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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3/19 20:58:01
Name 리듬파워근성
Subject [디아3] 결국, 또다시 성역의 문턱을 넘으며


우리 팀은 승리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또 안좋은 소리를 들었다.
그 말을 그런 식으로 쓰면 안돼! 라고 채팅을 하고 싶지만 난 채팅을 할 수 없다. 바쁜 사이에 틈을 내서 차단을 했을 뿐이다.
어차피 내가 채팅으로 말린다 해도 곧이어 더 심한 말이 돌아올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채팅을 하면, 세 명의 바이킹은 누가 조종한단 말인가.


한 명... 이어서 한 명이 더... 나를 욕하는 무리에 동참한다.
니들이 죽은 게 왜 내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미안하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화면 상단을 보라!
이기고 있다. 그것도 2레벨 차이로...


그러나 비난은 그치질 않는다. 한 명이 더 이 흐름에 동참한다.
나는 우리팀 3명에게 비난받고 있지만 그래도 기쁘다. 왜냐하면 상대팀 5명 모두에게 비난받고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죽지 않았고 상대팀의 모든 전장 요소를 장악했다. 그들은 영원히 나를 잡을 수 없다.

더이상 볼 것도 없는 승부, 이미 이긴 게임이다.

이 승리의 영광을 나를 비난하지 않은 유일한 우리 팀,
동방의 신사 국가에서 오신 한자 아이디를 쓰시는 고명한 높은 분께 돌린다.

승리라는 글자가 화면위에 떠있지만 나는 크게 기쁘지 않다.
나는 안좋은 소리를 들었고 재빨리 차단했지만 한번 들은 욕설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 팀은 승리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길잃은 바이킹 마스터다.
이전에는 해병머키 마스터였고 그 이전에는 잠옷투르 마스터였다.


나는 대전신청 버튼을 누르길 포기했다.
어차피 또 같은 일이 일어날 뿐이다. 승리보다 매너를 소망하는 게임이라니.... 나는 지쳤다.
그리고 이겼을 때 그만두는 것이 그나마 낫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바이킹들처럼 나 역시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주둔지로 갈까? 가서 오랜만에 태양거죽그론링을 타고 점프를 뛰어볼까?
약초캐고 낚시를 하며 공개창에서 와라버지들과 일베를 욕해볼까?
곧 체념하는 나를 발견한다. 난 정공을 탈퇴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그 이후 왜인지 드레노어에 돌아가기가 조금 불편하다.


어떻게 해야 딜이 잘 나오는지 나는 알고 있다.
공략도 당연히 다 알고 있다. 심지어 공략 페이지에 있었던 오타들까지 기억한다.
그런데 안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딜 사이클 나도 알아. 기술 이름을 외치며 키보드를 세게 누르면 크리가 터지는 거 나도 알아.
게걸음으로 무빙하는 거 나도 알지 이것만 몇 년을 했는데!

그런데 안된다. 갈수록 데미지 미터기의 크기를 키운다. 그래야 내 이름이 보인다.

더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어 공격대를 탈퇴했다.
아쉬운 척 하는 공대원들에게 작별을 고하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설움이 복받친다.
이럴 수는 없어.
누구도 나에게 이럴 수는 없다.

나는 타렌 밀 농장 모내기 한복판에 있었던 몸이다. 나는 루시프론에게 정배를 당했고 쑨(크툰)에게 안광을 맞았다.
온갖 위기와 공포로부터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놈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불성 때 므우르까지 갔던 자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
나는 아제로스의 수호자, 판다리아의 깨우는 자, 기다릴 줄 아는 자, 붉은 해적단 제독, 사랑에 빠진 바보이며 용사! 투사! 탐구자! 현자!
대지모신의 전령이며 온몸바쳐 블엘여캐 사제님을 지키는 대지고리회 확고 주술사다. 그밖에 전직업 만렙케릭은 그저 별 거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공찾 눌러놓고 점프뛰는 주둔지의 실업자다.
인정해... 나는 늙었다. 늙고 지쳐 병들고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봐도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아. 머리나 안빠졌으면 좋겠다.



서러움의 끝에서 분노가 보석처럼 결정을 맺는다.
한줄기 섬광이 보석을 투과해 내가 가야 할 곳을 별빛처럼 속삭여준다.
그곳은

세종과학기지다.


예언자를 막았다. 엄마! 내가 예언자를 막았어! 아빠! 나 예언자 막았어!!!!
너무 기뻐서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예언자를 막아낸 것 뿐만 아니라 격추시키기까지 했다.

일벌레 몇 마리 잡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5마리정도밖에 안잡혔다.
본진에 포자촉수를 3개 건설해 둔 건 올해 나의 최고의 판단이었다.
오늘은 되는 날이다. 상대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척! 하면서 나는 군단숙주를 뽑았다! 됐다! 군숙이다 이놈아!!
게다가 놀랍게도 나는 성공적으로 군단숙주를 맵 중앙에 박았다.
세종과학기지에서 센터에 군숙을 박았다고!!!

온몸의 세포가 승리를 직감한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이정도 손놀림이면 적어도 APM이 100은 나올 것이다.
살모사가 센터 부화장에서 마나를 채우고 있다.
바퀴 20마리 정도가 군숙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 저글링? 내가 저글링을 왜 뽑았지? 모르겠다. 어쨌건 너희도 한타를 도와라.
감염충이 왜 3마리밖에 없지? 조합 비율이 낯설다.


온다. 예상보다 빠르다. 거신이 4~5기, 불멸자도 섞어있고 추적자가 다수 있다.
뭔가 흐물흐물 거렸는데 관측선인지 아니면 내가 긴장해서인지 모르겠다.
식충 쿨이 얼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할 필요 없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타락귀가 호위하는 살모사 부대가 전면에 나선다.
가라! 지금의 나는 이승현이다!!!

흑구름? 납치? 단축키가 뭐더라? 모르겠다. 일단 뭐라도 막 누르자!

맨땅에 흑구름이 떨어졌고 거신 하나와 추적자 하나가 납치되어 왔다. 그리고 살모사는 모두 죽었다.
!!!!!
식충이 없다. 내 몸이 틀렸다. 이래서 기억은 머리로 해야 한다. 가라 바퀴! 믿는다 저글링!!
화면을 아무렇게나 드래그해서 거신에게 우클릭을 했다.
일벌레와 대군주 무리가 거신을 덮친다.
진균! 진균이 필요하다! 감염충 어디있지? 감염충 부대 단축키가 뭐였더라?
바퀴를 충원해야 한다. 나는 빠르게 부화장에서 바퀴를 생산... 해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급해서 저글링을 눌렀다.
애벌레 펌핑을 한다는게 실수로 대군주를 6마리나 눌렀다.
감염충 어딨니? 야!!! 감염충 어디갔어!!!!!!!!!!!!! 젭알!!

????






이겼다?





이길 수 없는 전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 컨트롤이 좋았나 보다.
경기 끝나고 통계창이 나오는데 이번 경기 APM이 평소보다 높았다고 별표가 붙어 있다. 86.
이 정도 컨트롤이면 프로팀에 연습생으로 들어가도 되겠다. 대진에 따라 코드S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길잃은 바이킹을 하며 3군데 동시 컨트롤을 연습했던 게 신의 한수다.

비록 북미 서버였지만 상대도 굉장했다. 끝없이 환상 불사조로 내 대군주를 때리는 걸 보니 이 친구도 거의 프로급이다.
나중에 더 높은 곳에서 만나자.

귓말이 왔다. 북미 서버는 잘하는 상대와 경기를 하면 자주 귓말을 보낸다.
참고로 난, 이전에도 무려 서너 번이나 귓말을 받은 적이 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핵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감히 나를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 놈 취급하다니!

그러나 진정하고 생각하면 비꼬기나 욕이 아니라 결국 칭찬이다.
나는 예전에 칭찬들었는데 그게 욕인줄 알고 발끈했던 창피한 추억이 있다.
정신을 집중해서 떠듬 떠듬 번역해보면
'나는 맵핵쓰는데 너는 무슨 핵을 쓰는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답장했다.


'kimchi hack'


녀석은 다시는 한국인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김치와 싸이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고
박지성과 김연아에 열광하고 뽀로로를 보며 눈물을 터뜨릴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인류의 역사를 지배했지만 일부 지배층의 음모로 인해 지금은 잊혀진, 그러나 뛰어난 학자들이 다시금 그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환국에 대해서도 알게 되겠지.


오늘은 되는 날이다. 북미서버 게이머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피곤하니까 앞으로 10연승만 하고 자야겠다. 너무 많이 이기면 등급이 올라가니 주의해야지.


플레이 버튼을 누를 수가 없다.
뒷목이 축축하다. 아직 3월인데 땀이 났다.
숨이 찬다. 숨을 헐떡거리는 정도는 아니어도 또다시 이 무서운 전장에 입장할 걸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누구도 날 욕할 수 없지만 누구도 날 도와줄 수가 없다. 난 코너에 몰려 있다.
당연하지! 그게 이 게임의 미덕인걸!!

암흑 속을 헤치고 느릿느릿 전진하는 대군주가 떠오른다.
너무 무섭다.

본진에 갔는데 테크 건물이 없다면? 전진사신? 전진우관? 혹시 암흑기사??
의료선이 지뢰를 싣고 내 본진에 드랍하면 어쩌지?
멸자뽕이면 어쩌지?
암흑 속을 헤치고 느릿느릿 전진하는 대군주가 떠오른다.
도망치고 싶다.

맵을 바꿔볼까?
이건 점추맵이고... 이것도 점추맵, 이거는 진짜 점추맵, 와.. 이거는 완전 점추맵이네..



안되겠다. 흔한 사적덱으로 여관주인이나 약올리면서 능욕해야지.
그런데 손이 미끄러져서 디아블로를 눌렀다.



맨날 스타나 히어로즈 화면만 보다 디아블로 화면을 보니 좀 칙칙하다.
우측 하단의 친구창이 반짝인다.

헐... 이 아저씨들 아직도 디아블로 하고 있네? 짠하다 정말 크크크. 지겹지도 않나?

벌써 시즌 2다. 별로 하고 싶진 않지만 '2'라는 숫자가 마음에 들어서 캐릭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여자 성전사로 멋진 룩을 갖고 싶다. 특성은 대충 해머딘으로 다 쓸어버려야지.





신난다. 재미난다. 나 빼고 다 죽는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다. 온몸이 찢어지고 팔다리가 분리되며 죽어준다.

너무 고맙다. 난 그냥 우클릭만 했는데... 망치만 돌렸을 뿐인데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면서 나가 떨어져준다. 진짜 아픈것처럼 비명도 질러준다.
뭐가 쾅쾅! 휙휙! 거리면서 호롤로롷로로로롷 하니까 다 죽어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데커드케인과 레아를 생각하니 잠깐 울적해졌다.
레아가 너무 보고싶다. 희생이 뭔지 알기나 하냐며 앙탈을 부리던 아이였는데...


행복하다.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기사단원의 의지가 더 강할 것이다.
누구도 나를 욕할 수 없다. 난 더이상 투기장에 내몰린 겁먹은 고양이처럼 벌벌 떨지 않아도 된다.
내가 바로 정의다. 내가 다 죽여버릴거다. 내가 지금 탱크를 몰고가서....... 이.......... 악마.......... 놈들으..........


이럴... 수가....... 어깨가 늘어지고......... 다리는 물에 잠긴....... 것 같.........다.
........이 느낌은........? 혹시.... 이.........게 졸음........이라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난 6개월째 가벼운 수면장애를 앓고 있다.


그............런데........ 어떠........케 이렇...........게................ 졸릴........수.............가..........
.........눈이 감긴다..... 이거시......... 디압블로의....... 위력..인...가............



......바람 .......앞........의........ 쭉............정이......... 같......................................군..............











아침이다. 몸이 가볍다. 이렇게 개운한 기분은 1년만이다.
일곱 살이 된 기분이다. 어떻게 이런 숙면을 취할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고맙다 디아블로 그리고 말티엘... 이따가 또 죽이러 갈게!



물론 나는 언젠가
다시 젤나가 감시탑으로 떠날 지도 모른다.
굴단의 거처에 쳐들어가 강철호드는 물론 불타는 군단을 쓰러뜨리러 출정할지도 모른다.
여왕님께서 오신다면, 시공의 폭풍으로 알현하러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니다.






끄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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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15/03/19 21:20
수정 아이콘
추천드립니다 크크
두부과자
15/03/19 21:25
수정 아이콘
디아블로는 좋은 수면유도제 였군요..
술마시면동네개
15/03/19 21:49
수정 아이콘
정말 특이한게임이에요 안할땐 막 하고싶은데 하면졸린....
헥스밤
15/03/19 22:09
수정 아이콘
아 나 이분 글 너무 좋아요.
지나가다...
15/03/19 22:10
수정 아이콘
진짜 저도 디아블로 하다가 졸아 본 적이 꽤 됩니다. 크크크
15/03/19 22:38
수정 아이콘
게임중독?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블리자드가 숙면유도용 게임을 만들었으니까요!
15/03/19 22:45
수정 아이콘
전 이분이 다이어트 하셨다는 글 쓰셨을때부터 팬인가봐요.
입담 좋으실 거 같습니다크크크크크

성역 가고싶네요
하얀마녀
15/03/19 22:47
수정 아이콘
대균열 돌다가 침흘린게 몇번인지 모르겠네요
세상의빛
15/03/19 22:54
수정 아이콘
입담이 정말 좋으세요
대균열은 살 떨리는데 일반 균열은 졸리긴 하죠
톰슨가젤연탄구이
15/03/19 22:58
수정 아이콘
Frameshift
15/03/19 23:11
수정 아이콘
필력에 빠져든다 크크크
15/03/20 00:15
수정 아이콘
디아블로가 붉은색이 많아서 그런지 진짜 졸립니다..
마이충
15/03/20 00:29
수정 아이콘
대지고리회가 잘못했네요
노답 딜술들 버프가 시급합니다
저도 술송함을 이기지 못해 제 정술 연치셔틀로 만들어버리고
배추로 전직했는데 딜은 그냥 그렇지만 재미라도 있네욧

그런데 술사하셨다는 거 맞죠? 크크
낭만토스
15/03/20 00:33
수정 아이콘
게임할 시간이 없어
실력은 줄고 줄고
나이가 더 먹어
손은 느려지고....

요즘의 빡쎈 경쟁 게임은 점점 힘들어지더군요

그래서 스팀게임으로...
플스구입도 고려중이네요

디아블로는....불면증치료제 입니다
일겅
15/03/20 00:44
수정 아이콘
필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리아드린
15/03/20 00:49
수정 아이콘
아.. 공감 할 수 밖에 크크크
화려비나
15/03/20 01:16
수정 아이콘
별빛처럼 속삭여준다가 아니라 별빛으로 속삭여준다라고 하셨다면 가히 완벽했을텐데...
15/03/20 01:25
수정 아이콘
인터스텔라 플랜C때부터 팬입니다. 오늘도 피식하고 잘 웃고 갑니다.
15/03/20 01:46
수정 아이콘
디아는 정말 간만에 하면 엄청 재밌다가 하다보면 또 졸려서 접고 그런 재미가 있네요.
즐겁게삽시다
15/03/20 02:55
수정 아이콘
형님 저 진심으로 형님하고 친구하고 싶어요....
다이어트 글 쓰셨을 때 부터 팬이에요.
브라운
15/03/20 08:43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완전 재밌게 봤습니다.
15/03/20 09:00
수정 아이콘
어우 블교에 심취하신 분 크크크
opxdwwnoaqewu
15/03/20 09:25
수정 아이콘
처음부터 끝까지 내얘기인줄....
Tyrion Lannister
15/03/20 12:54
수정 아이콘
따.. 딱히 글이 재밌다고 추천 누른 건 아니니까!
15/03/20 18:58
수정 아이콘
의식의 흐름 크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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