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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7/03 13:06:53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4. 포천 동두천 전투, 풍전등화의 서울
포천, 동두천에서 의정부, 서울에 이르는 축선은 도로가 잘 발달돼 있고 이 도로 사이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차 타고 오기엔 참 좋죠. 그만큼 북한군의 기갑, 기계화 병력이 오기도 좋았습니다. 반면 도로 사이의 산맥 때문에 각 방어병력 사이의 연계가 이루어지기 어려웠구요. 공격은 쉽지만 방어는 어려운 곳, 그리고 서울과의 최단거리라는 이점 때문에 이 곳이 주공이 될 거라는 걸 예측하는 게 어렵진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나올 사단들의 운명이 참 처량해서 그 부대 나오셨던 분들께는 고문이 될 것 같습니다 ( ..);

그 때문에 이 곳을 맡은 7사단의 방어범위는 47km, 좌우의 1, 6사단에 비해 절반이었죠. 당연히 방어가 가장 강력해야 됐을 이 곳,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북한군은 여기에 전체 화력의 1/3을 쏟아붙습니다. 동원되는 사단만 3, 4, 13, 15사단과 105전차여단 휘하 전차연대 둘이었죠. 이 중 1제대인 3, 4사단(각기 보병연대 3개와 포병연대 1)과 두 전차연대만으로도 병력은 2만 8천, 2제대인 13, 15사단까지 합치면 무려 4만 8천이 여기로 몰려온 것이었죠. 북한군 주력인 1군단 직할 포병연대도 여기에 포함됐습니다. 여기에 동원된 전차만 150대, 1사단이 상대한 전차는 40대였고 6사단이 상대한 것은 30대였습니다. 그야말로 적의 주력이 밀려온 것이었습니다.

1군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 김웅 중장, 3사단장은 김일성파인 88여단 출신 이영호소장이었고 기타 조선의용군과 88여단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105전차여단은 그 유명한 류경수였고 휘하 전차병들은 소련파들로 (그러니까 고려인이요 -.-a 소련으로 간 조선인 2세들입니다) 독소전쟁 당시 전차병으로 참전한 이들이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7사단, 하지만 이 7사단은 그 어느때보다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서울에서 창설된 7사단은 1, 3, 9보병연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6월 1일부로 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편입됐고 대신 6월 15일부로 2사단 25연대가 7사단에 편입하기로 했죠. 하지만 주둔지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25연대는 개전 당일까지도 충남 온양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후 그냥 2사단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6월 10일에 부임해 사단의 상황을 제대로 몰랐고, 1연대 1, 3대대장부터 부관과 정보참모는 보병학교에 입교 중이었습니다.

1연대는 동두천을, 9연대는 포천을 맡았지만 예비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이 두 연대의 주력은 훈련을 위해 26km 후방인 의정부로 간 상태였죠. 여기에 비상경계령이 풀리면서 많은 이들이 휴가 및 외출을 가서 개전 당시 병력은 4500에 불과했습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리 때문에 사단이 보유한 차량들이 모두 부평으로 이송돼 개전 당시 보유해야 될 차량의 40%밖에 가지지 못 했고 각종 중화기들도 25%를 반납한 상태였습니다.

대체 누가 간첩인지는 몰라도 가장 중요해야 될 7사단이 당시 가장 약화되었다는 것이죠. 이런 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방어계획에 있어서도 불리한 점이 많았습니다. 유사시 감악산-마차산-소요산 등을 잇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동해안의 8사단은 물론 좌우의 1, 6사단에 비해서도 지형적으로 너무 불리했습니다. 거기다 1사단은 나름 중요한 도시인 개성을 바로 포기한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7사단의 바로 뒤는 서울, 후퇴보다는 최대한 버틴다는 방침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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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rmy.mil.kr/history/초기작전/동두천요도/세부.html
클릭해서 보셔요

포천 방향을 맡고 있던 9연대는 2대대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문제는 이 2대대가 기존의 3대대와 교대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돼서 방어준비를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이죠. 그나마 7사단에 배속된 보국대대가 근처에 있긴 했지만 제대로 협조하지도 못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1주일 전부터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는 첩보 때문에 외출 외박을 통제하고 전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적의 규모는 이걸 뛰어넘었죠.

25일, 03:40부터 30분간 계속된 포격 끝에 적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북한의 포격은 너무나도 정확했고, 2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죠. 이 소식을 들은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급히 1, 3대대를 보내고 적의 전차를 막을 대전차포중대를 급파합니다. 문제는...

차가 없었어요. -_-; 연대가 가진 대부분의 차량을 보낸 상태에서 2 1/2톤 5대만 남아 있었고, 대포도 실어야 돼서 초반에 출발할 수 있었던 병력은 100여명 정도였죠. 주력이 출발한 것은 09:00, 그 때까지 2대대는 거의 홀로 싸워야 했습니다. 거기다 이들에게 바로 지원해 줄 수 있던 대포도 대전차포 3문과 2.36인치 로켓포 12문에 불과했죠.

적의 포화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계속 버티던 2대대는 08:00에 적 전차가 출현하면서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 때 대전차포중대가 도착해 적이 50m 앞까지 올 때까지 기다린 다음 발포, 명중했지만...


괜찮아, 튕겨냈다였죠. 병력은 급히 후퇴, 전차는 유유히 진격해 포천 방향으로 갔는데 이 때 매복해 있던 로켓포 특공대가 다시 공격했지만 역시 멀쩡했습니다. 이들은 계속 탄장(포천 북쪽 4km)으로 진격하니 이 때가 09:40 경이었습니다. 2대대는 전차에 돌파되고 후속부대에 포위돼 완전히 붕괴, 나중에 의정부에서 집결한 건 겨우 30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있는 차를 가지고 급히 출동했던 1대대 3중대는 적 전차 2대를 맞아 박격포 등 온갖 화기를 쏟아부었지만 역시 전차는 멀쩡했습니다. 하지만 참 다행인 일이 벌어지니 전차가 그냥 돌아간 것이었죠. 이렇게 겨우 시간을 번 사이 1, 3대대의 주력이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10:30에 적은 다시 공격해 왔고, 2대대에 했던 것처럼 1, 3대대 전체를 포위, 쌈싸먹으려고 했습니다.

이 때 참 어이 없는 일도 벌어집니다. 전차 2대가 백기를 단 채 호위병력도 없이 왔는데 이들에게 아무리 공격을 가해도 도무지 깨지지가 않아요. -_-; 근데 이들이 아무런 반격이 없어서 설마 투항하나 해서 병력을 보내려 했더니 어느새 근접한 전차가 기관총을 마구 발사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죠. 그 뒤를 이어 8대의 전차와 후속병력이 밀려옵니다. 선두 전차를 로켓포로 공격했는데 럭키샷으로 궤도에 맞아서 멈추게 됐죠. 하지만 뒤에 있던 전차들이 그걸 밀어버리고 그대로 왔습니다. 그 어떤 화기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전차는 아군의 주저항선을 뚫고 그대로 진격했고, 국군은 후속하는 병력이라도 막으려고 했지만 포위됐으며, 11:00에 포천은 적에게 점령됩니다. 이 과정에서 포병대대는 보유한 대포 9문 중 2문만 겨우 건져서 돌아올 수 있었고 5포병대대장 이규삼 소령은 이것이 부끄러워해 자결하려 했다가 막혔습니다.

연대장 윤춘근은 후퇴를 결정, 하지만 통신이 끊긴 3대대는 후퇴 과정에서 와해됐고, 태릉에 집결한 것은 역시 큰 피해를 입은 1대대 뿐이었습니다. 1개 연대가 1개 대대 이하로 줄어버린 것이었죠. 이후 이 방면의 전투는 서울에서 증원 온 병력이 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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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방면을 맡은 1연대는 전방을 맡은 2대대 외에 나머지 2개 대대는 (일단 의정부에 가 있기도 했고) 외출외박을 허용한 상태였습니다.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은 들었는지 1개 비상중대를 추가로 편성하기는 했지만 큰 도움은 안 됐죠. 연대장 함준호 대령은 부임한 지 1개월도 되지 않은 상태, 1대대장 한태원 중령은 보병학교 입교 중이었고 3대대장 김황목 소령도 30일에 입교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나마 나았던 점은 9연대와 달리 1연대 2대대는 3개월째 전방을 담당하고 있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는 것이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북한군이 쳐들어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대본부에서는 곧바로 비상대기 중대와 중화기소대를 지원했죠. 여기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집니다. 나름대로 버티던 2대대는 전차가 나타나면서 차례차례 무너졌고 08:00에 이르러서 전방은 완전히 무너졌죠. 2대대는 증원온 3중대와 함께 주저항선인 소요산에 방어선을 만들고 11:00까지 버팁니다.


복잡한 지도보단 이게 더 잘 와 닿겠죠?

그 동안 1대대는 09:00에 동두천에 도착, 이 때 이미 동두천 시내에도 각종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름 큰 활약을 한 것이 포병으로 그들은 250여발이나 되는 포탄을 쏘면서 적의 선봉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12:00에 다시 전차가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전차 1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2대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미 휴대한 탄약이 다 떨어졌고 포병의 포탄도 다 떨어졌죠.

+) 그리고 이것이 또 과장돼 국군의 반격설로 이어졌구요


적 전차가 다시 나타난 것은 15:00, 여기서도 1연대 전체 포위를 시도했고 주저항선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17:00에 이르면 1대대는 이미 포위돼서 고립, 적의 선두는 동두천 북쪽 창말고개를 넘고 있었죠. 그 때 포탄 300발이 도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시가전 끝에 22:00 후퇴 명령이 내려집니다.


집결지는 덕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포위된 1대대는 무선도 끊기면서 완전히 고립됐고, 물 한 방울 제대로 먹지 못 한 상태에서 홀로 철수하다가 적과 조우해 큰 피해를 입고 와해됩니다. 이들을 이끌던 부대대장 김봉용 대위도 전사했구요.

  이렇게 7사단은 사실상 전멸합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멸한 것은 7사단 뿐, 수경사는 멀쩡히 남아서 휴가 및 외출한 병력이 복귀하고 있었고 후방에 있던 3개 사단이 급히 서울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치챈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 북한군의 남진이 그리 빠르진 않았죠.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수경사 및 후방의 병력들이 집결한다면 병력 면에서는 그리 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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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밤에 있었던 장교구락부 개관 파티, 이게 언제 끝났는지는 다들 말이 엇갈립니다. 10시부터 12시까지로 엇갈리고 2차가 있었다는 말도 있죠. 여기서 중요한 건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언제 집에 왔는지, 얼마나 취했는지입니다. 일단 2시가 통설이고 그의 부인 백경화는 12시경에 집에 왔다고 증언했죠.

25일 새벽 4시에 육군본부에는 작전교육국 조병운 대위와 정보국의 김종필 중위-_-!가 당직이었습니다. 그들은 4시부터 전 전선에서 미친 듯이 들려오는 상황을 받아야 했죠. 이제까지와는 규모가 다르다는 걸 직감한 이들은 바로 채병덕에게 연락했고 다행히 채병덕은 바로 잠에서 깨 김종필을 집으로 불러 구두명령을 내립니다.


"즉시 전 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각 국장을 비상소집하라"

이 때가 오전 5시경이었습니다. 김종필은 육본으로 돌아오니 이 때가 05:30, 아직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과 작전교육국장 장창국 대령이 오지 않아서 이 때 온 이치업 대령의 이름으로 비상이 발령됩니다.

- 북한군은 25. 04:00를 기해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자행하였음
- 군은 25. 06:00을 기하여 비상사태에 돌입. 군은 휴가, 외출 및 교육을 일체 중지함

이렇게 06시부터 07시까지 전군에 비상령이 하달되고 지프를 동원해 서울 시내에 방송이 시작됩니다. 휴가 나온 국군 장병들의 원대 복귀를 명령하는 것이었죠.

+) 참고로 장창국은 막 이사한 상태라 전화가 없어서 9시에 방송을 듣고 전쟁 난 줄 알았다고 합니다 (...)

김종필을 보낸 채병덕은 바로 국방장관 신성모의 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하지만... 안 받아요 -.- 안 되겠다 싶어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 갔냐고 하니 하는 말이 걸작이었죠.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 하아 -_-

채병덕은 안 되겠다 싶어 신동우를 집으로 부른 후 그와 함께 신성모의 집으로 갑니다. 신동우는 이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때 그의 표정은 놀라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였는데, 북한군이 일요일 새벽에 기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 한 것 같았다."

채병덕은 여기서 비상동원령 선포의 재가를 받으니 오전 7시경입니다. 그런 급한 상황에서도 절차는 밟은 것이었죠. 이후 육본으로 직행합니다. 이 때 KBS에서는 북한군의 전면 남침 소식을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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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났소. 나는 사단에 가니 뒷일은 당신(아내)에게 부탁하오." - 유재흥, 격동의 세월

한편 7사단장 유재흥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05:15, 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30분 후였습니다. 이 때 그는 상황보고를 들으며 전면전이 일어났다는 걸 확신했다고 하는데, 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보이진 않습니다. 뭐 이건 뒤에 얘기하고, 그는 곧바로 조치를 취해 5 포병대대의 포병대 중 둘을 포천에, 1개를 동두천에 보내고 동두천의 주요 교량 폭파를 지시합니다. 뭐 이건 안 됐지만요 -_-;

10:00에는 채병덕이 직접 의정부의 7사단 사령부로 옵니다. 여기서 전황을 보고받은 채병덕은 수경사의 3연대를 배속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육탄공격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유재흥은 이걸 거부, 대전차포와 로켓포로 대응했죠. 뭐 결국 이것들론 안 되고 포탄도 떨어져 가면서 육탄공격이 있었지만요.

+) 육탄공격을 거부했다는 것은 유재흥의 회고록에 나오지 않는데 채병덕이 육탄공격을 지시했는데도 사단에서는 정식으로 명령하지 않은 건 확실해 보입니다.

자, 그 동안 대통령이신 프린스 리께서는 뭐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09:00에 마누라 프란체스카를 치과에 보낸 그는 연못에서 유유히 낚시를 하다가 10:00에 남침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_-; 네 뭐 여기까지는 깔 만한 때는 아니죠. 문제는 30분 후에 나타난 신성모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 했죠.

"적이 38도선을 넘어 남침하고 있으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각하의 신금을 어지럽혀 드린 일은 송구스럽기 짝이 없으나, 충용무쌍한 국군은 적을 격퇴하여 수일 내에 북한을 수복해 보일 것입니다."

국무총리까지 맡고 있던 신성모, 그의 주재하에 11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열렸지만 여기서도 그는 이런 말만 계속 했고, 군에 대한 지식 자체가 없었던 이승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죠. 일단 의정부로 나간 채병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14시에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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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의정부부터 동쪽의 6, 8사단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깁니다. 북한에서 게릴라를 보내 파괴했다고 추측이 됩니다만 -_-a 그 때문에 채병덕은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속 서울과 의정부를 왕복해야 했습니다. 그가 처음 의정부로 간 10시에 이미 그는 적의 공격이 전면전이라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정작 돌아와서 한 기자회견에서는 전혀 다른 말을 했죠.

"적의 지상군은 4~5만명이며 전차 49대를 동반하고 있다. 군은 현재 이 적을 격퇴 중에 있다"

이 때는 북한군의 YAK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김포공항과 용산에서 기총 사격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승만은 그저 신성모와 채병덕만 바라볼 뿐이었죠. 이 때 신성모가 뭐랬는지 또 들어 봅시다.

"적이 남침을 개시하였으나 아군은 후방 3개 사단을 투입, 반격을 감행하여 의정부를 탈환하고 적을 그 북쪽으로 격퇴하였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략) 만약 공세를 취한다면 1주일 이내에 평양을 탈취할 자신이 있다."

...... -_-; 채병덕은 뭐랬는지 봅시다.

"적의 침공은 전면남침이 아니라 공비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이며, 곧 남부에 있는 3개 사단을 동원하여 적을 격퇴할 것"

참고로 이주하와 김삼룡은 6월 들어 북이 평화통일 공세를 하면서 조만식과 바꾸자고 제의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이 조만식 같은 유명한 독립운동가를 받을 리가요 (...) 김일성도 진심으로 한 것 같지 않구요.

이 이후 참 많은 일들이 복잡하게 벌어집니다. 채병덕이 우선 한 것은 수도사단을 포함한 재경 부대를 1, 6, 7사단에 증원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지금 수기사 맹호부대로 이어지는 수경사는 (지금의 수방사는 후에 따로 창설된 겁니다) 각기 찢겨져서 6, 7사단으로 갑니다. 3연대가 11:00에 7사단에 배속됐고 20:00에 도착, 8연대는 가평으로 향했고 (하지만 곧 미아리/한강 방어로 돌려집니다) 18연대는 19:00에 출발해 21:00에 의정부에 도착합니다.  


하루만에 휘하 병력을 모두 잃은 이종찬 수경사 사령관만 불쌍할 따름이죠 (...)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건 육사 생도들을 투입한 것이었습니다. 군사영어학교 때부터 짧으면 45일, 길면 6개월까지 단기로 양성했던 예전과는 달리 9기부터는 2년이라는 나름 긴 교육을 해서 본격적으로 장교를 양성하려 했습니다. 이 때부터 "사관후보생"이 아닌 "생도"라 불렸고, 당시 육사에는 7월 임관만 남은 313명의 생도 1기와 333명의 생도 2기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 모두를 일개 병사로 투입한 것이죠.

이런 장교후보생들은 아무리 나라가 위험해도 전쟁이 끝난 후를 위해 살아야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특히 정규 교육을 받은 이들이니만큼 더 했죠. 거기다 이들이 받은 건 전투가 아니라 지휘였습니다. 이런 소중한 인재를 그냥 총알받이로 보내 버린 것이죠. 이들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더 하겠습니다만... 당시 교장이었던 이준식 준장은 반대했지만 막을 수 없었죠.

한편으로 후방 사단의 증원도 계속됩니다. 흥미로운 건 각 사단의 출발 시점이죠.

대전에 사령부를 두고 대전, 청주, 온양에 연대가 주둔해 있던 2사단은 선발대인 1개 대대를 14:30에 열차에 태워 보냅니다. 헌데 그 후방에 있던 3, 5사단은 이보다 더 빨랐죠.

유승렬 대령 (유재흥의 아버지)이 이끌던 3사단은 11:00에 대구에서 선발대를 보냅니다. 이 때 유승렬이 공비 토벌 문제로 진주에 가서 없었음에도 오히려 2사단보다 빨랐죠. 이응준 준장이 이끌던 5사단 역시 11:00에 전주에서 선발대를 보냈구요.

가장 가까이 있었음에도 출발이 가장 늦었던 2사단, 일단 육군에서는 공식적으로 공비들의 방해와 전쟁이 난 것에 대한 혼란으로 장병들의 가족들도 신경쓰느라 늦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형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부하들이 자기에게 제대로 말 안 해 줬다고 짜증내고 있구요. 하지만 그를 취재한 기자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죠. -_-;

"사단장이 기차로 상경한다기에 우리 일행은 모내기 취재를 대충 끝내고 그와 함께 열차에 올라타 상경하게 되었는데 그는 열차 안에서 가진 일련의 기자회견에서 “만약에 전쟁이 붙는다면 점심은 평양에 가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 가서 먹겠다.”라고 하기에 실상 전쟁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 연합신문 이지웅 기자 : 한국전쟁사 1권 개정판

이 때 2사단 장병들의 모내기를 취재하고 있던 기자들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이형근을 따라가서 취재를 합니다. 이 때 이형근은 상당히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고 하죠. 후방 부대의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것이 08:00, 설령 부하들이 놀아서 출발이 늦어진 거라면 저렇게 하진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후에 10대 미스테리까지 얘기하면서 이 모든 잘못을 채병덕에게로 몰고 자기는 전면전을 예측했다고 주장했죠. 군번 1번이라서 그럴까요.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 호의적입니다.

25일은 이렇게 저물어 갔습니다. 채병덕은 이 날부터 잘릴 때까지 잠 한 숨 제대로 못 자고 서울과 의정부를 왕복하며 작전을 짭니다. 하지만 결과는 파멸적이었죠. 그가 나름대로 열심히 하기도 했고, 잘 한 면도 어느 정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정치적인 이유든 애초에 그의 한계든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너무 크게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면전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말이죠.

그는 의정부에 병력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바로 역습을 시도합니다. 많은 병력이 마구 던져지듯 투입됐고, 소멸돼 갑니다. 그렇게 서울은 바람 앞의 등불이 돼 버렸죠.

그리고 이를 맡았던 유재흥은 이걸 막지 못 합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것이 무리일 것을 알면서도 적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막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명령이니까 따랐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전면전이라 생각했으면 아군이 많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게 했어야 했죠. 초기 7사단의 작전부터 이후 역습부터 서울 함락까지, 그가 전술적인 면에서 크게 잘못했다는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지역을 맡은 지휘관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 했죠. 오히려 그도 전면전임을 생각 못 했고 북한의 공격이 이 정도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이 부분은 당시 북한군의 문제였는데, 다음 편이나 다다음 편에서 모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아무튼 유재흥의 병력 날려먹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_-; 문제는 이 때부터 현리 전투까지, 그가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죠.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정도? (이게 작은 건 아니지만) 이런 점에서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유재흥에 대한 평가는 악의적으로 왜곡된 것이 많습니다. 많은 루머가 섞여 있고, 그 루머들이 나타난 시점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그가 잘 한 부분이 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것이죠. 참... 평가하기 복잡한 사람입니다. 가령 7사단의 경우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는데 유사시 다리를 폭파해서 적의 진격을 늦춘다는 계획이 아예 없었고 있었거나 당시 명령을 내렸더라도 이게 단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 있죠. 이게 꽤 크긴 합니다만... 여기서 다리를 하나도 못 깨뜨렸다는 부담감이 한강교 폭파라는 참사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가 맡았던 전투가 모두 패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중요한 패전에서는 언제나 그가 있었죠 (...)


다음 편은 의정부가 먹히고 적이 서울까지 들어오는 부분을 다루겠습니다. 이거 서울 얘기로 3편은 끌 거 같은데요 -_-; 아무튼 다음 편에서 채병덕이 욕 먹는 부분을 보면서 같이 욕 해 줍시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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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03 13:3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

아오 혈압이야;
쉐도우포스
12/07/03 13:5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잘 보고있습니다. ^^
6.25관련으로 글을 다 적으시면 다시 정주행 해야겠어요.
12/07/03 14:0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군인동거인
12/07/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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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루호도 류이
12/07/0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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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신성모는 뭐랄까요..... 별다른 능력도 없는 사람이 아부와 줄타기등 정치와 권력투쟁에만 능해서 저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저런 사람은 평시에도 해가 되지만 위기가 닥치면 그야말로 조직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사람인데...... 북진 운운 헛소리도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라서 한게 아니라 단지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입지와 위 사람의 비위 맞추기를 위해서 저런 헛소리를 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soleil79
12/07/0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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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 ㅠ. 이 부분은 정규교육에도 없는. 생각보다 무작정 밀린게 아니였군요.
정말정말 다음편 기다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m]
12/07/0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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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대신 지하철노선도로 설명하시는 거 정말 참신하네요. 눈에 쏙 들어옵니다. 흐흐.
쌀이없어요
12/07/0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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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개전 상황에서 삽질하는 총리를 보고 있으니 울화가 터지는군요
얼른 낙동강 방어선에서부터 밀고 올라갔으면 좋게습니당
가을독백
12/07/03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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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님 연재글 보다보면 놓치고 있던 부분도 잘 설명이 되서 나올듯한 느낌이 듭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북진할때 인천상률작전만으로는 불가능했을텐데..라는 나름의 궁금증도 풀릴것 같고요.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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