.]라는 구절을 쓴 것도 그런 양면성을 묘사하려 했던 것이고...

여하간, 사람에 따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있게 봤으니까요. 다만, 일련의 작품군들과 비교해봐도, 그리고 핀처의 이전작들과 비교해봐도, 혁신적인 장르적 발전을 일구어낸 작품이라는 데에는 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네요. 막장드리마계의 신기원...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궁색해뵈고.
마스터충달
14/12/16 17:37
수정 아이콘
뭐 저도 핀처의 역대 작품들과 놓으면 상당히 하위권에 놓이는 작품이긴 합니다.
근데 그게 올해본 영화 best5 에 들어가버리네요;;;;

나름 한 작품에 두 영화 찍어버리는 문법 파괴적인 부분이 있기에
신선함이 부족할지언정 (일상적 용어로) 매너리즘에 빠진 작품으로만 볼수도 없을 것 같네요.

막장드라마의 신기원이란 평은 제가 봐도 참 없어뵈네요.
에디파
14/12/16 18:23
수정 아이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감독이 어떻게 입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인지요? 악녀로서의 이미지만을 부각시킨 것이 어떻게 입체적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오히려 단순함을 극대화시켰다고 하면 더 그럴듯 합니다. 모든 욕망은 단순합니다. 다만 욕망을 좇는 방법이 복잡할 뿐이지요. 쟝르적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별로 재밌지 않았어요. 하나도 안무서웠거든요. 만약 에이미에게 사냥당하는 데지가 소름끼쳤다면 하나만 죽일거 뭐 있나요. 여럿죽이면 에이미는 더 단순한 에이미가 될텐데요. 욕망을 좇는 단순한 에이미의 진심을 끝까지 드러내지 말았어야 더 입체적이 되었겠지요. 스릴로서도 이 영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결과가 예상되는 스릴러라니... 너무 진부하잖아요.
마스터충달
14/12/16 18:36
수정 아이콘
반전까지의 에이미가 철두철미하고 냉철한 살인마였다면
이후의 에이미는 엉성하고 아이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 영화가 불행한 결혼생활에 지친 여성이 자아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죠.
눈 앞의 욕망을 위해 위선이라는 이름의 결혼생활을 이루는 자들에 대한 냉소로 결론짓게 되구요.
때문에 전반전이 흔한 양산형 스릴러였다면, 후반전에 비로소 핀처표 영화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전개에서 에이미라는 캐릭터의 내적인 심경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에 의해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이나믹하게 변화합니다.
캐릭터 스스로가 입체적으로 피어난다기 보다는
주변 조명이 달라지면서 입체적 면모가 드러난다고나 할까요.
때문에 전형적인 평면형 캐릭터와 비교한다면 입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연아
14/12/17 10:28
수정 아이콘
사실 후자의 에이미가 우리가 바라보는 에이미고, 전자의 에이미는 에이미가 보여주는 에이미인 거죠.
그러니까 그 두 개는 자신을 찾는 과정이나 각성이나 이런게 아니라 그냥 달라야 정상인 거죠.
이 영화는 무슨 에이미의 심경 변화가 나타나는 영화가 아닙니다. 에이미는 한결같지요.
그게 화자가 누가 되느냐, 사건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시청자가, 또 영화 속 사람들이 에이미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이 영화의 진짜 핵심이고.
그래서 충달님 말씀대로 타인에 의해 드러나는 입체적 면모가 중요한 영화죠.
에이미 자체가 입체적인 캐릭터라면 아마 이 영화의 주제의식에도 어긋나고 감흥도 덜 할 겁니다.
王天君
14/12/16 16:53
수정 아이콘
아옹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그냥 본문 길이만으로도 이런 압도적인 리뷰가 올라오니 미루고 있던 감상문을 어서 써야겠다는 초조함만 드네요
김연아
14/12/17 09:55
수정 아이콘
좀 쓰세용~~~
14/12/16 18:01
수정 아이콘
전 오히려 앞부분이 전형적이고 뻔한 스릴러라는 매너리즘이 느껴졌구요. 물론 완성도는 정교했지만요.
후반부에서 핀처영화에서 느꼈던 강렬함, 임팩트를 느껴서 감탄했었네요. 세븐에서 느꼈던 그런 느낌이랄까요.
물론 그 전개 과정에서 분명히 이게 대체무슨영화야 싸이코패스는 너무 뜬금없는데 이런 느낌도 받긴 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디악+세븐 느낌으로 감상했고 기대했던만큼 핀처스러움을 충분히 느꼈으며 여운이 남는 연출에 감동했네요~
사람마다 감상 포인트가 달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마스터충달
14/12/16 18:44
수정 아이콘
저도 앞부분이 전형적인 스릴러였다고 봅니다. 핀처 특유의 호흡이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스릴러였어요.
근데 그게 끝나도 영화가 안끝나더군요;;
14/12/16 18:54
수정 아이콘
저번 인터스텔라 리뷰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네요.(인터스텔라 리뷰에는 제가 그 영화를 너무 늦게 봐서 댓글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공감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영화를 너무 플롯 위주로 보시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별 5개를 줬는데, 그 이유는 많은 장면들에서 핀처식의 호흡과 카메라 구도가 완성형을 넘어 자신만의 왕국을 완성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소설이 아니거든요. 이 영화 플롯의 단점으로 지적된 것은 원작 소설로부터 이어받는 부분이 많고요. 근데 그걸 핀처나 각본가의 잘못이라고 하긴 어렵죠. 미국에서 1위 먹은 베스트셀러 소설인데요.

그래서 소설에서는 다양한 부가적인 묘사들을 통해 그 플롯의 단점을 극복하려 했고 영화에서는 그러기엔 극이 너무 늘어지니 많이 쳐낸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작진이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구밀복검
14/12/17 11:01
수정 아이콘
원작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논한 바가 있기에 해당 코멘트로 갈음하려 합니다. https://pgr21.co.kr/?b=8&n=55457&c=2070569

더불어, 제가 요구하는 것은 플롯, 즉 문학적인 구성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위에서 반지의 제왕의 경우 소설보다 영화가 낫다고 평했을 리도 없었을 테고, 소설 원작이 따로 있는 디 아워스를 위에서 굳이 언급했을 이유도 없겠죠. 애초에 영화의 플롯은 소설만큼 대단할 수가 없으며 아무리 용을 써도 차이나 타운 이상이 되기가 어렵죠. 매체의 특성상 텍스트 쪽이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정보량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영상 매체는 서사의 볼륨과 밀도에서 절대 텍스트를 따라잡을 수 없고 그 점에서 영화가 소설보다 플롯이 좋기는 어렵죠. 제가 요구하는 것은 플롯이 아니라 내러티브입니다. 그 자체로는 영화가 될 수 없는 문학적인 플롯을, 어떤 식으로 카메라를 통해 영화적으로 형상화해는지에 평가의 초점을 둔 거죠. 이 과정에서 플롯은 그저 기본적인, 무난한, 기성품으로서 흠 잡을 것 없는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 정도면 감독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환상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예컨대 그래비티라든가 메멘토, 샤이닝, 조디악, 다우트 같은 경우 플롯의 측면에서 위대하다고할 것은 없을지언정 내러티브가 훌륭한, 지극히 영화적인 가치에 충실한 영화다운 영화들이라고 봅니다. 반면 나를 찾아줘 같은 경우에는 서사라고 할 것이 너무나도 엉성하기 때문에 이를 어떤 식으로 형상화했든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것이고요. 위에 인용했던 것입니다만, [세계 최고의 부품들로 만들어진 차가 엔진이 없고 세계 최고의 요리에 메인 디쉬가 없으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단한 엔진을 바라는것도 아니다. 그저 차가 굴러가기만 해도 만족한다. 대단한 요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 끝내주는 사이드 디쉬를 망치지만 않을 정도면 그만이다.]라는 구절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촬영과 영상 그 자체로는 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 경우에는 멋진 풍광을 찍어낸 슬라이드 사진쇼나 출발 비디오 여행 따위에 나오는 많은 UCC 영상들도 영화가 되어 버리겠죠. 실제로 영상의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야 유투브에도 좋은 것들은 많고요. 그렇다고 이 작품이 해체주의적이라든가 미니멀한 시도를 통해 영상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아트무비는 전혀 아니니까요. 그 점에서 매너리즘의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영화로서의 틀을 갖추기 위해서 기술적인 완성도 역시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결여되었다고 꼭 영화가 아닌 것도 아니니까요. 촬영과 연출과 편집에 있어서는 대단할 것이 없지만 뚝심과 강단만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처럼 말이죠.
14/12/17 00:24
수정 아이콘
제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잘 읽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중반 이후에 중요한 부분이 되는데 오히려 김이 빠지더군요. 고작 이거였어? 하는 느낌으로. 인터스텔라에서 나온 만 박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는데... 윗 분 댓글보고 인터스텔라 리뷰도 읽어보러 가봐야겠습니다. 흐흐
김연아
14/12/1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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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본지 꽤 돼서 자세한 얘긴 못 하겠고.. 하려는 얘기가 고작 이거냐....에는 글쎄요...

전 이게 결혼 생활이 이런거야...로 한계를 지을 수 있는 영화인지 의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관찰자에 대한 조롱이랄까요.
좀 친절하게 풀어보면 니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렴이랄까요.

원작은 안 읽어봤지만, 영화의 경우 하필 대상이 결혼생활이었던 것이고 주제는 그 결혼생활을 밖에서 바라보게 된 우리들이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부터 매스미디어, 미국법정, 가족이나 주변 이웃과의 관계 등등이 겉모습에 속고,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며 움직이는지가 핵심이고.
가장 겉으로 보는 것과 이면적으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결혼생활의 이중성까지도 동시에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이 된 거죠.

그래서 전 전체적인 평 자체가 동의가 잘 안 갑니다. 이게 과연 결혼 생활을 진지하게 다룬 영화인 것부터가 의문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천재소년 두기가 끔살당하는 것은 에이미를 사이코패스로 치장하기 위함이 가장 큰 목적이 아닙니다. 그게 묻히는 과정이 핵심이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뜬금포 살인인데, 건드릴 생각조차 못하잖아요.
구밀복검
14/12/17 11:24
수정 아이콘
그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나를 찾아줘>보다 훨씬 좋은 영화들이 많지요. <차이나타운>이 이 계통의 전설이며,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라든가, <시티 오브 갓>이라든가, 핀처의 이전 작품인 <조디악>도 있고, 넓게 보면 <파이트 클럽>도 이런 소재를 활용했었고, <다크 나이트> 같은 경우도 일정 부분 이러한 지점을 경유하면서 미국 사회의 기만성을 논하는 작품이죠. 위에서 언급한 <홍등>도 좋은 예고...한국 영화 중에도 <추격자>나 <살인의 추억> 등이 있고요. 사실 본문에서 언급했던 시나 레볼루셔너리 로드 같은 경우만 해도 <위선적인 표층에 가려진 이면의 진실>의 문제를 더불어 다룬 것이고요. 이러한 작품들 중 상당 수가 등장 인물들이 기만적으로 포장된 표층과 긍정하기 어려운 심층 사이의 괴리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며 내외적인 투쟁을 진행해나가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실존적인 고민을 환기시키거나,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처연함을 보여준다든가, 정교한 형상화를 통해 묵직함을 전해주는 반면, 에이미를 포함한 나를 찾아줘의 등장 인물들은 전혀 생각이 없어 재고 따질 것이 없으며 너무 담백하고 평면적이라 무게감을 느낄 것이 없지요. '표층과 심층의 괴리가 크다고? So What? 난 잘 먹고 잘 살 거라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여기에는 어떠한 참신함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은 멍청하고 언론은 협잡을 일삼으며 경찰은 무능하다는 것 정도야 새로울 것이 없지요. 고전으로 가면 <이브의 모든 것>도 있고...

저 역시 이 작품이 결혼 생활을 진지하게 다룬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룰 게 없으니 '결혼은 판타지야!'라는 새로울 것 없는 클리셰로 도피한 것이고, 이것이 진지한 시도일 리 없겠지요. 도발적으로 한 발 더 나아가보자면, 본문에는 의혹 정도로 제기했습니다만, 저는 감독이 의도한 이 영화의 진짜 주제의식은 [많은 관객들이 극중에서 에이미에게 기만당하는 대중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지만, 사실 그 대중들은 핀처가 생각하는 관객들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닉과 에이미의 파란만장한 애투를 보면서 미국 전역이 들썩거렸듯이, 핀처는 관객들이 대학의 과CC나 사내 연애를 보면서 웃고 떠드는 집단 구성원들처럼 이야기를 소비하도록 유도했다. 결말 시점에서 미국 시민들이 여전히 ‘어메이징 에이미’의 동화같은 스토리를 진실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듯, 관객들은 ‘저런 미친년을 보았나’는 식의 감탄을 연발하지만, 정작 에이미의 본질, 에이미가 희망했어야하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가 도달할 수 있었던 지점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극장을 떠난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에이미는 불가해한 대상으로 남아 있고, 그럼으로써 여신이 된다.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가면에 가려져있던 아이돌 에이미는 ‘Fucking bitch'라는 또다른 가면으로 가리워지면서 여전히 아이돌로 남는다. 우상은 지성적인 파악이 멈추는 순간에 배태되는 것이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감독의 풍자의 대상은 미국사회, 세상사만이 아니라 관객이었다고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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