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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08 23:46:06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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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 #2 나주지도.JPG (16.0 KB), Download : 11
Subject [일반] 후삼국 이야기 - 3. 장보고의 후예




pgr에서는 사진 업로드가 두 개밖에 안 되는 모양이네요. 본문 중에 집어 넣는 것도 설정 못 하고; 나름 그림 자료를 준비해 봤는데 어떨까 모르겠습니다. 다음부터는 태그 같은 거 걸어봐야겠네요. 일단 이 둘로 만족하셨으면 합니다. ^^;
육상전 편과 해상전 편, 어느 것부터 시작할까 하다가 해상전 편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추측이 난무하는 글이니 가려서 들어주셨으면 하네요.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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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삼국시대의 해상 세력
장보고의 청해진은 신라에서는 이례적인 곳이었습니다. 근본도 없는 놈이 감히 일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진을 만들었으니까요. 장보고의 직함 '대사' 역시 중국에나 있던 것으로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뭐 이것 때문에 탄압 받은 거겠지만요. 846년. 장보고는 죽습니다. 그로부터 약 60년 후,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청해진 주변은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주요 전장이 됩니다.
이전에 신라구 얘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것이 현춘. 894년에 100척의 전함과 2500명의 병력으로 대마도를 칠 정도의 강력한 해상 세력을 이루고 있었죠. 다만 그 뒷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네요. 후백제에 흡수되었을 거라는 추측밖에는 찾지 못 했습니다. 그 외에 '수달이가 죽었어!'로 유명한 능창이 있고, 강주의 왕봉규 역시 해상 세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왕건이 있죠.
이 해상 세력들의 성향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일본 역사에 나오는 해적들을 대입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다이묘들을 따랐죠. 특히 일본의 경우 해외로 뻗는 것보단 안에서 아웅다웅하며 사는, 해내민족의 경향이 많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해외로 가는 일이 있을 경우 ( 굳이 말하자면 왜구 -_-; ) 이런 해적들의 역할이 중요했겠죠. 좋을 때는 상업 쪽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해적질을 하는 모습, 마찬가지로 고려 말 왜구 등에서 보이는 호족의 지원 하에서 해적질을 하는 모습을 대입시키면 어떨까 하는 거죠. 여기저기 드나드는 게 바다 사나이의 특성인 이상 육상 세력보다 오히려 무정부적인 속성이 강했을 것이고, 이게 나주 정벌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 다만 백제가 해상으로 세력을 뻗었었고, 백제 멸망 후의 해적들을 '백제의 잔적'이라고 불렀으며 현춘이 후백제에 흡수된 걸로 추측하는만큼 백제와 더 가깝다는 생각은 들지만요.
임진왜란만 봐도 수전에 익숙하고 물길을 잘 아는 게 얼마나 큰 이득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은 결국 거제도의 오른쪽으로 남하하는, 바깥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지 못 했고, 조선 수군이 견내량을 틀어 막자 서쪽으로 가지 못 했습니다. 명량해전 때도 진도 바깥으로 돌아가지 못 했죠. 반면 조선군은 심심하면 거제도 남동쪽으로 돌아가서 공격했구요. 수전에 특화된 세력의 가치, 특히 한반도는 다도해라서 그들의 역할이 더 컸겠죠.

아래에서 제가 서술할 나주 공방전의 모습과 수달의 행동 등은 이걸 생각하며 봐 주셨으면 합니다.

2. 나주의 가치
우선 역사상 나주 부근, 이른바 서남해에서 일어난 일들을 대충 정리해 봅시다.
- 청해진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습니다.
- 삼별초는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에서 항전을 했죠.
- 그리고 임진왜란 때 말도 안 되는 승리 명량해전이 벌어집니다.

신라, 고려, 조선 때 굵직한 사건이 바로 이 지역에서 벌어진 거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지역은 서해/남해의 경계고 역시 남쪽의 일본, 서쪽의 중국과 중계무역을 하기에 좋은 위치입니다. 신라가 당나라에 보내는 사신도 강주에서 뱃길로 출발 -> 나주에서 북쪽으로 턴 -> 서해의 연안 항로로 도달이었습니다. 즉 나주는 한중일 삼국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신라의 대당무역에서도 중요한 길목이었던 겁니다.

마침 강주도 언급되었으니 이 둘의 공통점을 찾아보죠. 일단 서남해의 특성, 다도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도와 거제도는 현대 선박도 쉽게 볼 수 없는 물길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쉽게 외해로 못 나간 거였겠습니다만. 한편으로 왕건, 유천궁(나주 정벌 때 왕건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그 딸이 바로 신혜왕후죠) 등으로 유명한 패서 지역의 해상 세력들. 한강, 예성강 등을 통해 백령도 등 서해 5도를 따라 해류를 쭉 가면 중국의 산동 반도에 쉽게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섬과 해류를 따라 가는 길은 그 시대 상업에도 주로 쓰였을 것이고, 소정방이 백제나 고구려를 치던 길, 발해의 장문휴가 등주를 치던 길 등에서도 쓰였다고 하네요. 해상 무역 및 제해권 장악의 요충지, 그렇기에 이들 지역에서 해상 세력이 보이는 것일 겁니다.

다시 나주로 돌아가죠. 이렇게 나주는 해상 무역의 거점이었고 청해진 이후로 상업으로 크게 발전했다고 합니다. 육지로도 나주 평야가 있으며 진도에서도 농사만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했다고 하죠. 그리고 후백제가 태어난 곳이며 중요한 거점이던 무진주까지 강으로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서기 903년, 아직은 후고구려, 후백제 모두 세워진 나라를 반석에 올리기에 급급했고, 중립적이던 호족들을 치거나 끌어안기에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작전이 세워지죠.

백제 땅에 고려의 깃발을 꽂는 것입니다.

3. 의문점
견훤은 미다부리정의 장수로 임명됩니다. 미다부리정은 신라 십정 중 하나로 요충지에 군사를 주둔시켜 둔 거죠. 신라 역시 나주의 가치를 알았다는 거겠죠. 즉 나주는 견훤이 세력을 쌓기 시작한 출발지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쉽게 뺏기고, 6년 동안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 합니다. 이것은 903년과 909년에 나타나는 왕건의 나주 공략 중 903년에 한 건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낳게 되구요. 이 때문에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배반하는 과정을 비교적 디테일하게 그려냈죠.
수달이 대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입니다. 왕건은 나주 공략 이후 압해현에 머물면서 후백제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선박을 공략합니다. 그런데 이 압해현이... 수달의 본거지죠. -_-; 나주가 먹힌 상황에서도 그 루트로 사신을 보내는 견훤의 행동도 이상하지만요.
그럼 이에 대해서 잔뜩 추측을 해 보겠습니다.

4. 나주의 상황
원종과 애노가 일어나기 직전,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상주의 사불성을 근거로 독립합니다. 그 직후인 889년, 미다부리정에 있던 견훤은 오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독립하죠. 3년 후 892년, 견훤은 무진주를 점령합니다. 그 후 궁예가 명주를 뺏고, 철원을 뺏고 패서일대의 항복을 받고 여기저기 마구 공격하는 동안 견훤은 침묵을 유지하죠. 8년 후 900년에 가서야 완산주에 도읍하며 비로소 백제의 부활을 대내외로 알립니다.
그리고 901년, 견훤은 대야성을 공격한 후 돌아오는 길에 나주 남쪽 연변 부락을 공략하고 회군합니다. 뜬금 없죠. 자신의 기반이며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지 겨우 1년만에 나주 남쪽에 군사력이 동원돼야 될 정도로 변한 겁니다. 그리고 2년 후 왕건의 나주 공략이 시작되구요.

이 점에서 저는 견훤의 거병이 아자개의 거병에 따라 자신에게 압박이 오자 급히 한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야망과는 상관 없이요. 하지만 상업 활동과 태조 왕건에 나오는 염전, 나주 평야 등으로 잘 살았던 서남해 지역은 이를 잘 따르지 않았고, 견훤 역시 가치가 높은 이 지역을 쉽게 공격하진 못 하고 자신에게 협조하는 선에서 만족한 것이겠죠. 때문에 견훤은 세력도 확장하고 거병에 명분을 주기 위해 전라북도 지역에 더 집중했고, 이 8년간의 노력으로 전라북도를 석권함과 동시에 백제의 부활을 선포한 겁니다.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순천의 호족인 점 등을 보면 전라남도 역시 대부분 차지한 듯 하지만 천도한 지 1년만에 공격 한 점, 그 후 2년만에 나주가 공격당한 것 등을 생각하면 나주 지역은 제대로 지배하지 못 한 듯 하네요.
자신의 근거지라고 하지만 그만큼의 협조가 없었기에 근거지를 옮겼다는 추측도 가능하죠. 하지만 든 구멍은 안 보여도 난 구멍은 잘 보인다고, 나주 지역은 견훤에게서 더 등을 돌렸을 겁니다. 백제 부활이라는 명분도 마한이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이 지역에는 큰 영향이 없었을 거구요. 혹은 견훤이 백제 계승이라는 명분에 너무 집착하면서 전주 세력과 기존의 나주 세력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나주 지역이 이탈한 것으로 볼 수도 있죠. 궁예 때 패서 지역과 청주 지역간에 갈등이 벌어졌고 왕건 즉위 이후 청주 등 충청도 세력이 이탈하는데도 왕건이 대응을 제대로 못 했듯이요.
아무튼, 그 과정에서 같은 해상 세력인 왕건의 뒷공작이 시작되었을 겁니다.

5. 903년. 1차 나주 점령
이 해에 왕건은 처음 나주, 백제의 금성군을 공격합니다. 이 때 쳐서 뺏은 군현이 십여개로, 나주가 포함돼 있는 무주의 군현이 14군 44현이라는 걸 생각하면 상당한 숫자죠. 주로 나주와 목포 일대였습니다. 이 때 무진주성까지 공격했다고 하는데 백제군은 방어만 할 뿐이었다고 하죠. 901년에 나주 남쪽의 군현을 공격해야 할 정도였고 개국한 지 3년차였다는 걸 생각하면 견훤은 이 지역에 대해서는 무진주 등의 거점 방어 이외에는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전북, 충청도 등에서 후백제 건국의 명분을 쌓는 데 더 집중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한 왕건이 별 반격 없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일대 해상세력이 거의 왕건 편을 들거나 중립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이 일대의 해상 세력이 후백제의 해군 주력이었을테니 반격하기도 어려웠겠죠. 결국 견훤은 이에 맞설 해군을 유지하기 위해 6년간을 준비한 것일 테구요.
하지만 909년까지도 견훤이 이 지역을 이용해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점, 909년에 왕건이 다시 군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섬들을 점령한 것을 보면 903년에는 백제에 반기를 든 지역 중심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만 넓히고 돌아온 게 아닌가 싶네요. 궁예가 이 지역을 나주로 승격한 것 역시 정치적으로 드러내기였고, 이 지역의 가치 때문에 견훤이 강압적으로 가지 못 하듯 궁예도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한 게 아닌가 합니다. 나주 인근의 호족과 해적들은 양 쪽에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구요.
다만 903년에 현 양산 지방의 호족 김인훈이 구원을 요청하자 수군으로 구원한 걸 보면 최소한 이 지역을 통과할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사실 이 지역의 섬에 있는 세력이 지지하거나 통과를 묵인하면 후백제가 이걸 저지하지 힘들었겠죠. 그리고 후백제는 전라남도 지방을 통과하는 고려군도 저지하지 못 할 정도로 해군력이 없었다고 봐야겠죠.

6. 909년. 나주 공방전
그 후 육 년은 궁예와 왕건이 나주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 고심한 시간일 것이며 견훤이 이를 막기 위해 해군력을 키운 시간일 겁니다. 본격적인 해전은 이 때 벌어집니다.
909년. 나주는 후백제의 군대에게 압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궁예는 이에 왕건을 파견하고, 왕건은 염해현에 머물면서(항구보다는 근처 섬이 아닐까 합니다만) 오월국으로 가는 후백제 선단을 붙잡구요. 견훤이 나주 지방을 되찾으려고 (혹은 지배권을 확실히 하려고 하고) 왕건이 서남해의 항구에서 머물 수 있는 조건, 나주 호족들의 줄다리기는 이 때도 계속되고 있었던 겁니다. 왕건은 부장 김언, 종희와 2500병력을 이끌고 고이도, 진도 등을 쳐서 빼앗고 마침내 견훤의 해군과 부닥칩니다. (견훤이 먼저 나주를 포위하고 해군으로 이 유역과 섬들을 되찾아서 왕건이 다시 뺏은 건지, 왕건이 가서 견훤이 이를 방어한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 때 백제군이 강해 보여서 병사들이 겁을 먹자 왕건은 격려하며 거세게 밀어붙였고, 백제군이 움츠려 든 틈을 타서 화공을 가해 몰살시켰다고 하네요. 왠지 적벽대전이 생각나는데 역시 견훤군보단 왕건군이 더 바다에 익숙했던 게 아닐가 합니다.
견훤은 작은 배에 타서 도망쳤고, 왕건은 이 직후 중요 인물 하나를 붙잡습니다. 바로 수달이죠.

7. 수달은 어떤 위치였을까?
수달의 근거지는 염해현이었습니다. 그 세력이 얼마나 됐을지는 모르나 왕건이 붙잡아서 궁예에게 바치고, 궁예가 잔뜩 놀리면서 죽인 걸로 봐서 이 지역 혹은 이 전투 기간 동안 나름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나주 공방전 기간 동안 그가 한 일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수달이 왕건을 붙잡기 위해 연계한 갈초도의 해적들은 왕건이 903년 이후부터 심심하면 지나쳤을 지역이죠. 큰 세력이었고 확실히 견훤 편이었다면 왜 그 전엔 이름이 보이지 않을까요? 혹은 왜 자신의 근거지인 염해현에서 왕건이 활동해도 별 반응이 없었을까요? 양 쪽 편도 아닌 중립이었다면 왜 후백제군이 패배한 직후에 백제 편을 들어 왕건을 붙잡으려고 했을까요?
태조 왕건에서의 설정처럼 휘하 수군이 전부 왕건 편으로 가 버려서 6년 동안 벼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궁예가 그렇게 놀리며 죽였다면 분명 이 기간 동안 뭔가를 한 거겠죠.
나주의 몽탄 나루터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전투 도중 왕건이 큰 위기에 처했는데 꿈에서 신령을 보았고 그의 말에 따라 강을 건너서 살았다는 거죠. 나주 공방전이 왕건에게 유리하게만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수달은 이런 부분에서 활약한 게 아닐까요? 즉, 나주 부근이 궁예에게 고개를 숙여 갈 때 같이 고개를 숙였다가 백제의 수군이 커 지고 나주를 수복하려고 하자 배신했고, 이 배신이 왕건의 작전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이게 다시 왕건에게 항복해도 안 될 정도가 아니었냐는 거죠. 그 때문에 견훤에게 붙기 위해 갈초도의 해적들(이 역시 수달의 세력이었겠죠)과 함께 왕건을 노렸고, 이를 간파한 왕건에 의해 붙잡힌 거죠.
태조 왕건의 포스에 비해서 안습한 결론이네요. ㅠ_-;

8. 계속되는 공방전
910년, 견훤은 직접 나주성을 포위하지만 열흘 동안 성은 버텼고, 물러나죠. 이 때는 확실히 나주 지역이 궁예의 차지가 되었다는 거죠. 사료에도 덕진포 전투 후에야 궁예가 삼한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서술을 하는데, 이를 보면 확실한 점령은 909년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911년에는 강을 거슬러 올라 무진주성을 공격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공격에는 실패했지만, 이로써 나주 점령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 드러났죠. 그 때문인지 912년 견훤은 다시 수군을 몰아 탈환을 노리고 2차 덕진포 전투가 벌어집니다. 견훤은 또 지죠 -_-; (또 졌어? 아이구 아이구) 914년 왕건은 다시 백 척의 전선을 뽑아 나주로 내려갑니다. 이건 아마 잡초 제거용이었겠죠? 이 때 얻은 말이 백선장군. 배의 크기가 꽤나 커서 갑판에서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왕건이 역성혁명을 이룩한 이후에도 나주는 충성을 바쳤고, 927년에는 나주를 경유해 수군으로 강주로 가서 대야성을 치기도 했죠.
자 그럼 이상 이번 편을 마치... 면 재미 없죠?

9. 견훤의 역습
공산 전투 이후 견훤은 나주를 탈환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딱히 드러나진 않지만 이 때 왕건이 그냥 나주를 포기했을 것 같진 않네요.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력이 부족해서였는지 고려 수군도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습니다. 전세가 다시 역전된 932년에 견훤은 빈집털이를 시도하거든요. 9월 백제군은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 염주, 백주, 정주(왕건 휘하 수군의 근거지였죠)를 기습, 백여척의 선박을 불태우고 인근 섬들을 약탈하면서 많은 재물과 말을 뺏죠. 10월에는 대우도를 공격, 역시 약탈 후 돌아갑니다. 왕건은 왕만세를 보내 이를 막지만 패배했죠. 9월의 공격은 기습이었다 하더라도 10월에 다시 공격당한 걸 보면 고려의 수군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고 봐야 될 겁니다.
아마 이런 식의 공격이 나주 공방전의 시작이었을 겁니다. 다만 나주 정도의 타격은 주지 못 한 듯 하네요. 나주가 견훤에게 어느 정도 등을 돌린 것과는 달리 예성강 일대는 고려의 중심이었고, 혼란을 줄 순 있어도 뺏을 정도는 되지 못 했을 겁니다. 애초에 그걸 바라지도 않고 치고 빠지기만 했을지도요. 여기서 좀 더 나아갔다면 또 한 번 바다에서 크게 싸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견훤은 너무 늙었죠.
이 상황에서 나주가 점령당한 건지, 견훤이 승승장구 해서 항복한 건지는 사료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역습에 나주의 군세가 포함돼 있는지도요. 다만 왕건이 백제의 정권교체의 혼란 속에 나주를 먼저 뺏은 거나 나주가 "아따 어서 오시랑께요" 하고 바로 항복한 걸 보면 견훤이 힘으로 뺏었고 친고려적인 정서는 계속된 것으로 보이네요.

10. 결어
나주는 왕건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일단 나주를 뺏은 공로로 벼슬이 높이 올랐고, 신채호의 일목대왕의 철퇴에도 "왕건은 해전을 잘 하고 난(궁예) 육전을 잘 하니" 하는 식으로 서술돼 있죠. 또한 후고구려, 태봉의 정국이 혼란할 때 왕건은 최대한 나주에 머물렀죠. 포상이 없다는 부하들의 말에 "지금 왕이 포악하니까 우리는 그냥 바깥에서 충성하면서 몸 보전하자"는 궁예를 까는 대답을 합니다. -_-; 이 정도로 나주는 태봉도, 백제도 아닌 왕건의 땅이었다는 거죠.
나주를 뺏음으로써 왕건은 패서 - 나주 - 강주에 이르는 제해권을 주도했고 (견훤이 예성강을 공격할 때 나주와 강주는 백제 영토였습니다. 마찬가지였겠죠) 중국으로 가는 교역로도 끊었으며 강을 거슬러 올라 무진주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위치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궁예가 세력을 크게 넓힌 데 반해 견훤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 있겠죠. 다수의 병력을 무진주에 배치해야 됐을 테니까요. 후에 나주에서 온 장화왕후의 아들 혜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이후 권력 다툼에 밀려서 나주 오씨는 몰락하고 말지만요. 고려 개국의 기반 중 하나였다는 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몰락이죠.

어떤 글에서 보니 왕건이 나주를 공략할 때 청해진과 연관된 선종 세력이 도왔다는 말이 있더군요. 이 때문에 나주를 회유하기 쉬웠고, 왕건은 이 때 큰 도움을 준 징효대사를 기리기 위해 절과 사리탑을 세워줬다고 합니다. 역시 아직 장보고의 정신은 남아 있었나 봅니다. 조부 작제건이 용왕의 딸과 결혼했고 아버지 왕륭의 초명은 용건, 용륭이었죠. 제대로 말 안 하고 '해상세력이다'고 했지만, 왕건이 얼마나 바다와 관련이 깊었는지 말 해 주는 부분입니다. 서양에서야 드래곤 하면 불이지만 동양에서는 용 하면 물이었죠.

이상, 나주 공방전을 통해 본 후삼국시대 해전과 그 기간 동안 벌어진 나주 호족, 해적 등의 해상세력에 대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추측이 난무하는 글 봐 주셔서 감사하구요. 태클 기다릴게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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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11/03/09 00:03
수정 아이콘
역시 잘 보고 있습니다. 추천 한번 때리고요~

아 그런데 마한을 비롯한 삼국시대전부터 이후까지 유지되었던 나라들에 대해서 써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Inception
11/03/09 00:59
수정 아이콘
(또 졌어 아이구 아이구) 의도하신건지는 모르겠는데 서인석씨의 목소리가 들리는거 같네요 크크크
몽키.D.루피
11/03/09 01:06
수정 아이콘
후삼국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참 왕건은 대단한 인물이네요.
장님버드나무
11/03/09 19:38
수정 아이콘
근데 임진왜란때 일본 해군이 서진을 못한것은 견내량이 막힌게 크긴 하지만 육군이 진주성에서 막힌것도 크지 않나요? 진주성이 뚫렸다면 조선 해군도 견내량에서 진치기를 어려웠을거 같구요.
장님버드나무
11/03/09 19:39
수정 아이콘
근데 보다보면 태조왕건이 참 준비도, 투자도 많이 한 작품인데 그놈에 삼국지 드립을 유치할정도로 떨어서 가치가 깎인 느낌이라 안타깝습니다.
상상력
11/03/10 01:57
수정 아이콘
근데 저 올려주신 지도를 보면 경주는 아예 없네요

어디있는지 누구나 당연히 다 알거라고 생각해서 표시를 안해놓은걸까요?

지도상 위치를 보면 양주로 표시된 지역 어딘가에 있을 듯 한데...오히려 양주란 곳은 떡하니 양주의 주도로 표시된 반면 정작 신라의
수도 경주는 오데로 사라지고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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