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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1/27 03:05:05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광개토 - (2) 전광석화

황산벌-평양성 때처럼 사투리로 밀고 싶은데 백제가 빼도박도 못 하는 한성백제이니 -_-a 쓸 수 없겠군요. 써 봐야 위례성 불바다론 이런 거? (...) 아신왕 어디 한 번 맞설 테면 맞서 보자 이런 거?
마찬가지로 제가 그린 국경에 대해 너무 믿거나 신경쓰지 맙시다. 그런 거 일일이 고증할 거라면 이 글 안 쓸 거예요 ( ..);;; 워낙 어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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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왕인가 태왕인가
호칭 문제 하나로 이렇게 싸우게 되는 왕도 드물겁니다. 광개토대왕이라 하면 일제의 식민사학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광개토왕이라 하면 우리 태왕님 무시하냐, 뭐 이렇게요.

광개토대제니 열제니 하는 표현은 없습니다. 고구려는 칭제한 적이 없죠. -_-; 애초에 왕이라는 게 낮은 지위가 아닙니다. 중국이 황제라고 칭하면서 낮아진 것처럼 보일 뿐이죠.

태왕은 그런 면에서 고구려에서 단독으로 칭한 호칭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을 중심으로 그 시기가 언제든 후대 고구려 왕들에게도 이어지는 시호라는 거죠. 이걸 신라도 이어받았다고 하기도 하구요. 문제가 되는 것은 태와이 단독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 외국에서 그를 부를 때 보통 호태왕이라고 하는데, 그것처럼 광개토대왕 단독으로 썼다거나 그냥 왕들에게 보이는 긴 명칭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거죠. 다만 이건 반박된 걸로 압니다만...

그에 대항해 새로 떠오른 가설이 그저 죽은 왕을 태왕이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일단 신라의 "왕" 칭호처럼 언제부터 부르자고 한 게 아닌 이상 이게 정설이 되거나 아예 고착되기는 어렵습니다. 황제는 시황제 때부터 쭉 불려 왔으니까요. 그리고 광개토대왕 혼자, 혹은 몇몇 강했고 단독으로 연호를 정했던 왕들에게 붙여졌다 하기에도 아직은 근거가 적습니다. 특히 죽은 왕을 칭한 거라면 굳이 그렇게 부를 이유가 없죠. 왜냐면...

조선 때도 죽은 왕들은 다 대왕으로 불립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 하지만 그게 선조든 인조든 일단 죽었으면 무조건 대왕이었어요. 이런 식의 호칭이었다면 굳이 그렇게 부를 필요가 없죠.

현대에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대왕이라 칭하는 것은 그 나라에서 정한 시호의 규칙이나 죽은 왕에게 붙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잘난 왕이었으니 존경의 의미로 붙이는 것입니다. 과거 태왕, 대왕의 정의랑 다른 것이죠. 태왕이나 조선시대의 대왕이 학술적인 의미라면 현대의 대왕은 그저 존경의 의미일 뿐입니다. 따라서 학술적인 얘기를 할 때는 태왕이 정설이 되지 않는 이상 그냥 왕이라 불러도 상관 없습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공식 호칭은 광개토왕입니다.

사실 이 광개토라는 것 역시 문제가 큽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다른 것에도 그리 다르지 않게 나옵니다만, 일단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온 풀네임은 이렇습니다. 이걸 나눠보면 국강상은 그가 묻힌 지명이고, 광개토경은 영토 확장을 한 외정의 공을, 평안은 내정을 뜻 하는 것입니다. 남은 게 호태왕이죠. 그 이전의 고구려 왕들은 자기가 묻힌 지역으로 이름을 정했습니다. 즉, 원래라면 그의 명칭은 국강상왕이 됐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 국강상이 어딘고 하니 고국원이었죠. 고국원왕이랑 겹치는 겁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이것 때문에 일부러 국강상을 빼고 광개토왕이라 한 것 같은데, 뭐 그것 외에도 광개토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이 양반부터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 그러니 고구려식으로 엄밀히 따져서 얘기하려면 일단 이 광개토라는 말부터 빼야 된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복잡한 얘기들은 뒤로 미루고, 그냥 대중적인 호칭을 쓰려 합니다. 광개토대왕으로 쭉 밀겠습니다.

2. 전광석화
18세의 젊은 왕에게 주어진 임무는 후연과 백제라는 고급 샌드위치 상황을 타개하는 것. 내정은 이 시기를 다룬 소설 드라마들과는 달리 소수림왕부터 이루어진 재건으로 괜찮아진 듯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이후의 상황이 설명이 되지 않거든요. 집안 싸움에만 연 단위로 걸리는 게 나라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대외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성공해도 나라가 망하는 일이 일어나죠.

후연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하북의 패자가 된 북위에게 발릴대로 발려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거든요. 그에게는 천운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시 주적은 백제, 백제는 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_-a)에 이은 진사왕이 있었습니다. 침류왕의 동생으로 조카 아신왕의 자리를 뺏은 건지 어려서 그냥 이어받은 건지도 얘기가 있는 왕이죠. 광개토대왕 즉위 전 해에도 고구려를 공격해 쏠쏠한 재미를 봤던 왕이었습니다. 내치도 그리 나쁜 것 같지 않고, 그럭저럭 백제의 전성기를 이을 만 했죠. 헌데...


391년 7월,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해에 곧바로 남정을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10여개의 성을 함락했고, 많은 부락들을 약탈했죠. 경기도 전체에 황해도까지 이르던 백제의 영역은 순식간에 축소되고,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의 용병술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지도 못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쪽에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며 한 숨 돌린 그는 곧바로 거란을 칩니다. 이 때 500명의 포로를 잡고 거란에 잡혀갔던 고구려 백성 1만명을 귀환시켰다고 하죠. 단 2개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 때의 고구려가 요동 쪽과 평양 쪽으로 두 개의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키기는 했을텐데, 이 두 쪽에서 모두 공격이 가능한 병력을 둘 정도의 국력이었는지는 의문이죠. 그렇게 본다면 남쪽을 공격한 고구려 주력군이 2개월 사이, 그것도 여름철에 열심히 행군해서 북쪽까지 간 겁니다. (...) 헌데 다음 달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니...


10월에는 다시 백제로 향해서 관미성을 공격합니다. 단 한 달만에 온 걸 보면 거란을 친 건 소규모였을지는 모르겠는데... 이 관미성에 대한 설은 동그라미로 표시한 세 개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외에 다른 설도 있고 대륙백제설로 치면 중국으로 가 버려서 태왕사신기에 청룡이 살던 그 성이 관미성이죠. 이 성은 사방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강화도설까지 나오는 모양인데 일단 강화도 내지 파주 쪽으로 생각해 둡시다.

쉽게 성공하기 힘든 이 성을 광개토대왕은 병력을 7개로 나누어 20일동안의 공격 끝에 함락시킵니다.

이 시기 백제에서는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즉위합니다. 진사왕은 고구려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사냥을 나갔다 하는데 이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군대를 정비하기 위함이라 하죠. 헌데 이러다가 죽었고, 아신왕이 갑자기 왕위에 오르는 겁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를 아신왕 측이 암살한 것으로 나오고, 위에 말한 진사왕이 아신왕의 위치를 빼앗은 것이면 (아신왕은 그 때 왜에 있었다고 하죠) 그럴듯 하긴 합니다. 이렇게 보면 광개토대왕의 공세에 진사왕이 제대로 대응을 못 한 건 아신왕 세력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반면에 광개토대왕의 공격 때문에 진사왕의 세력이 축소되면서 아신왕이 그 틈을 타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왕이 된 아신왕. 하지만 그의 앞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일들이 계획돼 있었죠 ㅠ_ㅠ

광개토대왕은 즉위년에 이미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었죠.

3. 광개토대왕 vs 아신왕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에 비치었다. 장성함에 뜻과 기개가 빼어났으며, 매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아신왕에 대한 평가입니다.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능력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상대가 하필이면 -_-; 전왕 진사왕도 용감 총명 어질 지략 등 좋은 말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아신왕이 주력한 것은 복수, 북벌이었죠. 얼마나 절치부심했겠습니까마는...

394년 7월, 백제군은 관미성을 공격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이에 맞서 정예기병 5천으로 이기죠. 8월에는 남쪽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굳히기를 시도합니다. 다음 해 8월 아신왕은 대군을 이끌고 다시 수곡성을 공격하지만... 패수라 하니 대동강까지 쳐 올라간 모양입니다만 광개토대왕은 이에 맞서 크게 이깁니다. 이 때 사로잡은 수만 8천, 백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타격이었죠. (백제본기에는 죽은 자 8천) 11월에는 7천 명으로 다시 북상하려 했습니다만 때는 겨울, 추위가 닥치자 엄두도 못 내고 돌아와야 했죠. 이렇게 주도권은 고구려에 완전히 넘어갑니다. 그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죠.

광개토대왕은 우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서북쪽의 비려(패려?)를 공격해 3개 부락 6~700개의 영을 격파했고 수많은 물자를 약탈합니다. 아마 후방 정리도 할 겸 백제 치기 위한 물자도 챙길 겸 한 모양이네요. 이 위치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대충 거란 쪽으로 해 놨습니다만 -_-a 또 하나 커다란 떡밥이, 돌아오면서 양평을 거쳐 영토를 시찰했다는 것이죠.

보통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점령한 건 400년 이후 후연과의 싸움에서 이긴 때로 보고 있습니다. 헌데 이 양평이 요동의 양평이라면? 당시 후연은 북위와의 싸움에 매진하고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요동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전투가 아니라 영토를 시찰했다는 것, 아버지 고국양왕 때 빼앗았다가 다시 뺏긴 요동을 이 시기 힘의 공백을 틈 타 다시 취했을 가능성입니다. 이런 주장에 신빙성을 더 해 주는 것이 2년 후의 기록인데 이는 뒤에서 말 하죠. 어차피 이 때 고구려의 주 목표는 요동이 아니었으니까요.


396년, 거대한 작전이 시작됩니다. 수군은 미추홀(인천)을 통해 위례성으로, 육군은 그대로 남진하여 진격해 갔죠. 이 거대한 작전으로 백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에 대한 복수이자 한반도의 맹주가 되는 첫 걸음이었죠.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 이것도 별로네요. 패러디 할 만한 거 없나. 북괴상스는 해 보려 했지만 역시 좀 아닌 거 같아서 -_-; 아무튼 그 결과입니다. 백잔은 백제를 깎아내리는 거죠.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아신왕은 고구려를 섬기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목숨과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고, 북쪽은 물론 한반도의 맹주 자리 자체가 위험하게 됐습니다. 독립을 유지하던 동예도 이 시기 고구려에 넘어간 것으로 보이구요. 동생까지 인질로 보낼 정도면 -_-; 이후 백제는 군사력까지 고갈되면서 왜에 크게 의지하게 됩니다. 뭐 그래도 아직까진 상황이 괜찮았죠. 예. 아직까지는요. 아신왕의 안습 전설은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처절하게요.

이에 대해 조선의 권근은 "장례도 안 끝났는데 치다니 예의도 모른다"고 깠고, 안정복은 이에 대해 "22년 전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면 됐지"라고 반박했습니다.

4. 동북아의 패자를 향해
다음 해인 397년, 안정복에 따르면 이 해 고구려가 요동성을 공격해 차지했다고 합니다. 헌데 이건 동사강목에만 나와 있어서 진위를 의심받죠. 뭐 395년 비려 공격의 경우도 광개토대왕비문에만 나와 있어서 문제됩니다. 일단 이 두 개를 허구로 보고 나온 것이 400년 이후설입니다.

반면 395년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을 신뢰한 것이고, 397년설의 증거 역시 받아들인 가설입니다. 이 397년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북사 고구려전에 나온 후연의 책봉이었거든요. 모용보는 광개토대왕을 평주목 요동, 대방 2국의 왕으로 봉합니다. 400년 이후설은 이것이 명목상의 벼슬인 것으로 보고 (왜가 임나를 책봉 받고 신라가 낙랑을 책봉받았든) 397년설은 이 때 요동으로 쳐들어간 후 후연에서 반격할 수가 없어서 정신승리로 책봉한 걸로 봅니다. 395년설은 이미 먹힌 걸 이 때서야 정신승리용으로 책봉한 거라 하죠. 어느 쪽이 맞을까요 :) 아무튼 후연은 고구려에 제대로 반격하지 못 합니다. 반격은 나중에 이루어지고, 사실상 두 나라의 전면전이 시작되죠.

어쨌든 이 397년설을 생각하면 무서운 게, 396년에 백제 치고 397년에는 요동을 먹었다는 점이겠죠. 그리고 다음 해에는? 동북쪽의 숙신을 순찰합니다. 395년 비려 공격가지 생각한다면 1년마다 동서남북을 왔다갔다하면서 공격했다는 것이죠. 이 때 숙신은 복속되고, 300명의 인질과 함께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며 내정을 보고하게 됩니다. 이전 서천왕 때 한 번 복속된 걸 생각하면 이젠 제대로 잡았거나 고구려가 어려운 가운데 벗어나자 다시 잡은 거로 봐야겠죠. 동부여도 비슷한 길을 걷지 않았을까 싶네요.

더 무서운 것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딱히 고구려 내부의 혼란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죠. 뭐 기록 안 됐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한 걸까요?

하지만 아직 그가 할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직 한참 멀었죠. 399년, 신라에서 사신이 옵니다. 왜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었죠. 아신왕은 재기하여 고구려에 맞서려 했습니다. 일단 무서웠는지 상대는 신라, 거기다 그 공격은 백제-가야-왜라는 남쪽 세력들이 모두 집결한 공격이었구요. 광개토대왕은 우선 1년 동안 잘 방어하고 있으라 했습니다. 그 1년 후, 한반도의 정세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후연 역시 고구려를 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다음 편은 임나일본부설과도 관련됐군요. 작게라도 얘기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쓰다보니 -_-a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될 거 같고... 외전이라도 하나 내야 될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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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1/11/27 03:13
수정 아이콘
역시 우리 역사에서 유일 -_- 하게 시원하게 볼 수 있는 정복왕의 이야기답네요. 그냥 여기 치고 저기 치고 다 부수는군요.
키스도사
11/11/27 03:54
수정 아이콘
참 역사로 보면 멋있긴 한데...저시대 백성으로 태어났다면 그리 행복하진 않았을꺼 같기도 합니다. 매년 전투복이라니..상상만해도 끔찍하군요 크크

그리고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호칭을 빌어 전대 왕들의 호칭도 풀네임이 존재할것이다. 김부식이 저 문장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지 못해서(혹은 자료가 부족해서) 기입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주장을 책으로 본적이 있는데 그거에 대해서도 궁금하네요.
11/11/27 03:57
수정 아이콘
눈시님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본다면, 내부의 혼란이 없었던 것은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계속해서 승리했습니다. 이건 두 가지면에서 모두 긍정적이죠. 우선 명분에 있어서 패하지 않고 있는 왕에게 반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한 번이라도 패한 후라면 모를까. 그리고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의외로 괜찮았을 겁니다. 눈시님의 기록에도 약탈했다고 쓰인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그런식의 물자충당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으론... 본문대로 좌충우돌, 남북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전투를 했다면 내부에서 혼란이 있을 여지조차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군대가 남부로 갔다 북부로 갔다 다시 남부로 갔다... 했다는 건 군대가 계속해서 중심부를 지났다는 뜻이니까요. 군대가 국가의 외곽을 경계만하고 있어도 사실 위협은 위협인데, 주력부대가 근처를 오가고 있었다는 건 내부가 혼란할 여지도 없애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요.
지금부터끝까지
11/11/27 15:37
수정 아이콘
저는 信主님의 견해에 일부분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반대입니다.끊임없이 전쟁에서 계속 승전보를 올리며 큰 성과를 올리는 게 백성에게도 온전히 잘 전달이 되어 내정이 안정된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오히려 전쟁에서 항상 승자에 속한 국가였는데 계속 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졌다...라는 기록은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더불어 승전을 올린 후 행하는 약탈이 자국의 일반 백성들에게 쓰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전장에서 고생한 '살아남은'병사들의 실질적 혹은 심리적으로 위안을 줌과 동시에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도구로도 사용이 되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그 '약탈물'이 꼭 일반 병사들에게 직접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도 결국은 군사력에 보탬이 되는 요량으로 활용이 되지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제가 信主님의 의견에 동감하는 부분은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하고 있는 왕을 어떤 부분으로든 비판한다는 것은 당시의 기득권층에서는 표현 그대로 '명분'이 적어 설득력과 동조를 얻기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리고 계속 된 전쟁을 하다보면 당연히 죽어나가는 일반백성이 많을 테니 그 만큼 인구도 줄게 됨으로서 한 국가의 어떤 내정능력이 그대로 유지 혹은 줄어든다 하여도 크게 티가 나지 않을 듯도 합니다.더 중요한 것은 저 시대는 일반백성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에(이것이 곧 전쟁이니)군사가 될 수 있으면 더 많이 필요하니 그 많은 군사의 필요성
때문에 백성들의 삶을 조금은 더 풍요롭게 해줄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물론 광개토대왕의 전쟁수행능력을 바라보자면 눈이 부실 정도이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평균적인 능력을 지닌 왕은 흉내내기 정도도 어려운 업적을 내버린 죄(?)로 항상 후에 고구려 왕들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며 본인 또한 그렇게 되기위해(물론 당시 상황이 평화를 혼자 지키고 싶다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고 전쟁이 안 일어나는 고구려의 지리적 혹은 시대적 상황이 아니였음을 감안한다해도)필요 이상으로 영토확장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그것도 되도록이면 광개토대왕이 보여줬던 것처럼 짧은 시간안에..그 만큼 서두르게 된다는 의미)그러다보니 정말 고구려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했고 이것에 대한 부작용(일반백성들 삶의 궁핍함)이
고구려의 전성기시절 이후부터는 뚜렷히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인하여 고구려 기득권세력들간 분열의 '단초'가 됩니다.
광개토태왕
11/11/27 06:11
수정 아이콘
안녕하세요 ^^ 제 이야기가 잔뜩 나와있군요. 하하
11/11/27 08:05
수정 아이콘
여기저기 다 두들겨 깨고 엎어 버린 왕이라서 참 정감가네요. 크크

내부의 혼란의 주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로 부터 물자 회수인데. 대규모 약탈로 인해 물자 확보가 되었고.

중요한건 승리로 인한 백성 및 병사들의 사기 충전. 본국으로 부터의 무리한 물량확보가 아닌점. 이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아틸라
11/11/27 12:38
수정 아이콘
얼마전 역사스페셜에서 했던 광개토대왕 2부작에서는
강화도 일대가 관미성이었을 것 이라 라고 가정하고 전개하더군요.

제해권을 위한 입지조건과 위례성과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요서지방(-_-;;)이나 예성강 하구보다는 일리가 있는거 같네요.
서해바다 전체를 지배한게 아니라 백제의 서해바다 진출을 제한했다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말이죠.

새로운 고액권 화폐의 주인공이였을만큼 세종대왕님과 함께
전 국민적 군주인 광개토대왕인데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고 명확하지 못한점은 많이 아쉽네요^^;

그리고 제 스스로 많이 몰랐던 역사적 내용을 채울 수 있어서
항상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카서스
11/11/27 13:18
수정 아이콘
먼치킨..........

내정이면 내정 외교면 외교 전쟁이면 전쟁 -_-; 못하는게 없었죠.

다만 일찍 죽은거 (....) 그거야 뭐 저렇게 돌아다니는걸 보니 그럴만 한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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