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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2/12 22:43:09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역사에 대한 잡상 (9) 황산벌, 백제의 멸망
쓰고 보니 엄청 길어졌네요. -_-; 전편도 그렇고 삼국사기 보니까 왠지 할 말이 많아져요. 참고로 제 글은 삼국사기 아니면 거의 이랬더라 수준이니까 (그런 거 원문 찾아 볼려면 한문의 압박이 ㅠ)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자 그럼 시간을 돌려서 황산벌로 가 봅시다. 아, 일단 더 돌려 보죠.

"느이 신라 X벌놈들 554년 옥천 땅에서 우리 고조 할아버지 성왕을 죽여서 어따 묻었어? 지난 100년동안 느그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전쟁하면서 있었던 일, 한 번 씨부려 볼까?"

광개토대왕 때부터 시작된 대공세에 움츠려 있던 백제는 무령왕 때 다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성왕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죠. 사비성 천도, 나제동맹을 통한 한강 유역 회복을 시작합니다. 결국 한강 하류는 백제에게, 상류는 신라에게 떨어지죠. 정말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는 고토 회복의 순간! 이었습니다만...
신라가 배신을 때리죠. -_-; 하필 이 때 신라의 왕이 정복군주 진흥왕이었습니다. 뭐 고구려의 압박과 호족들의 비협조로 포기하고 병력을 뺏는데 그 때 신라가 공백지였던 하류를 점령한 거라는 말도 있더군요.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신라의 행동을 묵인했다는 것에서 밀약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모르니 넘어가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백제의 주적은 신라가 되고, 그 확실한 기폭제가 바로 성왕의 죽음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50기로 신라를 기습하려다가, 일본서기에서는 전선을 시찰하려다가(그래도 왕이 50기로 기습한다는 건 뭔가 아니죠)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 목이 북청이라는 신라의 관청 계단 밑에 묻혔다고 합니다. 다들 밟고 가라 이거죠. 백제의 분노가 오죽했을까요. 이렇게 100여년간의 나제동맹은 끝나고 이후 100년은 신라와의 사투가 계속됩니다.
이후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은 나름 백제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수나라와 친하게 지내면서 고구려도 견제하고 신라도 여러 번 공격하고, 나름 이래저래 괜찮은 토대를 마련했죠. 하지만 당나라 때는 신라랑 화해하라니까 그건 못 하겠다고 결국 관계를 끊고 고구려-백제-일본이라는 하나의 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게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최고의 효과겠죠. 한강을 점령한 자가 삼국을 접수한다 뭐 이런 걸까요.

그리고 641년, 백제 최후의 왕 의자왕이 등장합니다.

1. 회광반조
사실 이전 고구려 편에 더 어울리는 말이겠죠. 촛불이 꺼지기 전 마지막 불꽃. 하지만 의자왕의 상황을 보면 이 말이 제법 어울리죠. 아무튼... 어차피 이렇게가기로 했으니 황산벌의 대사를 참고해보죠. ( - -);

"허구헌 날 쳐 들어와 남의 백성 채 직이는 게 정치적 갱류이가? 니놈 왕 되고 지난 이십년간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데이"
"아 즉위 초기에 정권 장악하고 국론 통일 할려믄 다들 하는 거 아녀?"
"대야성에서 내 딸내미 죽이삔 거 벌써 잊어삤나?" "니캉 내캉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존재데이!"

누가 누군지는 말투로 확인합시다 ^^; 무왕에 이어 의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 걸로 보입니다. 동시에 중국-고구려와의 양면 노선을 걷던 것을 확실히 친고구려로 돌리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하게 하죠. 즉위 다음해에 곧바로 신라를 공격해 40여성을 획득하고 이어 현재의 합천인 대야성을 깨뜨려 버립니다. 대야성은 태조 왕건에서 계~속 나오듯 신라로 가는 요지 중에 하나고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있었습니다. 이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여기서 죽게 되죠. 개인적인 원한이 없을 리가요. 643년에는 당항성을 공격, 깨뜨립니다. 여기가 현재의 화성시, 신라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당나라와의 연결선이 깨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후에도 계속 공격을 계속해서 655년에는 고구려와 연합, 30여개의 성을 빼앗고 망하기 직전인 659년에도 신라를 공격합니다.
이 정도면 신라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죠. 진덕여왕이 무능해서 나라가 망하게 됐다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당에서 직접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공격을 그만두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구려에 어떻게 선을 대려다가 잡히고 별주부전의 기원이 된 방법을 통해 (풀어주면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주겠다) 도망가기까지 합니다. 이후 고구려군은 무려 경북지역까지 진출하며 신라를 공격하죠.

2. 나당연합

"하모하모. 저기 점마들은 악의 축 정도가 아이라 악의 덩어리라카이" - 김춘추
"김춘추! 너래 떼놈들에게 알랑방구 고만 뀌라우 썅" - 연개소문

이 상황에서 신라가 기댈 곳은 당나라 뿐이었습니다. 동맹의 시작은 참 굴욕적이었다는군요. 신라 사신이 누군진 몰라도 그냥 살려만 줍쇼 이런 상황이었다네요. 아무튼 신라는 그렇게 지는 와중에도 한강 라인만은 죽어라 지켰습니다. 또한 김춘추는 자신이 직접 당으로 가기도 하고, 왕이 된 이후 아들 김법민, 김인문을 계속 당에 보내면서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구요. 당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뒤가 잡힌 거였으니까요. 거기다 나중에는 대립해서 그렇지 그 때의 신라는 정말 간이라도 빼 줄 듯이 행동했구요. 이것 때문에 나중에 신라까지도 먹으려고 한 걸지도요.

3. 권력다툼

"그 나라가 우덜 나란가? 느덜 부여씨 나라제." - 신하 1
"3년 전에 왕이 자기 아들 41명을 죄다 좌평에 임명해분 뒤로 우덜 나라는 없어졌제" - 신하 2

647년, 의자왕은 자기 아들 41명을 좌평에 임명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조치이긴 하죠. 즉위 초기인 642년에도 무려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했죠. 삼국사기에도 성충, 흥수 등 충신들을 쫓아냈다고 하고 이를 여기와 연결시킬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일본서기의 경우 대부인이 요녀라서 맘대로 나라를 주물럭거렸다고 했습니다. 이게 의자왕의 어머니를 말하는 건지, 은고라고 알려진 의자왕의 계비를 말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망국을 설명할 때 흔히 하는 여자에게 덮어씌우기가 아니라면 뭔가가 있었다는 거겠죠. 이 역시 신하 쪽에서 왕권에 덤벼들었다든가 왕 쪽에서 신하들을 마구 탄압했다는 주장이 있더군요.(후자라면 의자왕이 한 걸 뒤집어 씌웠을 수 있겠네요)
실제 의자왕의 말처럼 정권 장악하고 국론 통일할 때 좋은 방법이 전쟁이죠. 뭐 잘 못 하면 오히려 더 망하지만요. -_-; 의자왕 초기의 활발한 신라 공격 역시 거기서 이유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극단적으로 나간 게 왕자들의 좌평 임명일 겁니다. 정말 의자왕이 맛이 가서 그랬든, 왕권 강화를 위해서 그랬든 이 때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극에 달했을 겁니다. 2년 후 백제는 다시 신라의 두 성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게 끝이었습니다. 뭐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럴 수도 있고, 당이 확실히 신라를 보호하고 나섰고 고구려를 게속 공격해서 고구려도 그만큼 약해지기도 했겠죠. 하지만 더이상 대규모로 원정할 수 없을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듬해의 상황을 보면요. 실제 신라도 김유신의 활약으로 백제를 이기기도 하고 잃었던 성을 되찾기도 하고 김제평야까지도 공격하면서 나름 반격을 했죠.

그리고 마침내 660년이 밝았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수많은 망국의 징조 ( 여자 시체가 떠내려왔다든지 개가 죽었다든지 하는, 정말 말세의 분위기가 나옵니다 ) 와 함께 백제 최후의 해가 밝은 거죠.

4. 목표는 백제!

"의자왕 너 이 시키. 니는 이제 내 손에 죽는데이." - 김춘추
"뭐여? 시방 선전포고 하는 거여 뭐여?" - 의자왕

이전 글에 적었지만 요동방어선에서 막힌 당군은 수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국지전 동안에도 수군을 몇 차례 보낸 적 있죠. 그런 대규모 수군 투사능력이 본격적으로 나온 것이 바로 백제 공략이었습니다. 시작은 인천 앞바다 덕물도. 현재의 덕적도입니다. 여기서 후에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과의 회담이 있었고, 이 때가 6월 18일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7월 10일까지 사비성 앞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소정방, 김인문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김유신,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 5만의 나당연합군의 결성입니다.
자, 그럼 이에 대항하는 백제는 어땠을까요?

"당군이 배를 댄 인천 앞바다가 떡하니 중간이랑께. 워메 헷갈려분 거. 그럼 목표가 고구려여? 아님 백제여?" - 의자왕의 아들 1
"백제를 칠려면 진작에 기벌포 앞바다에 내려야제 얼쳤다고 인천 앞바다에 내린당가?" - 신하 1
"아 안 그렇습니꺼? 백제를 칠라믄 탄현에서 황산벌로 가면 직방인데 미x다고이까지 올라오겠십니꺼?" - 백제 첩자 1

에 뭐 -_-; 이런 상황이죠. 이상하게 이 때 백제의 반응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영화에서처럼 고구려냐 백제냐 하고 있었을까요? 이 때 신라의 기동이 이상하긴 했습니다. 경기도 이천까지 북상했으니까요. 백제는 정말 신라가 고구려를 치든가 그냥 한강 유역의 국지전이라고 생각했을지도요. 그리고 당군이 상륙한 건 정말 몰랐을지도요. 고구려가 백제 멸망을 구하지 못 한 것도 자기들 치는 줄 알고 움츠린 상태였을수도 있죠. 그 동안 주 전장이 경상남도-전라남도 부근과 한강 주변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여기에 백제의 주력군이 있었다면 신라군도 이를 피하기 위해 이런 기동을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나당연합군의 작전은 속도가 생명이었으니까요.
수많은 가정이 나옵니다만, 이 나당연합군에 대한 백제의 반응은 너무나도 늦게 나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는데 그건 이렇죠.

좌평 의직 : 당나라는 바다에 오래 있어서 피곤할텡께 당나라 먼저 치장께요. 신라는 당만 믿고 있응께 알아서 물러날 거 아니겠어라.
달솔 상영 : 아니어라. 당나라는 싸움 빨리 끝내야 된께 싸움을 피하는 게 능사지라. 당은 그냥 길을 막고 버티기에만 거시기허고 일부 군사로 신라부터 깨뜨리고 당이 지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라.
유배돼 있던 좌평 흥수 : 아따,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탄현과 기벌포를 막아야 되는구먼유. 그렇게 최대한 막다가 둘 다 지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구먼유.
흥수를 욕 하는 다른 대신 : 흥수는 유배되었는디 바른 말 하겠어라? 그냥 백강과 탄현에 들어오게 해서 좁은 길에 아들이 몰릴 때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다를 게 있겠어라?

에 -_-; 황산벌 따라 사투리로 바꿔봤습니다만, 역시 영 어색하군요. 충청도 분들께는 죄송 ㅠ 무왕 때 전북 직산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하기도 했지만 백제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충청도였습니다. 뭐 지역감정을 비유한 것도 있지만 충청도 사투리는 호남, 영남에 비해 표준말과 그리 큰 차이가 없어서 그런 거 같네요.
아무튼 대충 신라는 막고 당나라 먼저 치기, 당 막고 신라 먼저 치기, 양쪽 다 막고 있기, 그냥 불러들이기(이건 나당연합군 작전대로 되는 거죠 - -)로 나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연합군은 탄현과 기벌포를 넘었다고 하네요. -_-; 대체 왜 이 때까지 몰랐단 말입니까. 자. 이에 대한 논의를 잘 해 봅시다. 정말 여러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계백아. 니가 거시기 해야겄다." - 의자왕
"그 동안 안 죽느라 고생들 혔다. 느덜 이제 나랑 거시기 해야겄다!" - 계백
"긍께 우리의 전략전술적인 거시기는 뭐시기 헐 때 꺼정 갑옷을 거시기한다. 잘 알아듣겄제?" - 계백

일단 삼국사기의 분위기만 보면 의자왕은 사치에만 빠져서 연합군이 오는 것도 몰랐고 나중에 알았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도 못 하고 충신 성충, 흥수의 말을 마지막까지 무시하였고, 겨우 계백의 오천 결사대만 모아서 그걸로 신라만을 막으려고 했다고 하죠. 황산벌에서도 그걸 받아들여서 당과는 어떻게든 협상을 해 보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 아예 기벌포에 상륙했을 때부터 전쟁은 끝났다 이런 분위기죠. = =;

그런데 구당서 소정방전에는 소정방과 김인문이 이끄는 당군 역시 백제와 싸웠다고 합니다. 다만 당군이 썰물 때 상륙을 했는데도 제대로 요격을 못 하고 그 후에 패했다고 하네요. 거기에 사비성에 갔을 때도 백제군을 격파했는데, 이 때 격파한 숫자가 만여명이라고 돼 있으니 백제군의 규모는 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죠.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어야제. 그거 마시고 먼저 가소"
"그거 마시고 죽을껴 내 칼에 죽을껴?"
"호랭이는 죽어서 거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혔다. 제발 깨끗하게 가장께."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엔하위키에 재미있는 논의가 있더군요. 대충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백제가 소수로 신라를 견제하고, 다수로 당군을 격파한 후 다시 신라를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겁니다. 이게 맞을 거 같은데, 이게 맞다면 아직 망국의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왜 계백이 처자식을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거죠. 뭐 계백이 선견지명으로 어떻게 되든 우리는 다 죽었다 생각했을 수도 있죠. 사실 처자식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신라 쪽의 조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거라면 기벌포 하구에서 당군을 막은 백제군은 주력부대였겠죠.
둘째는 당군을 저지하면서 신라부터 격파하려고 했다는 게 있죠. 이 경우 신라는 탄현을 넘어서도 저항이 없었는데 당군은 상륙할 때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게 설명이 되죠. 하지만 당군이 이 저지선을 뚫고 너무 빨리 진격했고, 결국 신라를 치려고 모은 병력을 여기서 쓰고 계백의 소수만 신라를 요격하려고 보냈다는 건데, 이렇다면 의자왕이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할 지 결정을 못 했다는 것에도 맞고, 계백이 처자식을 죽일 정도로 절망적이었다는 것도 설명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게 맞다면 기벌포 하구의 백제군은 그냥 평상시 주둔군이었거나, 이 쪽도 결사대였는데 너무 쉽게 뚫린 게 되겠구요.
어느 쪽일까요? 아무튼, 계백은 황산벌로 향합니다.

5. 우리는 황산벌로 간다!

"손자병법에는 말이여. 지키는 쪽 군사가 십분지 일만 되야도 이길 수 있다 혔다. 이 짝 오천. 저 짝 오만. 간단한 산수 아니여? 우리는 명색이 결사대여! 아 결사대가 일당 십도 못 혀! 아들헌티 죽기 전에 나한테 확인 받고 죽으라고 혀라. 열 놈 못 채우면 내가 콱 죽여버릴랑께."
"옛날 구천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

위는 황산벌의 대사, 아래는 실제 계백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 열전 중에 찾아 볼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백제 인물이죠. 신채호에 따르면 해동잡록에 계백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그는 왕족으로 부여계백입니다. 가잠성의 성주로 김유신을 이긴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말 그대로 김유신용 결전 병기-_-;입니다. 확실히 귀족들이 제대로 지원 안 한 상태에서는 왕족이었고 그 휘하 병력을 이끌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이외에 위에서 신라와 먼저 붙자고 한 상영과 좌평 충상이 같이 갔다고 합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용으로 보입니다. 애초부터 처자식을 죽일 정도로 각오를 한 상태였죠.(이겼으면...) 전장이었던 황산벌 역시 평지였고, 계백이 자리잡은 곧 역시 높아봐야 해발 150미터 정도. 여기서 무려 열 배나 되는 적을 맞이한 겁니다. 물론 이겼으면 혹시 모르죠. 신라는 당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동원한 것일 테고, 당을 상대로 시간을 끌면 굴욕적인 협상이라도 얻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고구려도 언제까지나 보고 있었을 순 없을 테니까요.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 - 그래 미칬다. 자슥 죽으라고 내보낸 니는 안 미칬나? 처자슥 죽이고 온 계백이는 제정신이가? 미친 기야. 미쳐야 하는 기야. 전쟁은 미친 놈들 짓인 기야!"
"싸움은 이제부터여. 여기서 무너져불면 여태까지 거시기한 거 말짱 황이여! 오늘 하루만 끝꺼정 버텨불자."
"자랑스런 백제의 아그들아! 느덜이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바른 것이더냐, 시방. 그것이 바로 죽음의 맹세 아니여? 산다는 건 불확실한 것이여. 이 징헌 놈의 인간 시상에 확실한 것은 딱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사나이가 미련과 변명을 버리고 여그 황산벌에서 앗싸리하게 거시기 해불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배달 가는 기다. 지금부터 삭 슬어버리는 기라. 각오 됐나?"

역시 꽤 많은 if를 남기고 계백은 김유신과 맞붙습니다. 여기서 무려 네 번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그 희대의 먼치킨 김유신을 상대로요. 반굴과 관창의 자살 공격은 김유신의 초조함을 말 해 준 거겠죠. 이들이 버틴 시간은 단 하루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하루는 바로 당과 신라의 합류 시점인 7월 10일이었죠. 결국 신라군은 하루 지각하면서 소정방에게 온갖 소리를 듣게 되구요. 이것이 바로 백제 최후의 혼, 계백과 오천 결사대가 목숨 바친 이유였습니다. 원래 작전이 어땠든 의자왕은 이것으로 백제의 주력을 당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잘 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6. 백제의 멸망

"전투는 요식행위일 뿐인기고, 전후처리 협상만이 남은기야." - 김춘추
"가긴 어딜 가고, 싸우면 뭘로 싸운단 말이냐." - 의자왕

구당서 소정방전의 기록이 맞다면 백제의 병력은 수만은 됐을 겁니다. 사실 전쟁 1년 전에도 신라를 공격했는데 오천밖에 없을 리는 없죠. 하지만 귀족 및 지방 호족들의 도움은 끝까지 없었던 듯 합니다. 아무리 의자왕과 대립했다고 하지만 이 정도는 정말 심하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예전에 개로왕이 전사할 때도 백제의 지방군이 아닌 신라군이 먼저 왔듯이 그 정도로 단합이 안 되어 있었다는 것, 아무리 병력을 모으려 해도 당군이 그 정도의 시간조차도 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당군이 무려 13만이나 되었다는 것이죠.
당군이 너무 많고 빨랐다는 것도 확실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당은 수십년째 고구려만 치고 있었고, 아무리 대립을 했어도 백제에 완전 적대적이지는 않았으니까요. 애초에 바다를 건너야 되기도 하구요. 하지만 바다를 건너서 강을 거슬러 온다는 것은 육전보다 더 빠른 공격이 가능하죠. 거기에 고구려와는 달리 백제는 평야지대입니다. 사람 살기에는 좋지만 방어하기는 힘들죠. 그리고 적은 13만. 섣불리 성 밖으로 나서다가 요격당하기 십상이었겠죠. 또한 나당연합군은 최대한 수도만을 노렸죠. 임진왜란 때 성곽 단위로 어떻게든 버티고 그 동안 왕은 의주까지 달아났던 반면 호란 때는 성곽 무시하고 수도만 보고 공략해서 항복했다는 것과 비슷할지도요. 실제 백제부흥운동은 당군의 주력이 빠진 661년에 시작되구요. 방어하기 좋은 지형도 없는 평지에서의 13만 대군. 신라의 5만군과 합친 18만 대군은 백제 역사에서 경험하기 힘든 대군이었을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자왕의 대처는 잘 했다고 보기 힘들죠. 아무튼 여기서 연습을 착실히 한 당군은 이듬해 고구려의 평양성을 수군을 주력으로 공격하게 됩니다. -_-; 고구려 치기 전 예행연습이었을지도요.
최근 예식진이라는 장수의 묘비가 발견되면서 그의 배반으로 의자왕이 조기 항복한 거라는 가능성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식진의 공은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고 언급돼 있는데, 이는 한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족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웅진성에 있는 의자왕을 붙잡아서 바쳤다는 주장이 나오는 거죠. 그 정도로 상황이 악화돼 있다는 말도 될 것이고 분열이 더 심했다는 말도 되겠죠. 그래도 웅진성은 백제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을 것인데... 아무튼 700년을 이끌며 한반도 역사의 한 축이던 백제는 이렇게 멸망합니다. 정말 제 2의 전성기를 연 순간, 너무도 허무하게 망해 버린 거죠.

7. 평가

"아부지, 백제는 이만하면 훌륭했어라. 칠백년이나 해먹었으면 망할 때도 된 것이제 결코 아부지가 무능해서 망한 게 아니어라." - 의자왕의 아들 1
"우리 백제는 망했어야." - 거시기

왜 이렇게 길어졌죠? -_-; 고구려 편보다 더 짧게 될 줄 알았는데... 자, 마무리 해 봅시다.
백제는 비밀에 쌓인 나라입니다. 신라는 더 오래 가서 기록이라도 많고 고려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하면서 마찬가지로 고구려 정통을 내세우기라도 했지 백제는 그 양쪽의 수혜를 다 입지 못 했죠. 결국 세 나라 중 기록이 가장 적습니다. 그래서인지 떡밥으로 넘치는 나라죠. 비류백제설, 한성백제의 비밀, 요서경략설 등등. 4세기까지도 전라남도 지역은 마한이 남아 있어서 백제가 영향력을 못 미쳤다고 하는가 하면 일본과의 관계는 한일 간의 최대 떡밥 중 하나죠. 앞으로도 한국사가 풀어야 될 숙제들이겠죠. 글쎄요. 어떤 나라였을까요? 신라, 고구려가 아직은 고만고만할 때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은 최초의 나라였고, 멸망할 때 인구도 76만호로 고구려의 69만호보다 오히려 많죠. 이런 나라가 하루아침에 멸망하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해양대국이었다는 것, 지방 호족의 권리가 다른 나라보다도 강했다는 것,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는 점 등에서 왠지 삼국지의 오나라와 비슷하군요.
결국 백제 멸망 원인은 18만이라는 미증유의 대군이 신속하게, 그것도 양면으로 온 것,(이 때문에 백제가 그냥 압도적인 병력에 당한 거지 못 해서 망한 게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대처는 아쉽죠) 그것도 백제가 권력 싸움에 빠져 있는 그 타이밍을 제대로 노린 것, 의자왕의 아쉬운 대처, 먹고 살기에는 좋지만 적을 막기에는 어려운 지형 등이 있겠죠. 보면 후백제도 딱 이렇게 결전 한 방에 무너지고, 황산에서 항복합니다. =_=; 황산벌의 그 황산이죠.
그래도 그렇게 무너졌다고 무시할 나라는 아니죠. 대륙백제설은 지양해야겠지만 백제의 해양 진출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앞으로도 연구돼야 될 중요한 소재입니다. 여러 가지가 나오죠. 대만을 넘어서 필리핀까지 진출했다는 말이 나오니까요. 이게 사실이라면 그 시대에 이런 강력한 해양 커넥션을 구성한다는 건 엄청난 거니까요. 마찬가지로 양 쪽 다 치열하게 물어뜯고 있긴 하지만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그나마 비극으로 얼룩진 한일 관계사에서 정말 긍정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입니다. 일본에서 백제를 쿠다라라고 하는데, 이를 '큰 나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거 참... 일본이 무려 3만의 병력을 보냈다는 것에서부터 백제와 일본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알 수 있죠.
이후 백제부흥군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일본군과 연계하여 사비성을 탈환하려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사비성이 저격 당해서 그렇지 백제 자체가 죽은 건 아니었죠. 이외에 통일 후 신라 바닷가에서 난동하는 해적들을 백제의 잔적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맞다면 백제의 해상세력은 비록 무국적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살아 있었다는 거겠죠. 견훤은 의자왕의 복수를 외치며 서라벌로 진격했습니다. 의자왕이 그 때까지도 백제 유민들에게 기억됐고, 결코 나쁜 이미지는 아니었다는 걸 말 해 줍니다. 그리고, 1223년 고려 때도 백제부흥군이 일어납니다. 백제는 망했지만, 사람들은 백제를 잊지 않았었나 봐요.
뭐 백제 얘기를 하자면 이 글의 몇 배의 분량이 필요할 테니 여기서 끊겠습니다.

이거 황산벌 얘기라서 영화 대사 너무 남용했네요. 신라 편에서는 줄일게요. 쓰다 보니 황산벌 얘기는 조금만 하고 백제 얘기만 했는데... =_=a 생각해보면 이 곳 황산. 계백과 오천 결사대와 반굴, 관창이 잠 든 이 곳은 신라에게는 정말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고 백제에게는 후백제와 아울러 한이 잠 든 곳이 아닐까 싶네요

자, 다음은?

"느그들이 이딴 식으로 나오면, 고구려보다 느그들을 먼저 칠끼다!"
"이제 고구려와 당나라는 대장군과 내가 맡을꾜! 아부지는 빠지소!"

신라편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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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초
11/02/12 23:15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제일 잘 만든 한국사극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탄현과 기벌포의 현재지명이 있던가요? 탄현은 너무 많고 기벌포는 아예 못찾은 걸로 아는데 말이죠

흥수가 말한 탄현드립은 41좌평의 개각을 비판한 거라고 봅니다. 어쨌든 지방의 관료 및 유지들과

잘 연계해서 싸워야 한다는 건데 의자왕의 눈에는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대신들이 너무

성가셨겠죠. 아마 그것은 자신이 왕자 때부터 선왕이 대신들의 갈등에 전전긍긍 하는 걸 보고

알렉산더의 매듭같은 행동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이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성 상실로 이어지겠죠.

개인적으로 성왕의 비전으로 인해 백제는 재도약이 가능했지만

국사상 전쟁터에 잡혀죽는 왕 2명 다 백제왕이고 그 중의 하나라니..

백제와 마한과의 떡밥도 매력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레지엔
11/02/12 23:20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봤습니다!
11/02/12 23:35
수정 아이콘
당군이 막느라고 신라에 5천만 보낼수밖에 없었겠죠
영화에서는 당군이 무혈입성 한것으로 나오는데 실상은 황산벌 못지 않게 싸웠죠

얼핏보면 백제는 삼국중 땅이 가장 작아서 사람도 없고 약할것 같지만
백제땅 대부분이 평야입니다. 그것도 기후도 좋고 땅도 좋은 지역이고요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 논산평야가있습니다.
삼한시대 부터 벽골제 의림지 같은 커다란 저수지가 있는것을 보아도 일찍이 농사를 활발이 졌음을 알수있고요
커다란 저수지를 질수 있을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땅이 좁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됩니다.

반면 신라는 재껴 두고 고구려만 보면 고구려는 대동강평야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하지역에도
남한만한 평야도 있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곡물생산력은 백제의 곡물생산력에 비해 크게 딸렸습니다.
그 이유는 대동강평야는 땅은 넓지만 비가 잘 안옵니다. 우리나라에서 손 꼽히는 소우지이죠.
그리고 요하지역은 그 당시에 평야자체가 늪지대 였고요 즉 농사는 커녕 사람조차 살수없는 지역입니다.

후삼국시대에도 삼국중에서 가장 작은 후백제는 지금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일부만 가졌지만 삼국중에 가장 국력이 강했던 것도
호남평야에서 나오는 생산력을 바탕으로하였기 때문이였습니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일부를 가진 후백제가 그러한데 전라도, 충청도 다가지고있는 후백제보다 2배나 넓은 지역을 가졌던 백제는 훨씬
사람도 많고 국력도 강했겠죠
도달자
11/02/12 23:49
수정 아이콘
황산벌이 사투리와 허무개그로 얼룩진 3류영화로 알고있었는데... 나름 쉽게 설명하려한 사극이였나보군요.

아무튼 정말 글재미있게잘봤습니다. 글쓴분을 검색해봅니다..
11/02/13 00:23
수정 아이콘
김부식은 당이 공격들어올 때 성충의 직언을 무시하고 의직을 따른 것이 직접적인 패인이다. 라고 본다고 하네요:)

뭐 어찌됐건 백제와 마한의 관계를 보면, 최초로 백제라는 국가가 성립된 것도 마한의 윤허에 의해서였고, 결국 세력이 역전당했으면서도 마한의 흡수가 늦어진 점은 백제에게 있어서 가장 아쉽지 않나 합니다.
4~5세기에도 마한이 존재하고 있었고, 늦게는 6세기에도 마한을 바탕으로 한 지방호족 세력이 강력한 권력을 쥐며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으니까요
나이트해머
11/02/13 00:32
수정 아이콘
당서에 따르면 백제의 상비군은 6만이며, 이는 현재 연구되고 있는 백제의 지방행정체계를 통해 추측된 규모와도 거의 일치합니다.(지방 광역통치지역 방위병력+사비성 기본 수비병력 총합이 4~5만여 정도인데, 여기에 별도로중앙 상비군으로 1만~2만 정도가 존재한다손 치면 정확히 일치하지요.)

그리고 당군이 13만이란 건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것이고, 당서 및 자치통감에 따르면 10여만 정도로 기술하고 있지요. 당군+신라군 = 13만인지, 당군 =13만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삼국사기의 신뢰도가 워낙에 왕이라서 보통 국내에선 당군이 13만이란 추정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다면 그 방향이 탄현이란건 어찌보면 상식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발견되고 있는 백제 성곽 갯수, 성벽 길이에서 탄현 일대는 대전 및 익산지역에 비해 절반 수준인데다 대전 일대는 그 동쪽이 백제령, 익산 일대는 동남쪽이 또한 백제령인 반면 탄현 동쪽은 신라령이거든요. 너무나도 뻔한 루트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막지 못한건 백제의 실책이며,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한 시점에서 백제의 멸망은 결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예식진 논란은 떡밥수준에 불과하죠. 이미 그 이전에 승패는 나다시피 했으니까요.
루크레티아
11/02/13 01:35
수정 아이콘
어떻게 본다면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은 가히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동맹관계였던 백제가 무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고구려가 손을 쓸 수 없게 만든 것이 당태종의 침략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죠. 격하게 털린 나라 추스리는 사이에 백제는 지나치게 신속하게 무너져 버렸고, 신라에 빈집털이를 가자니 나라꼴은 도저히 군대를 일으키기엔 힘든 상황이었고요. 기껏 손 잡아 놓았던 돌궐은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당나라에 탈탈 털리고, 일본은 아직 나라꼴도 제대로 갖춘 것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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