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귀신이 하루하루 날짜 세어 가면서 사람을 괴롭히겠어? 하지만 상태를 보니 급하긴 했어. 최대한 빨리 떼어내야 할 것 같은데 안 간다고 고집을 부릴까봐 그런 거야.”
“그럴 줄 알았어요.”
바리가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해원은 웃음을 지었다.
“자아. 그럼 이제 문제는 그쪽인데 말이야. 어머님께서도 같은 의견이셔.”
“누가 일부러 빙의하도록 했다는 거죠?”
“응. 그 남자에게 가진 구체적인 원한은 없었어. 그렇다면 단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악의로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이야기인데, 구태여 저 남자에게만 이 주일 동안이나 끈덕지게 들러붙어 있을 이유는 없거든. 하지만 실제로는 너도 봤잖아?”
“엄청 달라붙어 있었잖아요.”
“그래. 집착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강했어. 외부의 영향이 있었을 거야.”
해원은 깍지를 낀 양손을 커피숍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예전에 어머님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원한령을 낚아채서 특별한 부적 같은 데 봉인해 두었다가 그 원한의 방향을 특정한 사람에게로 집중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사실 그 때는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부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군요.”
“응.”
해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세상으로 가야 할 영들을 이 세상에 붙들어두고, 더군다나 그 영을 이용해서 사람을 해치는 사람이 있는 거야. 그런 사람을 결코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나쁜 놈이네요? 그럼 혼내줘야죠.”
바리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어머님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응?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그는 흘깃 시간을 확인하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 나쁜 놈이 누군지 알아보자. 가끔은 정의의 사도 노릇도 괜찮겠지.”
해원은 여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미처 두 번도 울리기 전에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이해원입니다. 부탁하신 의뢰는 일단 해결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무사한가요?”
“무사합니다.”
침묵 속에서 해원은 안도와 안심의 기척을 읽어냈다. 좋은 징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한번 만나 뵙고 이것저것 여쭤볼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절 말인가요? 하지만.......”
여자가 주저하자 해원은 여기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일단 급한 불만 꺼 놓은 상황입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매번 그때마다 대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원이 강한 어조로 말하자 여자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말했다. 작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알겠어요.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어디든 괜찮습니다.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여자는 음식점의 이름을 댔다. 해원도 들어본 적은 있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물론 가 본 적은 없었다.
“OO동에 있는 곳 말씀이십니까?”
“예, 맞아요. 저녁 여섯 시에 제 이름으로 예약해 놓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때 거기서 뵙겠습니다.”
해원은 전화를 끊고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거 꽤 비싼 걸 얻어먹게 생겼네.”
“의뢰는 깔끔하게 끝냈으니 비싼 밥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끝이 아니야.”
해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정했다.
“아무래도 이제 시작인 것 같아.”
약속시간보다 이십 분 가량 일찍 도착한 해원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세 차례 전화통화만 했을 뿐 둘이 실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키는 약간 큰 편이었다. 머리는 귀밑 언저리에서 찰랑거리는 단발이었고 화장은 엷었다. 장식이 없는 흰색 블라우스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회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다 못해 수수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몸의 선이 도드라지게 드러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끌릴 만한 외모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지연이에요.”
“안녕하세요. 제가 이해원입니다.”
아주 짤막한 통성명을 하고 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두 사람 사이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다행히도 마침 노크소리가 나더니 미닫이문이 열렸다. 일본풍의 옷을 입은 직원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해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메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여자가 권했다.
“이 집은 회가 괜찮아요. 돔이 어떠신가요?”
“아, 저는 좋습니다.”
사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입으로 들어가는 생선이 돔인지 광어인지 구분하지도 못할 해원이었다. 물론 돔이 비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자신이 사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는 심산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익숙한 말투로 주문했다.
“돌돔으로 해 주시고요,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조금 이따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벨을 눌러주십시오.”
직원은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히더니 조심스레 미닫이를 닫았다.
“정말 감사드려요.”
여자는 해원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해원은 손사래를 쳤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실 정 회장님께 처음 말씀을 들었을 때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닥치고 나니 그 때 들었던 이야기 생각이 나서 제가 정 회장님께 선생님을 소개시켜 달라고 떼를 좀 썼습니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려서 놀라셨지요?”
“아닙니다.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의외로 그런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들어오는 의뢰는 일단 두 손 들어 환영하고 본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이번 달에는 의뢰가 별로 없어 살림살이가 빠듯하다는 이야기도 역시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그러신가요. 다행이네요.”
그녀가 살짝 웃어 보였다. 해원은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키며 생각했다. 매력적이지만 왠지 모르게 위험해 보인다고. 그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주의 깊게 사무적인 말투를 골라 입을 열었다.
“일단 의뢰하신 건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어차피 제게 의뢰를 주신 이상 선생님께서는 영이나 귀신같은 존재를 믿는 분이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녀는 주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공태훈 씨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정체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지독한 영이 그 분에게 붙어 있었는데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아는 어르신께 부탁드려서 그분에게서 영을 떼어낸 상태입니다. 워낙 끈질긴 영이었던 터라 아직 그 여파가 남아 있겠지만, 몸을 보양하면서 푹 쉬다 보면 한두 달 안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녀가 내쉬는 안도의 한숨은 길고 깊었다. 해원은 짐짓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뭔가요?”
“우선 첫째. 제 판단에 그 영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 분에게 씌운 겁니다. 아마도 해치려는 목적이었겠지요. 여기에 대해 뭔가 아는 바가 있으신가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을 보고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둘째. 그 누군가의 계획은 일단 실패로 돌아간 셈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물론 같은 방법을 또 쓰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전혀 다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여자는 여전히 침묵했다. 해원은 세 번째 손가락을 꼽았다.
“그리고 셋째. 평범한 사람이라면 공태훈 씨의 증상을 보았을 때 독한 몸살 정도로 생각할 겁니다. 기껏해야 병원을 찾는 정도겠지요.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선생님은 굳이 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 일을 의뢰하셨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여자가 대답하지 않았기에 해원은 자문자답했다.
“그건 선생님께서 공태훈 씨가 그렇게 된 이유가 영적인 데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이건 순수한 제 추측일 뿐입니다만.......”
그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선생님께서는 공태훈 씨에게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계시지요?”
여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침묵이 무거운 짐이 되어 해원의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해원은 어깨를 움츠리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미닫이 문 너머 멀리 어디에선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나가는 발소리와 음식 카트가 굴러가는 바퀴 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맞물린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어째서 그걸 알고 싶으신가요?”
“의뢰는 완수해야 하니까요. 직업 정신입니다.”
“아직 할 일이 남으셨다는 건가요?”
“제가 받은 의뢰는 공태훈 씨를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대로 놓아두면 그 분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될 겁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의뢰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정직하시군요.”
여자의 말은 감탄과 빈정거림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해원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감탄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여자는 무릎 옆에 놓아둔 핸드백을 열고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해원에게 건넸다. 해원은 무심코 봉투를 받아들다 그만 떨어뜨릴 뻔했다. 봉투에 손이 닿는 순간 뭔가 따끔거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 이건.......”
해원은 놀라 급히 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네 갈레로 찢어진 부적이 들어 있었다. 무슨 부적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음습한 기운이 깃들어 있음을 어슴푸레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이해원 씨는 입이 무거우시다고 정 회장님께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아 주시겠어요?”
해원은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무표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그곳에서 마구잡이로 출렁대고 있었다. 해원은 다시 그녀의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허나 뜻밖에도 그답지 않게,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는 혼란스러운 의문에 빠졌다. 그렇게까지 해야 힐 필요가 있나? 어째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진 후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급히 사족을 덧붙였다.
“무슨 범죄 같은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자가 살짝 웃었다.
“적어도 법정에서 처벌받는 종류의 일은 아닐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눈을 떠 해원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이걸 내게 주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이걸 집어넣은 베개를 베고 잠들게 하라고 했어요.”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해원은 침묵을 지켰다.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일부터 먼저 시작해야겠군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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