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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0/24 21:57:08
Name Neandertal
Subject [일반] 우리는 쌀 테니 너희들은 치워라...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었습니다. 김훈의 문체는 쉽게 읽히지 않는데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야만 넘어갑니다. 어찌 보면 그의 문체는 사진이 박힌 신분증 같아서 단 한 줄만 읽어 보아도 금방 김훈의 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로서는 축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그의 문체로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 남한산성에서 벌어졌던 일을 그린 소설이 바로 [남한산성]입니다. 이 소설 속에는 대비되는 두 집단이 나옵니다. 하나는 임금과 신하들로 구성된 지배계층, 다른 하나는 민초들입니다.

임금과 신하들의 말은 의(義)와 명(名)이 넘칩니다. 하지만 그 속에 행(行)과 실(實)이 없으니 속절없이 남한산성을 굽이굽이 돌아 연기처럼 흩어져 버립니다. 여기에는 주전파나 주화파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관념의 세계에 빠져 현실을 보는 눈이 멀어버린 맹인(盲人)들일 뿐입니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새해 첫날 임금과 신하들이 명의 천자(天子)에게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는 장면입니다. 청의 칸이 이미 조선 땅으로 들어와 망월봉 꼭대기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인조와 신하들은 명의 황제를 위해 예를 올리는 이 장면은 마치 잘 짜인 한편의 부조리극입니다.

반면 자신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난의 칼끝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는 사람들은 민초들입니다. 그들은 아비, 어미, 오라비, 누이를 잃고 집을 헐리고 굶고 추위에 떱니다. 청군의 총포에 총알받이가 되어 쓰러지는 사람들도, 청군의 몸시중, 음식시중을 들어야 되는 사람들도, 자신의 집을 헐어 관군의 말먹이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들도 다 민초들입니다. 이들은 애당초 이 사태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위에서 퍼질러 놓은 똥을 치워야 하는 기막힌 운명의 희생자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민초들입니다. 그들은 올 때처럼 임금과 신하들이 황망히 떠나버린 남한산성에서 다시 장독 속의 똥물을 에 뿌리며 새해 농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의(義)와 명(名)이 악취를 풍기며 떠난 그 자리를 행(行)과 실(實)로써 메꾸어 놓는, 깊게 베인 상처를 보듬어 안고 다시 한 번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단지 과거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만 보이지 않고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을 정통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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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미드
14/10/24 22:0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남한산성을 재밌게 읽었는데 다시 한 번 읽고 싶게 만드는 글이네요..
Neandertal
14/10/24 22:24
수정 아이콘
번역만 잘 할 수 있으면 외국에 소개해도 좋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번역이 과연 김훈의 문체를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 지는 의문이네요...--;;;
레이미드
14/10/24 22:27
수정 아이콘
번역으로 김훈 문체를 살릴 수 있다면 그 번역가는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독보적이죠. 김훈씨 문체는.. 원래 지독하게 가난해서 대기업 들어가는 게 청년 시절 꿈이라고 했을 정도이니 소위 글빨이 그렇게 다부질 수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당근매니아
14/10/25 00:30
수정 아이콘
멜빌 같은 문체로 번역하면 대강 느낌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피들스틱
14/10/24 22:46
수정 아이콘
리뷰글에서도 김훈의 문체가 느껴지네요. 의도하신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체면에서 소설이라기보다 하나의 시조같다는 느낌을 가장 두드러지게 받은 것은 칼의 노래, 현의 노래보다 남한산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해 주셨듯이 김훈의 운율에서 심상을 이리저리 곱씹어보면 마치 막창을 두고두고 씹을때 향긋한 고기향이 풍겨나는듯 문장의 맛이 느껴집니다. (표현 참 저렴하네요)

그런데 남한산성을 읽은지 꽤 되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민초들이 그렇게 비참하다는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네요. 민초들은 시대와 상황에 상관없이 그냥 들판에 피어 있을 뿐이고,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왕과 조정이 가장 비참하고 고통받고 굴욕적이었던, 어찌보면 나름 통쾌하다는 느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나랏님이라는 찬란한 허울이 풍선에 바람빠지듯 한없이 쭈그러드는 동안, 민초의 생존이라는 것은 굴욕당할것도 찬란할것도 없이 그저 꿋꿋하게 살아왔다는 일종의 민중예찬이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읽고싶네요.
Neandertal
14/10/24 22:56
수정 아이콘
저는 인조든 김상헌이든 최명길이든 그들의 하는 말이나 행동이 모두 한 편의 소극(farce)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조금씩 나오지만 이런 그들의 소극을 보면서 백성들은 비웃고 조롱하기도 하지요. 뭔가 비장하고 심각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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