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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8/31 11:37:53
Name ManUmania
Subject [일반] 박찬호 이야기.
1994년의 일이다.



대한민국 출신의 한 투수가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 입단했다. 계약금 120만 달러. 15년 전임을 감안했을 때, 고작 풋내기 대학생에 불과했던 투수에게 엄청난 금액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이름은 박찬호. 120만 달러라는 계약금, 그리고 LA를 연고로 하고 있는 다저스라는 명문팀. 아마추어 시절 국내에서조차 임선동, 조성민에 밀려서 최고로 인정받지 못했던 선수가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이다. 15년 전의 일이다.



다저스가 어떤한 팀인지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나도 잘은 모르지만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보겠다. 원래 LA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연고지는 뉴욕이었다. 뉴욕을 연고지로 하던 시절 이 두 팀의 이름은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팀인 뉴욕 양키즈와 더불어 이 세 팀은 1950년대, 화려한 시절을 수놓으며 뉴욕의 트로이카로 불리웠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였던 재키 로빈슨도 브루클린 다저스를 통해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었다. 다저스와 자이언츠, 이 두 팀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부로 연고지를 옮겼다. 그리고 다저스는 그 이후에도 샌디 쿠팩스, 돈 드라이스데일 같은 전설적인 투수들의 등장으로 LA에서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8년에도 월드시리즈 역대 최고의 명장면 중의 하나인 커크 깁슨의 연장 대타 홈런에 힘입어서 우승을 차지한 팀이 다저스다. 이렇게 오랜 시절에 걸쳐서 꾸준히 명문팀의 입지를 다져온 팀이 바로 다저스였다. 또한 당시의 감독은 20년이 넘게 다저스를 이끌었던 토미 라소다. '내 몸엔 푸른 피가 흐른다'(다저스의 상징색이 푸른 색이다.)라고 했던 전설적인 명장이다. 이러한 다저스라는 명문팀이라는 배경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LA라는 연고지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데뷔에 사람들이 더욱 더 큰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시작부터 화려했다.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할 것이라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박찬호는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같은 시기에 입단했던 팀 동료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는 17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94년 시즌에 메이저리그에서 두 경기에 등판했다. 물론 그 결과는 참담했고 그는 바로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지만 역사적인 한국 선수의 첫 메이저리그 데뷔 무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조차 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박찬호가 바로 메이저무대를 밟을 수 있었던 것은 큰 무대의 경험을 시켜주려고 했던 다저스 구단측의 배려였다고 볼 수 있다. 1994년, 만 21세의 박찬호는 말 그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에 불과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직구 구속은 160km를 넘나들 정도로 위력적이었지만, 그 이외에는 타자를 상대할만한 변화구도 없었고 컨트롤도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마이너리그에서의 고된 수련은 그에겐 예상되었던 일이었다.



1994년, 1995년을 LA 다저스 산하의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박찬호는 1996년에 이르러서 꿈에 그리던 풀 타임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그리고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 필드에서, 박찬호는 대한민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역시 역사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메이저리그에 관련해서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박찬호는 선구자다. 첫 메이저 진출, 첫 메이저 등판, 첫 승리, 첫 선발 승리. 모든 영광의 바로 그의 것이었다. 1996년 불펜과 선발을 넘나들면서 수준급의 성적을 올린 박찬호는 1997년에 이르러서는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는 영광을 맛보게 된다. 당시 다저스에는 박찬호에 앞서서 동양 출신의 투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노모 히데오가 있었고, 두 선수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동료 선수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노모의 등번호는 16번이었고 박찬호의 등번호는 이를 뒤집은 61번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은 이야기인데 박찬호의 아마시절 등번호가 16번이었는데 다저스에서는 노모가 이미 그 번호를 달고 있어서 61번으로 번호를 옮겼다고 함.)



1997년은 박찬호에게 있어서는 성공가도의 시작을 알리는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 해 그는 14승을 거두며 LA다저스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또한 국내에서는 공중파 방송인 KBS에서 박찬호의 선발 경기를 고정적으로 중계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팬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더불어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성적을 기록했으니 그의 인기가 크게 올라간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박찬호에 관련한 책들도 많이 출간이 되었는데 그 중 두 권은 나도 아직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다.



1997년이 저물어 갈 무렵, 박찬호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던 일이 벌어졌다. 바로 IMF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런 급작스런 경제불황이 닥치게 되면서 국민들에게는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그러한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스포츠 스타는 바로 박찬호였다. 박찬호는 이러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97년의 대활약에 이어서 98년에도 박찬호는 에이스 투수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15승을 기록하면서 큰 활약을 보였다. 그 당시엔 박찬호의 등판경기 하나하나가 이슈였다. 지금 박지성의 선발출전에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그 당시에 지금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면 그를 향해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지금 박지성이 받고 있는 것 이상일 것이다. 그만큼 당시 그의 성적은 대단했다. 또한 1998년 있었던 아시안 게임에서 그는 주축선수로 활약하며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안겼다. 또한 이를 통해서 그는 군면제의 혜택을 받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꾸준한 활약을 위해서 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1999년의 약간의 부진을 지나고 찾아온 2000년은 박찬호이 커리어에서 정점을 찍었던 해라고 볼 수 있다. 메이저리그 선발로 18승을 기록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박찬호의 커리어 하이 기록이다. 이 시즌을 통해서 박찬호는 팀의 에이스 투수로 거듭났다. 비록 그의 첫 메이저리그 시즌이었던 1996년 이후로 다저스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정규시즌에서의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불과 풀타임 메이저리그가 된 지 5년도 지나지 않았던 그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그가 초창기에 쌓았던 기록은 정말 대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모 히데오 역시 박찬호와 비슷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노모가 이미 일본 프로야구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고 메이저무대에 등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박찬호의 활약은 엄청난 것이었다. 2000년의 성적만 놓고 본다면 그는 다저스가 속해있던 내셔널리그에서 탑5안에 드는 선수였다. 마치 지금 프리미어리그에서 램파드, 제라드, 토레스, 루니 정도 레벨에 속하는 선수였다고 봐도 될 것이다.



2001년에도 역시 박찬호는 15승을 기록하며 제 몫을 해 주었고 이 해 이후로 FA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박찬호는 6500만달러라는 거액에 그동안 정들었던 LA다저스를 떠나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추락의 시작이었다. 거듭되는 부상과 부진, 첫 시즌에는 그럴수도 있는 일이거니 생각했던 팬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나락을 향해 치닫는 그의 모습을 보며 비난을 시작했다. '먹튀'라는 말이 그를 위해서 태어난 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또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무리로 활약했던 김병현이 등장하고 그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반지를 끼게 되면서 박찬호에 대한 관심은 시나브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랬다. 박찬호가 조금씩 저물어가기 시작했던 2001년을 기점으로 해서 나의 관심은 야구에서 축구로 옮겨갔고 현재까지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는 축구가 차지하고 있다. 결국 레인저스를 떠난 박찬호는 이후 여러팀을 전전하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축구로 많이 옮겨가게 되면서 국민적 영웅의 자리도 더이상 박찬호의 것은 아니었다.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박지성은 박찬호가 가지고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했고, 박찬호를 언급하는 사람조차 야구팬 소수 이외에는 사라지게 될 정도였다.



이렇게 메이저리그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보게 되었던 박찬호였지만, 국가대표로서는 꾸준하게 참여를 해 주었다. 비록 98년도에 따낸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군 면제를 따내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박찬호는 올림픽, WBC같은 큰 대회가 열릴때마다 조국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국민 타자' 이승엽과 더불어서 언제나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중심선수였다. 그리고 비록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고,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메이저리그의 선수였다.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지난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 획득 이후, 국내에서 야구의 인기는 다시 한 번 끓어올랐다. 그리고 2009년 3월 있었던 WBC를 앞두고서 박찬호는 국가대표팀 차출 여부는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선수 차출 거부로 인해 출장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박찬호는 그 아쉬움을 WBC에서 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새로 옮긴 팀인 필라델피아에서 2009년 메이저리그 선수로 활약하는 것이었다. 주전자리가 확고하지 않았던 박찬호에게 시즌을 앞두고 팀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않고 WBC에 차출되는 것은 악재가 분명했다. 하지만 국가대표역시 그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WBC를 앞두고서 국내에서 더 이상 국가대표팀으로 뛸 수 없다는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는 눈물을 보인다. 서른일곱의 나이, 어쩌면 일찌감치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국가대표를 포기하면서 그는 눈물을 보인다. 누가 이런 박찬호를 비난할 수 있을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는 대표팀을 위해서 온몸을 바쳤다. 중요한 경기마다 등판했고 기대했던 만큼의 성적을 거두어줬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싶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대표팀이 그를 부를때마다 응해왔던 것이다. 비록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2009시즌초, 박찬호는 선발로 출장을 하게 되었지만 또다시 부진에 빠지게 된다.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출장을 감행했던 것이 실수였다. 이는 그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경쟁이 너무나 치열한 메이저리그에서 그를 기다려 줄만한 팀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3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를 감안한다면 그것은 더욱 암울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찬호는 그간 그가 그래왔던 것처럼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시즌 중반을 넘어서며 불펜으로 전향한 박찬호는 중간계투로 나서면서 전성기시절에 육박하는 구위를 다시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제 한물 간 선수, 은퇴를 앞둔 선수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가 다시 일어선 것이다. 1973년생, 우리나이로 서른일곱인 그이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나를 원하는 팀이 있다면 끝까지 뛰겠다"라고 말하는 박찬호, 종목을 초월한, 진정한 스포츠 선수다.



초반부에 말했었지만 박찬호는 진정한 의미의 선구자다. 모든 종목을 통틀어서 최고수준의 해외 무대로 진출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990년대 중반에, 그는 이미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리고 한국선수로서 메이저리그 첫 등판, 첫 승리, 첫 선발, 풀타임 메이저리거, 200탈삼진, 메이저리그100승 등 이후 어떤 선수가 그에게 근접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기록들을 남겼다. 과거 박찬호가 부진한 시기를 겪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기량이 하락했다며, 먹튀라며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2009년, 그는 여전히 메이저리그에 남아있고, 한국 야구계의 맏형님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다. 지금와서 그 누구가 박찬호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선수다. 다른 선수라면 충분히 은퇴를 생각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을 포기하지 않는 박찬호. 이제 다시 돌아봐 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9월11일에 MBC에서 박찬호 스페셜 한다길래 써봤어요~ 저도 야구에 관해서는 잘 몰라서(예전엔 좀 알았는데 ㅠㅠ)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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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Trafford
09/08/31 11:44
수정 아이콘
첫홈런 첫타점 첫안타 등 타자관련 부분도 박찬호 선수꺼죠
09/08/31 11:45
수정 아이콘
진짜.. 저 때.. 5일에 한번씩 찾아오는 박찬호 선수의 선발등판일... 제 어린시절 삶의 일부였다고 할정도로 푹빠졌었더랬죠..
영,질,피아자,캐로스,몬데시,세필드... 제마음속 no.1은 언제나 박사장님!!!
09/08/31 11:51
수정 아이콘
전설같은 레전드, 레전드같은 전설. 찬호팍~
슬러거
09/08/31 12:42
수정 아이콘
다저스시절에 등판수에 엄청난 확률로 퀄리티스타트를 매번 기록했음에도 타자들의 물방망이때문에 날린 승수들이 엄청났죠.
그래서 다저스시절 박찬호선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더 대단했다고들 얘기하죠.

저도 초등학생 시절이었지만 6이닝 3실점 이하 투구를 하고도 매번 1,2점 밖에 못내던 다저스 타자진들 때문에 땅을 쳤던게 한두번이 아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나네요.
공업셔틀
09/08/31 12:47
수정 아이콘
학교식당에서 의자위에 올라서서 티비중계를 보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하하하

입단동기인 대런 드라이포트나 박선수 이후 미국에 진출했던 한국유망주들이 어떻게 빅리그에서 사라졌는지 보면
박찬호 선수의 위대함이 잘 드러나는것 같습니다.
전 원래 박선수가 엄청난 구위에 비해 멘탈적인 측면이 약점이라고 생각해서
칠테면 치보라는 식으로 던지는 김병현선수를 더 좋아했습니다만..
지금와서 돌아보면 박찬호 선수의 최고의 무기는 오히려 멘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김형준 기자님이 블로그에 이렇게 써 놓으셨더군요.
박찬호 선수의 진정한 툴은 '의지력'이라고...
09/08/31 12:54
수정 아이콘
나이 37에 150km 육박하는 무브먼트가 살아있는 포심...불과 며칠 되지 않았지만 레알 소름이었습니다 그건...
친절한 메딕씨
09/08/31 12:56
수정 아이콘
박찬호 선발승 하는 날엔 스포츠신문 1~4면은 모두 박찬호 관련 소식으로 도배 되었습니다.

정말 최고였죠!

더이상 말이 필요없습니다.
저런 위대한 선수에게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축구에는 차붐, 야구엔 박찬호, 골프는 박세리
진정한 레젼드죠..

박찬호 선수는 그 성품과 성실함 그리고 국가대표로 안와도 욕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도
스스로 달려와서 태극마크를 달아주시는...
이승엽 선수와 함께 정말 후대에 길이 길이 남을 섬품과 그 실력을 겸비한 대한민국의 자랑이죠!

작년 말인가요? 올 초던가요..!!
국가대표를 그만두게 되면서 눈물을 흘리던 박찬호 선수의 인터뷰를 보고 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식적인 눈물이 아닌 정말 진심어린 눈물을 흘리시면서 국민들께 그리고 WBC에 나가지 못해
김인식 감독님과 후배들에게 미안하다고 이해해 달라고 하며 우시는데 흑...;;
아~! 그때 생각하니 잠시 눈시울이...;;;

암튼 꼭 노모 최다승 기록 넘어서시고..
한국에 오셔서 한시즌이라도 뛰어주셨으면 합니다.

박찬호 선수 사랑합니다.!
남자의로망은
09/08/31 13:00
수정 아이콘
저도 고등학교 여름방학때 박찬호선수 등판경기 챙겨보는게 제 방학의 퀘스트였습죠 하하;;

그때 참 다저스 타자를 많이 깠던거 같은데...

아직도 션그린의 홈런치고 어린이팬에게 장갑을 벗어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군요...

이번주에 mbc 에서 박찬호선수 관련 프로그램을 하는것 같던데.. 정확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생각이 잘;;

박사장님 화이팅입니다!!

돈많이 버셔서 야구장 하나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
Galatico_
09/08/31 13:06
수정 아이콘
문득 라울 몬데시가 생각나네요..
캐로스, 질, 헌들리, 그린 등등 아 다 까먹었네요 읔
다저스타자들의 저조한 득점력뿐만아니라
불펜투수들이 날려먹은것도 꽤 되는걸로 기억하는데
제프 '불'쇼 였던가요??...
너구리를 형으
09/08/31 13:22
수정 아이콘
남자의로망은토스님// 이번주가 아니고 9월11일에 방송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MBC에서 방송하니 MBC스페셜 다큐멘터리로 할듯 하네요~^^;
난다천사
09/08/31 13:36
수정 아이콘
지난주 MBC스페셜 "북에서 온 머구리" 보다가 끝나고 예고에 박사장님 나오는대 예고만으로 눈물이...

다음주 까지 언제 기다리나요;;;
FuroLeague
09/08/31 13:38
수정 아이콘
운동선수이전에 한 남자로써 존경합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마이너리그까지 떨어졌지만 시련과 부상을 딪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 - 운동선수는 재능만이 다가 아니다 - 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올해 꼭 우승반지 끼고 내년에는 동양인 최다승까지 깬 다음 한국야구로 돌아와서 후배들을 잘 지도해주길 바랍니다.
내일은
09/08/31 13:40
수정 아이콘
몬데시는 그의 뒤를 이은 게리 셰필드와 달리 눈에 띄는 커리어를 지닌 선수는 아니었지만,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가 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죠. 우리나라 언론이 붙여준 '찬호도우미'라는 이름을 가진 몇 안되는 선수 크크크. 대표적인 찬호도우미로는 몬데시 외에 시애틀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드리안 벨트레, 에릭 캐로스 등이 있죠. 반면에 션 그린은 4번타자치고는 임팩트가 없어 인기가 없었고(다저스타디움에서 그 정도했으면 엄청 잘한건데...) 셰필드 역시 스탯은 뛰어나나 영양가가 없다는 이유로 엄하게도 우리나라 언론에서 욕좀 먹었지만... 어쨌든 FC다저스에서는 타점 머신이었는데 말이죠...
마이크 피아자는 메이저리그 포수 포지션의 타자로써 압도적인 기록을 가진 선수였지만, 박찬호와 궁합이 잘 안맞는다는 이유로 엄청 까이는 선수였고, 반면에 채드 크루터는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로 저니맨이었지만... 아마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메이저리그 선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Ms. Anscombe
09/08/31 13:41
수정 아이콘
토드 워렐과 함께 불쇼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는 제프 쇼의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1라운드 1번으로 뽑혔고, 본격적인 마무리로 뛰기 시작한 마지막 6년간 연평균 39세이브를 올렸죠. 신시내티에서 뛰다가 98년 중반부터 다저스에서 뛰었는데, 98~01년까지 3년 반 동안 129세이브를 올렸고, 25블로운 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성공률은 83.7%로군요.

이 25회를 살펴보면
98년 4회(박찬호 1회)
99년 5회(박찬호 0회, 발데스 2회)
00년 7회(박찬호 0회, 케빈 브라운 2회)
01년 9회(박찬호 2회, 프로코펙 2회)

박찬호가 '등판'한 경기에서 BS를 기록한 것이 4번이고, 그 중 3번이 박찬호의 승을 날린 것입니다. 생각만큼 쇼의 불쇼가 크진 않지요? ^^ 다만 날려먹은 경기들의 내용이 꽤나 아깝긴 합니다.
CoralEyez
09/08/31 14:17
수정 아이콘
요새 만화 메이저를 다시 보면서 깁슨하고 느낌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다지 비슷할 것도 없는데...쿨럭..
헤나투
09/08/31 14:19
수정 아이콘
항상 각잡고 조마조마하게 1회를 지켜봤었죠 흐흐
1회만 무사히 마치면 그날은 호투!!
09/08/31 14:48
수정 아이콘
멋집니다 정말.ㅜㅜ 진짜 전성기때의 박찬호는 나오면 무조건 이긴다는 믿음을 줄 정도였죠
뇌공이
09/08/31 15:31
수정 아이콘
정말 학창시전 박찬호 선수 중계보러 쉬는 시간 식당까지 뛰어가서
10분 잠깐 보고 수업들어가고~
이따금 야구 좋아하시는 선생님들께서는 직접 수업시간에 보여주셔서
친구들과 손에 땀을 쥐며 봤던 기억이^^
정말 박찬호선수는 실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우리나라 스포츠계의 레전드입니다!!!
Northwind
09/08/31 15:43
수정 아이콘
정말, 고2,3때 수업도중에 라디오로 박찬호 선수 경기를 들으면서 일희일비했던게 엊그제 같습니다...
정말 LA다저스 시절의 박찬호 선수,
물론 텍사스 시절이후로는 먹튀니 박사장이니 이야기도 많았지만.
그 힘들다던 IMF시절 대한민국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투수라는 것 하나로도 존경할만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장료문원
09/08/31 16:07
수정 아이콘
제 성을 제외한 이름이 박찬호 선수와 같아서 그 때문에 초중고 시절 어딜가도 찬호박이라는 말을 들었었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박찬호 선수를 좋아했음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박찬호 선수가 부진하면서부터는 제 이름을 듣고 박찬호 선수를 언급하는 말이 없어지더군요.
예전엔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도 있지만 요새는 다시 찬호박이라는 별명이 듣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박찬호 선수! 아시아인 최다승과 최다 이닝을 넘어 200승 250승 계속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09/08/31 16:10
수정 아이콘
실력, 기록, 멘탈 등등 모든 부분에서 감히 레전드라 불리는 선수이고,

그에 걸맞은 수입이 있었기에 팬으로써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참, 글 잘 읽었습니다 ^.^
밉쌍덩어리
09/08/31 16:12
수정 아이콘
한동안 먹튀와 관련해서 논란이 벌어졌을 때 참 안타까웠는데
당시 텍사스에 그만한 돈을 받으면서 이적할만한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했을 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던 이유는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를 정복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저는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선발투수들과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선수였다고 기억합니다.
언제까지나 제 가슴 속에 남아있을 코리안 특급, 박찬호!!
허느님맙소사
09/08/31 16:39
수정 아이콘
뜬금없지만 갑자기 찬호박 아이스크림이 먹고싶어지네요.

그당시 CF도 많이 찍었었죠. 스포츠 음료 아이스크림 등등...
스타나라
09/08/31 16:41
수정 아이콘
글 잘봤습니다^^

박찬호선수 아마시절의 등번호가 16번이었던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61번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노모였다는 것은 이제서야 알았네요^^

여튼 이런 박찬호선수때문에 국내에서도 등번호를 바꾸는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히어로즈의 송지만선수 입니다.

그의 데뷔초 등번호는 61번이었으나, 박찬호선수가 유명해진 뒤로 등번호를 뒤집어서 16번으로 바꿔버리죠^^
09/08/3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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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Anscombe님// 그렇군요. 생각보다 많이 날려먹진 않았네요.. 전 박찬호 하면 항상 제프 쇼가 떠올랐어요.. "그치가 말아먹은 경기들이 얼만데!" 하구요 크
09/08/3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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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KBS에서 찬호형님의 경기를 중계할 때 박찬호 선수의 투구가 끝나고 나면 삼진잡는 장면을 복기하곤 했는데, 삼진잡는 결정구를 노란 원으로 부각시켜서 잡아주던게 생각나네요. 그거 보고 동생이랑 박찬호는 마구를 던진다, 절대 칠 수 없는 공이다 라며 농담을 주고받곤 했는데.... 크크.... 이글스의 영원한 에이스 민철형님도 은퇴하셨는데 아직도 당당히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마지막 92학번 박찬호 선수. 박찬호 선수는 끝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다 명예롭게 은퇴하길 바랍니다. 동양인 최다승 기록도 세워주시면 더없이 감사하구요^^
적울린 네마리
09/08/31 20:47
수정 아이콘
참고로 예전 어디선가 스크랩해놓은 LA시절 박찬호선수의 구속(시즌초와 시즌최고)입니다.

95시즌
1995. 10.2 99마일(159km/h) 메이저리그 첫 선발 등판

96시즌 (5승5패)
1996. 4. 7 95마일(154km/h) 메이저리그 첫 승
1996. 6.19 98마일(158km/h) 5승

97시즌(14승8패)
1997.4.30 98마일(158km/h)
1997.8.1 99마일(159km/h)

98시즌(15승9패)
1998.4.3 96마일(154km/h)
1998.8.23 98마일(158km/h)
(이시즌에 허리이상을 느꼈슴에도 투구수 100개이상 8,9회에 95마일 찍은 경기들이 나오죠)

99시즌(13승11패)
1999.4.7 96마일(154km/h)
1999.9.19 98마일(158km/h)

대망의 2000시즌 ( 18승10패)
2000.9.30 18승! (완봉) 97마일(155km/h), 파워커브(137,8km/h), 체인지업(135~142km/h)...(레전드경기)

2001 시즌 (15승11패)
2001.4.3 95마일(153km/h) 개막전 첫승
2001.4.30 97마일(156km/h) 3승.. 이후 허리부상

2008년 되돌아온 다져스~
2008.5.17 96마일(154km/h) 7년만에 다져스로 다시 선발
2008.08.22 97마일(156km/)

2009년 필리스의 박찬호..
2008.8.25 93마일~96마일(151~156km/h) 엄청난 무브먼트의 패스트볼작렬
2008.8.28 95마일 9홀드...(3승2패) 불펜방어율2.40
국제공무원
09/08/31 21:00
수정 아이콘
제 프로필에 존경하는 사람에 항상 올라가는 박찬호 선수..ㅠㅠ
정말 존경합니다.
사실좀괜찮은
09/08/3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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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쇼가 좀 억울한 게 없잖아 있긴 하죠... 그 2001년 8월 언제더라... 그때 엄청 잘 던진 경기 날려먹은 게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박찬호 선수 못한 날에는 오히려 잘해서 - _-;

옛적에 다저스의 제프쇼를 변호하는 기사를 봤던 것 같은데... 강요된 보직의 서러움이었나...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홍승식
09/08/31 23:52
수정 아이콘
아마시절 박찬호 선수의 등번호가 16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 야구했을때 박찬호 선수의 주 포지션은 3루수였습니다.
(중3때 투수를 시작했고, 아마때 혹사를 당하지 않아 싱싱한 어깨를 유지했다는 얘기도 있죠.)
많은 선수들이 포지션에 따라 등번호를 정하는데 3루수의 번호는 6이어서 16번을 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LA에 갔을때에도 16번을 요구했는데 당시 코치중 한사람이 16번을 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61로 바꿨죠.
그 이후 노모가 미국으로 넘어왔고 그때는 그 코치가 없어서 16번이 노모에게 갈 수 있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입단했을때 16번이 남아있었다면 많은 고등학생들의 등번호가 바뀌었겠죠. ^^
적울린 네마리
09/09/01 00:47
수정 아이콘
그러고 보니 박찬호동기 (73년생,92학번)들이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화려한 선수들이 아니었나 싶네요...
Big3라 불리던 신일고의 조성민, 휘문고의 임선동, 공주고의 박찬호(or 경기고의 손경수) 에다가
부산고의 염종석,경남상고의 차명주, 대전고의 정민철, 광주일고의 박재홍...
게다가 김종국, 손혁,최원호,등등....
연아동생
09/09/01 03:49
수정 아이콘
2000년 시즌 마지막 경기가 생각나네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1:0 완봉승으로 이겼는데.. 이 1점도 자신이 홈런쳐서 이긴 경기였죠..
정말.. 혼자 다한경기였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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