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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12/31 22:52:28
Name 공룡
Subject [단편] 배신
배신


  잰걸음으로 막 현관을 나서려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토미! 시리얼이라도 좀 먹고 가지 그러니?”
  “바빠요! 오늘 저녁에 텍사스에서 대회 있는 거 엄마도 아시잖아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 차고 문을 열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비행기로 가면 금방인데, 무슨 걱정이니? 그러지 말고 우유라도 한 잔 하고 가렴!”
  “먼저 가서 연습을 해야죠! 어제 새벽까지 연습하느라 입맛도 없어요!”

  토미는 현관 앞까지 나와서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그의 붉은 색 페라리에 올랐다. 하지만 바로 공항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전에 들릴 곳이 있는 것이다. 열 블럭 정도를 지났을 때, 토미는 능숙한 솜씨로 좌회전을 한 뒤 그의 여자친구가 있는 바 근처에 차를 세웠다. 미끈하게 빠진 페라리의 모습에 휘파람을 부는 몇몇 아이들이 보인다.

  “와! 블레이드 토미다!”

  아이들 중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 외쳤지만, 토미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노란 색 선글라스를 낀 뒤 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 어서와, 토미!”

  늘씬한 금발의 여자가 그를 반긴다. 나이는 스무 살 중반 정도 되었을까? 하지만 여자가 반기는 토미는 이제 겨우 열아홉이다.

  “늘 마시던 걸로! 오늘은 조금 가볍게 해서!”
  “오늘 시합 있지 않아?”

  시원스러운 파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여자가 묻는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도수 낮춰달라고 한거잖아. 그리고 시합은 저녁이야. 가는 동안 다 깨고도 남지. 게다가 오늘 붙을 녀석쯤이야 술로 목욕을 해도 이길 녀석인 거 잘 알잖아. 너까지 우리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면 여기 다시 안 온다!”

  말하면서도 토미는 늘씬하게 빠진 여자의 다리를 곁눈질로 바라본다. 여자는 칵테일을 만들어 레몬을 하나 끼운 뒤 살짝 입술로 잔에 자국을 남기고 토미에서 주었다. 토미는 미소를 지으며 여자가 방금 립스틱 자국을 남긴 곳으로 입을 가져갔다. 어느 사이에 여자는 토미의 옆에 앉아 있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토미의 손이 여자의 허리를 감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난 자기가 텍사스 촌놈에게 지는 모습을 본다면 잠도 못잘 거라구!”

  얼굴을 쓰다듬던 여자의 손이 가슴께로 흐르자 토미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정말 예쁜 여자다. 더구나 백인이었다. 최신형 페라리와 넓은 정원이 딸린 주택을 소유로 하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토미와 같은 유색인종, 그것도 혼혈아에게 꼬리를 칠 여자가 아니다. 어차피 눈 앞의 여자에게 있어 토미는 그저 돈 많은 남자친구일 뿐이었다. 여자의 왼쪽 손가락을 장식하고 있는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룻밤 대가로 지불할 정도의….

  “또 여기에 있었군. 오후에 날씨가 좋지 않아서 일찍 출발해야 하네. 안녕 로라, 여전히 예쁘군!”

  매니저였다. 스케줄을 관리해주고, 상대 선수의 기록과 습성까지 면밀히 조사해주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귀찮을 때도 있었다. 쓸데없는 쇼에 내보내기도 하고, 이렇게 여자친구와 잠깐의 데이트도 방해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장년층 이상이나 즐겨보는 투나잇 쇼에 초대되었을 때가 가장 당황스러웠다. 미국의 장년층들은 아직도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무지하다. 명색이 미국에서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프로게이머를 모셔놓고, 물어보는 말이 KPGA가 KOREA의 PGA 골프대회인거냐는 둥, 그렇게 오래 컴퓨터를 하는 모습을 청소년들이 보면 악영향이 되지 않겠냐는 둥, 해외 국적을 가진 입장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둥, 정말 최악이었다. “제이레노 당신도 늙으니 별 수 없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던 토미였다.

  “알았어요. 지미! 이것만 마시고 갈게요.”
  “키!”

  매니저에게 자신의 차 키를 넘겨주고 나서 토미는 여자친구에게 한숨을 쉬어 보였다. 여자는 토미가 들고 있던 잔에 끼워진 레몬을 뽑아 반쯤 물고는 그대로 토미의 입에 키스를 했다.

  “선물이야. 이기고 돌아와서 오늘 밤새워 마시자구!”

  아직 정오도 되기 전이라 손님도 없는 텅 빈 바였지만, 토미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가끔 이 여자가 너무 적극적이라 부담이 되는 적이 있다. 하지만 어차피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결혼을 하자마자 곧바로 이혼을 하며 엄청난 위자료를 청구하겠지. 그의 아버지는 그러한 사례에 대해 항상 주의를 주곤 했다.

  “그래, 그럼 오늘 밤에 보자!”

  자리를 털고 일어선 토미는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매니저의 옆자리에 올랐다.

  “오늘도 자신 있지?”
  “그런 HASU 녀석이 프로게이머라면 난 ‘Boxer’라구요!”

  토미의 말에 매니저는 싱긋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하늘은 아직 맑았다.



  토미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경기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는 상당히 고전하는 중이었다. 우습게 봤던 녀석이었는데 몰래 건물을 통해 기습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녀석은 테란이었다. 3.56 패치로 인해 테란이 상당히 강해진 것이 중론이었고, 토미 역시 충분히 체감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국 전체랭킹 3위의 자신이 랭킹 50위권의 아마추어 같은 녀석에게 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상대하는 ‘라코빈’이라는 이 선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미국 게이머들은 마이크로 컨트롤이 엉망이다. 하지만 토미는 달랐다. 그의 피에는 흑인의 피 외에 아시아인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다. 학교 다니던 시절, 같은 반에 있던 한국인 아이보다 더 젓가락질을 능숙하게 했던 그였다. 점차 그런 토미의 장점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중앙 힘싸움을 벌이면서도 어느 사이에 ‘블래키’를 적진에 드랍한 것이다. 이번 패치로 새롭게 추가된 중립영웅인 블래키는 일반 영웅유닛에 비해 체력은 약하지만 순간 공격력이 대단했다. 패트리어트 업그레이드가 된 테란의 서플라이들이 일제히 일점사를 했지만 블래키의 실드를 뚫기 전에 소환된 핵에 의해 박살이 났고, 토미는 그 짧은 순간에 블래키를 다시 자신의 본진에 리콜 시킬 수 있었다. 전세는 단번에 역전이 되었다. 서플라이가 순식간에 날아가 인구수가 막혀서 유닛을 뽑을 수 없는 상대에 비해 토미는 지금까지 모았던 병력을 한꺼번에 중앙으로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와우! 대단합니다! 야생마 ‘블레이드’가 또 한번 역전승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라코빈 선수, 완전히 얼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이에요!”
  “그럴 만도 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저 블래키라는 영웅유닛은 이번 패치로 새로 생긴 공격형 중립영웅입니다. 공식 대회에서 처음 나오는데 아주 화려하게 데뷔를 했군요. 패트리어트 업그레이드를 한 서플라이의 공격을 무시하고 핵을 소환하는 모습은 정말 놀랍습니다. 누가 블래키가 약한 유닛이라고 했습니까? 실드 업이 된 블래키는 이렇게나 강합니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토미는 상대의 하나 남은 영웅 기계유닛 ‘매트랩’을 차분하게 잡았고, 마지막으로 ‘에시드 스톰’과 ‘사이오닉 스톰’의 더블 스톰을 상대 멀티에 작렬시키며 화려하게 GG를 받아냈다. 이제 결승 진출이었다.


  그러나 통쾌한 역전승으로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던 그 날은 토미에게 승리의 기쁨보다는 실망과 걱정만 주는 날로 기억되게 되었다. 슬슬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도 각광을 받기 시작한 스타크래프트3 ‘제국의 종말’은 확장팩이 나온 시점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최근 러시아와의 분쟁에 따른 어수선한 정국으로 인해 많이 기사화 되거나 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토미가 경기를 치르던 시각 미국 전역에 데프콘2가 발령이 되었다. 러시아와의 신경전은 결국 작은 전쟁을 유발했고, 현재는 휴전 중이지만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몰랐다. 덕분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스타크래프트 대회의 결승에 오른 토미였지만 그 날 석간 1면을 장식한 것은 러시아의 공격위성이라 추측되는 ‘HandTremor'의 위치변경과 관련된 것뿐이었고, 토미의 기사는 스포츠란에서도 두 번째 단락에 겨우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한 경기결과 뿐이었다. 토미는 이미 확보된 30만 달러의 상금에 대한 기쁨을 뒤로 하고 여자친구와의 약속도 거른 채 자신의 방에 처박혀야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전쟁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것은 토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러시아에서 핵무기가 날아올지 모르는 것이다.

  “한국에 가버릴까….”

  위스키 한 병을 손에 들고 방 침대에 누워있던 토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토미의 생각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토미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아버지의 고향인 중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 한국에서의 활동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다. 한국이 북한과 통일을 하고 난 뒤, 중국이 간도 주변의 지역을 한국에 반환함으로써 양국의 수교가 매우 매끄러워졌던 것이다. 현재 한국은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일본을 추월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더구나 중립국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의 위험도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여전히 독도 분쟁이 남아있긴 하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일본에서 말을 조심하는 실정이었다.

  이미 토미의 아버지는 한국의 수도권 근처에 집까지 한 채 사놓았다. 물론 이로 인해 미국의 꽤 유명한 언론사에 실린 ‘남의 나라에서 돈을 벌어 빼돌리는 파렴치한 유명인’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어쨌건 이런저런 이유로 시기가 좋지 않았다. 소속사와의 계약도 거의 끝이 났고, 이번 결승을 끝으로 스토브리그 기간이기 때문에 기자들을 따돌리고 슬쩍 한국으로 자연스럽게 갈 수도 있었지만 최근 벌어진 일부 게이머들의 징병거부 파동으로 인해 여론이 이상하게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토미의 소속사 ‘캐시’는 아시아 지역의 실력 있는, 하지만 현지에서는 메이저는커녕 마이너도 힘든 프로게이머들을 뽑아서 비교적 스타크래프트가 덜 발달한 미국에 상품으로 내놓는 일을 하고 있었다. 토미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고, 외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시에 징발될 염려도 없어 매우 유리했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그들의 실력에 열광했고, 그와 관련된 각종 사업을 펼치면서 ‘캐시’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거듭났다. 이제 선수마다 매니저와 보디가드 등이 붙었고, 특성 있는 플레이를 통해 캐릭터성을 높이는 것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캐시’의 거대한 빌딩 속에서는 최신 컴퓨터에 머리를 처박고 제 2의 토미가 되려는 청소년들이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고,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캐시’에 대해 미국의 언론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선진 기술을 습득한다며 수시로 한국까지 가서 쓰는 돈도 엄청나고, 소속된 게이머들이 대부분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미국의 돈을 유출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국 안에서 돈을 벌어들이고도 미국이 어려움에 처하자 모두 징병을 거부하고 영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국외로 달아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던 중 ‘캐시’의 공동 CEO 중 한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자, 회사도 긴장을 하는 눈치였다. 살해자는 정신병 증상을 가진 백인이었는데, 그는 살인을 한 장소에 그대로 남아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Monkey Go Home!” 이라고 쓰고 있었다. ‘Monkey’ 는 공화당 출신의 미국 43,44대 대통령 부시를 제외하고는 최근 미국 내에서 부상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을 비하하거나 욕할 때 쓰는 좋지 않은 말이었지만 요즘은 어린 학생들도 곧잘 쓰곤 한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시이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에서도 미국은 국가적 어려움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잘 뭉치는 애국심을 보여준 바 있다. 비록 그것이 비뚤어지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캐시’에 속해 있던 게이머들 중 많은 수가 이미 미국을 떠나 한국이나 중국으로 무대를 옮겼고, 그 중에서는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간 이들도 있었다. 특히 몇몇 이들은 미국 국적을 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국가가 부른다면 성조기를 가슴에 달고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공헌을 한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욕을 먹고 있으며, 그들의 집은 테러를 당하고 있다. 그런 속에서 프로게이머 중에서는 꽤 유명한 편인 토미마저 가게 되면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더구나 중국이나 한국에 가면 자신의 실력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 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토미는 아직도 작년 겨울 전 세계를 돌며 자선기금을 모으던 한국 소속 시니어 프로게이머들을 잊지 못한다. 이미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들이었지만, 미국의 랭킹 5위 안에 든 게이머들을 아주 간단히 잡아냈고 그 중에는 토미도 있었다. 토미와 싸운 이는 ‘July‘ 라는 아이디로 유명했던 저그 게이머였는데, 시종일관 단축키 한 번 쓰지 않고 마우스 드래그만으로 토미를 무찔러 한 동안 그 충격으로 마우스를 잡지 못하게 했다. 지금 한국에는 그런 그들을 은퇴시킨 엄청난 고수들이 잔뜩 있는 것이다. 가장 권위가 있는 한국의 Kespa 랭킹차트 100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전 세계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의 가장 큰 꿈이었다. 하지만 랭커의 90퍼센트 이상이 한국인의 차지였고, 2부리그격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무대에 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것이 토미가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중국이나 한국에 가도 자신이 먹고 살 일이 막막한 것이다. 자신의 실력이 미국에서는 충분히 통하지만 아시아 쪽으로 가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유럽 쪽이야 레이싱이나, FPS 부분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지만 미국은 내세울 것도 없었다. 실제로 3년마다 열리는 ‘월드사이버올림픽’에서 미국은 100여 참가국 중에서 겨우 45위를 차지했다. 특히 스타크래프트3 부분은 예선탈락의 수모도 겪었다. 아마 워크래프트5 개인부분과 디아블로4 5대5 배틀 부분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70위권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지금까지 토미가 했던 게임은 스타크래프트2와 스타크래프트3, 워크래프트4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모두 본토인 한국에 가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실력수준이다. 한때 미국의 언론들은 블리자드를 인수한 한국의 기업이 자기 나라에 유리하도록 게임들을 제작함으로써 다른 나라의 게이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자국의 게이머들을 두둔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궁색한 변명일 뿐이었다. 단지 명백한 실력의 차이였던 것이다. 그나마 토미에게 위안이라면 비교적 낭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미국에서 번 돈이 제법 되어서 꼭 게이머를 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이나 중국의 물가가 미국보다 비싸기는 하지만 생활을 할 정도의 돈은 충분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토미의 결정 뿐이었다.

  며칠 뒤, 토미의 아버지 ‘왕오너’는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토미가 미국의 영주권을 포기하고 최고의 게이머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간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게이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토미는 한국으로 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국적이 다르기에 미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의무적으로 군대에 들어갈 일은 없겠지만 데프곤이 발령된 이 위급한 상황에서 계속 게이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 전쟁 상황에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를 위해 게임이나 기타 스포츠에 정신을 쏟을 이들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게임을 하지 않게 되면 게임 감각도 떨어져서 다시 복귀가 힘들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른 몇몇 게이머들처럼 미국을 떠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더구나 원래부터 중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자주 말해온 토미로서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비난을 받을 여지도 적었다. 토미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란다는 형식적인 말을 끝으로 회견장을 나갔고, 따라오는 기자들을 따돌리며 리무진에 올라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행선지는 한국이었다..



석 달 후

  토미는 정오에야 일어나 엄마가 놓아둔 시리얼을 우유에 타서 먹은 뒤, 컴퓨터에 다시 앉았다. 다크서클이 생긴 그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B’ 예선이 코앞인 상황이기에 새벽의 경기들을 리플레이로 꼼꼼하게 분석을 해야 했다. 대부분이 진 게임이었다. 그것도 한국의 프로게이머들이 아닌 일반 아마추어들에게….
  토미는 악몽과도 같던 지난 몇 달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기세 좋게 내민 ‘마이너리그A’ 예선 첫 경기에서,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건너온 다른 게이머들과 마찬가지로 원사이드하게 상대에게 져버린 토미는 차마 가장 수준이 낮아서 아마추어리그라고 불리우는 ‘마이너리그C'에 참가할 수 없어 ’마이너리그B‘에 도전하기로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음을 느꼈다. 마이너리그C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서 8강 이상 들면 마이너리그B 본선에 바로 갈 수 있고, 또 마이너리그B 본선 8강 이상 들어야 마이너리그A 본선에 직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메이저다. 험난하고도 험난한 길이었고, 토미는 이번 예선도 통과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나마 미국 프로게이머 자격증이 있기에 AB 리그의 예선전을 치를 자격이 생긴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C리그 예선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C리그 예선부터 치러야 하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미국 프로게이머 협회에서 곧 토미를 제명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국의 리그에 6개월 이상 참가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자격이 정지된다. 그리고 지금의 토미는 자국의 리그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멍한 표정으로 리플레이 파일을 보고 있자니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말도 꺼내기 전이었지만 이미 토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실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토미야, 중국 진출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말꼬리를 흐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토미는 그대로 마우스를 벽에 집어던졌다.

  “싫다고 했잖아요! 그깟 한국 마이너리그C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중국리그에 가서 뭐해요? 아버지 고국인건 알겠는데, 난 죽어도 그런 냄새나는 곳에 갈 생각 없어요!”
  “지금 네가 그런 것을 따질 처지냐? 그래도 미국에서 중계권을 딴 중국 쪽 리그에 나가면 다시 미국으로 진출할 방법도 모색이 될 것 아니냐!”
  “이미 미국 쪽은 끝났어요! 포기하시라구요!”

  결국 아버지도 화를 냈고, 둘은 상당한 언쟁을 벌이다 각자 집을 나감으로써 싸움을 끝냈다. 잠시 후 돌아온 토미는 부서진 마우스를 치우고 새 마우스 포장을 뜯으며 컴퓨터를 켰다. 지금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접속하여 미국 소식을 읽어보는 토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몇 달 전에 자신이 우승을 했던 대회에서 4강에 머물렀던 ‘존 라코빈’이 가장 큰 스타대회인 라스베가스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캐시’에서 새롭게 영입한 게이머가 바로 라코빈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캐시’ 빌딩의 정면에 새겨져 있던 토미를 비롯한 몇몇 게이머들의 사진과 사인은 지워지고 없다.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은 결국 일어났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겨우 한 달 만에 휴전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섣불리 국적을 버리고 이민을 갔던 많은 미국인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길 청했지만 미국은 이미 리스트에 오른 그들에 대해 그 어떤 경유로도 입국 자체를 금지시켰다. 일반인도 그러할 진데, 유명인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었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다 전쟁터에 끌려가기 싫어 조국을 져버린 가수, 게이머, 기타 연예인들은 언론에서 언급되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한 달 쯤 전에 한국에서의 활약을 준비 중인 토미를 비롯한 과거 ‘캐시’ 소속의 게이머에 대한 내용이 미국의 한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는데, 곧바로 시민들의 엄청난 항의와 데모에 의해 기사는 정정되었고, 한 달이 지난 지금 그 신문사는 부도처리가 되었다. 구독자들의 불매운동을 통해 신문사가 망한 것이다. 전쟁을 겪은 미국인들의 응집력은 대단했고, 조국을 등진 이들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냉담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로써 토미가 다시 미국에서 활동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진 셈이었다. 반면 라코빈 등, 스스로 군에 지원했던 몇몇 유명인들은 겨우 1개월 가까운 군생활, 그것도 훈련병 생활만을 겪고 나서 소집해제가 되었고 곧바로 영웅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제 곧 가장 인기 있는 게임리그의 우승자 라코빈의 일거수일투족이 미국 게임관련 신문에 매일처럼 도배가 될 것이다. 예전 토미 등 인기 게이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사소한 내용도 기사화가 되고, 사람들은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가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최근 사귀고 있는, 바를 운영하는 금발의 예쁜 여자친구에 이르기까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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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접꽁트 하나 올립니다.
  두 달쯤 전 뜬금없이 생각나는 단어들을 조합하며 만들어봤었던 이야기입니다. 스타크래프트, 미래의 게이머, 한국의 위상, SM, 사이더스등 아이돌 스타를 양산하는 거대엔터인먼트 회사, 국적포기, 병역비리, 블리자드 인수, 애국심, 간도, 독도, 그리고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이요. 잠이 오지 않으니 참 별게 다 생각이 나더군요. 위의 이야기처럼 언젠가는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고 미국이나 일본 등이 우리 눈치를 보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아, 약간은 패러디가 되었지만 내용에서 보시다시피 몇몇 병역비리 관련 연예인들을 비꼬려고 만든 이야기는 아닙니다. 게임강국이 되어있는 미래의 한국을 꿈꾸고, 애국심의 측면에서는 미국에도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에서 썼지요. 여러 민족, 여러 인종이 모여 만든 합중국이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무관심으로 대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무관심이 최고죠. 무플이 악플이라는 말도 있듯이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열심히 욕하기도 하지만요. ^^

  벌써 2005년이 눈앞이로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 글의 무단 퍼감을 금합니다.


ps : 피지알 아이디를 도용한 아트 블래키님, 매트랩님, 수전증님께 감사드립니다.(물론 무단도용입니다.) 그리고 아트 블래키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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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h열혈팬
04/12/31 23:54
수정 아이콘
와 정말 멋진 단편소설입니다^^

끝이 약간 아쉬운 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덮고 남을만한 어휘구사능력은.. 지금 아래 작업표시줄에 떠있는 제 소설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는군요.

공룡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Forgotten_
05/01/01 00:42
수정 아이콘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트 블래키
05/01/01 00:59
수정 아이콘
솔로부대를 홀로 탈출한 것 같아 무척이나 죄송스러웠는데....
감사합니다. 잘 살게요.(__*)
공룡님도 행복한 새해 맞으시길 바람니다.
브라운신부
05/01/01 05:19
수정 아이콘
정신이 몽롱한 관계로 압박이 오는군요 --;;
블래키님 결혼 축하드림니다.
그리고 pgr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아케미
05/01/01 20:18
수정 아이콘
한국이 통일해서 다른 나라들도 설설 기는 강대국 되면 좋겠는데, 그런데… 이 단편이 왜 이리도 슬프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지금의 게임 계를 너무 좋아해서일까요? ^^ 잘 읽었습니다.
최유형
05/02/1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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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글을 쓰시는지. 늦은 리플이지만 추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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