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4일이 되면, 최동원 감독님이 우리 곁을 떠난지 딱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가 작년 14일에 썼던 글인데,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다시 작성해봤습니다.
이번 한일레전드 매치에서, 비어있는 두 이름.
장효조, 최동원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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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4일 2시, 한 시대를 지배했던 대투수,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바로 전날이었던 13일, 한국 프로야구는 30년 역사 이래로, 최초로 6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프로야구 전성시대에 역사적인 순간을 온 야구팬들 및 야구 관계자들이 기뻐했다.
이 기쁜 소식도 잠시, 최동원이라는 투수의 별세는 야구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타격의 전설 장효조가 간암으로 별세한지 불과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좀처럼 세상에 나오기 어렵다고 해서 붙여진 그의 별명,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은 5학년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두각을 나타낸건, 경남고 2학년 시절, 라이벌인 경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날 경기였던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 이 경기를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동원이라는 이름 세글자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3학년 시절,청룡기 고교야구 승자결정전에서,
김성한이 버티고 있던 군산상고를 상대로, 9이닝동안 20탈삼진을 잡으며, 완봉승을 거두었다.

(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마동탁,
그 모델이 바로 최동원이었다.)
아마시절 최고스타로 군림한 최동원을 모델로 만화까지 나올 정도였다.

최동원에게는 2번의 해외진출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77년 고교졸업 직후, 롯데 오리온스 (현재, 지바 롯데 마린스) 의 감독 가네다 마사이치는,
그의 투구를 보고,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일본리그에 진출시키고자 하지만,
당시 주변 정서로,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허용될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어르신들이 많이 반대하였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이 내용은, 최동원 선수의 개인 인터뷰에서 직접 말씀을 하셔서 화제가 되었었는데요,
작년 가네다 마사이치, 매거진S 인터뷰에서는 그렇게 얘기 한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가네다 마사이치는 안경낀 그 선수는 기억이 나지만, 양자의 얘기를 꺼낸적은 없다고 합니다. 어느쪽이 맞는 얘기인지....
더 신기한 건, 두 인터뷰 모두 박동희 기자의 인터뷰라는 점 )
두 번째는, 81년 캐나다 대륙간컵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이닝 까지 퍼펙트게임.
그리고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는 여러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특히 토론토 블루제이스 측에서, 61만$에 계약을 맺었지만,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숫한 방법을 모색했지만,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해외진출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낼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전성기 시절의 최동원의 투구모습)
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고,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선출되어,
프로야구 데뷔가 1년이 유보가 되었다.
그리고 83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다.
데뷔해의 성적은 9승 / 16패 / 208 2/3이닝 / ERA 2.89 를 기록했다.
아마야구 최고스타였던 최동원이라는 이름에 기대에는 크게 못미친 기록이었다.
팀 전력이 워낙 약했던 데다가, 프로야구 출범 1년만에, 타자들의 기량이 많이 발전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이닝 이상 투구했고,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84시즌은 최동원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1984년의 최동원은
51 G / 27승 / 13패 / 6세이브 / 284 2/3inn / 223K / ERA 2.40
당시의 경기수는 100경기로 한 시즌이 치뤄지고 있었다.
최동원은 100경기 중에 무려 51경기에 등판했다.
현재 시즌을 기준으로 133 G로 환산하면, 더욱 더 놀라운 기록이 나타난다.
68 G / 36승 / 17패 / 8세이브 / 397inn / 287K / ERA 2.40
굳이 133경기로 환산하지 않더라도,
최동원의 27승은, 83년 장명부의 30승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
284 2/3 inn 투구 기록도, 장명부의 427 1/3이닝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
223 탈삼진이라는 기록은, 굳이 133경기로 환산하지 않더라도,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위는 96년에 주형광이 기록한 221K / 126G)
최고의 시즌을 기록한 최동원은
페넌트레이스 MVP로 선정되었고, 다승과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리고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하며, 최고의 영광을 누린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 타격 3관왕에 빛나는 이만수와 타격천재 장효조가 버티는 삼성과의 가을의 전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국시리즈의 역사가 바로, 84년에 쓰여진다.
최동원은 7전 4선승제로 진행되는 한국시리즈에, 5경기에 출장했다.
4경기에서 완투했고, 1경기에서 완봉승, 2경기에서 완투승, 1경기에서 완투패했다.
한국시리즈에서 그가 던진 이닝은 40이닝이었고, 평균자책점은 1.80 이었으며,
홀로 4승을 거두어, 롯데 자이언츠에 창단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1차전 선발등판 9 inn 6-0 완봉승
3차전 선발등판 9 inn 3-2 완투승
5차전 선발등판 8 inn 2-3 완투패
6차전 구원등판 5 inn 6-1 구원승
7차전 선발등판 9 inn 6-4 완투승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시리즈 MVP는 유두열이 차지했는데,
7차전까지 17타수 1안타에 그쳤던 유두열이,
7차전 3-4로 뒤지던 8회에, 결승 역전 쓰리런 홈런을 때려내면서,
홀로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둔 최동원에게 MVP 투표에서 이겨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이 사건은, 83년 신인왕 투표에서, 0.369를 기록한 장효조가, 0.312를 기록한 박종훈에게
신인왕 투표에 밀려 박종훈이 신인왕을 차지한 사건과 함께 타이틀 미스터리로 꼽힌다.
- 당시 삼성 선수로 뛰었던 김용국 수비코치(現 삼성 수비코치)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KS 기간에 합숙을 하면서, 최동원의 비디오만 끊임없이 돌려봤고, 또 돌려봤고, 또 돌려봤다.
그렇게 연구하고 연구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했다.
최동원 1명에게 패배한 한국시리즈였다."

우승을 확정하고나서, 기쁨의 축하연에서, 최동원은 쌍코피를 쏟아,
코를 막고 축하연을 즐겼다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도 있다.
84년 한국시리즈는 세계의 어느 나라의 야구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기록이며,
또 당시의 에이스 투수의 운명이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혹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승 이후에도, 최동원의 질주는 계속됐다. 85년 20승을 달성해 20승을 기록했다.
2년 연속 20승은 89-90년 선동열과 84-85년 최동원이 유이하다.
20승은, 선동열이 3차례, 최동원과 김시진이 2차례를 기록하고,
그외에 그 어떤 투수로, 두차례이상 20승 달성하지 못했다.
19승을 달성한 86년, 시즌 마지막 경기 9회에 역전타를 맞음으로,
아쉽게 3년연속 20승의 문턱에서 좌절한다.
87년까지 해마다 10승이상, 200이닝 이상 책임지고 던지는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최동원은 큰 활약을 한다.
88년 최동원은 해태타이거즈의 김대현 선수가 교통사고로 숨지자,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선수 복지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함께 운동했던 선수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할수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선수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제도를 갖춘 선수협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나섰다.
- 당시의 여론에서는 최동원이 명예욕이 생겨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이 많았지만,
이에 최동원은 개의치 않았다.
1억이상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명예를 위해서 선수협회를 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단지 어려운 선수를 돕고 싶을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결국 구단들의 강력한 반발로, 선수협 결성은 결렬되고,
시즌 종료 후 11월 삼성 김시진과 1대1 맞트레이드 되었다.
고향을 등지고 야구를 한다는 것은 최동원에게 더 이상 야구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도가 왜곡되어 구단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했다.
90년까지, 2년을 삼성에서 뛰었고, 91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마운드를 떠났다.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아마와 프로야구 초기의 지나친 혹사가 조기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많지만,
최동원은 비겁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당시 투수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고, 최선을 다했으므로,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8시즌 / ERA 2.46 / 248 G / 103승 / 74패 / 1414 2/3 inn / 1019 K
5년연속 200이닝을 던진 선수는 30년 프로야구 역사에 단 2명, 최동원과 정민태
최동원이 뛰었던 시즌의 경기수는 100경기였고, 정민태가 뛰었던 시즌의 경기수는 126경기였다.
그렇게 전설은 마운드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은퇴이후, 최동원은 야구인으로 남고 싶었지만, 그를 찾는 구단은 없었다.
팬들에 대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왜 야구선수가 야구는 안하고 TV에 나온다며 비난하는 여론이 많았다.
결국 1999년 방송활동을 접고 새롭게 지도자로써, 야구로의 복귀를 노렸다.
2001년 한화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했다.
한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2005년 다시 한화이글스의 투수코치를 맡았고,
2007년에는 한화이글스의 2군 감독을 맡아, 2년여 동안 유망주들을 길러내고, 지도했다.
한화이글스 2군감독 재임시절, 대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 끝에, 병세가 호전되어,
KBO 경기감독위원으로 2009년에 다시 야구계로 복귀했다.
그러다가 2010년,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요양하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병마와 끊임없이 싸웠다.

지난해 7월 22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경남상고와 군산상고간의 레전드 매치에서,
경남상고 대표로 뽑혀 경기에 참가했지만, 건강을 이유로, 등판하지 못하고, 벤치를 지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병약한 모습이었지만,
"다이어트를 해서 살이 너무 빠졌다. 다시 살을 찌우는 중이다.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
그는 이렇게 말하며, 투병을 숨겼다.
마지막까지도 병을 숨기며, 강인한 모습을 보인 최동원이었지만,
지난 9월 14일, 그는 영원한 나라로,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일주일 사이에, 한국 야구계는 역사에 영원토록 기억될 큰 인물, 둘을 잃었다. 장효조, 최동원......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프로야구의 모든 팬들은 그를 기억하며, 추모한다.
병마와 끝까지 싸워가면서도, 그는 당당했으며, 약한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야구공을 쥐고 있었으며,
병세가 나아지면 다시 야구장으로, 고향팀의 감독을 해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 그였기에....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더 이상 선동열 투수와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최동원만큼 강렬했던 투수가 있었을까?
이 투수는 팀의 우승을 위해서, 그 한몸을 불살랐다.
그가 던졌던 공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던진 공이 아니라,
오로지 팀만을 생각하며, 팀을 위해서 던진 혼신의 불꽃과도 같았다.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가 또 있었을까,
홈런을 맞은 타자에게, 다시 불같은 강속구를 한가운데로 찔러넣던 배짱,
평소에는 한없이 부드럽던 사람이, 마운드에 올라가면 냉철한 승부사로 변했던 그 표정.
안경을 고쳐쓰며, 발을 크게 내딛으며 던졌던 역동적인 투구폼...
그리고 병마와 싸우며, 자신의 몸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고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의연하고 그리고, 강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최후의 순간까지도...
최동원은 그렇게 한국 야구 역사에 큰 획을 긋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오늘날 한국프로야구가 600만 관중시대를 열었고, 최고의 흥행스포츠로 부상했으며,
9구단 10구단까지 추진하고 있는 이런 발전의 역사는,
한국 프로야구의 1세대, 장효조, 최동원, 박철순, 선동열과 같은 위대한 선수들이
그 초석을 깔았기 때문이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유난히 탈도 많고, 사건도 많고, 경조사가 많은 2011년의 한국프로야구는,
한국프로야구에 유난히도 크게 빛났던 두 별이 지는 해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미소,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