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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5/28 23:47:14
Name 구밀복검
Subject [일반] 조동관 약전 - THE STORY
[조동관 약전]은 97년에 발표된 성석제의 단편 소설입니다. 전문이 게시된 페이지 링크합니다.
http://blog.daum.net/hun0207/13291471

작품의 서사는 간단합니다. 조동관은 은척읍이란 곳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악한으로, 자신의 쌍둥이 형과 함께 폭행, 강도, 강간 등 이런저런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키며 마을을 쥐락펴락합니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던 와중, 조동관은 새로 부임한 경찰 서장을 두들겨 패게 되고, 경찰의 추적에 저항하다 결국은 산에서 얼어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전기로 남은 것이 해당 작품이라는 식이죠.

어떤 이들의 눈에는 이런 서사가 기괴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쌩 양아치가 지 맘대로 살다가 그 귀결로 비참하게 죽은 이야기가 뭐 어쨌다는 건가 하고요. 주제도 파악하기 힘들고, 교훈적이기는 커녕 꽤나 비도덕적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사의 어두운 측면을 다루며 비애감과 결부된 미감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이렇게 이도저도 아니라면, 성석제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요?

늘상 그렇듯이 여러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그리고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는, 은척 읍의 사람들이 사고만 치고 다니고 결코 수위가 가볍다 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며 자신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끼치곤 하는 조동관 형제에게 꽤나 호의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들이 조동관 형제의 행동을 긍정한다든가 지지한다든가, 혹은 우러러본다든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네들이 악당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척의 사람들은 조동관 형제에게 어떤 특정한 종류의 기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동네 양아치에게 어떤 기대감을 가질 건덕지가 있기에?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은척 읍은 조동관 형제만 없으면 잠잠한 마을입니다. 모두가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안락하고 목가적인 공간이죠.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그럴까요? 더 바랄 나위가 없다기에는, 이런 곳에서는 아무런 스토리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수다 떨 건덕지가 없는, 따분한 공간이라는 이야기지요. 지극히 무미건조합니다. 서사는 멈춰져 있죠. 이런 가운데, 유일하게 조동관의 악행만이 서사를 전개시킵니다. 조동관이 행패를 부려야 이야기가 전개되고, 은척의 사람들은 조동관의 행적에 대한 입방아와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비로소 마을 공동체가 됩니다. 조동관이 아니라면 소설은 단 한 글자도 씌어질 것이 없었으며, 은척 읍은 애초에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할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성석제가 이 소설을 쓸 당시인 90년대는 기존의 이야깃거리들은 상당 부분 상실된 시기입니다. 더 이상 독재 정권이나 노동자 문화나 억압적인 세태 따위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게 되었고, 소설가들은 이제부터 무엇을 써야하는지, 소설이 드러내야하는 본질은 무엇인지, 무엇이 소설로 쓸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두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손만 뻗어도 먹을 거리가 넘쳐나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지를 고민해야 했죠. 실제로 이 시기에 노동 문학과 같은 것은 사양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성석제가 들고 나온 것은 이야기 그 자체였습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며, 재담 자체면 충분하지 그 어떤 의미가 굳이 필요한가 하고 말이죠.

때문에 성석제에게 있어 조동관이라는 주인공의 옳고 그름이라든가 도덕관, 그 행적의 파격성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초에 그런 것을 의도하고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니까요. 그저 조동관이라는 개인이 어떻게 그가 속한 세계의 이야깃거리가 되는지가, 그리고 작가 자신이 독자에게 어떻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고, 조동관은 작가 자체를 의미했을 따름입니다. 요즈음의 예능이 띠는 특성과 비슷하죠. 무슨 거창한 담론이라든가 무게감 있는 주제의식, 의미로운 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즐길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가 손가락질을 하든 비탄을 하든 물고 뜯고 씹고 빨 수 있는 그런 것들처럼 말입니다. 이로써 소설은 레포츠의 세계로 끌어내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눈을 돌리면, 실상 많은 것이 일맥상통하다는 생각도 함직합니다. 마치 조동관이 은척읍에 에피소드를 선사했듯, 몽망진창은 정치판을 현대가의 막대한 재력만큼이나 풍요롭게 했으며, 노홍철의 소개팅은 무한도전 게시판을 화끈하게 불태웠고, 오늘도 많은 인터넷의 커뮤니티는 키배에 의해 살찌워지고 있으니까요.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 쯤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조동관은 딱 삼천 원 어치일 테고요.




똥깐의 본명은 동관이며 성은 조이다. 그럴싸한  자호(字號)가 있을 리  없고 이름난 조상도, 남긴 후손도 없다. 동관이라는 이름이 똥깐으로 변한 데는 수다한 사연이 있어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똥깐이와 한 시대를 산 사람들이 똥깐이를 낳고 똥깐이를 만들고 똥깐이를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일부로 평범한 사람 조동관을,자신들과는 다른 비범한 인간 똥깐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똥깐이 살다간 은척읍에서 세 살 먹은 아이부터 여든 먹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동관을 칭할 때 똥깐이라고 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똥깐이  보고 듣는 데서는 아무도 그를 동관으로도, 똥깐으로도 부를 수 없었다.

똥깐은 이란성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죽을  때까지 형 은관과  대략 일천 회 이상의 드잡이질을 벌였다.  그 드잡이질은 똥깐의 타고난 체격에 담력과 기술,자잘한 흉터를 안겨주며 그가 은척 역사상 불세출의 깡패로 우뚝 서는 바탕이 되었다. 은관은 성격이 비교적 온건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걸 좋아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합기도 삼단,유도 사단,태권도  삼단의 면장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조십단>이었다. 나쁘게 발음하면 그대로 욕이 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은관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 그 별명으로 부르지  않았고 없는 데서도 혹시 신출귀몰하는 그들  형제가 주변에 없나 살피고 나서 <똥깐이가 조씹다니하고 술 먹다가 전당포 주인을 깔고 앉은 사연> 등을 즐겼다.

그런 이야기가 은척읍 사람들에게 재밋거리가 된 것은 그때 은척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텔레비전이나 신문,라디오를 보거나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 돈도 없었고 볼 생각도 없었으며  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은관 형제의 이야기는 그들의 뉴스였고 연재소설이자 연속극이며 스포츠였고,무엇보다도 신화였다.

...

- 똥깐이가  대단하기는 대단해. 나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저렇게 웅장하고 다양한 욕을 들어보기는 처음일세.
- 얼마 못 버틸걸. 사람이 욕만 잘한다고 살 수 있나. 입고 있는 것도  변변치 못하대. 거기 먹을 게  있겠나,덮을 게 있겠나.
- 나는 똥깐이가 절대 그냥 내려오지는 않을 거라고 믿네.
- 그냥 내려오지 않으면? 호랑이라도 잡아올까?
- 꼴뚜기 사려,꽁치 사려어,밴댕이젓 사려
- 여봐요. 거 왜 남 장사하는 집 문전에서 비린내를 풍기고 그래?
- 맞아. 하도 욕을 퍼부으니 온 읍내에서 욕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애들  교육은 어떻게 할지,원.
- 그런데 말야,희한해.  난 하루라도 똥깐이 욕을  듣지 않으면 잠이 안  와. 몸도 찌뿌드드하고. 버릇이 됐나봐.  그 욕을 듣고 있으면 꼭 안마를  받는 것같이 시원해.

.....

한없이 내리퍼붓던 눈이  문득 그치고,느닷없이 침묵과 고요가 은척을 엄습했다.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바람도 소리를 죽이던 바로 그때,그  순간. 아뿔싸,오호라,슬프도다,어쩔 것인가,똥깐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가 전해졌다. 그는 얼어 죽었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쥐뼈인지 비둘기뼈인지 작고 메마른 뼈 몇 개가 그의 발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아주 가는 뼈 하나가 그의 입에서 멧돼지의 어금니마냥 튀어나와 있었다. 뻣뻣한 똥깐의 시체를 모포에 말아 들것에 싣고 내려오던 기동타격대 행렬은 말없이 눈을 맞으며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사람의 행렬과 마주쳤다.  이 행렬은 저 행렬을 무언으로 비난했고 저 행렬은 이 행렬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을 무언으로 전하며 한동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어쨌든 은척에서 태어나 은척에서 살다가 은척에서 죽을 사람들은 모두 한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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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트윈스
14/05/29 01:2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추천.
랍상소우총
14/05/29 16:14
수정 아이콘
이야기를 참 맛깔나게 하는 작가죠. 고딩때 기형도 시인때문에 알게 되어 한참을 재밌게 빠져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제가 읽은 한국 단편들중에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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