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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4 12:24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더 큰 무력을 가지고 있냐고 보면 답은 절대 아니다 입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도덕성을 높게 평가해서 더 도덕적인 기업 활동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것이 가능한 것이죠.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사회일수록 시간, 도덕성, 다양성과 같은 비실재하는 가치를 돈으로 사고파는것이 가능해지는데 한국은 아직 그정도는 아닌것 같습니다.
25/08/04 12:56
깡패에게도 도덕이 있다고 봅니다. 이 구역은 내 구역이고 따라서 여기서 돈을 벌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죠. 무력으로 공간을 독점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도덕을 강제하는 거죠.
어느 나라 대통령은 물물교환식 무역이 도덕이라 주장하죠. 상호관세를 동등하게 해야 한다는 도덕은 무시하고요. 주관적 도덕이 있다는 전제를 해야, 세계를 사실 그대로 이해하기 더 유리하다고 봅니다. 세계나 국가뿐만 아니라, 가족간에도 도덕이 달라서 다툼이 일어나곤 하죠.
25/08/04 12:58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내부식민지(노동자, 여성, 지방 등)나 외부식민지(후진국)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겠지요. 서울에 사는 내가 환경을 생각하며 타는 멋진 전기자동차에 들어갈 자원을 캐기 위해 아프리카에서는 저임금의 아동노동이 행해지고 이 차를 충전하기 위한 전기는 지방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들어진 발전소에서 오는 거고... 그런 착취를 유지하기 위해 말씀하신대로 무력, 도덕(이데올로기?) 등이 동원되는 것이겠고, 유물론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무력도 도덕도 결국은 생산관계, 경제적 이해관계 등의 물질적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거고... 2차대전 후로는 표면적으로나마 무력보다는 규칙을 기반으로 살자고 UN이니 GATT니 WTO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왔었는데 트럼프 이후로는 다시 무력이 전면으로 등장하게 될지.
25/08/04 13:38
착취는 검사의 언어라 봅니다. 세상에는 검사나 변호사처럼 적극적인 실천의지를 높이는 사람들이 필요한가 하면, 또한 판사나 배심원처럼 관조적인 사람들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관조적이라면 도덕언어는 가급적 뒤로 미루는게 필요하다 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처럼요. 검사가 무죄추정을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죠. 소를 제기하고 법정에 세워야 하는 실천적 과제가 있으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사실판단을 많이 하고 난 후에 가치판단에 들어가고요. 법원을 놓고 보면 검사는 가치판단을 빠르게 해야 하더라도, 판사는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사실심리에 먼저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요. 착취에 사실성분을 추출하면 매우 적은 몫만 주고 있는 걸 가리킬 것입니다. 여기에 만약 인권이나 건강이 훼손되면 착취라 부를 가능성이 커지겠죠. 각자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힘을 뭉쳐야 하고, 이를 위한 수단들이 강화되며, 그 수단 중에 혐오와 증오 그리고 도덕이 있는 거라 봅니다. 도덕감정은 아마 편도체와 뇌섬엽을 자극할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힘센 침팬지라도 여러 침팬지가 용기를 키우고 덤비면 무너질 것입니다. 집단 규모를 키우고 용기를 키우는 방법은 혐오와 증오 표현을 통해 감정을 증폭하고 서로를 보며 자신감을 키우는 것이겠죠.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만 이를 비폭력적으로 이뤄지게 만드는 방법이 민주주의와 선거인 거라 이해합니다. 결국 숫자로 이길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프리카인이 미국이나 유럽의 선거에 투표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따라서 국제협력을 강화하게 되는 것이며, 그에 대한 반동도 생기는 거라 이해합니다. 그 반동도 힘을 키우기 위해 자기들 나름의 도덕이 있을 수 있겠고요.
25/08/05 09:35
(수정됨) 마르크스의 말대로라면,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이고 노동자는 그 생산수단을 이용해서 생산을 하는 사람이죠. 자본가는 자본에 대한 수익을 받는 사람이고, 노동자는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는 사람입니다. 둘을 같게 하려는 여러가지 시도도 있지만, 지적노동이나 지적자본으로 분류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네요
독점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는 원론적으로는 가격탄력성과 수요와 공급입니다.
25/08/05 11:44
마르크스는 윤리학자일 뿐 경제학자가 아니라고 봅니다. 경제학은 과학과 유사하고, 윤리학은 종교와 유사하다 보고요. 경제학은 경제현상을 예측하는데 쓸모가 있어야 하는데, 마르크스 이론을 예측에 쓰지는 않는 걸로 압니다. 윤리학은 정치를 하는데 쓸모가 있어야 하는데, 쓸모가 있죠. 마르크스는 경제윤리학자라 봅니다. 경제는 이래야 한다 — 라고 당위를 역설한 것이고, 그 당위에 맞춰 역사를 해석하고 사실에 대한 프레임을 설정한 것이라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경제에 대한 윤리학자거나, 경제에 대한 정치학자입니다.
마르크스를 떠나, 자본과 노동을 보자면, 저는 그 프레임이 강력히 작동하는 3가지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입니다. 공리가 노동가치설이니, 그에따라 프레임이 노동과 나머지로 나뉘는게 자연스러운 것이겠죠. 나머지를 자본이라 부르죠. 둘째로 국가 관료의 효용입니다. 자본과 노동으로 나눠야, 돈과 사람을 관리하기 좋겠지요. 셋째로 인간의 인식입니다. 인간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프레임은 사물과 행동입니다. 둘다 눈에 잘 보이죠. 감각적입니다. 이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확장되면서 자본 개념이 되고, 행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확장되면서 그걸 일으킨 생각 ・ 지식 ・ 경험 ・ 기술로 이어져 비육체노동을 설명하며, 나아가 관념적으로 특허 등 지적자본으로까지 이어지는 거라 봅니다. 그에따라 지적노동과 지적자본, 물적노동과 물적자본으로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추상적 확장을 더욱 한다면, 자본과 노동의 경계가 흐릿해질 것입니다. 마치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것처럼요. '돈이 일을 한다'라는 생각도 가능할 것입니다. '기계가 일을 한다'는 생각도 가능할 것입니다. '생각을 소유한다'라는 생각도 가능할 것입니다. '아이디어가 자본이다'라는 생각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직관적인 혹은 철학적인 생각을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투자자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합니다. 그걸 기반으로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수집과 분석을 위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투자회사에서 일어나는 노동은 실은 투자자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을 위임한 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노동자가 아닌지 문제됩니다. 그들이 노동자라면, 개인 투자자도 노동자입니다. 정부 관료의 편익에 따라 개인 투자자를 노동자로 분류하지 않는 것일 뿐, 실질을 놓고 보면, 투자자도 노동자입니다. 투자회사의 직원들은 지적노동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적자본은 저로서는 당연한 얘기라 봅니다. 특허를 지적자본으로 분류하는게 상식적인 거라 봅니다. 노하우도 지적자본일 것입니다. 기술도 지적자본일 것입니다. 노동자는 신경세포는 근육과 구별해야 하며, 노동자는 자신의 뇌와 손에 지적자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적자본에 따라서 임금이 달라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이는 자본이 아니라 생각되지만, 실질을 놓고 보면 자본이라 봅니다. 다만 정부가 그걸 자본으로 분류할 실익이 있는지는 의문이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자영업자도 노동자이고, 조선업 기술자도 자본가인 거라 봅니다. 많은 수의 자영업자는 일반 임금노동자보다 더 많이 노동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장사가 안 되고 소득이 적으니, 노동시간을 늘려서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합니다. 조선업 기술자도 수년 혹은 그 이상 축적해온 자본을 가지고 있어 가치창출을 합니다. 다만 그 자본이 양도나 임대가 되지 않고 자신의 노동과 함께 발현되는 것이란 점에서 특이성이 있는 것뿐이라 봅니다.
25/08/05 12:06
(수정됨) 자본이란 노동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는 동의합니다. 실제로 동일 노동을 하는데 왜 생산성이 차이가 나느냐에 대한 대답으로는 자본축적의 차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죠. 그게 직접자본이든 사회적자본이든 인적자본이든간에요. 하지만 자본에 의한 소득과 노동의 의한 임금은 분명 다르기 때문에, 이걸 넘어서는 자본과 노동의 통합은 좀 말이 안되지 않나 싶습니다.
자본소득은 이익에서 자신이 투입한 자본만큼을 가져간다면, 임금은 계약한 금액만큼을 가져가니까요
25/08/05 12:59
(수정됨) 네. 두 관점 모두 필요하다고 봅니다. 주류적 관점으로서 자본과 노동을 나눠 보는 것, 그리고 극소수 비주류 관점으로서 그 경계에 서보는 것, 둘다 유용하다 생각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 문제가 있는데 노동가치설로는 이 문제를 풀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때 대안적 관점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국민은 자본가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복지는 자본소득이라 봐야 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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