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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5/16 16:42:55
Name 헥스밤
File #1 dia.jpg (30.3 KB), Download : 63
Subject [일반] 누워서 혼자 티비를 봐요, 8년만에.


2년하고도 며칠 전, 디아블로 3가 발매되었지요. 청춘을 바친 게임 중 하나인 디아블로 2의 후속작. 어떻게든 한정판을 구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도저히 시간이 되는 사람이 없어서 직원 바텐더에게 구해달라고 5만원 웃돈을 주고 15만원에 구했습니다. 컴퓨터도 없고 시간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한정판은 사야겠다 싶어서 바로 구했습니다. 그리고 발매 첫날부터 달리고, 며칠을 달렸죠.

그렇게 디아 3이 발매된 주말, 피씨방에 자리가 없더군요. 아, 일단 사람이 살만한 집으로 이사를 가서 집에서 디아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몇 년 더 살다가는 온 몸에 병이 들 것 같은, 신촌 한구석에 있는 창고를 개조한 월세 17만원짜리 다락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한 2년쯤 살았습니다). 거기서 데스크탑을 사고 인터넷을 설치했다간 이사가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보다는 상황이 조금 좋고 월세는 두 배 좋은 근처 옥탑방으로 이사를 했지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 모아둔 돈 한푼 없는 초짜 자영업자에게 데스크탑을 구비하고 인터넷을 설치하고 할 만한 여유가 없었네요. 어차피 지금 살고 있는 옥탑-이제 거의 2년이 되어가는-에서 오래 살 생각도 없었습니다. 나도 이제 슬슬 서른인데, 반지하가 되었건 옥탑이 되었건 월세 생활은 좀 벗어난 다음에 생각해야지, 싶었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흐르고. 시간이 쌓이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돈도 쌓이지 않고 흐르더라구요. 삼십대의 목표였던 전세 장만은 인생의 목표가 되고. 가게 일이 손에 익고 재미가 들리면서 '전세 살 목돈이 생기면 차라리 그 돈으로 가게 확장을 하던 이전을 하던 2호점을 내지, 전세 구하는 데 쓸 돈이 어딨냐' 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살며 올해 초에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문득, 거주민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20대 중반, 제대 직후에 집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로 몇년간 이사는 1,2년에 한번씩 경제적 상황이 변할 때 마다 집을 옮기고. 이사를 할 때마다 친구 두세 명을 불러서 종이박스에 짐을 대충 구겨넣고 택시를 타는 지긋지긋한 방랑자의 삶을 좀 끝내고 싶다는 생각.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막연한 미래의 전세집에서 뭘 하느니, 지금부터라도 좀 사람답게 살아봐야지.

올해 물건을 참 많이 샀어요. 집에서 독립한 지 8년동안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 많은 책. 서재. 정리대. 신발장. 정장. 구두. 책은 나같은 서울 떠돌이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물건이에요. 무겁고, 정리하기도 귀찮고, 이사에는 방해만 되요. 서재와 정리대와 신발장은 공간을 잡아먹는 물건인데다, 미니원룸과 고시원에는 보통 빌트인으로 장착되어 있고 그 한단계 위의 '소형 원룸'에는 사둘 공간이 없어요. 정장은 무슨, 대충 깔끔한 옷 주워입고 가면 되는 거지요. 구두는 공군 복무 시절 에스콰이어 이후로 신어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거기까지 사고 나니 5년동안 쓴 노트북이 사망했어요. 다행히 작업하던 위스키 번역은 모든 원고를 넘겨서 괜찮은데, 새 책 기획(칵테일 레시피북을 쓰게 되었습니다, 어쩌다)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그렇게 되어버리니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네요. 피씨방은 다 금연이라 어디서 담배를 피우면서 글을 쓸 수가 없어요. 하하, 물론 글쓰기같은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는 디아블로 2주년 기념 전설드랍 100% 행사지요. 그래서 어제 데스크탑을 사고 인터넷 신청을 했어요. 인터넷 신청을 하면서 티비 신청을 같이 했어요. 언젠가 인터넷+티비 신청 질문글에 성실히 대답해준 피지알러들에게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집에서 테레비가 나와요. 티비, 하면 어감이 안 사니까 테레비라고 할래요. 이제 집에서 야구도 사랑과 전쟁도 좋은 화질로 볼 수 있어요. 8년만에, '육체 수납장'이 아닌 '집'에 살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생각해보면 올해 그 많은 물건들을 사면서 그렇게 막 돈을 쓴 것도 아닌데. 책은 집에서 왕창 가져오고 예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헌책방에 카트 끌고 가서 긁어오고 할인때 왕창왕창 사고. 서재는 2만원짜리 정리대 몇개 붙여서 쓰고. 나이와 비슷한 가격의 정장에 그 반이 안되는 구두. 돈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나봐요. 아아, 삶이란. 근데 생각해보니 돈도 없었구나. 학자금대출과 가게 시작 대출이 일촌도 아닌 주제에 내 통장을 막 퍼가가지고.

그렇게 컴퓨터를 켜고, 크롬을 깔고, 피지알을 열고, 트위터에 로그인하고, 2년 전에 산 디아블로 3 한정판 패키지를 개봉했어요. 이건 뭐 위스키도 아니고 뭘 사고 2년이나 묵혀두었다 까냐.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인스톨을 누르며, 첫 컴퓨터로 첫 글을 써요. 인스톨 끝나면 씻고 출근해야겠죠. 오늘은 퇴근하고 누워서 혼자 티비를 보다가 잘 수 있겠군요.

8년만에.

나도 이제 떠돌이 유랑자가 아닌 서울 주민이라오. 비록 월세 옥탑에 살지만, 더 이상 1,2년에 한번 이사를 다니지도 않고, 이사를 다닐 때 친구 세명 불러서 박스 세 개 들고 택시를 타지 않는다오. 냉장고에는 술보다 물이 더 많고, 양배추도 있고 베이크드빈도 있고 마늘도 있고 카레도 있고. 냉동실에는 언제나 탱커레이 10.

오리지널 설치가 끝났네요. 씨디키 넣고 확장팩이나 깔아야겠다 랄라.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28&aid=0002143440&viewType=pc
2년전의 저 기사에 등장하는 '서울 신촌에서 바를 운영하는 주아무개 사장'이 바로 접니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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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lgadiss
14/05/16 16:49
수정 아이콘
글 읽다가, 혹시 아까 트위터에서 본 그분?! 했는데 맞았네요. 흐흐
1일3똥
14/05/16 16:56
수정 아이콘
여동생이 신촌 바에 자주 간다더군요. 헥스밤님께서 피지알러인것도 알고있고... 저도 서울서 자취하는 이제곧 30대인지라 공감하고갑니다
이걸어쩌면좋아
14/05/16 16:57
수정 아이콘
"과일맛나고 상큼하면서 적당히 술맛도 나고 색깔 이쁜걸로 만들어주세요." 칵테일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안알랴쥼
14/05/16 16:58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바에 갔어요. 지금은 군대간 친구랑 같이 갔던 곳인데, 같이 게임하던 분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예전에는 KOF에 나오는 장거한 같은 이미지였는데 털보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변신하셨네요.
같이 얘기를 하다가 요즘은 디아블로 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중에 아이디 보내겠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요.
이 분 안 되겠어요, 정글에서 한판 붙어요.
당근매니아
14/05/16 18:05
수정 아이콘
어 왠지 저 거기서 전에 압생트 마셨던 거 같은데요.... 전에 롤하신다고 해서 같이 갔던 다이아 친구가 나중에 몇판 같이 돌렸던...
안알랴쥼
14/05/16 18:10
수정 아이콘
어... 테이블에 앉았던 학생분들이신가요...?
당근매니아
14/05/16 18:31
수정 아이콘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ㅠ 친구 아이디가 코코넛밀크 뭐 이런 거였을 거에요
루키즈
14/05/16 16:59
수정 아이콘
조만간이 2년이 될줄이야... 흐.... 저는 조금 늦은 대학생활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14/05/16 17:05
수정 아이콘
어우 주아무개사장님 겜덕냄새 나네요...
그나저나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설 드랍 100% 행사 때문에 어떻게든 술자리 피하고
여자친구한테는 운동간다고 뻥치고 후...
주말동안 아무 생각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잊힌영혼이라도 모아보고 싶은데 정말 문제네요...
바람이라
14/05/16 17:11
수정 아이콘
사장님을 그동안 뵐때마다 40은 되셨겠지하고 의심했던 저를 반성합니다!!! 알고 보니 30대 초중반쯤 되셨겠네요... 수염만 없으셔도 그정도로 보이실텐데 흐흐 그래도 수염은 사장님의 아이덴티티가 아니겠습니까
은하관제
14/05/16 17:19
수정 아이콘
우선 축하드립니다 흐흐. 다리 뻗고 누워서 내 공간이 있다는게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대략 2년 반 전에,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고,
약 2년 전에, 드디어 내가 번 돈을 제대로 써먹어서 처음 내 컴터를 장만하는 그 순간이 정말 기쁘더군요.
공교롭게도 컴터를 장만하게 된 이유중 하나가 사진에 있는 저 '디아블로'녀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흐흐...
뭔가,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놀고 싶었달까. 그런게 이뤄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

다시 한번 누워서 혼자 티비를 맘껏 보실 수 있게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흐흐
사악군
14/05/16 17:24
수정 아이콘
맛깔나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이때 전설좀 줍고싶지만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하는지라ㅜㅜ
켈로그김
14/05/16 18:05
수정 아이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셨군요.
누워서 TV를 혼자서 볼 수 있다니.. 부럽부럽..
적토마
14/05/16 18:16
수정 아이콘
저도 오늘 밤부터 향후 48시간 동안 전설 150개 모아 보겠습니다.
하드코어
14/05/16 18:34
수정 아이콘
전 이번주말 와이프가 친정에 갑니다.
후후후후후후후
디아3던 롤이던 뭐던 준비됐습니다.
지니쏠
14/05/16 19:21
수정 아이콘
축하드려요 흐흐.
14/05/17 00:01
수정 아이콘
헥스밤님과 노가리 까본 분께는 음성지원이 막 되는 거 같은 글이네요…
지니-_-V
14/05/17 04:15
수정 아이콘
혹시 가게가 어디인지 물어 봐도 될까요?

혼자 가도 되나요?

ㅠㅠ
14/05/17 11:49
수정 아이콘
어제 집에 들어와서 디아블로를 하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이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디아블로는 80년대생 세대들에게는 단순한 게임이상의 의미가 있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idewitme
14/05/17 12:28
수정 아이콘
평소의 재기발랄하고 살짝 표독스럽고 일부 위악적인 글들이 좋아서 헥스밤 님 좋아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헥스밤 님의 힘빠지고 편하고 기분좋은 글을 읽으니까 뭔가 울컥하면서 기분이 좋네요. 번창하세요! 몰래 팔아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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