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M < 1 >
Prologue
"그러나 그 자는 '역사'가 이 세상을 써나가는 두꺼운 책 속에 든 수억 가지 문장 중 한 단어일 뿐입니다. 수백 페이지에 걸친 이야기 속에서 그는 차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첫 문장, 또는 백 번째 문장부터 죽기로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 자의 차례가 왔을 뿐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뭐요?"
- 전민희,『 룬의 아이들 : 데모닉』中
이 판의 세월을 굳이 나누어 따지자면 이는 크게 세 덩이로서 그 세 시대는 각기 임요환, 마재윤, 택뱅리쌍이라는 주인들을 갖는다.
임요환과 그 피를 먹고 자란 세 자루 창, 곧 합쳐 4대 천왕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이끈 시대를 사람들은 낭만시대라 부르고, 마재윤이 가혹한 통치로 가열하여 새 씨앗을 남기지 않은 그 시대는 본좌론의 시대일 것이며, 택뱅에서 리쌍으로 이어지는 오늘은 그 어떠한 잣대도 마땅한 축도 없이 위태로운 분란의 되풀이일 뿐이니 어쩌면 참된 의미로 춘추전국시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 펼치고자 하는 이야기는 최후의 천왕 한 사람의 분투만이 낭만시대의 흔적. 구세주를 자처하던 정점은 영광된 7일의 대가를 치른 직후이며, 택뱅리쌍은 아직 진가를 드러내기 전인 곳. 그리하여 그 세 시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 주인공들 또한 그 무엇의 계승자도 그 무엇의 선도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이 이야기를 아직까지 생생하고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며, 다른 그 어떤 거인들의 발걸음도 이 이야기를 묻지는 못하였으니, 그 까닭을 지금 나는 말하고자 한다.
낭만시대의 아득한 대단원을 우리 소망(So1)한 대로 보았고, 그에 낭만시대를 끝맺고 별들은 새로운 지평(UZOO)에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어쩌면 장구한 세월 속에서는 다만 짧은 외전(外典)이나 막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 이야기는 그러한 추측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내일과 미래를 상징하는 이름을 가졌다.
자.
다음(DAUM)이다.
분수령 : 폭풍 속으로
" - 그들의 소설은 막을 내리고, 그들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 로뮤비류즈
하염없이 비는 내리고, 창과 벽을 할퀴는 바람 소리와 멀리서 울려오는 우렛소리도 익숙해질 무렵, 마침내 그를 자장가삼아 잠드는 위업을 달성하려던 문지기의 귓가에, 조심스레 규칙적이고 둔탁한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눈꺼풀과 함께 가라앉던 문지기의 의식이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을 즈음에 그는 그것이 문고리를 잡고 두드리는 소리임을 깨닫는다.
늦은 방문자.
문지기가 욕지거리와 함께 무거운 몸뚱이를 들어 올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비는 내린다.
어두운 하늘에서, 쉼없이,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번뜩이는 전광, 으르렁대는 뇌명을 양 옆에 끼고서.
비는 내린다.
2007년은 대립과 격변의 시대였다.
낭만시대를 장식한 주역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프로리그 주5일제의 시행으로 개인리그와 프로리그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블리자드에서는 스타크래프트2 프로젝트를 발표했으며, 투신 박성준이 웨이버 공시로 내몰리면서 선수들의 권익에 대한 담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재윤의 온게임넷 우승으로 마침내 안정을 찾는가 했던 본좌론은 김택용의 혁명과 함께 다시 문투(文鬪)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폭풍 속에서 어느 것 하나 안정되이 제 자리에 있는 것 없었고, 모른 척 평안히 제 길만을 걸을 수 있는 이도 없었다. 이전까지 판을 장악하고 군림했던 그 모든 것들은, 그것이 사람이든 이론이든 아니면 체제든 간에 그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어 새로운 위기에 봉착하였다. 서로가 저마다의 식견을 소리쳐 높였고, 그저 가만히 듣고 따르는 이는 적었다. 저마다의 이(理)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모든 이가 격쟁했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는 10년에 가까운 역사를 쌓아올린 전장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신한은행 시리즈 - 최연성으로 시작하여 마재윤으로 끝난 - 의 1년을 마친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사상 처음으로 스폰서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시즌을 시작했다.
낭만시대에 이 판의 스토리를 장악하고 이끌어나갔던 것은 언제나 온게임넷이었다. 온게임넷은 임요환을 왕좌에 올려놓은 전장이었고, 홍진호와 박정석이 임요환과 자웅을 겨루었던 전장이었다. 네 명의 천왕, 가을의 전설, 3대 프로토스, 조진락, 골든마우스 등등 그 모든 이야깃감은 온게임넷에서 만들어졌다. 그에 비하면 MBC 게임은 강자를 가려내는 콜로세움이었다. 이윤열은 겜비씨를 세 번 연달아 제패하면서 머신, 천재, 새로운 왕좌의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저 센게임에서 최연성은 이윤열로부터 패권을 넘겨받았다.
헌데, 낭만시대의 종결 - 4대 천왕의 몰락, 마재윤의 등장과 함께 이러한 구도는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마재윤이 마각을 드러낸 곳은 스타리그가 아니라 UZOO MSL이었으며, 낭만시대의 별들이 일제히 무릎 꿇은 곳 또한 UZOO MSL이었다. 마재윤 시대에 새로이 성장한 재능들, 심소명과 진영수, 박대만, 전상욱 등등은 MSL에서 마재윤과 대결하면서 이름을 높였다.
마재윤과 함께 MSL은 이 판의 스토리에 있어 그 한 축을 주도할 기회를 처음으로 얻었으며, 천천히 그를 수행해나감으로서 라이트 팬층의 흡수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한 움직임은 스토리의 OSL, 게임의 MSL이라는 기존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MSL은 선수들의 별명을 짓고 포장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대진표에 더욱 민감해졌다. 물론 자칫 노루를 잡으려다 잡은 토끼 놓치는 격이 될 수 도 있었으나, MSL은 마재윤을 믿었다. 그들이 배출한 시대의 정점이 이 승부수를 옳은 선택으로 만들어 주리라 믿었다. 실제로 마재윤은 그 몰락 : 3.3 혁명까지도 MSL에서 맞이하면서 철저하게 MSL이 이 판의 스토리를 쥐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되자 온게임넷은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마재윤을 몰락시킨 김택용조차도 MSL의 스타였다. 항상 마재윤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마재윤이 온게임넷 우승을 차지하자마자 이제 김택용만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물론 온게임넷 역시 저 데스노트 게임 - 천재와 사신의 신한은행 S2를 훌륭하게 치러냈지만, 마재윤에서 김택용으로 이어지는 저 스토리 라인은 이른바 본좌론이라 불리는 새로운 담론 위에서 점차 이 스타판 전체의 중심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포스트 임요환'은 끝나고, '본좌'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폰서 확보조차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람들은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위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위기는 언제나 시대의 전환점에 자리한다.
어쨌든 온게임넷은 뒤늦게나마 DAUM을 스폰서로 확보하는데 성공하게 될 것이었고, 스타리그는 시작되어야만 했다.
맞닥뜨린 분수령에서 온게임넷이 마련한 열다섯 개의 자리에는 새 시대의 항로를 결정할 길잡이들이 앉았다.
이윤열은 모든 시대의 증언자로사.
최연성은 전 시대의 패자로서.
마재윤은, '구세주'로서.
그들은 모두 빼앗은 자였고 빼앗긴 자였다. 임요환과 이윤열의 싸움은 찬연한 전설로 남았고, 이윤열과 최연성의 전쟁은 장대한 서사시를 남겼다. 마재윤은 그들 선대 테란 모두와의 싸움, 그리고 맵으로 주어진 시련 속에서 외경 받아 마땅한 신화가 되었다. 다만, 마재윤을 추락시킨 김택용의 위업은 혁명이라 불렸다. 혁명은 전설과도, 서사시와도, 신화와도 다르다. 혁명은 - 역사를 낳는다.
세 명의 전(前) 본좌 맞은편에 앉은 대적자들은 혁명 이후를 만들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역사를 시작할 이들이었다. 그 자리에 앉은 것은 김택용이었고, 이영호였고, 송병구였다.
김준영과 변형태는 그들 사이에 섰고, 나머지 이들은 기회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들 중 보다 멀리 볼 줄 알았던 일부는 이미 저울추가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막을 수 없는 흐름 속에, 이제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
확정된 대세 앞에, 저마다가 행보를 결의하였을 때, 그 때 - 문은 열린다.
폭풍 속의 방문자. 열여섯 번째의 빈자리를 채울 자. 그는 역사를 거부한 자였다. 혁명은 역사를 만든다. 전설은 - 적어도 낡고, 빛바래고, 쉽게 바스러지는, 그리하여 지독할 정도로 그립고 아린, 그런 추억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돌아왔다. 낭만시대, 전설로 남을 물결을 이끈 네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서, 고결한 영웅은 돌아왔다.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공격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약속할 것이다.
2007. 4. 20.
박정석 귀환.
성자필쇠盛者必衰
「아, 운명이여! 그대 변덕스러움이 달과도 같나니
늘 차오르다가 또한 이지러지누나!
정신을 홀려 희롱하려는지, 증오스런 인생인은 모질다가도 부드러이 달래나니,
가멸찬 재산이며 기회며 권력이며 얼음 녹듯 사라지도다.」
- Carl Orff, 『Carmina burana : 제 1곡 O Fortuna』 中
달은 차면 기울고, 핀 꽃은 반드시 고개를 떨군다.
융성 뒤에는 쇠락이 온다. 예외는 없다. 만일 쇠락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는 애시 당초 흥한 것도 아니었으리라. 영원할 것 같았던 테란의 십년 제국도 이제 영광에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저그를 막아내지 못함으로서 일어난 일이었다.
스타크래프트 10년을 지배한 세 명의 테란은 눈뜨고 손 놓은 채 마에스트로의 협연을 방치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이윤열은 마스터즈에서 그를 분명히 제압했다. 단 - 3.3 이후에 말이다.
마재윤Savior의 신화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저그에 구세주가 등장하사, 세 명의 테란 군주를 몰락시키고 영광된 7일을 누리셨으나, 혁명의 비수가 마지막에 그 심장을 찔렀노라」
데저트 폭스의 광야를 헤매고도 돌아왔으며, 잃어버린 성전(聖殿)을 다시 쌓아올렸고, 롱기누스의 창이 옆구리를 찌른 뒤에도 그는 부활하였다. 그 모든 것을 짓밟고 그는 물 위를 걸었다. 그는 신이 되었다. 구세주가 되었다. 그는 절대였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구가한 7일 - 그 거짓 위광의 휘장을 걷어낸 것은 프로토스였다. 낭만시대의 그 어떤 이야기와도 연을 맺지 않은, 전조 없이 등장한 신참자 프로토스였다. 모든 것은 테란의 손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테란은 다만 자리를 박탈당한 채 망연한 마에스트로의 부러진 날개를 한 번 더 쥐어뜯었을 뿐이었다. DAUM 스타리그 16석 중 10석을 채운 테란이었으나, 그 중 이윤열과 최연성을 포함한 아홉 명의 테란이 사람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었다.
제국의 영원한 영광은 없었다. 하지만, 구세주조차도 그러했다. 왕도 신도 시작되는 역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택했다.
닥쳐오는 몰락 앞에, 그들은 손을 뻗었다.
이윤열을 김택용을, 모든 것의 미래를.
최연성은 이영호를, 테란과 본좌의 미래를.
마재윤은 최연성을, 자신의 영광된 과거를.
이윤열은 김택용을 택했다.
이윤열이 보고 싶었던 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 그 자체였으며, 김택용은 그 단초를 제공한 젋은 프로토스였다. 그를 움직이게 만든 건 그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흐름과 그것이 자아내는 호승심이었다. 그는 항상 새로운 도전의 충동을 견뎌내지 못했다.
압도적 커리어로서 임요환을 넘어선 다음에는 최연성에게 끊임없이 도전했고, 마재윤이 등장한 다음에는 마재윤에게 도전했으며, 이제 김택용이 등장했으니 김택용을 선택했고, 그 뒤에 열릴 새로운 시대와 싸울 참이었다. 그리고 이윤열은 그 모든 도전에서 성과를 거둘만한 역량 또한 가지고 있었다.
김택용과의 대결에서 이윤열은 필살기성 다크 드랍에 양단당한다. 뒤이어 진영수와 김성기에게 연패한 뒤, 3패로 이 스타리그를 마친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어떤 좌절을 안겨주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는 이미 더한 굴욕을 많이 겪었고, 그보다 많은 영광을 이루었다. 쉽게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운, 그 모든 시련을 딛고 그가 신한은행 S2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 나는 이윤열의 뒤를 쫓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원하는 그 모든 것을 손에 쥘 힘을 가졌고, 거기서 또 다른 새로운 하나를 위해 그 모두를 버릴 수도 있는 이였다.
이윤열은 이 이야기를 수놓은 이름들 중 가장 먼저 새로운 저편을 향한 항해자의 하나였다. 그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천재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 그대로, 나의 기억 속 이윤열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던 그 빛나는 뒷모습만으로 남을 것이다.
최연성은 이영호를 택했다.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테란의 미래였다. 또한 본좌의 미래였다.
답지 않게도 최연성은 이미 힘에 부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2007년을 불사르고 싶다"며 이 무렵 최연성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그 말은, 회광반조 - 최후의 불꽃이 되고 싶다는 것처럼 들렸다.
'저그는 나의 라이벌이 될 수 없다'는 오만에 가까웠던 프라이드는 아이러니컬한 신탁처럼 최연성을 덮쳐, 라이벌 아닌 천적으로서 마재윤을 마주토록 했다. 최연성은 감내하기 힘든 굴욕에 몸서리쳤다.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임요환과 이윤열 - 최연성이 경의를 표했던 단 두 명의 선배 - 마저도 그와 같은 굴욕에 시달려야 했었다는 것이다. 전상욱이 악을 쓰며 그 발목을 물어뜯었고, 진영수가 마지막까지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조차도 마재윤 Savior에게는 극복될 시련, 쌓여나갈 영광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다.
최연성은 패배했다. 또한 T1이 패배했고, 세 명의 테란 군주와, 모든 테란이 패배했다. 최연성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가 소속되어 있던 그 모든 것이 마재윤에게 패배했다. 머리를 맞대고 최후의 비책을 짜낼 파트너 - 그의 스승의 공백이 그의 발걸음을 더 무겁게 했다.
그래서 최연성은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자의가 반, 타의가 반이었다. 성자필쇠. 한 때는 믿지 않았던 그 말을, 오늘에 이르러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마재윤도 결국 쇠락한다 - 테란에도 다시 미래가 온다.
과연, 혁명의 날은 왔다.
또한, 테란의 미래, 본좌의 미래도 모습을 드러냈다.
최연성은 그제야 지켜보기를 그만두었고 이영호에게 다가갔다.
이영호와 최연성의 대결은 2007.6.15 - DAUM 스타리그 16강 6주차 1경기. A조의 마지막 경기로, 1승 1패를 기록한 두 사람의 8강 진출 여부가 달린 경기였다.
최연성은 여기서 이영호에게 패배했다.
이영호는 노배럭 더블, 최연성은 전진 3팩을 택했음에도, 이영호는 막아냈다. SCV와 머린, 그리고 한 때의 최연성을 떠올리게 만든 사력을 다한 승부로서 최연성을 저지했고 최연성을 패배시켰다.
최연성은 돌아섰다.
그는 충분히 보았고, 충분히 싸웠고, 충분히 느꼈다. 이 때 최연성이 이미 이영호가 장차 '무엇'이 될지 예측해냈는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연성이 이 때 이미 By의 두 번째 테란, 공포를 퍼뜨리는 자(Terrorist), 등장부터 최후까지 안티 택뱅리쌍의 필두에 설 자신의 제자를 무대에 올릴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최연성이 보고 싶었던 것은 테란의 미래였고 본좌의 미래였다.
하지만 최연성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그와 그의 스승이 함께 쌓아올렸던 SK Telecom T1 - 그들의 제국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 가운데 8강을 밟은 것은 옛 향수를 따른 마재윤 뿐이었다. 마재윤은 예정된 수순을 밟듯이 최연성을 격파했고, 3해처리 저글링 올인으로 이영호를 무너뜨렸다. 이 날 경기 후 이영호에 대해 묻는 질문에 마재윤은 답했다.
"아는 것도 없고, 경기를 본 적도 없다."
- 마재윤, 2007년 5월 25일 이영호와의 16강 경기 후
그의 영광은 테란의 학살 뒤에 세워졌고 그는 다시금 두 명의 테란을, 테란의 과거와 미래를 짓밟아 그를 재차 확인했다.
혁명이라고? 시간이 지나고, 보다 많은 영광이 겹겹이 반복되면, 그는 아주 작은 오점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역사보다 먼저 시작되어야 할 것, 그것은 그의 두 번째 복음이었다.
그는 마에스트로였다. 그 눈은 언제나 자신의 악단을 향할 뿐, 관객들은 항상 그의 등 뒤에서 박수치고 환호하면 족했다. 그는 등 뒤의 박수소리, 그 쾌감에 익숙했다. 그는 그 쾌감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제 앙코르가 시작되면 잠시 그의 관객들을 돌아봐 주리라. 마음껏 환호하라, 정중히 답하리라.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마재윤은 그렇게 만족했다.
마지막 세대
「사람은 각자 자신의 운명을 따라야 하는 법이다. 내 말도, 네 아들도 그저 그 운명을 따르고 있는 게다.」
- 죠반니노 과레스키,『돈 까밀로의 작은 세상』中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3.3 - 혁명 기념일에 스타크래프트 커뮤니티를 방문하면 기묘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약속이나 한 듯 2007년 3월 3일의 전야로 돌아가 3월 3일의 승부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저 2.69의 가능성을 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풋내기 프로토스의 무모한 도전과 결정된 패배를 말하는 사람들만이 가득하다.
12년의 세월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며, 프로토스의 패배 의식을 일소시켰다고 하여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렸던, 그 혁명 기념일을 보내는 방식으로는 퍽 괴상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과연 틀림없는 축제다. 다만 축제의 흥을 돋우는 광대가 자기 자신들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혁명 기념일은 거대한 자조의 장인 셈이다.
무엇을 비웃는가?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가졌던 자신들을.
믿은 것은 무엇인가? 구세주라 자칭한 거장의 승리를, 그를 향해 칼을 빼든 프로토스의 어리석음을.
이루어진 것은 무엇인가? - 혁명. 결코 잊혀지지 않을.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단정하는 행위의 무가치함을.
혁명의 축제는 실로 혁명이 품었던 그 모든 의미를 되짚고 즐기는,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혁명아 김택용은 그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이제 3.3이라는 날짜와 2.69라는 숫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질래야 잊어질 수 없는 상징이 되었고, 김택용은 등장과 함께 이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김택용은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기라도 하듯 그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 그 행보는 마치 마재윤은 물론 마재윤 시대의 흔적마저도 지워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마재윤을 가장 끈질기게 괴롭혔던 테란들, 신한S3에서 마스터즈에 걸친 장대한 일전을 벌인 이윤열, '붉은 저격수'로서 투혼을 선보였던 진영수, 마재윤 시대에 저항자로서 빛났던 테란의 별들 그 모두가 새로운 역사에 합류를 위한 시험대에 올랐다. 김택용은 먼저 다크템플러 드랍으로 이윤열을 양단했고, 진영수Hwasin에 대해서는 '보험'이라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 DAUM 스타리그 16강 5주 B조 2경기, 진영수 VS 김택용 in 파이썬
김택용이 진영수를 상대로 빼든 칼은 다시 한 번 다크 템플러 드랍이었다. 큰 타격이었지만, 진영수는 인내하면서 승부를 가를 일격을 준비했다. 단 한 번, 마지막에 단 한 번만 벨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진영수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재윤의 시대를 이를 악물고 견디어내며 반란을 꿈꾸었던 수많은 이들이 있는데, 정작 그 시대를 끝내는 영광은 갑자기 튀어나온 신참 프로토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더욱이 그 무임승차자는 이전까지와는 게임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달리했으며, 탁월한 재능 마저 갖추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니꼬운 경쟁자건만, 실언이랍시고 내뱉은 '보험'이란 말까지 더하여, 그 모든 게 진영수의 꼿꼿한 자존심에 거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 번이라도 단칼에 쪼개어 놓지 않고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상대였으리라.
하지만 진영수의 마지막 일격은 완벽하게 분쇄 당했다. 더욱이 김택용은 진영수의 투혼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카웃까지 생산하여 진영수를 두들겼다. 차마 GG를 선언하지 못한 채, 진영수는 끝까지 눈을 이글거리며 모니터를 노려보았으나 이미 기운 승세를 어찌해볼 수는 없었다. 진영수는 피를 토할 듯한 얼굴로 패배를 인정했다.
김택용과 진영수는 이미 8강 진출이 확정된 상대끼리의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까지 이 승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 앞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어떤 전조와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재윤 시대를 싸워낸 테란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이 시기 가장 주목받은 테란은 따로 있었다.
그는 마재윤의 사막을 견뎌낸 바 없었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그 무렵에는 이 세계에 발조차 디디지 못했다. 불과 16세의 소년으로서, 데뷔 후 치른 경기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 모두를 승리로 장식했고, 스타리그에 곧바로 입성했으며, 최연소 로열로더로서의 그 행보만으로 단숨에 본좌론에 거론되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에 어울리는 재목이었다.
당시에는 그 무서운 기세를 최연성에 빗대어 '어린 괴물'이라고 불렸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
최종 병기(Ultimate Weapon), 최후의 세대(Last Generation),
그리고, 신(The God).
- DAUM 스타리그 16강 5주차 B조 2경기, 이영호 VS 이재호 in 파이썬.
이름 모를 관객은 이 게임을 단 한 문장으로 일축했다.
「결국 이재호가 벙커 지어서 진 거다.」
이재호와 이영호, 두 명 모두 더블이었다. 이재호는 적의 급습을 대비해 앞마당에 벙커를 지었고, 이영호는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본진을 정찰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영호는 이재호의 벙커를 보았다. 이 시점에서, 이영호는 이재호의 더블을 확신하고 보다 빨리 골리앗을 확보했으며, 그 골리앗으로 이재호의 정찰 배럭을 파괴했다. 이재호는 배럭이 파괴되기 전에 팩토리를 늘려야 한다는 조급함에 골리앗을 취소하고 팩토리를 늘렸다.
골리앗을 취소한 그 대가가 이영호의 골리앗 드랍이었다.
<벙커가 있다 - 상대는 앞마당이 확실하다 - 그럼 방어 준비 생략하고 빨리 골리앗 확보하자 - 상대 배럭 먼저 파괴하면 상대는 팩토리를 늘리는 데 자원을 쓸 것이며 - 병력 공백이 발생한다.>
이 추론이 열여섯 살 중학생의 머리 속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대로 이재호가 따를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다소 대담한 비약이 군데군데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재호는 이대로 움직였고, 이영호의 손에서 완전히 놀아났으며, 초반 빌드 선택에서 크게 뒤지지 않았음에도 '후반의 이재호'는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것이 이영호가 품은 재능이란 것이었다. 어린 천재의 악마와도 같은 통찰력이었다.
사실 테란은 오랫동안 상대와 응수타진하는 방법을 잊고 있었다. 마재윤과의 그 처절한 항쟁을 치러내면서도 그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마재윤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 전상욱과 이윤열이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에 맞춰 대적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테란이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간과되었다. 그 대가로 테란은 머리를 잃은 종족으로 몰락했다.
그렇기에, 이제 이영호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자명했다.
그가 바로 테란의 희망이었다.
한 편에 밝아오는 혁명의 새벽. 다른 한 편에는 열여섯 살의 로열로더 후보. 두 사람을 지켜보던 몇몇인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 무대의 주인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던 것이었을까.
임요환 다음에 이윤열, 이윤열 다음에 최연성, 최연성 다음에 마재윤, 그리고 마재윤의 다음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했던가. 김택용과 이영호는 그 등장부터가 어떤 프로토스와도, 그 어떤 테란과도 달랐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시대의 주연일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