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M < 2 >
이번 스타리그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름들은 모두 8강을 밟는데 성공했다.
이전 시대의 패권을 틀어쥐었던 마재윤, 그를 몰락시킨 김택용, 프로토스의 새로운 돌풍이었던 송병구, 테란의 희망이 된 이영호, 박정석에 이르러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고, 진영수와 변형태 역시 이영호 직전까지 테란을 이끌던 재능들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김준영이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탈락한 8명은 상대적으로 그리 부각되지 않던 선수들이었으며, 특히 8명 중 7명이 테란이었다는 것은 소위 '양산형 테란론'과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프로리그 확대로 급격히 늘어난 게임 수와 본좌론이 맞물리면서 사람들은 지극히 선택된 소수를 갈망했으며, 그 가운데 무명의 신참자들이 나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는 중이었다. 그렇다. 오로지 선택받은 네 사람이 모든 것을 거머쥘 - 택뱅리쌍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그를 예고하듯 김택용과 이영호가 8강에서 만났다.
하지만 아직, 아직은 좀 더 시간이 남아있었다. 마재윤과 진영수가 아직 그들 사막의 영광을 갈망했고,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변형태와 김준영이 각각 나섰다. 그리고 송병구 - 그는 그들의 파수꾼과 이제 막 두 번째 시험을 치를 참이었다.
이 막간의 끝은 아직 멀었다. 좀 더, 좀 더 기다려야만 했다.
데모닉Demonic
「군주란 모름지기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을 한 데 갖추어야 한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中
한 명의 테란이 패권을 쥐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느냐 묻는다면 나는 네 가지를 꼽겠다. 자존심, 교활함, 뻔뻔함, 그리고 냉혹함. 천부의 재능을 가졌기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이윤열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두 명의 테란 군주 : 임요환과 최연성은 이 네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네 가지는 테란 왕좌의 조건인 동시에 제국의 미덕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임요환과 최연성을 제외했을 때 이 모든 것을 갖춘 테란은 예나 지금이나 이영호 뿐이다.
한 명의 프로토스가 전설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느냐 묻는다면, 나는 한 가지를 꼽겠다. 반골. 김동수로 시작하여 박정석, 강민, 박용욱의 3대와 So1의 오영종, 박지호를 통틀어 반역하지 않은 프로토스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그들 중 오직 일순의 난亂으로 끝나지 않은 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프로토스는 예나 지금이나 김택용 뿐이다.
그리고 패자인 동시에 반역아, 테란의 군림자이지만 또한 프로토스의 이해자이기도 한 누군가도 있다. 역시 단 한 사람뿐이지만.
공교롭게도 우리는 이 싸움에 앞서 그가 이영호와 김택용, 두 사람을 대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나긴 세월의 무게가, 새로운 역사를 열 열쇠들의 무게가 늙은 왕을 짓눌러버릴 것을 의심치 않았고, 그리하여 대가로 양손을 고이 모은 채 뒤통수를 싸매고 땅바닥을 굴러야 했다.
낡은 칼끝이 보기 좋게 꿰뚫어버린 것이다. 두 젊은이의 가슴팍을.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임요환의 마지막 기염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임요환은 총 11승 10패로 염보성과 더불어 프로리그 테란 다승 1위를 차지했고, 그 과정에서 김택용과 이영호를 비롯하여 마재윤, 박성균 등 녹록찮은 위명들을 쓰러뜨렸다. 그것은 경악과 환희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는데, 사람에 따라 그 연유는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하나를 굳이 말해보자면 이 무렵 공군이 프로리그 흥행의 핵으로 떠올랐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요환단물을 빨기 위해 높으신 양반들은 프로리그 확대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며, 이것이 또 참으로 많은 분란을 야기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훌륭한 목소리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하고 생략하도록 하겠다.
여하튼 노왕(老王)의 칼끝이 김택용과 이영호, 두 사람을 꿰뚫은 이 무렵의 일은 당대에도 상당한 센세이션이었지만 훗날 택뱅리쌍의 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아예 두고두고 곱씹히는 이야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후에 홍진호는 공군에서 김택용과 이제동을 쓰러뜨리며 이 센세이션을 다시 일으켰고, 이는 더욱 즐겨 인용되는 일화가 되었다) 꽤나 많은 이들이 이미 잊혀진 이름이라 여겨지던 노왕이 새파란 젊은이들 - 프로게이머의 평균 선수 수명을 감안한다면 꼬마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을 터 - 에게 손수 회초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재미있게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 그를 감상할 수 있었던, 이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프로토스가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약 8년이 필요했다.
이영호가 그 꿈을 깨뜨리기 위해 약 10분이 필요했다.
택뱅리쌍 시대의 예고. 테란의 미래와 프로토스의 미래의 만남. 그 결과 김택용이 탈락하기까지, 두 경기를 연달아 패배하는 동안 걸린 시간 - 약 10분.
이영호는 웃었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8강 1주차 C조 1경기 김택용 vs 이영호 in 히치하이커.
이영호가 선택한 것은 스캔러시였다. 노왕이 자신을 찔렸던 바로 그 날, 자신이 당하기에 앞서 팀 선배 강민이 노왕에게 당한 바로 그것이었다. 적의 언덕 위에 뿌려지는 스캔, SCV의 행렬은 프로토스의 방어진을 단번에 밀쳐냈고, 뒤를 이어 몇 기인가의 머린이 들이닥쳤다. 원 게이트 더블넥을 택했던 김택용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8강 2주차 C조 2경기 김택용 VS 이영호 in 몬티홀.
이영호는 SCV를 빠르게 넘겨 전진 2배럭을 건설하면서, 리파이너리를 지어 몬티홀의 미네랄을 뚫었다. 일찍이 이성은이 스타 챌린지에서 선보인 것이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이영호의 머린이 들이닥쳐 김택용의 본진을 장악하기까지 4분 20초.
가히 악마와도 같았다.
이영호는 1경기에서 임요환의 빌드를, 2경기에서는 이성은의 빌드를 사용해서 김택용을 침묵시켰다.
임요환의 빌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영호가 임요환에게 패한 바로 그 날, 앞선 경기에서 임요환이 강민을 패배시킬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임요환이 이영호를 내찌르던 날 이영호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영호는 그 날을 아픈 패배의 기억이기보다, 그 위험한 패도의 디딤돌로 가졌다. 그 비수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이 순간 김택용의 가슴팍을 꿰뚫는데 사용했다.
또 이성은이 누구인가? 마재윤을 상대로 유례없는 게임을 벌여 '블록버스터'란 이명을 얻었고, 그리하여 당대에는 이영호에 비견될 유일한 테란 신성으로 여겨졌던 게이머였다. 이영호는 그런 상대의 빌드를 카피하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뿐만 아니다.
"연습 때 많이 졌다. 여기 와서도 어떤 전략을 할 것인지 생각을 못했다. 경기에 막 들어간 뒤 일꾼을 퍼뜨리면서 스캔 러시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몽환(3경기)도 테란이 어렵다고 하더라. 최대한 몬티홀(2경기)에서 끝낼 수 있도록 하겠다."
- 2007. 6. 22 이영호, 8강 1주차 1경기 후
"2경기는 싫어하는 맵이고 3경기는 좋아하는 맵이다. 그래서 3경기만 죽어라고 연습하고 2경기는 전략만 준비해왔다."
- 2007.6. 29. 이영호, 8강 2주차 2경기 후
저 유명한, '안티 캐리어'의 트릭은 이미 그 패도의 시작과 함께 예고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처음에는 이 표현을 쓰는데 약간 주저했으나, 이제 분명히 다시 말하련다. 가히 악마와도 같았다. 데뷔 이후 16경기를 치르고 14승 2패. 임요환보다는 12살이 적었지만 폭풍을 베던 그의 냉혹함을 이미 가졌고, 최연성보다는 9살이 적었지만 세상을 유린한 그의 교활함을 이미 가졌다. 승리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 제국의 경구를 이미 새기고 그는 등장했다.
이 조숙한 천재가 테란의 미래였고, 반역하는 프로토스가 이후 5년을 견뎌내야 할 그들의 재앙이었다.
임요환이 김택용을 내찌르던 날 무엇을 남겼는가. 그것은 조롱과 함께 찾아올 첫 치욕이었다.
최인규와 임요환, 오늘의 이영호, 그리고 내일의 박성균, 정명훈, 변형태…….
김택용은 이 DAUM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MSL에서 송병구를 두 번째의 우승을 차지할 것이며, 이후 허영무를 꺾고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여 프로토스 영광의 이름으로 자리할 것이다. 안티-리쌍에서 결코 내릴 수 없는 이름일 것이며, SKT T1의 에이스로 불릴 것이다.
그러나 또한 영원히 OSL의 우승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며, 개인리그에서의 지독한 부진에 시달리며 반쪽 취급을 당할 것이다. 위대한 영광과 조롱의 나락을 오가며, 사람들에게 그에게 안길 상처에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김택용의 사람들은 차라리 2007년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런지도 모르겠다. 혁명의 여운에 취한 채, 간특한 천재의 분탕질에 상처입어도, 아직 프로토스 패권의 시대를 바랄 수 있었던 그 때로.
그만큼 이제 혁명가라 불렸던 신성은 쇠약했고, 이미 너무 여러 번 기대를 불어넣고 배반했다. 한 때 혁명의 시대를 꿈꾸었던 사람들은 오늘에 익숙해져 그 시절을 낭만과 추억으로 기억 깊은 곳에 밀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말이다.
마재윤은 비웃었었다.
- 당신이 패배할 이유는 나를 대적하는 당신이 프로토스이기 때문이다.
그 때, 프로토스의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은 자, 한 명의 고아가 그 철검을 빼들고 한줄기 노호를 내질렀다. 그에 모든 프로토스가 호응하여 일어섰고, 개미 떼처럼 마재윤의 사막을 덮어 그 열사를 짓밟고 여섯 마리 용들의 시대를 열어 제쳤다.
다시 한 번 그 노호가 귀를 파고 들어올 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 속에서 흘려보낼 자신이 있는가?
지금까지 속고 또 속아,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는 이유로 평온 속에 머무를 자신이 있는가?
혁명을 꿈꾸지 않는 청년은 가슴이 없는 이이고, 혁명을 꿈꾸는 장년은 머리가 없는 이라 했다. 아직도 김택용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들은 틀림없이 구제할 도리가 없는 돈키호테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쓸데없는 수고를 덜기 위해, 여기 돈키호테를 자칭한 또 다른 당신의 말을 빌어 이 이야기를 끝낸다.
투쟁은 원과 같다. 어디서든 시작될 수 있으나, 결코 끝나는 법은 없다.
에너미 인 더 미러Enemy in the mirror
「막스: 운수도 사납지! 행운이 날 외면하네.
쿠노: 믿음을 갖거라!
막스: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실패하는 건 견딜 수 없습니다.
쿠노: 하늘의 뜻이 그러하다면, 남자답게 감수해야지.
카스파르: 행운의 탄환을 쏘게! 더 높은 힘을 아는 자는 실패하지 않아!
막스: 아가타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실패할 순 없습니다!
쿠노: 견뎌내!
합창단: 아니, 아니. 그는 절대로 실패를 견딜 수 없어! 절대로!」
- Carl Maria Von Weber, 『마탄의 사수』中
진영수는 어떤 테란인가?
누군가 답했다.
拔刀一劍발도일검 天下第一천하제일.
진영수는 어떤 테란인가?
누군가 답했다.
소울의 붉은 저격수.
한편은 검을 말하고, 한 편은 총을 말한다만, 그 두 명명(命名)이 공유하는 바는 분명히 있다.
칼집을 빠져나온 칼도, 총구를 뛰쳐나온 총탄도, 그 어느 쪽도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선택하고 그 선택에 온몸을 던진다. 그것이 진영수의 방식이다. 일찍이 진영수는 마재윤의 사막에서 싸워나갈 것을, 그리하여 마재윤의 사막에서 살아갈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 것이다.
김준영을 마주하고 진영수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자문했다.
고요한 물에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었다.
제 1탄.
장전한다.
방아쇠를 당긴다.
불발.
- DAUM 스타리그 2007 S1 8강 1회차 D조 1경기 김준영 VS 진영수 in 몽환.
진영수의 일섬은 분쇄되었고, 그걸로 경기는 끝났다. 이 싸움에 대해서는 이 이상 할 말이 필요치 않을 듯 싶다. 김준영은 과감하게 확장했고, 진영수는 그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4배럭의 일섬을 준비했지만 그것이 뮤탈과 성큰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후는 김준영의 대인스러움이 발휘되었을 뿐이다.
일격에 따라 갈리는 승리와 패배.
그 질릴만치 알기 쉬운 방식은 잡티 하나 허락지 않는 흰빛을 떠올리게 한다. 가히 편집증적일 정도로 극한을 추구한, 티 없는 백색.
백색은 시작의 색이다. 그 무엇 하나 더해지지 않은 색이다. 그 어떤 기교도, 재능도, 화려함도, 기발함도 더해지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나 허락되며, 그 누구라도 갖고 시작하는 색이다.
진영수의 시작이 바로 그랬다.
그가 몸담은 Soul은 '저그 군단'이라는 이명으로 불렸으며, 그에 걸맞게도 뛰어난 저그를 여럿 배출해냈다. 특히 조용호와 변은종을 발탁해낸 것은 Soul이 몇 번을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을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조용호는 KTF 갈락티코의 일원으로 더 유명하고 변은종은 신생 삼성전자 칸의 초대 에이스로서 더 널리 알려졌다. 훗날 저그의 김윤환 - 테란의 진영수 - 토스의 김구현이라는 라인업을 갖추고 강호로 도약하는 Soul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STX라는 대어를 낚은 이후의 일이었고 그 이전까지 Soul은 참으로 불운한 팀이었다. 언젠가 스폰서 팀과 비스폰서 팀의 경제 상황 차를 조명한 다큐에서 Soul은 비 스폰서팀의 대표적인 사례로 등장한 바 있는데, 당시 Soul의 주축이었던 박상익과 한승엽은 무거운 발걸음으로써 e-sports의 그림자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건만 그를 보고 사람들은 다시 깊이 한숨을 내쉬며 침묵했다.
진영수는 그 저그 군단의 테란이었고, 어느 정도 저그전 타이밍에 감각을 갖추고 있었고, 그리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8강 2회차 D조 2경기 김준영 VS 진영수 in 파이썬.
김준영의 9드론 저글링이 일찌감치 진영수의 본진에 난입해서 그 심기를 어지럽혔다. 김준영은 뒤이어 대규모 저글링을 통해 앞마당 공략의 시도까지 감행했다.
귓가에 이명 있음.
제 2탄.
장전한다.
그러나 진영수는 SCV까지 동원한 아슬아슬한 디펜스를 성공시켰고, 멀티를 뻗어가며 승기를 굳히려는 김준영을 향해 노 베슬 - 바이오닉 - 탱크의 과감한 진출을 감행했다.
방아쇠를 당긴다.
명중.
오랜 경험으로 얻어진 감각에 의지하여 방어에는 아슬아슬한 최소의 투자를, 많은 패배로 얻어진 부동심에 의지하여 공격에는 절제미를 발휘한 최적의 편성을, 그리고 그 여력으로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속도와 타이밍.
기본을 연마하여 손에 넣은 백색 극한. 그것이 범재 진영수가 선택한 길이었다. 진영수는 그것을 무기로 마재윤의 사막에 들어섰으며, 구세주의 심장을 노렸다. 그는 값진 노력이었고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그 사이 Soul은 STX란 스폰서를 얻어 당당히 대기업팀의 대열에 들어섰고, 저그군단 변두리의 논외에 지나지 않던 테란 진영수는 테란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는 마재윤 시대를 장식한 위대한 저항자였고, 노력과 의지로 천부의 재능에 맞서는 긍지 높은 사수였다.
하지만 혁명의 새벽이 시작되었다. 그 모든 것이, 그가 사막에서 쌓아올린 전부가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영수는 김준영을 마주한다.
한빛이 실상 스폰서의 의미를 잃어가는 동안 스타즈는 박정석과 변길섭을 갈락티코에 내주었고, 나도현을 팬택에 보냈으며, 김동수와 강도경과 박경락을 잃었다.
김준영은 그 한빛 스타즈의 에이스였고, 후반 운영에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리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8강 2회차 D조 2경기 김준영 VS 진영수 in 히치하이커.
이번에는 초반 김준영에게 행운이 따르지 않았고, 그래서 서로가 거의 대등한 상태로 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2경기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제 3탄.
장전한다.
진영수의 병력이 자리를 박차려던 때.
그 때, 스커지가 진영수의 첫 베슬에 달려들었다.
속절없이 터져나가는 베슬을 보며 진영수는 자문했다.
당길까.
말까.
김준영이 그의 앞에 있었다. 자신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폐허 위에. 일찍이 자랑하던 모든 것을 빼앗긴 폐허 위에. 홀로 선 채 진영수를 마주보고 있는 김준영이 있었다. 그 무엇도 갖지 못한 채 작열하는 태양광과 메마른 사토에 싸워가려하는 누런 이파리와 앙상한 줄기가 있었다.
그래. 진영수가 이미 그러했듯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김준영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온 자신의 길인지, 의심하는 순간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그 모습을 흔들어 놓았다.
진영수는 한 번 눈을 깜박였다.
이제 그의 앞에는 한 명의 위대한 사수가 서 있었다.
인고로서 험난한 세월을 견디어 왔고, 그리하여 파멸을 알면서도 각오한 채 신과 같은 위대한 재능에 당당히 맞서는, 사막의 사수가 서 있었다.
- 시간이여 멈추어라, 그대는 너무나 아름답다.
사수의 손이 멎었고, 그리하여 그 숨도 멎었다.
방아쇠는 결국 당겨지지 아니하였다.
진영수는 다음 베슬을 기다렸고, 뒤늦게 총구를 박찬 탄환은 언덕의 두 마리 러커와 극적인 타이밍에 합류한 디파일러의 활약으로 분쇄되었다. 김준영은 이후 맵 하단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예의 그 이름난 울트라리스크 무리가 지축을 울리면서 경기를 끝냈다.
김준영은 진영수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진영수는 김준영-진영수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이후 진영수는 '한여름밤의 꿈'이라 일컬어지는 빛나는 시절을 보낸 후 몇 번이고 개인리그의 무대를 밟지만, 이른바 하부리그의 지배자로서 8강을 넘어서지 못하는 지독한 불운에 시달린다. 결코 닿지 않는 하늘을 향해 끝끝내 손 뻗는 그 모습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의심한다.
그 손은 정말로 하늘에 닿지 못했던 것이었는지. 사실 그는 처음부터 하늘 따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그 손이 붙잡고 싶었던 것은 저 사막의 사수, 그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그저 불가능에 도전하며 장엄하게 파멸하는, 고독한 영웅 - 위대한 실패자의 모습에, 그 자신의 기억에 스스로 취해, 그저 그 모습을 반복하여 연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10년 6월 7일, 불법 도박 및 승부조작 행위로 인한 영구 제명-.
그것이 한 때 인간의 칼날, 범재의 의지라 불렸던, 바로 그 마탄의 사수가 선택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