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4/04/03 13:14:26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수험생들을 위한 패러디 시 몇편
아래, AraTa_Higgs님의 글을 보다보니 오래 전 노량진에서 수험생활을 하던 시절,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심심풀이로 썼던 패러디 시들이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사실 패러디라고 하기에도 좀 우습고 그냥 '노래가사 바꿔부르기'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죠.)




1. [청년(靑年)]


청년(靑年)은 짐을 꾸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장수생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노량진(鷺梁津)의 어느 골목 낡은 고시원
나는 파리한 청년에게서 월세비를 받았다.
청년은 직장에서 쫓겨났다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잡힐듯 잡히지 않는 합격을 기다려 오년(五年)이 갔다.
합격증은 주어지지 않았고
여친은 고급 아파트가 좋아 예식장으로 갔다.

노량진 비둘기도 섦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고시원의 마당귀, 그을린 청년의 책들이
머리카락처럼 검게 흩날린 날이 있었다.







2. [가난한 수험생 노래]
-이웃의 한 수험생을 위하여-


수험생이라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노량진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수험생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시험 종료를 알리는 소리
알바생의 '수강증 주세요' 소리
문풀집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1호선 국철 굴러가는 소리.

수험생이라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친구들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앞 영화관에 한 자리 남았을
트랜스포머 예매 좌석도 그려보지만.

수험생이라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합격하라고 꼭 기다리겠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수험생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수험생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3. [공무(工舞)]


종이 울린다 시험이 끝났다.
나무 걸상이 삐걱대는 중학교 교실
수험생들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나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떡볶이집에 앉아 빈 속을 달랜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문풀집을 끼고 노량진을 나서면
따라붙어 말을 거는 건 헌혈 아줌마뿐
커플들은 커피숍 창가에 붙어 앉아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장수생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합격생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학원가에 쳐박혀 벌버둥친들 무엇하랴
기본서 값도 안 나오는 스터디 따위야
아예 조원들에게나 맡겨두고
육교를 거쳐 수납처 앞에 와 돌 때
나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리듬을 타거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4. [쉽게 쓰여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노량진(鷺梁津)은 낯선 도시,

수험생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눈물로 적셔진
보내주신 학원비 봉투를 받아
기본서와 서브 노트를 끼고
젊은 강사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대학 때 친구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공부하는 것일까?

시험은 붙기 어렵다는데
공부를 뒤로한 채 이렇게 시를 쉽게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노량진은 낯선 도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스탠드를 밝혀 어둠과 외로움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합격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인내와 다짐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5. [불합격은 가라]


불합격은 가라.
사월(四月)도 국가 공무원만 남고
불합격은 가라.

게으름은 가라.
을축년(乙丑年) 노량진 들어설 때의,
그 풋풋한 초심만 남고
게으름은 가라.

그리하여, 다시
외로움은 가라.
합격 후에, 보무도 당당한
어여쁜 합격남과 합격녀가
시청(市廳) 앞 커피숍 안에 앉아
부끄럼 빛내며
맞선볼지니

불합격은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합격증만 남고
그 모오든 방해물은 가라.


--------

-밤이 깊어지면 새벽은 가까워 온다.' 라는 말이 있죠.
지금도 어디에선가 열심히 공부하고 계실 수험생 분들 힘내시길 바랍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기차를 타고
14/04/03 13:19
수정 아이콘
엄청난데요 덜덜.... 다 좋네요 전 특히 2번 4번이 마음에 드네요
1번은 '장수생의 내음새가 난다' 부터 그 느낌이 확 오네요 크크
Eternity
14/04/03 13:39
수정 아이콘
전 개인적으로 1번을 가장 좋아합니다.
백석의 [여승]을 무척 좋아해서요.
Shurakkuma
14/04/03 13:36
수정 아이콘
저는 3번이 특히 좋네요 흐흐
눈시BBv3
14/04/03 13:41
수정 아이콘
단어 외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책상에는 책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영어 단어들을 다 외울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야 할 단어들 이제 다 못 외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개념이 충만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단어 하나에 피로와 단어 하나에 싫증과 단어 하나에 구토감과 단어 하나에 짜증과 단어 하나에 욕와 단어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단어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신나게 당구치고 있을 아이들의 이름과, 수, 시, 태, 이런 중요 영어문법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결혼한다고 돈 모으는 커플들의 이름과, 표준어, 신민회, 동학, GDP, 환율, 오토 마이어, 법률행위적 행정행위 이런 어려운 문제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단어 외기가 아슬히 빡시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서 일하고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짜증나 이 많은 단어가 적힌 책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지우개로 지워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봄이 지나고 나의 책상에도 여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적힌 시험지 위에도 자랑처럼 동그라미가 무성할 게외다.

... 어줍잖게 따라해 봤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 ㅠ_ㅠ)
Eternity
14/04/03 14:16
수정 아이콘
공부하시는 내용을 보니, 대략 시험을 알겠군요. 뭔가 익숙합니다.
역사학도이자 국문학도인 눈시님의 패러디 시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벚꽃 따위에 휘둘리지 마시고 굳은 마음가짐으로 파이팅하세요!!
분명 좋은 결과 있으실 겁니다.
눈시BBv3
14/04/03 14:5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ㅠㅠ)!!
14/04/03 14:09
수정 아이콘
좋아요.
Realization=V.D
14/04/03 16:13
수정 아이콘
수험생.. 생각해보면 그시절로 돌아가려면 죽어도 못할거같은데.. 또 그립기도한 시절이네요~ 잘읽었습니다^^
Eternity
14/04/04 08:48
수정 아이콘
그쵸? 그당시에는 지긋지긋하게 싫었는데 가끔씩 그리워지는..
이렇게 생각하니 수험생활과 군생활이 비슷한 면이 있네요 흐흐
당근매니아
14/04/03 20:43
수정 아이콘
정작 1번 그림의 주인공은 중딩ㅠㅠㅠㅠㅠㅠ
아케미
14/04/04 00:34
수정 아이콘
와, 정말 다 좋은데 3번이 최고네요. 엄청난 싱크로율과 리얼리티... 훌륭한 패러디 맞는데요!
저도 옛날에 쓴 거 하나 놓고 갈게요.

점수가 오르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점수가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사월 어느 날, 그 하루 졸립던 날,
자신 있게 푼 문제마저 다 틀려 버리고는
바라던 점수는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점수가 떨어지면 그뿐, 내 시험은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점수가 오르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합격의 봄을.
Eternity
14/04/04 08:41
수정 아이콘
하핫, 잘 읽었습니다.
좋네요. 찬란한 합격의 봄이라..
남들이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이런 깨알같은 패러디들이 수험생에겐 외로움을 달래주는 낙이자 재미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0979 [일반] 차세대 축구계를 이끌어갈 선수는 누가 있을까? [44] Ayew9204 14/04/10 9204 4
50896 [일반] 노아 보고 왔습니다. (스포 있습니다) [11] 王天君4157 14/04/05 4157 2
50853 [일반] 수험생들을 위한 패러디 시 몇편 [12] Eternity12966 14/04/03 12966 4
50131 [일반] 레고 무비 보고 왔습니다.(스포일러 있습니다) [10] 王天君4601 14/02/28 4601 1
50095 [일반] LGBTAIQ, 무례하지 않기위해 부지런히 알아야 되는것 [15] 어강됴리14305 14/02/27 14305 10
49784 [일반] [겨울왕국] 엘사 여왕님이 굴린 스노우볼 [96] 이브이9019 14/02/10 9019 2
49747 [일반] [스압, 19금 내용포함] 2박3일동안의 소설같은 이야기 (1) [25] AraTa_Higgs23654 14/02/08 23654 6
49648 [일반] K리그 In PGR [53] 잠잘까6299 14/02/04 6299 24
49102 [일반] 두서없이 쓰는 2013년 트랜스 이야기 [10] Prelude6871 14/01/04 6871 0
48889 [일반]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아시 프로덕션 [20] 드라고나6180 13/12/26 6180 5
48213 [일반] [축구] K리그 루머들로 알아본 각 팀별 상태는? [28] 잠잘까6915 13/12/04 6915 7
47382 [일반] 앰비언트 음악 소개하기 [10] 노랑오리부채6995 13/10/30 6995 4
46812 [일반] 벨기에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1) [10] Lionel Messi9774 13/10/03 9774 11
45673 [일반] 설국열차 재미있게 즐기기 (스포없음) [189] 룰루랄라8908 13/08/07 8908 1
45549 [일반] 더 테러 라이브 보고 왔습니다. (스포없습니다) [13] 부평의K5789 13/07/31 5789 0
45337 [일반] 방금본 퍼시픽림 간단한 후기...(스포) [65] 알테어5984 13/07/20 5984 1
45276 [일반] 세계 3대 디지털 특수효과 회사들... [14] Neandertal8566 13/07/18 8566 1
45232 [일반] 퍼시픽림을 보았습니다. 강추합니다! [64] 로랑보두앵6674 13/07/16 6674 1
45228 [일반] 퍼시픽 림의 첫 주 성적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63] 선형대수세이지9023 13/07/16 9023 1
45142 [일반] 퍼시픽 림 보고 왔습니다. (미리니름 없습니다) [74] 王天君10199 13/07/11 10199 2
44528 [일반] [리뷰] 맨 오브 스틸 (스포있음) [53] 마스터충달5558 13/06/16 5558 1
44021 [일반] 여름엔 일렉트로닉 [6] 애플보요4364 13/05/26 4364 1
43777 [일반] 태어난 아기의 선천적 질병에대한 정부보조금 백만원 받았습니다. [102] 칭다오6686 13/05/15 6686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