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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7/30 23:54:29
Name 지니팅커벨여행
Subject [일반] 첫사랑과의 이별... 이 남자가 기억하는 방법
오늘은 이별할 수 있기를...

1편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52957
2편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52971

여자들 앞에서는 말도 잘 하지 못했고, 쪽지 사건과 같은, 지금으로 보면 절호의 기회(?)를 찌질하게 대처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어떠한 대응을 하지 못했던 저였지만, 단 한번 답장을 보낸 적이 있어요.
바로 크리스마스 때입니다.

어느새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기말고사까지 치르고 방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마 방학하는 그 날이었을 거예요.
보통 12월 21~23일 경에 방학을 했으니, 그 무렵에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곤 했죠.
물론 저는 친한 친구들과 주고 받았고, 때론 카드를 만들어 보내기도 했지요.

당연히 그 날 그 아이에게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게 될 것을 예상하며, 저도 이제는 응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구점에 가서 어느 카드가 좋을 지 둘러 보는데 도무지 마땅한 카드를 찾을 수 없어 두세 개의 카드를 샀고,
물론 하나는 이 아이에게, 나머지는 다른 친구들에게 보낼 것으로 골랐죠.

고심 끝에 가장 크고 입체로 된 카드를 선택했습니다.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진 일종의 코믹 카드였는데, 이게 제일 비쌌으니 나름대로 결정의 이유가 있었어요.

근데 도무지 쓸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글을 빌려 쓰고 말았는데, 아직도 후회가 되네요.
대강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너의 말들을 웃어 넘기는 나의 마음을 너는 잘 모를 거야.
너무 많은 생각들이 나를 가로막고 있지만, 날 보고 웃어 주는 니가 고마워.
세상은 분명히 변하겠지, 우리의 생각들도 달라질 거야.
어른들은 항상 내게 말하지, 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그렇죠.
당시 제가 가장 좋아하던 가수의 노랫말을 빌려 적은 것입니다.
1994년 겨울이었으니, 이 정도의 응답이면 드라마의 그것과 같이 충분한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편지의 흑역사 중 첫번째로 내세울 만한,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1997년이 되어서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더이상 그 아이를 볼 일이 없어 졌습니다.
토요일이라고 해봐야 하교 길에 제가 탄 버스를 그 아이가 타는 우연을 바랄 수 밖에 없는 날이었지요.

평일에는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조그만 교실로 들어가서, 전국 90만의 동급생 아이들과의 경쟁을 치르며,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10시에야 학교를 나올 수 있었으니...

토요일 1시가 넘어서 버스를 타면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지날 땐 1시 반에 가까워지고, 그 학교 학생들은 이미 하교를 마친 상황이 되기 때문에 토요일에도 우연히 마주칠 기회는 없는 겁니다.
같은 차를 탄 적이 몇번 있긴 했어요.
근데 워낙 만원버스이다 보니 저는 맨 뒤에, 그 아이는 맨 앞쪽에 타고 집 근처까지 와야 했고요.
저는 차 안에서 사람들이 타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그 아이가 탄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아이는 사람들이 내려 차 안이 덜 붐비게 되는 시점에야 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 그녀는 내려야 했고요.
일년에 몇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이 상황을 생각하며 토요일 하교길에 그 학교 앞을 지날 때면, 말을 걸 수 있을까, 무슨 얘기를 하지, 하며 고민하곤 했어요.

잠들 땐 그녀가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습니다.
풍선 게임을 하지 않고도 그녀를 안을 수 있었던 건 덤이었고요.
3년 동안 그랬던 것 같네요.

그런데 차 안에서 말고는 그녀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수능을 치렀고, 지긋지긋한 공부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어요.

수능 이후 반에서는 단체로 '반팅'이란 것을 인접 여고의 같은 반과 하게 되었는데, 한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카페를 빌려
30:30 정도의 대규모로 교복을 입고 일종의 회전초밥식 미팅을 한 것이죠.
내심 그녀가 다니던 학교와도 하길 바랐지만, 첫 반팅 후 친구들의 의견이 갈려 두번째 반팅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논술 준비를 하면서도 학교는 점심 전에 마쳤고, 친구들과 놀지 않고 집에 들어오는 날엔 천리안이 아닌 인터넷이란 걸 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마침 인터넷이 확산되던 시점에 '다음'이라는 공짜 메일을 제공하는 사이트에 가입해야 했습니다.
다들 가입을 한다고 하니, 그리고 카페 라는 것을 이 가상의 공간에서도 갈 수 있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신기한 것을...

당시에는 '가입'이라는 것이 상당히 생소하게 다가왔고, 절차에 대해 상당히 거부감이 들었으며, 과연 어떤 식으로 아이디를 만들고 비밀번호를 설정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영어로만 해야 한다는데, 이니셜 3자리는 너무 짧아 안 된다고 하고, 생일이나 전화번호, 주민번호 같은 것을 아이디로 사용하는 것을 지양하라는 문구도 있어 엄청난 고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근데 그 때 번뜩이며 지나간 아이디.. 가 아닌 아이디어.

'나와 관련된 전화번호가 아니면 되지 않겠는가!'

그럼 어느 번호로....
당시에는 이 아이디라는 것이 십수년 이상, 길게는 평생 지속되어야 편한 것인지 몰랐고, 그냥 일시적인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디에 그녀의 집 전화번호 뒷자리를 붙인 것이지요.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사귀게 된 절친이, 마침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집안과 친하게 지냈으며 전화번호도 한 자리만 다르고 같다는 것을 우연히 언급한 것이죠.
그걸 왜 4년이 지난 이때까지 기억하고 있었을까...
저도 알 수 없었어요, 왜 그 순간 그 전화번호가 다시 생각난 것인지.
그녀의 쪽지에는 뭔지 모를 마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해서 인생 첫번째 이메일인 한메일넷의 아이디에는 그녀의 전화번호가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참, 아이디 선정의 난제를 해결한 원인을 제공한 이 친구는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며 지내게 있습니다.

그리고, 농구대잔치의 열풍이 남아 있던 프로농구 초창기에, 현주엽을 보러 갔던 농구장에서 전화 ARS로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지요.
그녀는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생활에 졎어 메일 사용 빈도도 점차 줄어들고, 과제를 위해 친구들과 자료를 주고 받을 때에 주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한메일넷은 가끔 저에게 그녀의 존재를 일깨워주곤 했습니다.

결국 그녀를 본 건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차 안에서 잠깐 마주친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지요.


@ 근데 이게 첫사랑이 맞는 것일까요?
그녀의 첫사랑 이야기인지, 저의 첫사랑 이야기인지 헷갈리면서 글을 마칩니다.
이별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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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로
14/08/01 16:15
수정 아이콘
아직연락이안되시는건가요 ㅜㅜ?
아쉬워요
지니팅커벨여행
14/08/01 17:10
수정 아이콘
노력한다면야 닿을 수 있겠지만,
이 분야가 다 이렇지 않겠습니까.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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