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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1/17 20:41:11
Name 마술사얀
Subject [일반] 저주받은 연인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내가 조각 감상에 조예나 취미가 있는건 아니지만 파리 여행에서 로뎅 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순전히 ‘칼레의 시민’을 보기 위함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간에 백년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영국군에 칼레시가 포위당했는데. 당시의 외슈타슈 생피에르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칼레 시의회에서는 로댕에게 그의 동상제작을 의뢰했다. 로댕은 그에 관한 자료 조사를 하던중 칼레시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인물이 모두 여섯명이었음을 알고 시 당국과의 협의끝에 동상의 인물을 여섯으로 하여 제작한 것이 바로 이 칼레의 시민이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당시 칼레시를 1년 가까이 포위공격하여 항복선언을 받아낸 영국 국왕은 칼레 대표시민 6명이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다음날 아침 성문을 나와 국왕에게 성문 열쇠를 바치면 칼레시를 파괴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였다. 시민들은 모두 눈치를 보는 가운데 외슈타슈 노인을 비롯한 여섯명이 자원하여 나왔지만. 마침 영국의 왕자의 탄생으로 사면을 받아 이들은 모두 목숨을 구하게 된다.

여행 책자에 의하면 지하철 Varenne 역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평소 관심 있었던 프랑스 전쟁 박물관도 그 근처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잘됐다라고 생각하며 먼저 로뎅 박물관 방문. 로뎅 박물관은 로댕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2층 건물 하나와 그 앞에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지옥문, 깔레의 시민이 있는 야외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 내부에 들어가지 않고 정원만 들어가는 티켓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 되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거 로댕의 다른 작품도 감상하고 가자는 생각이 들어 건물 입장권까지 구입. 8유로.

먼저 정원부터 나가서 내가 찾는 깔레의 시민을 감상했다.



깔레의 시민은 6명 각각의 개성을 살린 것이 유명한데.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외스타슈 노인, 강한 의지력으로 죽음에 맞서 머리를 높이 치켜든 장 데드, 자기 희생을 의연히 받아들이며 오히려 밝은 표정을 짓는 장 드 피에네, 그리고 그의 옆에 자포자기의 몸짓을 하고 있는 드 비상이 서 있고 다른쪽에는 앙드레당드리외가 두 손에 머리를 파묻고 절망에 빠져 있으며 자크 드 비상은 악몽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영웅적이라기 보다도 죽음에 직면하여 괴로워하는 인간의 고통과 체념이 서려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옆의 지옥문과 생각하는 사람을 감상. 역시 가장 있기 있는 작품은 저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앞에는 같은 포즈로 앉아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천천히 나무 사이의 길을 걸으며 이름 모를 로댕의 작품을 감상하고는 박물관 건물로 들어섰다. 그런데 난 그 박물관에 들어서자 마자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제일 앞자리에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 평생의 라이벌. 저주받은 천재. 까미유 끌로델.

어린 까미유가 로댕의 연인이 되었을때 이미 로댕에겐 그때까지 삯바느질과 날품팔이로 남편대신 생계를 꾸려온 착한 아내 로즈가 있었다. 그러나 뒤늦은 성공으로 인한 남편의 신분상승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으로 이미 시들어가는 아내에 비해 총명한 언행과 몸에 밴 탁월한 교양미를 갖춘 제자. 고혹적이다 못해 관능적이기 까지한 눈빛으로 당돌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까미유 끌로델에 로댕이 빠져 들어갔음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이 부적절한 관계는 로댕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도덕적 해이였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로댕은 어리고 나약한 까미유를 육체적으로 탐했고, 가히 천재적이었던 그녀의 재능과 영감을 자신의 작품활동에 십분 이용하였다. 로댕의 애로틱한 작품 ‘영원한 봄’ 과 ‘영원한 우상’. 그 유명한 ‘입맞춤’ 등의 작품이 그녀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 챈 아래 로즈는 울면서 돌아올 것을 간청하고 까미유는 로즈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 고통스런 선택에 번민하던 로댕은 결국 평생의 은인이고 동반자이자 아들 오귀스트의 어머니인 로즈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까미유는 로댕에게 비참하게 버려지고. 그녀는 로댕에 대한 원망과 증오, 자기학대와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며 정신병원에서 30년이나 감금되어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Camille Claudel

까미유 본인은 죽을 때 까지 저주하던 사람 이름 로댕의 박물관에 평생을 통해 피땀 흘려 완성해낸 작품들이 겨우 로댕의 연인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난 로댕 박물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만나게 될지 상상도 못했다. 이 기막히고 비극적인 아이러니에 입술을 잘근 깨물고 천천히 회랑을 돌았다. 까미유의 비극을 곱씹으며 로댕의 번민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했다. 누구나 도덕과 욕망의 갈림길을 수도 없이 마주하며 살아간다. 사회와 관습은 대부분 도덕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그러한 관습에 따라 쉽게 포기되지 않는 욕망과 실리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어떠했는가. 나도 도덕을 포기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로댕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나에게 그대로 반사되어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죄없는자 돌을 던지라’ 식의 죄인에 대한 태도의 일반론이 아니라. 말 그대로 로댕의 고민이 나에게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에 더 아픈 것이다. 지금 당장만 양심의 고통을 참으면 나중에는 괜찮아 질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그런 선택을 했었다. 도덕은 구름같은 허상이지만 실리는 틀림없이 손에 잡혔다. 그러나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양심의 고통 지금의 상처는 분명 언젠가는 아물게 마련이지만. 흉터같은 그 기억. 자기혐오의 고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켜켜히 쌓여가는 그 흉터들은 결국 내 마음을 메마르게 한다는 것. 그럼에도 난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하고 있고. 그렇게 피할수 없는 상처를 안으며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로댕은 까미유를 포기할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분명 시작을 후회했겠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다시 까미유를 선택할 수 밖에 없을테고. 그것은 우리네 사람들이 묵묵히 견뎌야 할 숙명과 같은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로댕 박물관을 나서는 파리의 하늘은 유럽여행 처음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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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저그
08/01/17 20:50
수정 아이콘
생각하는 사람 포즈가 생각보다 불편합니다. 자세히 보면 오른팔꿈치가 왼쪽허벅지에 올려져있습니다. 한 번 따라해보세요. 저 같이 몸이 굳어있는 사람은 저 자세로 생각하기가 힘들더군요. 그냥 왼쪽팔꿈치를 왼쪽허벅지에 올려놓고 편안하게 생각하면 안되는 걸까요?
08/01/17 21:00
수정 아이콘
초보저그님// 저 생각하는 사람 상의 고뇌를 육체적인 불편함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마술사얀
08/01/17 21:05
수정 아이콘
사족인것 같지만. 지옥문위에서 들어오는 영혼을 내려다보는 파수꾼을 따로 다시 제작한게 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옥문보다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요.
김용만
08/01/17 21:45
수정 아이콘
에전에 EBS 에서 '까미유 끌로델'에 관한 영화를 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었죠...
천재와 광기란 뗄 수 없는 관계인 걸까요?;;
푸른별빛
08/01/17 22:00
수정 아이콘
까미유 끌로델 참 안타까운 사람이죠. 로댕의 친구이자 까미유 끌로델의 스승인 부셰가 로댕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을 어떻게 이야기할 지 궁금합니다. 가장 왕성하게 공부하고 작품을 내놓아야할 20대에서 30대 중반까지의 15년을 온전히 로댕에게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 뒤 3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죠. 영문 구글에서 검색해보시면 '사쿤다라' 라고 하는 작품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입맞춤'과 상당히 흡사하지만 그보다 더 비극적으로 보이는 작품인데 까미유 끌로델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후문이지만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까미유 끌로델과 관련된 작품으로 1980년대 말 프랑스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주연한 영화 '까미유 끌로델'이 있구요, 배해선씨가 까미유 끌로델로 열연했던 뮤지컬 '까미유 끌로델'도 있습니다.
허클베리핀
08/01/17 22:02
수정 아이콘
초보저그님// 미대생인 입장에서 분석하기로는 왼쪽팔꿈치를 왼쪽허벅지에 올려넣는 것은 전체적으로볼 때

시각적인 긴장감이 없습니다. 분명 다각도로 보기에 시각적인 쾌감을 자극하는 쪽을 선택한 것일 겁니다.
08/01/17 22:5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
08/01/18 00:5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예술쪽에 끈이 짧은데, 교양 수업으로 미술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로뎅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데 PGR에서 글을 접하니 왠지 기쁘(?)군요 ^^
이카르트
08/01/18 15:08
수정 아이콘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 중에서는 왈츠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사견일 뿐이지만, 이제껏 본 조각 중에서는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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